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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식 기록을 베낀 아시아 일식기록 01

monocrop 2011. 10. 13. 04:04

남의 나라 일식기록을 베낀 것은 중국과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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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기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淸이 後漢의 일식기록을 다시 베꼈다는 사실이나 日本이 1824 년 이후에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저들이 우리나라 역사책 및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日本은 20 세기에 들어 와서도 우리나라 한단사(桓檀史)를 토대로 남연서(南燕書) 등의 날조 일본 역사책을 만들어 왔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이를 근거로 日本과 中國에 우리나라 역사책과 기타 문헌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어제 올린 내용에 이어 그 다음 내용을 올립니다. 제가 볼땐 이글은 날조되고 말살되기전 우리역사의 진정한 원형을 보여 준다고 믿습니다.
이제까지 부분적으로 알고 있엇던 대륙에 존재했던 우리민족사에 대한 종합해설판이라고 봅니다.
한문이 혼용되어 있어 읽기 어려운 점이 잇겠지만 인내하고 읽다 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이 나오네요
아래 싸이트 가면 그림자료랑 같이 보실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thinkpool.com/mini/bbs/pdsRead.jsp?hid=think2001&ctg=3&slt=&key=&i_max=00003081939999&number=308796


2. 일식기록으로 찾은 우리나라 강역은 동아시아였다.(1)

1) 남의 나라 일식기록을 베낀 것은 중국과 일본이다.


三國의 일식관측지(日蝕觀測地)들은 지역적으로 서로 매우 떨어져 있다. 中國의 일식기록을 무작정 베꼈다면 관측지가 모두 같게 나와야 하지 않은가? 또 三國史記의 기록이 오히려 中國史書의 일식기록보다도 더 정확하다는 사실에도 의구심이 들었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日蝕처럼 지구상의 특정 위치에서만 관측 가능한 현상은 天文現像 관측기록의 독자성을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三國의 최적 일식관측지는 高句麗가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 이북 및 타림盆地(Tarim Basin)에서 중가리아분지 일대, 百濟는 渤海灣, 新羅는 揚子江 下流이다.

三國 일식관측의 특징은 集中性을 보인다는 점이다. 實測이라는 의미다. 장마 현상 기록까지 최적 일식 관측지와 일치하는,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실측이다. 三國은 일식관측 보다 훨씬 어려운, 태백월범(太白月犯), 태백주현(太白晝見) 등의 관측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朝鮮 역시 일식보다 훨씬 더 관측이 어려운 오행성결집(五行星結集) 현상도 관측했다. 이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천문관측기록은 中國의 일식기록을 베꼈다는 주장에 정면 배치된다.

新羅本紀, 百濟本紀에 동시에 나오는 205 년 7 월의 기록을 보면, 205 년 9 월 4 일 오후 4시경 달은 金星에 2.1도까지 가까워 졌다가 金星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일몰 때는 2.5 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이때 金星은 평소 밝기 -3.9 등급보다 0.5등급 밝은 -4.4 등급이었다. 百濟와 新羅는 205 년 金星이 밝아진 데다가 달 가까이 접근한 현상을 보고 金星이 달을 범했다(太白月犯)고 기록한 것이다.
金星이 낮에 나타났다(太白晝見 )의 394 년 7 월, 555 년 11 월의 독자기록도 계산상의 시기와 일치한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환한 낮에 金星을 관측하자면, 오랜 기간에 걸쳐 金星의 위치 변화를 추적해 두어야 한다. 그 축적된 지식에 따라 당일 낮에 金星이 하늘의 어디쯤에 자리할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주의 깊게 관찰 해야만 金星을 찾을 수 있다. 太白晝見 관측이 가능 했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도 당시의 天文學 수준이 어느 정도 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미 이 시기에 고도의 관측 기술을 지닌 天文學者들이 있었으며, 장기간 관측 자료가 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우리나라는 太白月犯, 太白晝見을 독자관측한 나라이다. 日蝕現象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天文現象은 독자관측 하면서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日蝕現象은 남의 나라 기록을 베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천문현상은 관측하면서 누구나 관측할 수 있는 일식기록을 장기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누군가 일식기록을 없앴다는 증거지, 일식관측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절대로 될 수 없다.

반면 中國이 천문관측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수두룩하다. 우선 中國文獻에 의해서도 우리나라 땅이라고 표시된 지역에서 천문관측하고 있다. 北魏(386∼534)의 하천지[河川誌 : 北魏 때의 학자 력도원(酈道元)이 저술]의 수경주(水經注)를 보면, 遼水가 상건하(桑乾河)이다. 더구나 遼西조차 우리나라 영토다. 宋書에는 “高句麗가 遼東을 다스렸고 百濟는 요서(遼西)를 다스렸는데, 이름하여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한다(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고 했다.

梁書와 南史[中國 남북조(南北朝)시대의 남조(南朝)인 남송(南宋) ·제(齊) ·양(梁) ·진(陳) 4 왕조(王朝)의 역사서]에도 百濟가 遼西와 晉平 2郡을 차지하고 百濟郡을 설치했다(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고 했다. 주서(周書), 북사[北史 : 북조(北朝), 즉 위(魏)·북제(北齊)·주(周)·수(隋) 4왕조 242년간의 역사서]에도 高句麗의 영토가 “西로는 遼水를 건너 2천리에 이른다(西遼水二千里).”고 했다. 宋書에는 百濟 역시 遼西에 있는 진성(晉城)과 고평(高平) 2郡을 점거했다(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고 했으며, 三國史記에는 “太祖大王 3년(기원후 55년) 봄 2월, 遼西 지역에 10 城을 쌓아 漢나라 군사에 대비했다(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고 했는데, 高句麗는 漢나라가 아니라, 百濟에게 遼西를 빼앗겼다.

後漢의 일식관측지로 나온 지역은 中國 문헌에 의해도 모두 우리나라 땅이다.

太祖武烈帝[현 史學界가 太祖大王이라 일컫는 高句麗 皇帝. 三國의 帝號에도 太祖니 하는 廟號는 高句麗 武烈帝가 유일하다. 大震國 시대에 이르러야 世祖, 太祖 등의 廟號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中國 날조 王系表를 보아도 唐 이전까지 前漢의 劉邦이 유일하게 高祖라고 했다. 太祖라서 國祖라니 高句麗의 皇通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니 하지만, 武烈帝는 2 대 유리명제(琉璃明帝)의 손자다. 琉璃明帝는 高句麗 건국자 주몽성제(周蒙聖帝)의 아들이다. 高句麗의 건국자도 아니고,  曾孫子가 國祖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太祖가 國祖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날조 中國史에 의해도 5 胡 10 國의 後梁이 처음이다. 高句麗 武烈帝가 太祖라는 말을 사용한 후 854 년이나 지나서다. 實史에 의하면 高麗 太祖가 처음이다. 결국 太祖武烈帝는 날조고, 원래 帝號는 무열제(武烈帝)이다. 武烈은 高句麗, 新羅는 물론이고 百濟 식민지 倭까지도 사용했다. 百濟의 武帝도 武烈帝로 추정된다]는 遼西에 10城이나 쌓았다.

後漢의 天文官은 後漢 땅을 다 놔두고 적국이자 전쟁터에서 천문관측한 셈이다[적국에서, 전쟁터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나라는 중국밖에 없다. 1차 대전 당시, 아이슈타인(Einstein)의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예측한 태양 뒤쪽에 위치한 항성에서 오는 빛의 휘어짐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잉글랜드 원정대가 일식이 일어나는 소련에 도착 했으나, 아인슈타인이 독일 태생이라 소련이 독일과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원정대의 입국이 거절된 사례도 있다]. 그러나 遼西에서 싸운 나라는 百濟와 高句麗니까, 周蒙聖帝에게 정복된 後漢은 上國의 영토에서 천문관측한 셈이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古代人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을 했다면, 自國을 놔두고 他國에서 일식관측할 수는 없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주는 중요한 암시”를 캐도록 他國人이 自國에서 천문관측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後漢을 포함, 그 어떤 나라도 우리나라가 遼西를 차지한 高麗 末까지 遼東은 물론이고, 遼西에서도 천문관측이 불가능했다. 이것만으로도 中國의 일식기록이 실측이 아님은 분명하다. 나머지 증거도 검토하자.

遼東에서 들었다(遼東以聞). 後漢書 오행지(五行志) 기사이다. 後漢의 일식 중 외부에서 들은 것을 적었다는 기록이 40%에 이른다(三國時代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40%라는 수치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논문에 의하면, 後漢書에 기록된 일식은 75 개고, 소문 이라고 표시하지 않은 일식이 57 개다. 18 개를 所聞으로 들어서 기록 했으니까, 32 %에 해당한다. 날조사에 의하더라도 後漢은 947∼950 까지 겨우 3 년동안 존재했던 단명왕조이다. 왕조를 지키기에도 급급했던 나라에서 무슨 천문기록을 쓸 수 있는가? 中奴史 날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기록이며 後漢書는 우리역사를 보고 베꼈다는 증거다.

天文官이 所聞으로 들은 것까지 다 기록 하는가. 오늘날의 천문학자들이 소문으로 들은 것까지 다 사실로 취급해서 연구 한다는 것과 똑같은 소리이다. 그 당시는 倫理的 기준이 오늘날 만큼 엄격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현대인만의 착각이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했다면, 소문으로 들은 다른 장소의 일식을 기록 했다가는 목숨까지 내놓아야 한다.



후한의 수도 낙양보다는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지역이 약간 북쪽으로 나타나 있다. 실제로 소문을 들어 적었다는 일식까지 모두 포함하여 구한 최적관측지도 거의 차이가 없다(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所聞으로 들은 것까지 포함해도 최적 관측지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결국 한 장소에서 천문관측을 했고, 그 관측장소에서 관측되는 현상을 천문관이 관측하지 못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관측하는 일식을 전문가인 천문관이 놓쳤다는 소리이다.

소문을 포함하든 않든 後漢의 최적관측지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은 일식이 관측된 장소가 진짜 일식 관측지라는 이야기이다. 드넓은 중국 대륙을 다 놔두고 現 北京에서 관측한 일식만 매번 所聞으로 들었다는 것도 우습다. 결국 현 北京에서 모조리 관측했지, 現 洛陽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가 後漢 존속 당시 現 洛陽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으니까. 後漢 당시 現 洛陽을 도읍으로 삼은 우리나라 왕조가 없었기 때문이다.

後漢書의 日蝕記錄은 百濟의 것이다. 新羅가 現 무한(武漢)을 중심으로, 百濟가 現 北京을 중심으로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현 洛陽은 필연적으로 高句麗 영토일 수밖에 없다. 高句麗가 현 洛陽에 없었다면, 삼국 전쟁은 불가능했다.

中國은 문자가 없던 시대의 日蝕까지 기록해 놓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일식기록은 기원전 2128 년의 일식으로 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원전 2128 년에 中國에는 文字가 없었다. 漢字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자마저 殷末 200 년 동안(B.C. 1250~B.C. 1046?)에 사용 했다고 날조했다. 周나라 선왕(宣王, B.C. 827~ B.C. 782) 때 周文을 만들었고, 진(秦)나라 때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 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甲骨文字가 발견된 黃河 下流는 우리나라 영토이다. 일식기록으로 본 三國이 黃河 河流를 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三國은 수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싸운 나라들이다. 殷이 黃河 하류에 있었다면, 殷을 멸망시킨 周도, 秦도, 漢도 黃河 하류에 있어야 한다. 黃河 하류가 中土라면, 三國이 전쟁을 하기 전에 中國부터 멸망 시켜야 했다. 하지만 三國史記나 三國遺史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黃河 下流에는 中國이 없었던 것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文字를 빌려 쓴 것에 불과하다.

기원 직후 玉篇에는 漢字가 22,726 字였다. 1716 년에 만들었다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47,035 字로 나와 있다. 그러면 기원전 11세기의 甲骨文字는 몇 字 였을까. 고작 3 千字이다. 甲骨文字는 점치는 데 사용된 문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상생활 에서는 3 천 단어쯤 있으면 의사소통이 가능 하다고 하지만, 그 옛날에는 3 千字로 절대 역사책을 쓸 수 없었다. 역사책 이라는 특성상, 온갖 분야의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관직만 해도 대체 몇 개인가.

◀영변지에 실린 鹿圖文 : 한웅대성존(桓雄大聖尊)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에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鹿圖文으로 기록 하였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일찌기 神誌의 전서(篆書)로 쓴 옛 비석을 보고 다시 문서(帖)를 만들어 세상에 전한 것이다(桓雄大聖尊天降後命神誌赫德以鹿圖文記之崔孤雲致遠亦嘗見神誌篆古碑更復作帖而傳於世者也 蘇塗經典本訓).

孔丘(孔子)가 썼다는 書經(尙書)이 中國의 첫 역사책 이라고 했다. 孔丘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면, 書經 이전에 역사책이 나왔어야 한다. 孔丘는 기원전 5~6세기 사람이다. 書經이 중국의 첫 역사책 이라면 한자는 周 宣王이 아니라, 기원전 6세기부터 중국에서 사용된 문자[중국 전설에서 한자를 개발했다는 창힐(倉頡)이 배운 부도(符都 : 符都誌는 朴堤上이 쓴 글로 창세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의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인 녹도문(鹿圖文)이다]라는 소리다. 그런데 書經은 요순시대(堯舜時代 : 기원전 24세기)부터 기록한 책이다. 2천년 가까이 역사를 기억 했다가 기록할 수 있는가. 일본은 300년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고사기(古事記), 日本書紀를 썼다.

우리나라의 첫 文字는 기원전 39 세기에 만든 鹿圖文이고, 가림토(加臨土) 문자도 기원전 2181년에 만들었다. 그렇다면 기원전 2128 년에 일어났다고 書經에 기록된 일식은 어느 나라가 관측하고 기록한 일식인가. 문자가 없는 중국이 2천년이나 일식기록을 전해올 수 있는가.







▲ 가림토 문자 : 3 세檀君 가륵(嘉勒) 2년(庚子 B.C.2181)..이에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正音) 38 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또한 3년(辛丑)에 神誌 고설(高契)에게 명을 내려 「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하였다 (庚子二年..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檀君世紀) 加臨土文字는 후대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전이 된다.

日本은 375 년에야 百濟에서 漢字가 들어 왔다면서 이전의 천문관측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불가능 하다면서 三國史記의 천문관측은 中國의 기록을 베낀 것이라고 우겼다. 이러한 주장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아 三國 초기의 역사를 오늘날까지 부정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中國은 잃어버린 역사가 없다. 文字의 발명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처럼 중요한 사건이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것은 中國이 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날조 하면서 빠뜨린 대목이다.

용산문화(龍山文化) 유적지에서 文字가 새겨진 도자기 조각이 출토돼 中國의 문자사용 연대가 현재까지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온 연대보다 최소한 9 백년 가까이 더 올라가는 기원전 2300 년경으로 판명될 수 있는가. 龍山文化 유적지가 있는 山東省을 포함, 黃河 하류는 三國의 영토가 만나는 곳이다. 黃河 하류가 우리 영토가 아니라면, 三國戰爭은 불가능하다. 中土가 아니라는 말이다. 창힐(倉頡)이 5000 년 전에 漢字를 만들었다면, 시대를 불문하고 漢字가 발굴 되어야 하지 않는가.

漢字 이전의 문자발명 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역사책(桓檀古記)에 있고, 실제 발굴은 중국 대륙에서 되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의 무대가 중국 대륙을 포함한 동아시아라는 의미이다. 시간이 촉박해서 우리나라 역사를 周나라 이전의 中國史에 할당하지 못한 것이다.

丙申년(B.C. 925)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吏讀法)을 지어 바치니 天王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三韓)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 하였다(丙申漢水人王文作吏讀法以獻天王嘉之命三韓如勅施行 番韓世家 下).

이 당시 벌써 漢字가 개발 되었기에 吏讀法을 만들었다. 漢字조차 우리나라가 개발한 문자였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만든 漢字까지 빌려 쓴 中國이 기원전 2128 년의 일식기록을 남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기원전 5세기 중국의 첫 역사책 書經에 나오는 역사기록도 중국 스스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기원전 39 세기에 문자를 발명한 이래 계속해서 새로운 문자를 발명한 우리나라의 역사책을 중국책으로 날조한 것이 書經이다.

呂氏春秋에는 기원전 1177 년에 발생한 地震부터 나온다. 周나라 宣王(B.C. 827~ B.C. 782) 때 周文을 만들었다는 중국의 지진기록은 呂氏春秋가 처음이다. 기원전 12 세기에 발생한 지진을 기원전 3 세기까지 어떻게 기억하고 쓴단 말인가. 呂氏春秋는 우리나라 책을 가지고 날조한 책이다.

周書가 周나라의 史官이 기록하여 모아놓은 史書라고 하는데, 周나라 때는 중국에 문자가 없었으니까, 史官도 있었을 리 없다. 인심 써서 한자를 周 宣王 때 만들었다고 해 주어도 西周(B.C. 1046?∼B.C. 771) 때는 문자가 없으니, 史官도, 史草도 있을 리 없고, 周 武王과 箕子朝鮮 등의 기록은 절대로 남길 수 없다. 明 때 朝鮮의 역사책에서 周나라에 대해 쓴 기록을 적당히 베낀 것이 周書다. 이것은 日本만 보아도 알 수 있다.

中國 文獻에 漢字 발명은 周나라 선왕(宣王, B.C. 827~ B.C. 782) 때의 周文이 시초이다. 그러나 한자는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찬에는 다수의 한국으로 부터의 도래자(渡來者)나 그 자손이 관여했고, 한국의 역사책을 그대로 베낀 기사도 있고, 편찬상 가장 중요한 연대 구성이, 6세기 이전에는 한국 역사책을 따르고 있다[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요미우리 신문, 1972. 3. 30.].


日本書紀는 한국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이노우에 미쓰시다(井上三下)].

日本은 5세기 초까지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古事記, 日本書紀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中國의 일식기록은 한 곳에 집중되지 않는다.



三國史記의 일식기록에는 주목할 만한 특징이 또 하나 있다. 三國의 각 나라가 기록한 일식들의 경우, 일식 때 지구상에 드리워지는 달그림자가 매번 비슷한 지역에 떨어지는 일식들 이라는 점이다. 즉 일식을 볼 수 있는 지역이 늘 같은 곳이라는 점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中國의 일식관측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한다.” “일식 때 지구상에 드리워지는 달그림자가 매번 비슷한 지역에 떨어지는 일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같은 지점에서 볼 수 있는 일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보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합친 것이 바로 중국 일식기록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중국사서의 일식기록을 임의로 뽑아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로 나누어 싣는 모의실험을 수천 번 해보면, 삼국의 최적 관측지에 이 정도의 위도차이가 발생할 가능성은 사실상 0 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삼국사기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삼국의 일식 최적 관측지. 백제가 발해만 연안으로 나온다.
고구려(왼쪽 위), 백제(왼쪽 아래), 상대신라(오른쪽 위), 하대신라(오른쪽 아래)가 기록한 각국의 일식들을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등고선의 중심), 上代新羅는 201 년 이전, 下代新羅는 787 년 이후의 기록에 대한 결과이다.

우리나라는 중국 통일왕조의 역사책에서 천문기록을 발췌해서 三國의 강역에 맞게 따로따로 분류할 수가 없는데 반해, 중국은 三國의 각 역사책에서 간단하게 발췌, 각 연대에 맞게 이 나라, 저 나라에 할당할 수 있다. 일식관측 위치는 각각 高句麗, 百濟, 新羅 강역의 일부 이므로 차지하고 싶은 영토에 맞게 각 역사책을 베끼면 된다. 일례로 百濟 최적 관측지와 별 차이가 없는 後漢의 일식기록은 百濟 역사서에서 베낀 것이 대부분이다.

首都가 아닌 장소에서 천문관측한 나라 혹은 여러 장소에서 천문관측한 나라는 어떤 식으로 기록을 남길까. 여러 장소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것은 관측장소에 따라 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이 달라 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측장소에 따라 당연히 분류해 놓아야 한다.

그런데 中國은 이 기본적인 대원칙에 위배되고 있다. 天文志까지 따로 만들면서 정작 중요한 관측지에 따른 분류는 망각한 것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끼면서도 관측장소에 따라 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이 다르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天文官이 천문기록을 베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史官이 옮겨 썼다는 의미이다.

新羅 초기의 일식이 三國史記에 나오는 기간(서기전 54년 - 서기 201년)에 한서(漢書)에는 27개, 후한서(後漢書)에는 75개의 일식이 기록되어 있다. 後漢의 수도 낙양(洛陽) 보다는 평균식분이 최대가 되는 지역이 약간 북쪽으로 나타나 있다(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중국의 일식기록에 대해 평균식분을 구해야 했다는 사실은 관측장소가 표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측장소가 표시되어 있다면, 평균식분과 일치해야 한다. 수도에서 천문관측 하지도 않았으면서, 일식관측지가 여기저기 흩어 지면서 관측장소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실측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무엇보다 洛陽을 포함한 黃河 하류는 三國의 영토가 만나는 곳으로 後漢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高句麗의 일식 관측지는 長城 이북에 있다. 그러나 高句麗가 長城 이북에 있었다면, 新羅와 전쟁이 불가능하다. 秦始王이 萬里長城을 쌓았다는 날조사에 의하면, 異民族들이 수시로 長城을 넘어 왔지만, 實史에 있어서 長城은 결코 장식품이 아니었다. 新羅의 침공을 막는 長城이 없었기 때문에 新羅가 三國을 통일할 수 있었다. 長城이 無用之物 이었다면, 百濟에 이어 高句麗, 新羅, 高麗가 장성 축조에 가세하지도 않았다. 長城은 효과적인 방어물 이었던 것이다).

朝鮮 역시 黃河 하류에서 일식관측했다. 결론적으로 後漢書에 나와 있는 모든 일식기록은 後漢의 실측이 아니다. 실상 後漢만이 아니라, 明 이전까지 中國의 모든 일식기록은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낀 것이다.

그렇다면 後漢의 일식기록은 누구의 것인가. 당연히 渤海灣에서 일식관측한 또 다른 나라 百濟의 일식기록이다. 後漢書의 일식기록은 中國이 역사왜곡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런데 어째서 後漢의 일식기록이 百濟의 일식기록보다 훨씬 많은가. 三國史記는 明이 축소 날조했다. 그 과정에서 三國의 일식기록을 다 삭제해 버리자, 천문관측에 집착한 李氏朝鮮이 옛 문헌을 뒤져 다시 기록한 것이다. 이미 李成桂가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수거해 焚書한 뒤라서 다른 문헌에서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高句麗와 百濟의 일식기록은 몇 개 없다. 新羅의 일식을 기록한 문헌은 상대적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高麗史는 李氏朝鮮이 날조했다. 그래서 高麗의 일식기록은 三國보다 많이 남아 있다.

주원장(朱元璋)이 三國의 천문기록을 삭제하지 않았다면, 李成桂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에서 관측한 高句麗(3세기까지)의 천문기록을, 韓半島에서 관측한 百濟, 新羅(5세기 이후)의 천문기록을 남겨 두었을 것이다.




▲ 輿地全圖


三國時代 내내 중국은 遼東은 물론이고 遼西 지역 에서도 일식관측이 불가능했다. 遼水가 난하(灤河)라는 明, 淸 때 지도에 의해서도 현 北京은 중국 땅이 절대로 될 수 없다. 현 遼水가 내내 遼水 였다고 해도 渤海灣은 우리나라 영토가 되지, 중국 땅이 아니다. 19세기 전후로 제작한 여지전도(輿地全圖)에는 현 遼水가 鴨綠江(이 당시 韓半島 위에도 東鴨綠江이 있었다)으로 표시되어 있다. 현 遼水가 遼水가 된 것은 遼나라 때가 아니라, 1824 년(“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의 참고지도 제작 연도) 淸 때였다. 결론적으로 중국 역사책과 중국 고지도에 의해도 현 北京은 우리나라 땅이지, 後漢 땅이 아니다.

渤海灣에 있었던 나라는 後漢이 아니라, 百濟이다. 遼水가 桑乾河, 灤河, 현 遼水로 이동해 왔다는 사실만 보아도 지명이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後代에 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중원에 있던 대부분의 지명이 동쪽으로 이동 했다는 사실이다. 요수(遼水)와 압록(鴨綠)이 그러하고 요양이라는 지명 역시 원래는 山西省의 遼라는 곳에 있다가 다시 난하의 동쪽으로 옮겨와서 지금은 현 요녕성의 요하 동쪽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실증 한단고기).

中國의 지명이 밀렸듯이 後漢의 강역(疆域)도 밀렸던 것이다.

百濟는 나중에 遼西를 高句麗에 빼앗겼다. 遼西는 高句麗에서 百濟로, 다시 高句麗(文咨好太烈帝 : 날조사에 의하면 21世 文咨明王)로 주권이 바뀌었다. 百濟가 발해만을 내내 차지(百濟는 전시기에 걸쳐 고루 일식현상이 기록되어 있다)한 이상, 상건하(桑乾河), 조백신하(潮白新河), 난하(灤河), 대능하(大凌河), 현 遼水 등은 遼水가 될 수 없다. 遼東은 高句麗 땅 이었으니까.

遼西가 상건하(桑乾河)보다 훨씬 더 서쪽에 있을 때만이 百濟가 北京에서 내내 일식관측을 할 수 있다. 百濟는 遼西를 高句麗 무열제(武烈帝 : 날조사에 의하면 高句麗 6世 太祖王) 이후 획득해서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 12 년(504)에 상실했다. 최소한 桑乾河 以西에 高句麗 영토인 遼東과 百濟가 한시적으로 차지했던 遼西가 있었다.

내내 일식관측한 渤海灣은 줄곧 百濟 땅이었다. 渤海灣은 百濟가 전쟁을 통해 확보한 땅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半島史에 따르면 百濟는 河南 위례성(慰禮城)을 쌓은 도시국가로 출발했다. 韓半島에서 건국 했다면, 상식적으로 도읍이 있는 韓半島 남부에서 영토를 확장 해야지, 渤海灣에 영토를 확보할 수는 없다. 黃海와 渤海灣 너머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 쉬운가, 도읍 주변을 정복하는 것이 쉬운가.



明이 中土(티벳고원 북부)에서 중국대륙으로 기어 나오면서 우리의 역사에 나오는 지명들은 점차적으로 대륙의 동쪽으로 밀려 났으며 淸 이후에는 韓半島로 더욱 축소되어 왔다.



三國이 도시국가에서 출발 했다고 날조당한 三國史記에도 高句麗가 朝鮮을 계승한 나라임을, 朝鮮이 大帝國 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남아 있다. 고추모(高鄒牟)가 나라를 세운지 2 년 여름 6 월, “高句麗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多勿)''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高鄒牟가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俠父) 세 사람과 함께 도망치다 모둔곡(毛屯谷)에서 세 사람이 합세해 나라를 세웠다면, 궁실조차 짓지 못해 물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면, 회복할 옛 땅이 있을 수 있는가. 高鄒牟는 多勿을 연호로 내걸 정도로 朝鮮의 영토 회복을 최우선 과업으로 삼았다.

‘三國時代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에서는 新羅가 해외 천문대를 세웠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다. 新羅의 천문현상 기록은 건국 직후부터 나온다. 최초 천문현상 기록은 기원전 54년의 日蝕과 기원전 49년의 혜성 기록이다. 新羅는 소국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건국 당시에는 천문대가 한 곳에 불과했다. 3차 辰韓의 천문대를 그대로 물려 받았다.

현 半島史에 의하면, 新羅의 母體 사로국(斯盧國)은 아주 작은 나라다. 4 세기 중반까지(건국 후 5 백년이 된 시점)도 慶州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의 나라에 불과했다. 斯盧國은 3 세기 중반 무렵부터 辰韓[3차 三韓의 하나. 우리 역사에서 三韓은 세 번 성립했다. 성립 시기를 기준으로 朝鮮의 管境 三韓(三朝鮮)을 1차 三韓, 番朝鮮을 衛滿에게 빼앗기고 番朝鮮의 諸加들이 上將 卓大와 함께 月支로 가서 세운 後三韓을 2차 三韓, 百濟의 영토로 편입되고 朝鮮의 제후국 땅에서 일어난 新羅, 伽倻가 건국된 三韓을 3차 三韓이라 하자] 소국을 정복 하거나 복속시켜 辰韓 지역의 맹주가 되었다.




▲ 현 역사책에 나타난 삼국과 고려의 일식기록 및 일본이 베낀 우리나라 일식기록의 최적 관측지


북위 38.4° 기토라 고분 벽화의 천문도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한반도 북위 38.4°에서 기원전 65 년 경부터 천문관측 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三國이 건국하기 전 부터다. 원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의 관측자 위도는 북위 38°가 아니라 38.4°이다. 李氏朝鮮이 기존 천문도에 14 세기 말의 하늘을 그려 넣으면서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일식기록에 38.4°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천문기록이 누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韓半島의 開城이 38° 근처에 있지만, 高麗의 開城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Asia 1808 (“Asia” from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by R. Brookes. Eighth Edition. Dublin, 1808.)에는 淮水 중류 이남에 Cayson(개성)이 표기되어 있다.

그런 소국이 기원전 부터 해외 천문대를 설치할 수 있는가. 겨우 280 년에 이르러 斯盧國왕이 辰韓 세력을 대표하여 진(晋)에 조공 했다면서 도시국가 斯盧國이 건국 하자마자 中土에 해외 천문대를 어떻게 설치할 수 있는가.

韓半島 남부의 일부가 辰韓 이라면서 그런 辰韓 12 국 중 하나라는 斯盧國이 黃海를 건널 선박은 어떻게 보유[일본은 9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오갈 수 있는 선박을 만들었다. 그것도 침몰하고 조난 당하기 일쑤라 9 세기 말,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의 건의에 따라 唐(?)과의 교류가 중단 되었다(일본문화사, 홍윤기). 그렇다면 新羅는 日本보다 무려 천년이나 앞서 黃海를 건널 수 있는 외항선을 건조하고 항해술을 보유했던 셈이다. 도시국가에 지나지 않는 나라에게는 불가능한 얘기다]할 수 있으며, 黃海를 건너 중국 대륙에 天文臺를 세우겠다 한들, 朝貢도 하지 않는 小國에 ‘大國’ 中國이 허락 하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했다면, 타국에서 절대 천문관측하지 않는다. 또한 타국이 천문관측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우리나라가 自國을 버려두고 他國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를 관측하여 타국의 인간과 사회의 운명을 알고자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他國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우리나라 사람들과 우리나라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 新羅는 中土의 운명 따위에 신경 쓸 여가가 전혀 없었다.

대제국 高句麗, 百濟의 침공 앞에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 제1의 과제 였으니까.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영토에서 천문관측 했다. 新羅는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했던 것이다.

新羅의 일식기록은 新羅가 중국 대륙에서 건국했지, 韓半島에서 건국해서 중국 대륙으로 건너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현 武漢이 新羅의 일식관측지 이다. 新羅가 韓半島에서 건국해 黃海를 건너 중국 대륙을 차지 했다면, 揚子江 하류에서 상륙작전을 실시해야 하고, 그렇다면 揚子江 하류에서 현 武漢까지 다 新羅 땅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新羅는 중심지 마저 중국 대륙으로 옮겼을 것이고, 新羅는 이후로 중국과 싸워야지, 三國統一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韓半島의 小國은 아무리 항해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건국 하자마자 중국 대륙에 넓은 땅을 차지할 만큼 병력과 무기를 한꺼번에 실어 나를 국력이 안된다. 현 半島史에 의하면 高句麗마저 滿州도 벗어나지 못했다.

날조사에서 植民母國 百濟가 멸망 하고도 倭가 지원군을 3 년 후에야 간신히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오히려 新羅는 중국 대륙에서 東中國海와 黃海를 건너 韓半島를 침공한 나라이다.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상대적으로 큰 나라였기에 가능했다.

辰韓 12국의 하나가 斯盧國이라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은 “新羅國은 본래 弁韓의 후예이다(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는 舊唐書의 기록과 정면 배치된다. 심지어 後漢書는 新羅가 秦나라의 후예라고 했다.




“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이 동쪽의 땅을 나누어 같이 살게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불러 모으니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秦나라 말과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 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秦之亡人來適韓國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三國遺史 秦韓條, 後漢書).”



중국 역사책에 등장하는 辰韓은 세 개의 辰韓을 구분하지 않고 뒤섞은 것이다. 중국의 역사책 이면서도 서로 모순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斯盧國은 辰韓 12국의 하나도 아니고, 新羅는 弁韓의 후예도, 秦나라의 후예도 아니다. 3 차 辰韓 6 부의 나라이다. "이렇게 되어 辰韓의 6 部가 함께 높여 거세간(居世干)이라 하고 서라벌(徐羅伐)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이름을 辰韓이라 하였으며 또한 사로(斯盧) 라고도 한다(於是辰韓六部共尊爲居世干立都徐羅伐稱國辰韓亦曰斯盧 太白逸史).

新羅가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新羅는 朝鮮이 해체된 후 諸侯國의 땅에서 건국한 나라이다. 新羅가 건국 당시부터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은 朝鮮의 제후국들도 천문관측을 했다는 증거이다. 番韓도 기원전 천여 년에 이미 監星을 두었다(丁卯子牟弗立乙亥置監星 太白逸史). 제후국 사이 에서도 광범위하게 천문관측 했던 것이다.



高句麗는 2 세기에 이미 蒙古高原 以西에서 일식을 관측했다. 韓半島 이북의 도시국가로 출발 했다면, 어떻게 2 백년 만에 타림盆地에서 중가리아 분지까지 진출할 수 있는가. 현 遼水 以西도 高句麗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 땅의 사학자들의 주장이다. 韓半島 이북에서 渤海灣을 포기하고 중가리아분지(準噶爾盆地;Dzungaria)로 진출할 수 있는가. 蒙古高原도 高句麗 땅이 아니라면서, 오르도스 사막을 건너 차지할 가치가 있는 지역인가.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印과 以西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육지에서 떨어진 두 지역을 영토로 가질 수 있는가. 자국의 두 영토 사이에 낀 나라가 군대 통행을 묵인 한다면, 당장 그 나라부터 정복하고 말 것이다. 몽고고원도 高句麗 영토였다.






百濟, 新羅와 끝없이 전투를 벌여야 하는 高句麗 역시 일식관측지가 보여주듯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 高句麗가 揚子江 유역의 新羅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長城 이남에 영토를 가져야 했다. 百濟의 것을 베낀 後漢의 일식기록에서 보듯이 百濟의 중심지도 長城 이남 이었다. 百濟의 도읍을 공략하기 위해서도 高句麗는 반드시 長城 以南에 있어야 했다.

三國은 중국 대륙을 분할하고 있었다. 三國의 영토가 서로 만나는 黃河 下流는 수세기에 걸쳐 三國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 洛陽조차 三國의 땅이지, 後漢의 수도가 될 수 없다. 朝鮮의 일식기록에서 보듯 중국 대륙 또한 우리나라 영토였다.

三國의 천문기록은 기원전부터 남아 있다. 百濟의 일식관측지는 渤海灣이니까, 기원전 13 년의 일식기록도 발해만에서 관측한 것이다. 高句麗의 기원전 35 년 오로라와 기원전 7년 火星 기록이나, 百濟의 34년 오로라(赤氣: 오로라는 극지방에서 발생하는 현상 이므로 저위도 에서는 오로라의 위쪽 부분에 해당하는 붉은색만 관측된다) 기록 등은 중국 대륙에서 관측 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두 나라의 영토는 동아시아에 걸쳐 있었고, 朝鮮時代 부터 다수의 천문대를 설치해 운용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新羅는 현 武漢 일대에서 시작한 小國이다. 기원전 54 년 일식과 기원전 49 년 혜성 기록은 현 武漢에서 관측했다. 우리나라의 일식기록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우리나라가 실측한 지역은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실측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 에서만 중국이 실측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三國은 중국 대륙에 있었으니까, 중국은 당연히 우리나라가 차지하지 않은 지역만을 차지할 수 있다.

둘째, 三國이 건국 초기부터 중국 대륙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은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삼국이 중국 대륙에서 건국한 사실은 삼국 이전의 국가가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대륙에서 관측한 朝鮮의 일식기록으로 뒷받침 된다.

셋째, 三國이 한반도에서 건국하고 삼국 이전의 왕조가 韓半島 이북에 있었다는, 일식기록에 反하는 韓國史와 中國史는 대대적으로 날조 되었다.

중국의 주장대로 燕이 渤海灣에 진출 했다면, 燕이 발해만에 長城을 쌓았다면, 百濟가 발해만에서 건국할 수는 없다. 百濟가 발해만에서 일식관측 할수도 없다. 또한 新羅도 揚子江 유역에서 건국할 수 없고, 高句麗도 중국 북부를 차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燕이 渤海灣에 있었다는 중국 고문헌은 거짓이다. 燕을 발해만에 위치 시키는 것은 中土의 지명을 밀어내고 해대(海垈), 회대(淮垈)를 축소하면 가능하다.






春秋戰國 시대의 날조 강역도를 보면, 倭가 없다. 그러나 明은 “개국(蓋國)은 거연(鉅燕) 남쪽에 있고, 倭의 북쪽이며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고 山海經을 날조했다. 倭가 燕에 속하기 위해서는 燕과 倭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한다. 倭는 중국 남부에 있었다. 渤海灣에 長城을 쌓았다는 燕이 중국 남부의 倭와 접할 수 있는가. 燕이 渤海灣에서 揚子江 이남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면 秦 대신 中土를 통일했을 것이다.

朱元璋이 날조한 역사 에서도 燕은 중국 남부에 있었다. 李成桂는 朱元璋에게 揚子江 이남을 주었고, 明은 揚子江 이남에서 亡한 나라이다. 朱元璋은 中土의 北京을 揚子江 이남으로 밀어냈다. 北京이 원래 中土의 長江 이남에 있었기 때문이다. 燕이 존속할 당시, 회대(淮垈)는 우리나라 영토였다. 淸이 회대(淮岱)로 고치자 燕은 종이 위에서 渤海灣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날조한 春秋疆域圖에서 越나라는 揚子江 이남의 항주만(杭州灣)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伽倻가 있던 지역이다. 504 년 이후 高句麗 영토에 편입 되었다가, 6 세기 중반 이후 新羅 영토로 편입되고, 南北國(新羅, 大震國) 시대에도 新羅 영토였다. “한국어휘의 많은 부분이 古代 越나라 지역에서 쓰이던 말과 비슷”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영토였기 때문에 韓國語가 사용 되었던 것이다.

杭州灣 지역에만 유독 韓國語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中土에서 빠져나온 華夏나 濊貊族, 거란(契丹)이 중국 대륙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저질문화를 전파 시켰다. 明은 華夏의 나라였고, 淸은 濊貊族의 나라였다. 지배자임을 내세워 韓族 文化에 未開文化를 강제로 접목 시켰다.



三國이 중국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高句麗 古土를 차지한 大震國도 중국 대륙에 있었다. 下代 新羅의 영토에서 건국한 高麗 역시 중국 대륙이 활동 중심지였다. 우리나라가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은 지명을 밀어낼 수 없다. 중국이 아무리 지명을 밀어내봤자, 우리나라가 밀어낸 지명대로 불러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 淸이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만들었을 때는 종이 위에서만 지명을 밀어냈다. 그것은 李氏朝鮮의 땅을 반드시 차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에서였다. 이미 몇 번이나 李氏朝鮮 땅을 가로챘는데, 그런 자신감이 없다면 더 이상한 것 아닌가.

日本의 역사책에 나오는 일식기록은 중국 남부(628 년 부터 709 년 까지), 蒙古高原 이북 및 스타노보이 山脈(Stanovoi Mts. 710년에서 792년까지)[일식관측지점은 스타노보이 山脈보다는 더 고위도로 추정되지만,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에서는 일식관측지가 잘려나갔다], 黑龍江 중, 하류(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 滿州(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에서 관측한 것이다.

중국 남부, 蒙古高原 이북, 黑龍江, 滿州가 그 당시 일본 땅 아니었냐구? 홋가이도(北海道)조차 19 세기 말에야 간신히 정복한 일본이다. 倭奴 메이지(明治)가 쓸모없는 사무라이들[1873년에 놀고먹는 사무라이(侍)의 3 분의 1을 정리하고, 1875 년 에도 3 분의 1을 정리했다. 倭奴 明治가 사무라이들을 北海道로 내쫓아 아이누족(Ainu 族)과의 전쟁에 동원한 것은 1869 년 부터다]을 美軍이 南北戰爭 당시 입고, 사용한 골동품 군복, 수통, 각반, 식기, 장총 등으로 무장시켜 아이누族과의 치열한 전쟁에 투입한 끝에 정복했던 것이다.

海外 天文臺가 아니냐구? 9 세기에 이르러 중국을 오갈 수 있는 선박을 간신히 만든 日本이다. 그것도 침몰하고 조난 당하기 일쑤라 9 세기 말,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가 중국 대륙으로 가길 거부 했었다.

“공동의 문화와 미래를 함께 영유하면서 지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세계와 격리된 채 살아온 일본인”(라이프발간, 2차 대전)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 倭가 천문관측만은 격리를 극구 탈피하려 했단 말인가. 日本 역사책에 기록된 천문관측지는 러시아의 땅으로 알려진 곳이다. 어떻게 그 땅에서 천문관측할 수 있었을까. 천 수백 년간 러시아에 끊임없이 조공 해가며 그 땅에서 천문관측하기를 집착했단 말인가. 자국 땅에서는 천문관측을 외면하면서?

黑龍江 너머는 외항선도 못 만들었고, 홋가이도(北海道)조차 19 세기 말에 정복한 일본의 땅이 될 수 없다.

高句麗의 일식관측지가 黑龍江 상류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高句麗 및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일식기록은 대부분 삭제되고 극히 일부만 남았다고 전술했다. 黑龍江 너머도 高句麗 영토였던 것이다. 高句麗 영토는 그대로 大震國의 영토가 되었다. 흑룡강 너머에서 관측한 일본 역사책의 일식기록은 바로 우리나라가 관측한 것이다.

日本은 西洋 天文學을 배울 때까지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일식관측조차 셋에 하나 꼴로 맞추는 천문학자는 없다. 百濟人 관륵(觀勒)이 천문관측을 가르쳐준 602 년 에서 무려 26 년 뒤인 628 년 부터 일식기록이 나온다. 그때부터 동아시아 전역에 일식 관측지가 흩어져 있다, 시대에 따라 한 곳에 집중 되면서. 딱 두 번 列島가 일식관측지로 나오는데, 高麗와 李氏朝鮮에서 건너간 천문관이 관측해준 것이다.

◀ 고려시대의 군함

1189 년 에서 1326 년 까지 日本이 일식관측지로 나오는 기간이 高麗가 대포를 장착한 戰艦을 앞세워 일본을 정복한 1019 년[일본 소우기의 기록(高麗의 전함은 배에서 말을 달릴만 했고, ''돌에 화약을 넣어서 적선을 부순다''라고 적고 있다)]과 왜구(倭寇)가 날뛰기 시작하는 14 세기 사이라는 데 주목하자. 1189 년에서 1326 년 까지의 日蝕을 日本이 제 스스로 관측 했다면, 이후로도 관측지가 日本으로 나와야 한다. 그러나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滿州다. 倭奴는 高麗 천문관에게서 천문학을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601 년 이후의 일식기록도 日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百濟時代에는 日本과의 교류가 활발하여 잦은 왕래가 있었고, 新羅 말기에 장보고(張保皐 ?~846))는 靑海鎭을 설치하여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倭寇를 섬멸하고, 세력을 형성한 후에 남해안 해상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웃 나라와의 해상무역을 독점 하였는데, 이것으로 당시의 배를 건조하는 주조기술이 얼마나 발달 하였는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박 건조기술의 축적을 되물림 받은 高麗에서는 과연 어떠한 배가 건조되었을까?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영릉로(英陵路)에 있는 왕건묘(王建墓)의 정문(中奴들은 무엇이 께름칙한 것인지 王의 무덤을 陵이라고 해야 되는데 墓라고 표시하고 있다)

918 년 왕건(王建 : 877~943 재위)에 의해 건국된 高麗는 지방 豪族 出身과 海上勢力의 영향으로 건국된 나라로, 이 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土臺는 바로 海洋力 이었다. 사실상 王建의 조상과 그의 가문도 해상무역을 담당한 海上勢力이었다(이 당시 海는 바다만이 아니고 江도 海라고 표시했다).

이런 까닭에 그는 海軍을 지휘 했으며 직책도 백선장군(百船將軍) 해군대장(海軍大長)이었고 당시의 해군력 또한 막강 했는데, 909 년 에는 海軍을 이끌고 羅州를 공격하여 火攻戰法으로 승리 함으로써 서남해 일대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면서 後三國時代의 혼란을 수습해 가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羅州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호족의 딸이기도 한 장화황후[莊和皇后 : 吳富純의 딸이며 2 世 皇帝인 惠宗(943~945 재위)의 母]는 王建이 해상활동 중에 맺어진 사랑이기도 하다.

舊 五大史의 기록을 보면 주목되는 인물로 '촉(蜀)' 임금 王建이 高麗太祖와 같은 시대 인물이라는 점이고, 그의 출생지가 주(周)의 경계인 서화(西華)가 있는 지역이고, 당(唐)과 統一新羅의 경계인 항성(項城) 출신이라는 점이다. 項城은 河南省의 동부에 있으며 대륙 新羅의 땅인데, 王建이 蜀나라 임금이 되었다. 어째서 蜀나라 임금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현재 支那 정부는 大震國 유물을 唐나라 유물로 둔갑하고 사기치는 경우를 보아 의혹이 크다. 그가 죽은 해에 "王建이 高麗를 건국(918)"한 것으로 되어 있다(前蜀-王建陳州項城人也 衍建之幼子也 建卒衍襲僞位 舊五大史) (前蜀-王建字光圖許州舞陽人也 五大史) (前蜀 - 舞陽人 建奔蜀 中國人物史)

기록에 의하면 王建이 건조한 大船은 그 길이가 각 방 16보(36.6m)에 무게만도 250∼280톤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15∼16 세기경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가 항해한 배의 규모인데 이미 5∼6 백년 전에 高麗에서 건조된 것으로 이를 통해서 당시 高麗의 해상세력의 배의 건조기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렇게 큰 규모이다 보니 배 위에서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할 만하다(소우기).

당시 高麗의 배에는 大船, 과선(戈船) 등의 군함 에서부터 순찰선인 巡船, 행정지도선인 관선(官船), 소나무로 만든 큰 배인 송방(松舫), 막선(幕船), 지방의 조세(租稅)를 서울로 옮기는 조운선(漕運船) 등 매우 다양하였다[高麗史에 大船·戈船 등에 대한 기록이, 1123 년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巡船·官船·松舫·幕船 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大船은 현재까지 밝혀진 高麗의 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함이며, 戈船은 高麗의 대표적인 軍艦이다.
日本의 《소우기》 기록에 따르면 高麗의 배, 그 중에서도 戈船은 철로 뿔을 만들어 적을 부수게 만들었다고 한다(衝角). 이에 비추어 보면 거북선이 바로 高麗軍艦을 원형으로 하여 개발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高麗 배에는 세계최초로 ''戈砲''라 하여 포를 설치 하였다. ''1019 년 高麗戰艦이 화약을 넣어 공격한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일본 《소우기》]. 이렇게 보면 중국이 4대 발명품으로 자랑하는 것 중에 이미 한국이 元祖이자 종주국으로 밝혀진 인쇄술[앨 고어 前 美國 부통령은 2005 년 5 월 19 일 "서울 디지털 포럼"에 참석하여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Gutenberg : 1397~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李氏朝鮮)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것"이라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敎皇의 사절단과 이야기 했는데 그 사절단은 Corea를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전했다. 2005.5.19.연합뉴스] 과 더불어 ''火藥''도 한국이 최초로 발명 했다는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 셈이다.

특히 高麗가 일본 원정시 화약성 폭발무기를 사용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객관적 정황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日本의 《백련초》에는 997 년 高麗가 日本이 계속적인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3차 요구 이후에는 큐슈(九州)를 침공 했다고 하며, 5 백여 척을 앞세운 高麗軍의 침공 기록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1607 년 부터 1811 년 까지 朝鮮通信使가 건너가 일본의 문맹자들을 깨우쳐 주었다. 朝鮮通信使에는 온갖 방면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천문관까지 끼어 있었다는 것이 일식기록에서 드러난 것이다. 일본에 曆法을 가르쳐준 박안기[朴安期 : 천문학자로서 1643 년 일본에 가서 일본의 가장 유명한 천문학자 오카노이 겐테이(野井玄貞)에게 천문계산법을 전수했다]는 단순히 李氏朝鮮의 선비가 아니라, 天文官이었다. 일본은 관륵(觀勒 : 百濟 武帝때 倭에 天文技術을 전했다고 함)을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라 내세우지만, 西洋 天文學을 배울 때까지 천문관측할 줄 몰랐으니까, 정확히 말해서 西洋人이 일본 천문학의 비조(鼻祖)이다.

그런 일본의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는,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蒙古高原 이북이다. 동양사(東洋史)의 역사날조를 주도한 中國은 蒙古가 원래부터 蒙古高原에 있었다고 했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 했다니까, 中國은 蒙古高原이나 그 이북에서 천문관측(?)하지 않았다. 日本이 러시아에 까지 조공하며, 역사책을 하사받아 일식기록을 베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설령 일식관측을 했다고 해도 자국 역사책에서 일식기록을 삭제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일식기록 이었던 것이다.

滿州에 女眞族이 살았다고 날조 했으니까, 中國은 滿州나, 滿州 너머에서 일식관측 하지 않았다. 당연히 일본 역사책에 기록된, 710 년 에서 792 년 까지의 스타노보이 산맥(Stanovoi Mts)이나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의 黑龍江 중, 하류에서 관측한 日蝕은 우리나라 일식기록이다.

高麗가 黑水와 접해 있다고 高麗史는 물론 高麗圖經 등에도 나와 있다. 일식관측지로 보건데, 黑龍江 이남의 강들은 黑水가 될 수 없다. 국경에서 천문관측하는 나라는 없다. 일식기록상 흑룡강 중, 하류 너머도 高麗 영토니까, 黑水는 黑龍江 상류이다. 黑龍江이 우리나라 영토니까,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 日本이 베낀 일식관측지 滿州[일본에서도 몇 개 관측한 것인지 일식관측지가 동쪽으로 늘어져 있다. 장소가 北海島와 혼슈(本州) 사이이다. 이 당시 홋가이도(北海島)는 일본 땅이 아니라, 아이누族의 땅이었다. 본격적인 일식관측은 아니고, 어떤 사건과 연결지어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기 위해] 역시 당연히 우리나라 영토이다.

中國은 잃어버린 역사가 없으니까, 天文志(?)에 실리지 않은 中國의 일식기록은 없다. 반면 우리나라 역사책은 대대로 焚書 됐다고 했으니까, 현 역사책에 실린 일식기록은 우리나라가 관측한 최소한의 일식이다. 日本이 중국의 일식기록(?)을 베꼈다면, 일본의 일식기록이 중국의 일식기록에 다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의 일식기록(?)과 일치하는 기록은 베끼지 않고, 三國이 중국 일식기록을 베꼈다고 우겼다.

무엇보다 천문관측 장소도 표시하지 않고, 한 곳에 集中 되지도 못하는 중국의 일식기록에서 시대에 따라 한 곳에 강하게 집중 되면서 東아시아 전역에 일식 관측지가 흩어져 있는 日本의 일식기록을 컴퓨터의 도움 없이 베껴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일식기록은 한 곳에 강하게 집중 되므로 간단히 베낄 수 있다.

일식기록은 모조리 우리나라 것을 베끼고, 나머지 역사기록은 중국 역사책 에서도 베꼈다? 중국 역사책도 베꼈다면, 중국(?)의 일식기록도 베껴야 했다. 결국 “니혼쇼키(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 졌다”는 이노우에 미쓰시다(井上三下)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책은 오로지 우리나라 역사책만을 보고 썼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책을 대부분 중국의 역사책으로 할당한 결과, “日本書紀가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를 기초로 만들어진” 셈이 되었던 것이다. 日本은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날조 역사책을 참고서로 삼았다. 중국사로 할당된 것에 맞추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친 것이다. 日本의 日蝕記錄은 東洋史가 완전히 날조 되었다는 증거이다.

일본의 천문기록은 모두 우리나라 역사책에서 직접 베꼈다. 날조 역사책과 우리나라 실사책을 대조해 가면서 빠진 일식을 챙겼던 것이다. 베꼈다는 사실을 은폐 하려고 가짜일식을 40~50 %씩 섞었다. 대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일시에 베꼈다는 의미이다. 日本이 베낀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의 일식관측지가 滿州라는 사실은 李氏朝鮮이 滿州를 상실한 1824 년 이후에 일본이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째서 일본은 628 년 부터 709 년 까지 중국 남해안의 일식기록을 베끼는 모험을 감행 했을까. 이 시기, 中國倭는 중국 대륙에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남해안은 아니다. 中國倭는 천문관측할 줄 몰랐다. 이 당시, 중국 남부는 新羅 땅이었고, 中國倭(정확한 표현은 大陸倭)는 대만(臺灣 : 원래의 지명은 對馬島)으로 밀려나 있었다. 中國倭의 위치에 가장 근접 하면서도 역사 중심지에서 비켜난 지역의 일식기록을 베꼈던 것이다. 제 딴에는 역사에 충실하게 왜곡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후에는 오로지 변두리만을 찾아 일식기록을 베꼈다. 中國倭가 일본으로 이주한 후로 일본은 대륙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 현 역사책에 나타난 삼국과 고려의 일식기록 및 일본이 베낀 우리나라 일식기록의 최적 관측지


[혹성(惑星)이 日本語라는 주장이 사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식관측도 못하던 나라가 행성(行星 : planet)관측을 할 수 있는가. 行星觀測도 불가능 했던 일본이 행성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단 말인가. 알았다면 하사받은 우리나라 史書를 통해서다. 三國時代 우리나라는 水星, 金星, 木星, 土星 등을 진성(辰星), 태백성(太白星), 세성(歲星), 진성(鎭星)으로 부르는 것과는 달리, 火星을 특별히 형혹성(熒惑星)이라고 불렀다. 사람의 마음을 현혹시키는 行星. 서양에서도 火星의 붉은 색에 착안해 전쟁의 신 이름을 따 Mars라 불렀다. 日本의 惑星은 熒惑星에서 유래한 것으로 별인지 의심스럽다는 뜻으로 와전(訛傳)된 말이다]

옛날에는 육안(肉眼)으로 천문관측 했다. 그런데도 檀君世紀와 太白逸史에는 監星을 두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乙丑 35년(B.C. 1916) 처음으로 監星을 두었다(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檀君世紀)." “乙亥년에 監星을 두다(乙亥置監星 太白逸史 番韓世家)." 이들 기사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기원전 1916 년 부터 우리나라는 고정적인 위치에서 천문관측 하기 시작했다.

천문대를 설치 했으니까, 천문관측 장소는 점이다. 三國의 일식관측지도 점이었던 것이다. 三國의 일식 관측지점을 찾아보자. 우선 수도에서 관측했을 것이다. 하지만 三國은 여러 장소에다 천문대를 설치한 나라다. 그 옛날에는 천문관측을 방해할 휘황찬란한 불빛이 없었으니까, 천문대를 중요도시에 설치했다. 천문대를 설치한 도시는 최적 일식관측지 내에서 제일가는 高度로 남아 있을 것이다. 중요도시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일식관측지 중앙에 있는 지명으로 추정했다. 韓國史와 대조해 우리나라 일식관측지를 분석해 보면, 관측지점은 대개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新羅의 일식관측지는 북위 28° 에서 35° 까지, 경도 110° 에서 116° 까지이다. 현 武漢(湖北省)이 그 중심에 있다. 新羅는 高句麗, 百濟와는 달리 소국으로 출발한 나라라 건국 당시 수도 한 곳에서 천문관측했다. 武漢이 新羅의 수도 金城이다.

일식기록이 많을수록 정확한 일식관측 지점을 찾을 수 있다.

後漢은 百濟의 일식기록을 베꼈다. 百濟는 일식기록이 더 많은 後漢의 일식 관측지를 기준으로 정했다. 北京(河北省)이 거의 중심에 해당한다. 그러나 北京은 河南 慰禮城이 아니다. 百濟는 河南 慰禮城을 상실했다. 百濟의 일식기록은 건국 초에서 멸망 때까지 고르게 분포한다. 이 말은 北京이 내내 百濟 땅이었다는 의미이다. 北京은 百濟의 마지막 首都 사비성( 泗沘城)이었던 것이다.

高句麗의 우측 일식 관측지는 북위 49° 에서 57° 까지, 경도 114° 에서 124° 까지이다. 黑龍江 상류가 관측지점이다. 아무르강 유역의 모고치쯤. 高句麗의 좌측 일식관측지는 북위 34° 에서 51° 까지, 경도 90° 에서 102° 까지로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서 중가리아분지(準噶爾盆地) 너머까지 넓게 나타난다. 위도를 보면, 중간지점이 북위 44° 이다. 이령(伊寧)과 띠화(迪化)가 위치한다. 특히 天山北路의 오아시스 마을로 발전해 차가타이 汗國의 수도이기도 했던 伊寧이 유력하다.

下代新羅의 일식관측지는 韓半島 南端이다. 順天이 거의 중심에 해당한다. 일본이 베낀 628 년에서 709 년까지의 일식관측지는 중국 대륙 남단에서 해남도(海南島)와 대만(臺灣), 필리핀 사이에 걸쳐 있다. 해상이다. 일식관측을 배타고 바다에 나가서 하지는 않았다. 중국 대륙 쪽의 일식관측지 중심인 홍콩(香港)으로 보아야 한다. 日本이 베낀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의 일식관측지의 중심에는 하르빈(哈爾濱)이 있다.

우리나라는 왕조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동일 장소에서 천문관측했다. 日本이 베낀, 794 년 에서 1183 년 까지의 黑龍江 중, 하류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은 新羅에 이어 高麗가 관측했다.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 滿州의 일식기록은 高麗 末에서 李氏朝鮮 中期까지 관측했다.

◀ ▼ 일본 나라(奈良)현 아스카무라(明日香村)의 기토라(キトラ) 고분[7세기 말∼8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여기에서 발견된 천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247 년에 만든 중국 南宋(?)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보다도 5 백년 정도 앞선 것이다] 벽화 1983 년 발견된 기토라 고분의 천장에 그려진 천문도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별자리와 닮았다는 점과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가 발견됐다는 점 때문에 국내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기토라(キトラ) 古墳 벽화의 天文圖(우측아래사진)에 의해서 우리나라는 한반도 북위 38.4° 에서 기원전 65 년 경부터 천문관측 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三國이 건국하기 전이다. 남아 있는, 高麗의 99 회 일식에 대하여 동아시아 전 지역에서 관측되는 식분을 계산한 다음 평균을 구했을 때, 식분이 최대인 지역이 현 사학계가 高麗의 수도로 단정하고 있는 開城과 정확히 일치 한다고 하지 않고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고 한 것은 현 開城이 아니라, 북위 38.4°에서 천문관측했기 때문이다.

원래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중앙부의 관측자 위도는 북위 38° 가 아니라 38.4° 이다. 李氏朝鮮이 기존 천문도에 14 세기 말의 하늘을 그려 넣으면서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10 世 檀君 노을(魯乙 : 35 年 乙丑에 監星을 설치) 때부터 천문대를 설치했다. 檀君이 다스리던 강역은 辰韓이다. 그리고 韓半島는 辰韓에 속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북위 38.4° 는 기원전 1916 년 이나 그 직후부터 줄곧 천문관측 해온 지점이다.

Asia 1808에 표시된 것처럼, 開城은 현 淮水 이남에 있었다. 開城은 高麗의 수도가 아니다. 고려의 수도 開京은 중국 대륙에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 平壤城이자 大震國의 수도 홀한성(忽汗城)이다. 바로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의 관측자 위도 34.3° 이다. 天象列次分野之圖 주변부가 1 세기의 하늘 이라는 점(天象列次分野之圖의 별그림 분석)에서 平壤을 수도로 하지 않을 때에도 平壤에서 천문관측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平壤 역시 우리나라의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 이었던 것이다. 실은 乙丑 35 年(B.C. 1916) 처음으로 監星을 둔 곳이 바로 平壤이다. 그 당시에는 장당경(藏唐京)이라 불렀다. 平壤은 北夫餘를 제외하면, 그 땅을 차지한 우리나라 역대 왕조가 반드시 한 번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그러기에 妙靑은 開京의 地德이 쇠하였음을 말하며 西京遷都를 주장했다).

高麗의 수도가 韓半島 開城이라는 것은 李成桂에 의해 창작 되었다. 수도가 아닌 곳에서 천문관측 하면서 관측장소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은 李氏朝鮮의 영토가 한반도로 줄어들자, 나머지 천문대에서 관측한 천문기록을 없애면서 한반도 천문대의 위치까지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기원전 18 년에 건국한 百濟는 기원전 13 년의 일식이 남아 있다. 高句麗에서 갈라진 百濟가 건국 직후부터 현 北京에서 천문관측할 수 있었던 것도 고정적인 천문관측 지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여러 곳에서 천문관측한 것은 장소에 따라 천문관측의 결과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들이 관측장소를 표기해 두지 않았을 리 없다.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나라마다 다수의 장소에서 천문관측 했는데, 중국과 일본이 韓半島 일대에서 관측한 천문기록은 베끼지 않았다는 점, 우리나라 기록을 베낀 일본 역사책의 일식기록이 시대마다 한 장소에 강하게 집중 된다는 점에서 우리나라는 관측장소에 따라 천문기록을 분류해서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三國의 일식기록이 수십 개에 지나지 않고, 38.4° 에서 관측한 일식기록도 없다는 사실 만으로도 우리나라의 천문기록이 대량으로 누락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원래 李氏朝鮮은 高麗의 일식을 韓半島에서 관측한 것만이 아니라, 黃河 이북 및 동북아에서 관측한 것도 남겨 두었다. 李成桂가 朱元璋 등과 합의할 당시의 李氏朝鮮 영토가 黃河 이북 및 동북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淸에 의해서 영토가 단계적으로 축소되자, 蒙古高原 以西 및 현 北京, 滿州, 黑龍江 등에서 관측한 천문기록을 차례로 삭제해 버렸다.

日本이 베낀 1343 년 에서 1599 년 까지의 우리나라 일식 관측지가 滿州이다. 李氏朝鮮 중기 까지는 최소한 滿州에서도 일식관측을 했다는 증거이다. 실제로는 李氏朝鮮의 영토가 東鴨綠江 이남으로 축소된 1824 년 까지는 滿州에서 내내 천문관측했다. 丙子胡亂 때 까지는 桑乾河 以西에서, 丁卯胡亂 때 까지는 현 北京에서도 천문관측했다. 영토가 축소되자, 李氏朝鮮은 高麗만이 아니라, 自國의 천문기록까지 삭제해 버릴 정도로 역사축소에 혈안이었다.



◀ 92년 12월 24일 낙산사 일출중의 부분일식

中國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언제 베꼈을까. 中土에 세워진 모든 나라가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끼기에 혈안 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천문기록을 갖고 싶다는 생각과 실행은 별개의 문제다. 베낀 사실이 발각될 경우의 보복도 생각해야 한다. 中國의 천문기록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것은 한꺼번에 베꼈다는 것인데, 中國의 왕조(?)는 서로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中土를 차지 하려고 침입한 종족들이 과연 다른 나라의 일식기록까지 신경 써줄까. 唐은 鮮卑族이다. 그런 나라가 토착(?) 왕조를 위해 천문기록을 일일이 베껴 주었을까. 隋書에도 기록하지 않았다. 단일국가라는 日本조차 서양 천문학을 배운 자들의 소행이었다.

대대적인 역사날조에 나선 明이 천문기록까지 베꼈던 것이다. 明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멸시 했다는 蒙古의 역사 까지도 날조해준 나라다. 이런 나라이니 만큼 中土에 세워진 나머지 나라의 천문기록도 챙겨주었다.

明의 天文官은 高麗人이었다. 高麗는 여러 곳에서 천문관측한 나라다. 그것을 잘 아는 高麗의 천문관이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마구 베껴 여기저기 흩어놓고, 李氏朝鮮의 영토로 합의한 현 北京에서 관측한 百濟 일식기록 까지 베꼈을까.아니다,,

後漢의 일식기록은 淸 때 새로 베꼈다. 李氏朝鮮의 영토를 가로챈 淸이 원래부터 중국의 강역이 동북아 까지 였다고 우길 심산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遼水도 桑乾河에서 난하로, 현 遼水로 밀어내고, 淮垈, 海垈를 글자까지 바꿔가며 면적을 줄여 明이 1 차로 밀어낸 燕을 揚子江 이남에서 渤海灣으로 또 다시 종이 위로 진출시킨 것은 淸이다.

다른 나라의 천문기록을, 일식기록 마저 베낀 중국이 과연 曆法을 만들 수 있었을까.

◀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을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곽수경 (郭守敬 1231∼1316)은 고려인이다

대통력(大統曆)은 明나라 때의 역법 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元나라 때 수시력법(授時曆法)의 역원(曆元)을 변경하고, 1 년의 길이에 변동이 없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내용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달리 말하면, 授時曆을 훔쳐 大統曆이라 한 것이다. 漢族國家를 자처하고 문명대국 이라던 明이 유목민족 몽고의 曆法을 베꼈다는 소리다. 이것이 中國史의 실체이다. 他國史를 훔쳐 自國史로 날조하는 것. 대대로 曆法을 만든 中國 이라더니, 明은 어째서 授時曆을 이름만 바꾸어 부를 수 밖에 없었나?

中國이 曆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明도 만들지 못한 曆法을 유목민족 蒙古가 만들 수 있는가. 曆法까지 스스로 제작할 정도로 고도 문명을 누린 蒙古가 어째서 오늘날 달랑 천막 하나 치고 사는 유목생활로 되돌아 갔는가. 明이 曆法을 만들 줄 몰랐기 때문에 蒙古의 曆法을 中國人이 만들어 주었다는 주장조차 성립할 수 없다.

“혈거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지방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살”던 女眞族이 세운 金이 과연 大明曆을 만들 수 있는가. ‘천하고 작은 생선’ 유목민족 선비족(鮮卑族) 唐이 曆法을 만들 수 있는가.

“자연의 비일상적인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에 중요한 암시를 준다는 고대인의 믿음 때문”에 천문관측한 것이라면, 남의 나라 日蝕記錄을 베끼고 曆法을 베낀 中國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당연히 역사책 마저도 베낄 수 있는 비양심적인 나라임을 말해주지 않는가.

우리나라와 주변국들이 이 시기에 남긴 일식기록들 중 천체역학적 계산을 통해 실제로 그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기록의 비율, 즉 실현율이 가장 높은 史書가 바로 三國史記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식기록이 총 66 개가 있는데, 그 중 53 개가 사실로 확인되어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였다. 특히 200 년 까지의 초기 기록은 그 실현율이 89 %에 이른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천문기록을 베꼈다던 중국사서의 일식기록은 오히려 이보다 실현율이 떨어진다. 중국 일식기록의 실현율은 한(漢)나라 때 78 %로 가장 높고 그 이후부터 당(唐)나라 말까지는 63~75% 의 수준을 보인다.

삼국사기는 둘쭉날쭉함이 없이 모든 시기에 걸쳐 고르게 실현율이 높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이 독자적인 실제 관측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베꼈다면서 어째서 中國의 일식 실현율이 우리나라보다 낮은가. 中國이 왕조라고 우기는 각 나라마다 우리나라 천문기록을 배당했다. 각 나라 존속기간에 해당하는 일식기록을 포함한 천문기록은 최소한 수백 개에 이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책을 다 없앴다고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부 다 베끼면 탄로날 가능성을 생각한 中國은 다수의 천문대에서 관측한 기록에서 선택적으로 약간씩 베꼈다. 日本도 우리나라 역사책에 기록된 실제일식과 허구의 일식을 섞어서 실현율이 33~45 % 밖에 되지 않는다.

다수의 천문대에서 관측한, 중국대륙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전체에서 육안관측할 수 있는 천문현상 전부를 기록 했으므로 우리나라는 각 王朝마다 역사책과는 따로 天文志를 엮어야 했던 것이 분명하다. 똑같은 내용의 천문현상이 가득한 天文志를 베끼면서, 실수가 없을 수 없다.

우리나라 戶籍을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13.3 %의 주민등록번호가 잘못 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 번쯤 답안지를 밀어쓴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을 것이다. 선택적으로 베낄 경우는 실수가 더 많이 발생한다. 남의 나라 천문기록을 베끼는 사람이 한 단계 밀려 올라 갔다고 다시 기록할까. 자신만 입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데? 이 당시 朱元璋은 우리나라 역사 전부를 中國史로 둔갑 시키고 있었다. 수만 권의 책을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식이 三國史記와 중국사서에 공동으로 나오는 이유” 역시 中國이 우리나라 일식기록을 베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식관측 실현율이 높은 것으로 보아, 천문관측을 얼마나 중시 했는지 짐작 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과연 일어나지 않는 일식을 일어났다 보고하고 기록 했을까. 日蝕現狀은 일식이 일어나는 지역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다. 거짓보고를 하면 당장 탄로난다. 태백주현(太白晝見), 태백월범(太白犯月)도 관측한 나라가, 일식관측을 잘못할 수는 없다.

天文志를 포함한 역사책은 처음 한 권을 만들어 여러 부 필사(筆寫)한다. 현존하는 인쇄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126 호)이 가장 오래 되었다. 인쇄술을 개발 했다고 해도 모든 책을 인쇄하는 것은 아니고, 최종 단계에 한해 인쇄했을 것이다. 필사를 거듭 할수록 誤字 발생율이 높아진다. 실상 天文官이 쓴 草稿 외에는 모두 誤字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결론을 말하자. 三國의 일식기록은 明이 삭제하고 李氏朝鮮이 다시 찾아서 기록했다. 몽고고원 以西, 현 北京, 현 武漢에서 관측한 高句麗, 百濟, 新羅의 일식기록을 李氏朝鮮이 찾아서 기록한 것은 朱元璋이 차지한 땅이 揚子江 이남 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中土는 유목민족의 침입을 끝없이 받았다. 날조사에서 유목민족의 南方下限線이 揚子江이었다. 揚子江 이북을 北朝로 날조했다. 유목민족으로 날조된 高句麗, 百濟, 新羅도 揚子江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옛 長江 까지가 우리나라 영토였다.

李氏朝鮮은 高麗는 물론이고 李氏朝鮮의 천문기록까지 영토가 단계적으로 축소될 때마다 삭제해 왔다. 그럼에도 三國의 일식기록을 삭제하지 못한 것은 그것마저 삭제하면 천문관측 하지 못한 나라가 되기 때문이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淸이 後漢의 일식기록을 다시 베꼈다는 사실이나 日本이 1824 년 이후에 천문기록을 갖기로 날조 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저들이 우리나라 역사책 및 고문헌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특히 日本은 20 세기에 들어 와서도 우리나라 한단사(桓檀史)를 토대로 남연서(南燕書) 등의 날조 일본 역사책을 만들어 왔다. 일식기록의 가치는 이를 근거로 日本과 中國에 우리나라 역사책과 기타 문헌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