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alysis/person

알랭 드 보통

monocrop 2011. 10. 8. 11:55

[O2/Life]서구는 한국을 모른다, ‘정신’ 을 수출해 보라

알랭 드 보통 기고 내사랑한국인들에게

동아일보 | 입력 2011.10.08 03:07 | 수정 2011.10.08 03:08 / 출처 및 원문보기

 




세계적 작가 알랭 드 보통 씨가 지난달 29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 카페에서 동아일보 독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스위스 출신의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 씨가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 기고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문학과 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사랑, 여행, 건축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해 독특한 지적 유희를 펼쳐온 세계적 작가입니다. 드 보통 씨는 에세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출간에 맞춰 지난달 26일 처음으로 방한해 이달 2일 출국했습니다. 이 글은 그가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쓴 것입니다. 》

나는 우연히 한국이란 나라를 알게 됐고 사랑에 빠졌다. 10년쯤 전, 운 좋게도 한국의 출판사 한 곳과 일하게 됐다. 그 출판사는 내 책을 훌륭하게 번역했고, 매우 아름다운 표지도 만들어 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 책들이 점점 더 많이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해가 갈수록 판매 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며칠 전 서울의 커피숍에서 한국인 친구 하나가 농담처럼 말했다.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선 자네 책을 사는 게 일종의 '통과의례'야. 젊은 일본 여자들이
루이뷔통 핸드백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고는 사람 좋고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게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차이점이지!"

지난주 서울에 있을 때 내 사인을 받으려고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 출판사는 경호원을 고용해야 했다.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은 공원에서 나를 보자 자기들끼리 웃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팝 스타가 되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다행히도, 나 같은 남자들의 그런 쓸모없는 환상은 집에 도착해 아내를 보자마자 깨져버린다)

나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당연히 나도 그들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들과 나, 그리고 나와 그들의 감수성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렇게 깊은 공감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내 안의 무엇이 한국적이고, 그들 안의 무엇이 '드 보통스러운(De Bottonish)' 것일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일주일 동안의 한국 방문에서 찾으려 한 것이었다.

친절한 한국인… 왜 자신감 부족할까

나는 지금 집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글을 쓰고 있다. 비행기는
시베리아의 우울한 도시 노보시비르스크 상공을 날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깊이 감동시켰고,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찾고 싶은 나라를 떠난다는 커다란 슬픔에 젖어 있다.

모든 이가 한국인들은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식의 말은 사실 세계 어느 나라를 묘사할 때나 쓰이는 것이고, 종종 사실과 다르다. 그렇지만 한국에선 이미지와 실제가 정말로 일치했다. 한국인의 영혼 속엔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너그러움과 관용을 보여주는 정신이 있다. 한국에선 격식을 차린 겉모습을 벗어버리는 데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국엔 존재의 기쁨과 슬픔을 솔직하게 나누려는 열망이 있다. 내 책들은 30개 나라에서 번역된다. 하지만 나는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케이크를 구워 오는 곳은 본 적이 없다.(이번 그의 방한 때 독자 3명이 케이크를 구워 선물했다·편집자) 작은 예일 뿐이지만, 나는 그것에서 큰 의미를 읽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한국인들은 여러 면에서 자신감이 부족하다. 가슴 아프게도 그렇다. 나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사람이나 나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충분히 선량한지, 아름다운지, 부유한지, 또는 현명한지를 의심해 보는 것은 언제든지 도움이 된다. 이런 자세가 실제로 자신을 그렇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이런 의구심을 한국인들은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자기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지, 한국이 기본적으로 괜찮은 곳인지 등의 질문을 한다. 물론 그 대답은 예스다.


한국인의 고통과 우울함도 느껴져


나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고통과 우울함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은 20세기가 만들어낸 아픔과, 최근의 과도한 물질적 성공이 그 부지런한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값비싼 대가의 존재를 번갈아가며 느끼게 해 주는 나라다. '불안(Status Anxiety)'은 한국에서 출간된 내 책 중 가장 인기가 높았다. 이 책은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경제적 번영과 함께 심리적 불균형을 가져오는지를 설명한다. 나는 '불안'이 많은 한국인들의 내면적 괴로움을 잘 포착해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났다. 막막한 미래에 대해 불평하는 학생들의 편지도 수없이 받았다.

내가 런던에서 '불안'을 썼을 때, 나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당시 나는 나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대한 분석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는 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문제점을 담아내게 된 것 같다. 한국은 많은 선진국이 겪었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물질적으로 더 풍족한 삶을 더 행복한 삶으로 바꿔 나갈지의 문제 말이다. 이 문제를 풀어낸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배고픔을 해결했지만 마음과 영혼에 양식을 제공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나라도 많다.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문화와 자연을 즐길 시간, 그리고 서로서로와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지낼 시간을 허락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배를 만들어야 하고, 자동차를 조립해야 하며, 이웃 나라들이 안보를 위협하거나 질시의 눈빛을 보낼 때는 더욱 그렇다.

나는 자녀 양육에 대한 태도에서 한국의 딜레마가 드러나는 것을 봤다. 내가 마주친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서구에서처럼 아이의 정서적 측면을 주로 지원하면서, 학교 성적에 대해서는 그리 큰 부담을 갖지 않게 할 것인가?(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다) 아니면 시험 성적은 좋지만 정서적으론 우울한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좀 더 전통적인 아시아적 모델을 따라갈 것인가?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즐겁게 보내길 바라는 듯하다. 그렇지만 나중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보여줄 새로운 사랑의 방식은?

작가로서 나는
사랑이란 주제에 매력을 느낀다. 당연히 이것은 내가 한국의 지인들과 토론하고 싶었던 분야다.(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삶에 대한, 솔직하고 개방적인 통찰을 전해준다) 한국인들의 감성(heart)은 서구의 낭만주의(Romanticism)와 아시아의 유교적 전통 사이의 교차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태는 한국 문화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제약하곤 한다. 유교의 가르침은 가족을 개인적 성취보다 중히 여기고, 의무를 성적인 쾌락에 우선시하며,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연장자에 대한) 존경을 앞세우라고 한다. 낭만주의는 완전히 상이한 관점에서 출발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적·감정적 친밀함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구인들은 (꽤 이른 나이부터) 자신의 천생연분(soul mate)을 만날 때까지 여러 사람과 사귀어보려 한다. 같은 맥락에서 만약 성적인 측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혼이 해결책이 된다.

내 생각은 이렇다. 유교든 낭만주의든 제도 자체는 문제없이 작동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두 가지를 섞으려 할 때 생긴다. 낭만주의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필요로 한다. 개개인은 '성적인 실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쉽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결혼관계를 끝낼 수 있어야 한다.

유교적 전제조건은 이렇다. 여성은 가정에 머물러야 한다. 남성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가장이며, 집안일을 도울 필요도 없다. 부부 사이에 감정적 거리가 있더라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이혼은 최후의 수단이다. 나는 내 한국인 친구들이 두 가지 가치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결과적으로 두 기준의 불합치로 인해 고통 받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할 이유도 있다. 동과 서, 옛것과 새것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사랑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서구 세계는 사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많다. 아마도 한국이 사랑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a new nuanced attitude)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의 '소프트 파워' 커지길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서구 세계가 아직도 한국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에 슬퍼하고 있다. 나는 왜 어떤 나라들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고, 어떤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런 '소프트 파워'가 대략적인 비즈니스 의사결정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해당 국가에 대한 투자나 관광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내 결론은 이렇다. 어떤 나라가 국제적 인지도를 얻으려 한다면 다음과 같은 항목 중 몇 가지를 가져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1명,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 1가지(초밥이나 카레를 생각해 보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나 영화 제작자 1명, 잘 발달된 디자인 감각과 그 나라의 수도에 생기 넘치고 역동적인 문화와 사회상이 있다는 인상이 그것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한국은 이미 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지만, 그 사실이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 때문에 서구 세계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을 유명하게 만든 대중음악과 영화는 사실 서구 세계에 그리 많이 건너가지 않는다. 한국은 상품과 서비스의 수출에선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 이제는 한국이 정신과 아이디어, 그리고 개성을 수출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때다.

크진 않지만, 그것이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하려는 일이다. 내가 사랑하게 된 한 국가를 내 주변의 세계가 알게 하는 것, 그리고 내 가슴을 울린 나라에 보답을 시작하는 것 말이다.

정리=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 알랭 드 보통은…


△1969년 스위스 취리히 출생. 8세 때부터 영국에서 교육을 받음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을 전공 △24세 때인 1993년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데뷔.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국제적 작가로 자리 잡음

△2003년 2월 프랑스 정부로부터 '슈발리에 드 로르드르 데자르 에 레트르'라는 기사 작위 받음. 11월 '샤를 베용 유럽에세이상' 수상

△저서: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여행의 기술' '불안' '행복의 건축' '공항에서 일주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