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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은 결코 조선(朝鮮)으로 가지 않았다

monocrop 2011. 9. 30. 22:35

:: 네티즌 자유게시판



  동명 (2011-09-30 20:43:42, Hit : 29, Vote : 1
 기자(箕子)은 결코 조선(朝鮮)으로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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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箕子)은 결코 조선(朝鮮)으로 가지 않았다>

기자는 은나라 주왕의 친족이며 성씨는 자씨 이다. 산서성 箕 땅에 봉해져 箕子라고 한다.

기자라는 사람이 우리 역사에 이처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조선의 계보를 잇는 기자조선을 개국 했다는 문헌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측 문헌기록중 《상서(尙書)》가운데 《주서(周書)·홍범편(洪範篇)》 서(序)에서 "주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 나서, 주왕을 죽이고 그 아들 무경을 세우고 기자를 데리고 호경으로 돌아왔다. 라는 대목에서 처음 기자의 존재가 드러난다.
하지만 위의 기록중 기자와 조선을 연결시켜주는 대목은 없다. 기자와 조선의 연결고리는 그 뒤 기원전 2세기경에 전한의 복생(伏生)이 쓴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 비로소 등장하고 그 뒤 사마천의 《사기(史記)·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등에서 볼 수 있다.
<상서대전(尙書大傳)>를 보면 “은나라를 멸한 주무왕은 공자 녹보(祿父)를 세워 그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고,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다. 기자는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를 인내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달아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주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인 기자는 할 수 없이 주나라에 신하로써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어 도망간 지 12년 만에 주왕에게 조례를 올리기 위해 돌아왔다. 이에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洪範)>에 관해 물었다.” 라고 하였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 주무왕은 감옥에 갇혀있던 箕子를 석방해 주는 호의를 보이지만 기자는 인내하지 못하고 조선(朝鮮)으로 달아났다고 했는데 <상서(尙書)>에 “기자를 호경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라는 문구와 비교하면 기자가 호경으로 왔으나 인내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해석이 되어진다.
<상서(尙書)>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조선이 뜬금없이 나타나는데 주무왕이 달아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주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인 기자는 할 수 없이 주나라에 신하로써의 예를 갖추지 않을 수 없어 도망간 지 12년 만에 주왕에게 조례를 올리기 위해 돌아왔다. 이에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洪範)>에 관해 물었다.
기자가 인내하지 못하고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주무왕이 조선에 봉했다고 해서 도망한지 12년만에 조례를 올리기 위해 돌아왔다.라는 기록을 사실로 인정 하더라도 기자의 추후 행보가 기록에 보이질 않는다.
또한 조선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는 상황에서 기자는 연고도 없는 조선으로 달아나고 주무왕은 조선과의 접촉도 없이 책봉을 해준다. 이는 조선이 주나라 및 은나라 제후라는 가정하에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상서(尙書)>나 <좌전>의 문헌기록을 볼 때 조선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한(前漢)의 복생(伏生)이 <상서대전(尙書大傳)>을 찬하던 시기 위만조선을 이치 시킨 결과물이라고 생각되며 사마천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조선(朝鮮)이 실제로 존재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기원전 3세기부터 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마천 이후 중국측 문헌기록은 조선(朝鮮)을 기자의 나라로 거의 동일하게 기술한다..

<후한서(后漢書). 동이전(東夷傳)>
옛날 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기자는 그 백성들에게 예의아 농사짓는 법과, 누에를 기르는 법을 가르치고 다시 8가지 항목의 규범을 만들었다.
<잠부론(潛夫論).오덕지(五德志)>
주무왕이 송에는 미자계를, 조선에는 기자를 봉했다.
<수경(水經), 패수주(浿水注)>
한조 때 허신(許愼)의 말을 따르면, 조선은 원래 기자의 나라다. 기자가 백성들에게 도의와, 농사법과, 직조법, 그리고 믿음과 덕을 가르치고, 8조의 법금을 제정, 알게 해서 예속을 이루게 했다.
< 구당서(舊唐書). 고려전(高麗傳)>에 “ 요동의 땅은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곳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제 29 연표(年表) 상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海東)에 나라가 있은 지는 오래였다. 기자(箕子)가 주나라 왕실에서 봉작을 받고 위만(衛滿)이 漢 나라 초엽에 왕호를 참칭한 뒤로부터 연대가 요원하고 기록들이 조잡하여 도저히 그 사적을 자세히 알 수가 없다.라고 했듯이 김부식의 생각 또한 중국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성계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중국의 유학을 신봉하는 많은 학자들은 기자가 조선개국의 시초인양 숭상하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보이는데, 특히 한백겸은 《기전고(箕田考)》에서 평양에 있는 잘 정비된 구역으로 보이는 농경지를 기자시대의 것으로 추단 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렇게 조선(朝鮮)은 주무왕 으로부터 봉해진 기자의 나라가 되는 것인가?

<사기 서주 본기>에 보면 은허(殷墟)에 봉해진 은주(殷紂)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주성왕의 명을 받들어 반란을 진압한 다음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 유랑하게 만들었다. 주공은 다시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개(微子開)로 하여금 무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송(宋) 땅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 도읍을 세우게 하였다. 다시 무왕의 막내 동생인 강숙(康叔)을 은나라의 고토(故土)에 봉하고 나머지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주무왕의 은나라 정벌에도 불구하고 주무왕 직접통치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은주(殷紂)의 아들을 은나라 고토에 봉하고 관숙과 채숙을 보내는 간접통치 방법을 구사하지만 주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주성왕이 어려서 주공이 대신 주나라를 이끌던 시기에 은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이에 주공은 다시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개(微子開)로 하여금 무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송(宋) 땅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 도읍을 세우게 하였다는 사실은 추후에 다시 거론 하기로 하고 주무왕의 막내 동생인 강숙(康叔)을 은나라의 고토(故土)에 봉하고 나머지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라는 문구를 주시하자.
주무왕의 동생인 강숙(康叔)이 봉해진 지역은 은나라의 고토 현재 하북성 한단 아래인 안양이다. 이곳은 衛나라의 봉토인데 나라의 백성들은 거의 은나라 백성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은나라 당시 기(箕)지역까지 은나라 통치권이 미쳤던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은나라 지배세력 및 백성들이 골고루 분포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箕)지역은 현재 산서성 적태산 근처로 백적(白狄)족 지역이었다.

기원전 627년
狄伐晉(적벌진) : 적이 진나라를 정벌하려
及箕(급기) : 진나라의 기 지방까지 쳐들어왔다
八月戊子(팔월무자) : 8월 무자일에 진날
晉侯敗狄于箕(진후패적우기) : 진양공은 적의 군대를 기에서 격파했다
?缺獲白狄子(극결획백적자) : 그때 극결은 백적의 임금을 사로잡았다

백적(白狄)족과 남쪽으로 국경을 마주했던 당진(唐晉)과의 지속적인 전쟁은 당진(唐晉)이 주나라 희성씨로서 은나라 유민들의 나라인 백적(白狄)과는 대결 구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백적(白狄)은 후에 중산국이 된다.
백적(白狄)족 지역으로 기자(箕子)를 봉했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는데 고힐강 선생은 기자(箕子)가 산서성 서쪽에 봉해졌다는 근거로써 다음의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로써는, <좌전(左傳)> 희공(僖公) 15년의 기록에 “ 나는 당숙(唐叔)이 진(晉)에 책봉을 받았을 때 기자가 한 말을 전해 들었다.‘그 후손들은 필시 창대하게 될 것이다. 당진국의 장래는 아마도 이후로도 대단히 희망적일 것이다.
이 대화는 섬진(陝秦)과 당진(唐晉)이 한원(韓原)에서 싸운 뒤에 섬진의 목공이 당진의 혜공(惠公)을 석방하고 귀국시키려고 할 때 한 말이다. 고힐강 선생은 이것을 근거로 당숙(唐叔) 우(虞)는 성왕이 당(唐)을 멸한 후에 그 땅에 책봉을 받았음으로, 만일 기자가 주무왕에 의해 조선에 책봉 받았다면 그 당시의 교통여건 상으로는 그렇게 먼 거리를 두고 기자가 당숙 우의 책봉 사실을 전해 듣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기자가 봉지로 받은 지역은 당진과 섬진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로는, <좌전(左傳)> 희공(僖公) 33년 조에 산서성 경내에 기(箕)라는 지명이 나온 것을 든다. 이 기사로 고힐강 선생은 기자가 봉지로 받은 곳은 산서성 서부로 비정(比定)했다. 산서성의 기(箕)라는 곳은 상나라 때 기씨들의 선주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고힐강 선생이 주장한 산서성의 기(箕)라는 곳으로 기자(箕子)가 봉해졌다는 가설은 어느정도 신비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는 기록이 있다. <사기 서주본기>에 “주공이 무경의 반란을 제압하고 은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개(微子開)로 하여금 무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송(宋) 땅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 도읍을 세우게 하였다.” 라는 것과 관련하여 <사기(史記) 태사공자서>에 기자(箕子)의 거취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미자계(微子啓)가 송나라에 책봉되자 기자(箕子)를 태사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송세가>제팔을 지었다.”
사마천은 기자(箕子)의 행보에 대해 두가지 경우를 기록 하였던 것이다.
하나는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에 봉해졌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자(箕子)가 송(宋)나라 태사에 임명 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기자(箕子)의 墓가 송(宋)나라 지역에서 발굴 되었다는 보도가 있는것으로 볼 때 기자(箕子)는 조선(朝鮮)에 봉해진 것이 아니라, 송(宋)에서 죽음을 맞이 한 것이다.

 


카오스 (2011-10-01 16:40:49)  
음.....역사연구에 유익한 글이군요....

그런데,..../ 조선(朝鮮)이 실제로 존재 하지 않았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라고 단정하지는 않는 것이 상고대사를 재구성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만,......
백랑수 (2011-10-01 21:02:06)  
기자를 봉한 곳은 조선국이 아니라 조선현입니다.
물론 기자도 오지 않았고...
객좌현 부근에서 발굴된 기자 혹 후예들의 것, 즉 은 말기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동 제기 몇 점도 그 출토된 곳이 무덤이 아니라 지하 갱이라는 점
Mimesis (2011-10-02 14:24:16)  
은,상의 후예가 기자-라는 기록들이 맞다면...
(箕子朝鲜乃殷商遗裔在朝鲜半岛上所建地方政权,臣于周,后又臣于秦,为周秦海外之属国。 “箕子与箕子朝鲜研究(No.6)”,课题名称:”箕子与箕子朝鲜研究”,课题主持人:张碧波, 主持人单位:黑龙江省社会科学院 ,课题的设计与论证(摘要)(http://www.xttzw.com/dprk/shownews.asp?newsid=7578

有了箕子朝鲜,方有卫氏朝鲜,方有汉之四郡,方有高句丽史、渤海史,从而构成了东北古史、东北民族与疆域史的基本系列,而箕子朝鲜是为中国东北史之开端。“箕子与箕子朝鲜研究(No.6)”,课题名称:”箕子与箕子朝鲜研究”课题主持人:张碧波,主持人单位:黑龙江省社会科学院 ,课题的设计与论证(摘要)( target=_blank>http://www.xttzw.com/dprk/shownews.asp?newsid=7578))


기자의 선조는 탕임금이고 그의 선조는 현이의 아들로 상나라 시조가 된 현왕-설(이름은 알백이라는 고조선계 이름)인데 현이는 북이이고 자몽의 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자몽성이 있는 자몽의 들은 요양시 조양이라 함-<독사방여기요>,
자몽성(紫蒙城)은 사(司)의 동(東)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 누방현(鏤方縣) 땅(地)이다.'-<遼志>
누방(鏤方)”이 조선(朝鮮)의 일부- 진서<晉書>
동경 요양부는 예로부터 조선의 땅. 그 동쪽에 있는 것이 자몽성이다.원나라-<요사지리동경도 >)

즉, 중원으로 진출했던 북이-현이의 상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가 주나라를 피해 갈 곳은, 혹은 봉해졌다면 다시 종족의 근거지인 북이의 본향으로 돌아가야만 세력을 쥘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한편으로 이 말은 기자는 동이의 후예였음을 말하는 것이며 기자가 고대중국인이라는 동복공정 논리의 전제부터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자가 여러 명이든 조선현이 어디에 있든 주나라를 피해 '조선'과 관련된 지역에 와 문제없이 잘 융합되었다라는 것이 아직까지 드러난 내용이라면
기자는 상나라의 후예이자 동이의 후예로 보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닌가해서요.
Mimesis (2011-10-02 14:46:44)  
위 글 근거들은 글자변조까지 추적한 [우리역사] 항목 내의 근거들이 아니라 현재 중국 측 기록들만으로 본
어찌보면 '최소한도'로 지역 비정을 한 내용으로도 지금의 역사교육은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동명 (2011-10-02 16:51:12)  
Mimesis님 관심을 가져 주셨읍니다.

기자의 선조는 탕임금이고 그의 선조는 현이의 아들로 상나라 시조가 된 현왕-설(이름은 알백이라는 고조선계 이름)인데 현이는 북이이고 자몽의 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자몽성이 있는 자몽의 들은 요양시 조양이라 함-<독사방여기요>,
자몽성(紫蒙城)은 사(司)의 동(東)쪽에 있다.
’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 누방현(鏤方縣) 땅(地)이다.'-<遼志>
누방(鏤方)”이 조선(朝鮮)의 일부- 진서<晉書>
동경 요양부는 예로부터 조선의 땅. 그 동쪽에 있는 것이 자몽성이다.원나라-<요사지리동경도 >)

즉, 중원으로 진출했던 북이-현이의 상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가 주나라를 피해 갈 곳은, 혹은 봉해졌다면 다시 종족의 근거지인 북이의 본향으로 돌아가야만 세력을 쥘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한편으로 이 말은 기자는 동이의 후예였음을 말하는 것이며 기자가 고대중국인이라는 동복공정 논리의 전제부터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답) 요컨데 님께서는 기자(箕子)의 선조가 탕임금이며, 탕임금의 선조가 구이의 하나인 현이(玄夷)의 아들인 설이 상나라 왕이 되었다. 따라서 기자(箕子)는 東夷의 후예 즉 한민족이 아니냐 하십니다.
이에 관한 근거로 현이는 북이이고 자몽의 들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자몽성(紫蒙城)이 있는 자몽의 들은 요양시 조양이라 함-<독사방여기요>로 예를 들고 계십니다. 따라서 현이는 북이이고 자몽(紫蒙)이란 곳이 조선의 지역이기에 기자(箕子)는 당연히 본향으로 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현이는 북이이고 자몽의 들에서 나왔다."라는 문구는 晉書(모용외전)에 " 모용선비의 조상이 유웅씨의 후예로서 대대로 북이에 정착하여 살면서 자몽의 들에 있었으며 동호라 불렀다. 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전연록)에 의하면 "고신씨가 아들 염월을 북이의 임금으로 봉하고 자몽에 도읍을 정하고 동호라 불렀다." 라고 설명한다.

이는 결국 선비족 또한 중국 황제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수 있읍니다.
은나라 시기 동쪽에 있던 종족들을 통칭해서 동이(東夷)라 하였읍니다. 북쪽에는 적족들이 있었고요
기자(箕子)가 동이와 관련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느 문헌에 있는 기록인지 알수가 없읍니다. 기자(箕子)는 황하족의 나라인 은나라의 후손일뿐 한민족과는 관련이 없다고 사료됩니다.
Mimesis (2011-10-02 18:38:50)  
동명님께...다른 시각의 글이 있어 올려보겠습니다.

그리고... 상나라는 동이족 관련 유물이 많이 나온 나라로써 향당제라든지 기타 여러가지가 고구려, 발해로 이어짐이 확실히 드러난 나라가 아닌가요.....

->상나라와 한민족 1,2,3.
( target=_blank>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2151715165&code=210000

target=_blank>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2221705225&code=210000

target=_blank>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071746405&code=210000  target=_bl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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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北 夷)” 지방 “자몽의 들(紫蒙之野)”은 조선민족의 요람인 조양>

“북이(北 夷)” 지방 “자몽의 들(紫蒙之野)”에 관해 명(明)말 청대(清代) 초 고조우(顧祖禹: 1631년~ 1692년, 明崇祯四年~清康熙三十一年)가 써서 “천고절작(千古絕作), 해내기서(海內奇書)” 라고 불리는 역사지리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명백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동구도사성(遼東舊都司城) 동(東)쪽으로는560리(五百六十里)를 가면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자몽성(紫蒙城)은 사(司)의 동(東)쪽에 있다. 《遼志》는:’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 누방현(鏤方縣) 땅(地)이다. 나중에 불날국(佛涅國)이 동평부(東平府)를 두고,몽주(蒙州) 자몽현(紫蒙縣)을 이끌게 했다. 곧 요성(遼城)을 옮겨 황령현(黃岭縣)에 넣었다. 발해(渤海)가 다시 자몽현(紫蒙縣)을 두었다. 요(遼)나라가 이를 이었다. 요양부(遼陽府)에 속한다. 금(金)나라가 폐(廢)했다.”

->ref: 有清一代地理著作层出不穷,其中,清初顾祖禹独撰的《读史方舆纪要》颇受后世称道,被誉为”千古绝作”、”海内奇书”。 target=_blank>http://guji.artx.cn/Article/17081.html

顾祖禹,字瑞五,号景范,江苏无锡人,生于明崇祯四年(1631年),卒于清康熙三十一年(1692年)。由于久居无锡城东宛溪,被学者称为宛溪先生。他自幼聪颖过人,好学不倦,背诵经史如流水,且博览群书,尤好地理之学。顺治元年(1644年),清兵入关,顾祖禹随父避居常熟虞山,长期躬耕授业,过着”子号于前,妇叹于室”的清贫生活。虽如此,亦耻于追名逐利,走入仕途。相反,选择了以著书立说为手段,以图匡复亡明的道路。秉承父亲遗命,立志著述《读史方舆纪要》,”盖将以为民族光复之用”。自顺治十六年(1659年)始,他边教私塾,边开始《读史方舆纪要》的著述。http://guji.artx.cn/Article/17081.html

◇遼東舊都司城。東至鴨綠江五百六十里,南至旅順海口七百三十里,西至山海關一千一十五里,西北至大宁廢衛八百六十里,東北至故建州衛七百九十里。自都司至山東布政司二千三百三十里,至江南江宁府三千四百里,至京師一千七百里。…紫蒙城在司東。《遼志》:漢樂浪郡鏤方縣地。后佛涅國置東平府,領蒙州紫蒙縣。尋徙遼城并入黃岭縣,渤海复置紫蒙縣。遼因之,屬遼陽府。金廢。(《讀史方輿》卷三十七 山東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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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몽성(紫蒙城)은 사(司)의 동(東)쪽에 있다. 《遼志》는:’한(漢나라 때 낙랑군(樂浪郡) 누방현(鏤方縣) 땅(地)이다.” 라고 한 기록은 “누방(鏤方)”이 조선(朝鮮)의 일부였다는 진서(晉書) 에서도 확인된다.

“북이(北 夷)” 지방 “자몽의 들(紫蒙之野)”은 명(明)말 청(清) 초, 그 동(東)쪽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서북으로 224km 곧 560리(五百六十里)에 자리한, 오늘날 만주 요양(遼陽)에 있던 요동구도사성(遼東舊都司城)의 동쪽에 있던 자몽성(紫蒙城)인 것이다. 이 “자몽의 들(紫蒙之野)” 곧 요동(遼東) 요양성(遼陽城) 부근의 몽주(蒙州)의 “자몽성(紫蒙城)”은 오늘날 단동(丹東市)으로 부터 100km정도의 거리로 명백히 “동이(東 夷)” 조선반도의 입구에 위치해 있고, 명백히 수천, 만년간 고대 조선민족의 요람이다.

원(元)나라 때 톡토(脫脫: 탈탈)가 쓴 요사지리지동경도(遼史第三十八卷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는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는 원래 조선(朝鮮)의 땅(地)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가 갇힌 것을 풀어주니, 떠나서 조선(朝鮮)으로 가서 이에 그를 그곳에 봉(封)했다.” 고 한다. 그 동쪽에 있는 것이 “자몽성(紫蒙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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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朝鮮語)로 말한 “북이(北 夷)”의 “현이(玄夷)”와 상(商)나라의 시조 설(契)>

상(商)의 시조 설(契)이 “동이(東 夷)”의 조선민족(朝鮮民族)사람인 것은 또 그가 “동이(東 夷)”의 현조(玄 鳥)부족 사람이라는 것과 더불어, 그의 이름이 “알백(閼伯)” 으로써 이는 조선어(朝鮮語)로 된 이름임을 보아도 알 수있다. 이는 “북이(北 夷)”의 “현이(玄夷)”와 그 종족의 한 사람인 상(商)나라의 시조 설(契)과 그 아버지 고신씨(高辛氏) 제곡(帝喾)은 조선어(朝鮮語)로 말한 사람들이었음을 말한다.

그는 “동이(東 夷)”의 현조(玄 鳥)부족의 “현조란(玄 鳥 卵)”에서 태어 난 까닭으로 그 성씨가 “자(子)”씨이며, 또, 설(契)이라는 이름 이외에 또 달리 “알백(阏 伯=卵伯)” 곧 “알(閼=卵)”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름 “알백(閼伯)”은 “알(閼)” 과 “맏이” 또는 왕이라는 “백(伯)”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따라서 그의 순수한 이름은 “알(閼)”이다
“북이(北夷)” 설(契)의 이름인 이 “알(閼)”은 그의 성씨인 “자씨(子氏)”와 같은데, 따라서 그의 이름인 “알백(閼伯)”은 “자백(子伯)”과도 같으며, “알(閼)”은 조선어(朝鮮語)로 “알(卵)” 이라는 사실이다. 설(契)의 어머니는 검은새(玄 鳥)의 알을 먹고서 설(契)를 낳았기 때문에 동이(東夷)의 순(舜)임금이 설(契)에게 성씨(姓)를 자씨(子氏)로 내려준(賜) 것이다.

여기서 “자씨(子氏)”가 곧 “알씨(卵氏)”와 같다는 것에 관해서 집해(集 解)의 예위(禮緯)는 「(순(舜)임금이 설(契)에게 성씨(姓)를 자씨(子氏)로 내려준(賜) 것은: 필자) 조상(祖)이 검은새(玄 鳥)로써 아들(子) [곧 새알(卵)]을 낳았기 때문이다. 」” 고 한다.

이를 보면, 동이(東夷)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언어를 쓴 “알백(閼伯)” 설(契)은 고대 조선민족(朝鮮民族)이다.

->ref: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周武王釋箕子囚,去之朝鮮,因以封之。…紫蒙縣。本漢鏤芳縣地。【五】後拂涅國置東平府,領蒙州紫蒙縣。後徙遼城,并入黃岭縣。渤海复為紫蒙縣。戶一千。(遼史第三十八卷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

遼建五京:臨潢,契丹故壤;遼陽,漢之遼東,為渤海故國;中京,漢遼西地,自唐以來契丹有之。…東京,本渤海,以其地建南京遼陽府。統縣六,轄軍、府、州、城二十六,<五>有丁四万一千四百。天顯十三年,太宗改為東京。
遼陽府: 遼陽縣丁三千。 仙鄉縣丁三千。 鶴野縣丁二千四百。 析木縣丁二千。紫蒙縣丁二千。 興遼縣丁二千。 開州開遠縣丁二千。  鹽州丁五百。穆州丁五百。 賀州丁五百。 定州定東縣丁一千六百。   保州來遠縣丁二千。辰州丁四千。 盧州丁五百。 鐵州丁二千。   興州丁三百。湯州丁七百。崇州丁一千。(遼史第三十六卷志第六兵衛志下五京鄉丁)

그의 아버지 곡임금(帝嚳) 고신씨(高辛氏)는 아들 둘이 있어 큰 아들(伯)은 알백(閼伯)이라 하고,막내(季)는 실심(實沈)이라 했다. “알백(閼伯)”은 상(商)나라 시조인 설(契)이고, “실심(實沈)”은 요임금(帝堯)이다. 사기42권 정세가 제12(史記卷四十二‧鄭世家第十二)의 간공(簡公) 25년조는 다음과 같이 설(契)은 곧 알백(阏伯)이고, 실심(實沈)은 요임금(帝堯)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고신씨(高辛氏) 아들 둘이 있어 큰 아들(伯)은 알백(閼伯)이라 하고,막내(季)는 실심(實沈)이라 했는데,큰 숲(曠林)에 살면서(居),서로 같이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었다. 날마다 창을 들고(日尋干戈),서로 싸웠다. 나중에 임금(帝)이 이를 보다 못하여,알백(閼伯)을 상구(商丘)에 옮겨,싯(辰: 동: 東) 쪽을 다스리게(主)했다. 상나라 사람들(商人)이 이를 이었다(是因). 따라서 시(辰: 신=동: 東)를 상의 별(商星)이라 한다. 실심(實沈)은 대하(大夏)에 옮겨(遷),삼(參)을 다스리게(主)했다. 당인(唐人)은 이를 이었다. 이리하여 하(夏)와 상(商)나라를 따라 섬기었다.”고 한다.

(簡公)二十五年,鄭使子產於晉,問平公疾。平公曰:「卜而曰實沉、臺駘為祟,史官莫知,敢問?」對曰:「高辛氏有二子,長曰閼伯,季曰實沉,居曠林,索隱曰賈逵曰:「曠,大也。」不相能也,日操干戈以相征伐。后帝弗臧,賈逵曰:「后帝,堯也。臧,善也。」遷閼伯于商丘,主辰,賈逵曰:「商丘在漳南。」杜預曰:「商丘,宋地。」服虔曰:「辰,大火,主祀也。」商人是因,故辰為商星。服虔曰:「商人,契之先,湯之始祖相土封閼伯之故地,因其故國而代之。」遷實沉于大夏,主參,服虔曰:「大夏在汾澮之閒,主祀參星。」杜預曰「大夏,今晉陽縣。」唐人是因,服事夏、商,(史記卷四十二‧鄭世家第十二)
여기서 알백(阏伯)”은 설(契)이고, 제곡(帝喾) 고신씨(高辛氏)의 아들(子)이며, 또 상(商)나라의 시조(始祖)이다.
契,即阏伯,帝喾高辛氏之子,商之始祖。(火神阏伯), 尚起兴 尚骥 저 http://yanhuang.sqnc.edu.cn/h123.html

대하(大夏)에 옮겨(遷),삼(參)을 다스린 실심(實沈)이 요임금(帝堯)임은 “당인(唐人)은 이를 이었다.” 고 한 말을 보아 알 수있다. 여기서 “당인(唐人)은 요당씨(陶唐氏)의 후손(胤) 유루(劉累)를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괴(賈逵)는 사기42권 정세가 제12(史記卷四十二‧鄭世家第十二)의 주에서 :「당인(唐人)은 요당씨(陶唐氏)의 맞이후손(胤)을 유루(劉累)를 말하는데 하(夏)나라의 공갑(孔甲)을 섬겨 대하(大夏)에 봉을 받아 실심(實沈)의 나라(國)를 이었고, 그 자손(子孫)이 하(夏)와 상(商)을 섬겼다.」고 한다.

賈逵曰:「唐人謂陶唐氏之胤劉累事夏孔甲,封於大夏,因實沈之國,子孫服事夏、商也。」(史記卷四十二‧鄭世家第十二)

후손이 조상의 땅을 계승하는 원칙이 이미 확립된 그 당시를 고려해 보면, 실심(實沈)이 요임금(帝堯)임을 알 수있다. 따라서 실심(實沈)은 “알백(閼伯)”, 즉 설(契)의 이복동생인 방훈(放 勛), 곧 요임금(帝堯)이다.

일반적으로 지나의 한어(漢語)라고 잘못 알려진 “백(伯)”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은 고대의 “맏이”라는 조선어(朝鮮語)이다.이는 왕(王) 또는 통치자라는 말로 발전했다. 그러면 알백(閼伯)이라는 그의 이름에서 진짜이름인 “알(閼)”이 남는데, 이것은 지금은 한(汉)대의 흉노(匈奴) 선우(单于), 즉 투르크어로 탕리쿠티(单于:Tangri-quti)의 정처(正妻)를 부르는 칭호(称号)인 “연씨(閼氏: yānshì)”와 같이 “얀”이라는 소리를 내고, 또 동사로써 막다(阻塞: block) 또는 명사로 문짝(门扇; 闸板)을 뜻할 때는 “어(閼: è)” 라는 소리를 내지만, 그 옛소리는 “알”이었다. 예컨데,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전의 사실을 기록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조선어(朝鮮語)의 알(卵)과 관계된 고사에서 알천(閼川)과 알영(閼英)의 지명을 기록하고 있다:
“알(閼)”의 소리와 관련하여, 같은 기록에 또 다른 기록이 하나 있다.
“5년 봄 정월, 용이 알영(閼英) 우물(井)에 나타나서 오른 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데려다 길렀다. 우물 이름으로 그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덕스러운 용모를 갖추었다. 시조가 이를 듣고 그녀를 왕비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행실이 어질고 내조가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성인이라고 불렀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 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 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內輔, 時人謂之二聖. (三國史記卷第一,新羅本紀第一,始祖<朴赫居世>居西干)
이 것은 한어(漢語)가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북적(北狄)의 한 갈래들인 돌궐어(突厥語)나, 몽골어(蒙古語)도 아니다. 동이(東夷)족의 한 갈래인 선비족(鮮卑)의 선비어(鮮卑語)나, 만주족의 만어(滿語)도 물론 아니다. 이는 순수한 조선어(朝鮮語)이다.

殷 契 , 〔 一 〕 母 曰 簡 狄 , 〔 二 〕 有 娀 氏 之 女 , 〔 三 〕 為 帝 嚳 次 妃 。 三 人 行 浴 , 見 玄 鳥 墮 其 卵 , 簡 狄 取 吞 之 , 因 孕 生 契 。 〔 四 〕 契 長 而 佐 禹 治 水 有 功 。 帝 舜 乃 命 契 曰 : 「 百 姓 不 親 , 五 品 不 訓 , 汝 為 司 徒 而 敬 敷 五 教 , 五 教 在 寬 。 」 封 于 商 , 〔 五 〕 賜 姓 子氏 。 〔 六 〕 契 興 於 唐 、 虞 、 大 禹 之 際 , 功 業 著 於 百 姓 , 百 姓 以 平 。(史 記 卷 三, 殷 本 紀 第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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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나라는 고대 조선민족(朝鮮民族)이 중원(中原)에 들어가 세운 나라>

이상의 역사 사실들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원의 상(商)나라에서 도망와서, 고대 “조선(朝鮮)”의 왕이 된 “기자(箕子)”는 상(商)나라 왕족이다.

둘째, 상(商)나라는 오늘날 중원의 하남(河南)에 있는 언사시(偃師市), 정주시(鄭州市), 안양시(安陽市), 신양시(信陽市), 온현(溫縣), 휘현(輝縣), 신정시(新鄭市) 등에 위치했다가 주(周)나라에 망했다.

그러나, 세째로, “상(商)나라의 왕족 기자(箕子)”의 선조는 탕(汤)임금이고, 탕(汤)임금의 14대 선조는 “현조(玄鳥)”, 곧 “현이(玄夷)의 아들로 나서 상(商)나라 시조가 된 “현왕(玄王)” 설(契) 곧 “알백(閼伯)”이다.


네째, “상(商)나라 시조 “현왕(玄王)” 설(契)은 고대 조선민족(朝鮮民族) 부족인 동이(東夷)의 구이(九夷)가운데 “북이(北 夷)” 곧 곧 오늘날 압록강부근에서 살던 “현이(玄夷)”에서 나온 사람이다.

다섯째, 설(契)은 “북이(北夷)” 곧 “현이(玄夷)”의 땅인 “자몽의 들(紫蒙之野)”에서 났는데, 이는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224km서북쪽에 자리한, 오늘날 조양(朝陽)에서 동쪽에 있던 오늘날 조선족이 으로 살고 있는 심양시(沈陽市)를 중심으로 한 요양부(遼陽府)의 부근에 있던 자몽성(紫蒙城)이다. 이는 오늘날 심양시 남쪽의 요양시(遼陽市) 부근으로 보이는데, 이는 바로 위쪽의 심양 지역을 비롯하여 압록강 바로 건너 단동시(丹東市)로부터 100km 정도의 거리로 고대로부터 조선민족의 요람이었다.

여섯째, “상(商)나라 시조 “현왕(玄 王)” 설(契)”의 이름 “알백(閼伯)”은 “자백(子伯)”과도 같으며, 그 진짜이름인 “알(閼)”은 조선어(朝鮮語)로 “알(卵)”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고대조선민족(古代朝鮮民族)이며, 고대중국인(古代中國人)이 결코 아나다.

일곱째, 위의 사실들에 따라서 상(商)-은(殷)나라는 고대 조선민족(朝鮮民族)의 동이(東夷)의 구이(九夷) 가운데 “현이(玄夷)” 곧 “현조(玄鳥)”의 아들로 나서 상(商)나라 시조가 된 “현왕(玄 王)” 설(契)의 14대 후손 탕(汤)임금 때에 이이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상(商)나라의 왕족”이었던 기자(箕子)는 그의 왕족 친척들과 함께, 고대 조선민족(朝鮮民族)이다. 그들은 일부 북적(유송씨)와 혼인동맹을 맺고 “북이(北 夷)”지방에서 살다가, 마침내 고대 한족(漢族)이 살던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상(商)-은(殷)나라를 짓고, 그들을 다스리며 600여년을 살았다.


그러다가, 그 것이 고대 조선민족인 동이족(東夷族)의 또다른 일파가 서방으로 가서 만든 주(周)나라에게 은허(墟殷) 에서 망하자, 상(商)나라의 왕족인 기자(箕子)는 주(周)나라를 피해 다시금 산동 및 하북을 거쳐 동북으로 도망쳐 그의 조상이 난 곳인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의 고대 조선(朝鮮)으로 돌아왔다.


그 뒤 그는 그 조상 및 자기 자신과 한 민족인 고대 “조선(朝鮮)”의 왕이 되었다. 결국 기자(箕子)는 자신의 모국 또는 조상의 땅과 민족인 조선(朝鮮)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결코 “고대중국인(古代中國人)” 곧 이른바 “한족(漢族)”이 아니고, “고대조선민족(古代朝鮮民族)”이었던 것이었다.

이상을 볼 때, “고대중국인(古代中國人)”인 기자(箕子)가 고대조선古代朝鮮왕조의 왕이되었다” 또는 “기자조선(箕子朝鲜)은 곧 은상(殷商)의 후예(遗裔: 유예)가 조선반도(朝鲜半岛)위에 지은 지방정권(地方政权)으로 주(周)나라에 신속했다” 는 논리는 그 최초의 가정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참된 역사적 사실은 거꾸로 뒤집어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중국(中國)의 고대 왕조” 또는 “고대중국인 왕조”라고 잘못 알고 있는 “상(商)나라”야 말로 사실은 “고대조선민족(古代朝鮮民族)”이 필자가 말하는 “역사적 중국(中國)”이 존재했던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옛 땅에서 “고대중국인(古代中國人)”, 또는 “고대한족(古代漢族)”을 통치한 나라이다.

기자(箕子)는 이 곳에서 고대의 조선(朝鮮)으로 돌아온 사람이며, 따라서 그의 기자조선(箕子朝鮮)은 당연히 고대조선민족(古代朝鮮民族)의 역사이다. 나아가, “고대중국(古代中國)의 왕조” 또는 “고대중국인(古代中國人) 왕조” 라고 잘못 알고 있는 “상(商)나라”는 조선민족(古代朝鮮民族)의 역사이자 고지이다. (이 논제를 증명하는 필자의 논의의 좀더 자세한 논거들은 “조선민족의 상나라”를 보라.)

이와는 달리 한국 및 조선인민공화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북공정학자들의 이러한 거짓 논리에 대응하여 역사적 조선민족의 왕조들이 민족적으로 원래 조선민족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보다는 기껏해야 겨우 “중국 상나라의 기자가 조선에 온 적이 없었고, 그가 왔다는 기록은 모화사상에 따른 후대의 조작이다” 는 정도의 어슬픈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 조선민족학자들의 대응은 동북공정학자들의 논리에 불철저하게 대응한 옹색한 논리이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역사기록들이 보여주는 사실을 그들나름대로 피동적으로 다시금 왜곡하는 것에 불과했다. 말하자면, 역사왜곡에 대응한다는 미명하에 마지못해 하는 또하나의 역사왜곡에 불과한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필자의 임무와 논리는 기자에 관한 역사의 수많은 자료에 충실하면서도, 역사왜곡에 대응하여 나름대로 또다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을 피하고, 나아가 새로운 역사의 증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 이상 발췌.
Mimesis (2011-10-02 19:25:58)  

참고삼을 관련글들인 것 같아 '저를 위해' 적어놓습니다.

1) 중국역사가 아닌 기자
- target=_blank>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281727295&code=210000

2) 주무왕과 기자후 관련
- target=_blank>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3&sn=off&ss=on&sc=on&keyword=상나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215

3) 기자와 고죽국의 위치
- target=_blank>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3&sn=off&ss=on&sc=on&keyword=상나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1006

4) 고조선(하가점 하층)도기와 상나라 도기
- target=_blank>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3&sn=off&ss=on&sc=on&keyword=상나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0899

5) 은나라(상나라)의 군자들
- target=_blank>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3211645015&code=210000

6) 기자와 혼범주구, 그리고 동래설 기록의 부재
-http://www.coo2.net/bbs/zboard.php?id=con_4&page=1&sn1=&divpage=3&sn=off&ss=on&sc=on&keyword=상나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993

 

....................

백랑수 (2011-10-02 22:44:32)  

Mimesis 님께.
지금으로부터 약 3600 여년 전 고대 조선 민족이 세운 정권이 상이라는 주장보다는 차라리 지금으로부터 불과 약 1000 여년 전

<요사/지리지>의 동경요양부 위치가 어딘지를 규명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을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요사/지리지> 동경도에 기록된 자묭현이 지금의 요양 부근이라고요?
자몽의 들에 살았다는 북이.현이가 지금의 압록강 서북쪽 560 리 떨어진 요양부근에 살았다고요?
님의 주장인지 글이 길어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겠는데,
님 글에 언급된 지리 비정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나인들이 주장하는 동북공정에 철저하게 대응해야하는 것은 북이의 상 정권 수립 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기록이 넘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고 곡해하고 있는 자몽현 등의 지명 비정입니다.

님이 언급한 요국의 동경도 요양부는 지금의 요양이 아니라 훨씬 서쪽에 있는 지금의 폭하 변에 있는 평천입니다.

중경 대정부 치소가 대정현이고 백(제)의 고지이며 지금의 란하 서쪽에 있고 산해관 옛 이름인 임유관을 통령합니다.

즉 지금의 흥륭.준화.천서.풍윤 지역입니다. 그런데 어찌 동경이 지금의 란하를 넘어서고 대릉하도 넘고 하물며 지금의

요하도 넘어서서 지금의 요양이 될 수 있나요?

기자나 상 정권을 세운 조선민족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히 천진스러울 정도로 <요사/지리지>의 요양부나 그 속현인 자몽현이 지금의 요양이라는 그 주장이 동북공정에 철저하게 부합하는 한국인들의 자폭적 수준인 Self 역사 왜곡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Mimesis (2011-10-02 23:08:22)  
백랑수님께.
위의 글의 가치는 현재 중공이 주장하는 동복공정 논리를 현재 그들의 사서들 그대로 예시로써
반박할 수 있다는데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미 알려진 것들, 그리고 기타 여러 연구들이 뒷받침되는 영역안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 일련의 족보추적같은 것은 지역 비정에 상관없이 충분히 가치있는 일로 생각합니다.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인가]라는 답답한 책도 버젓이 나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위치나 지역비정에 대한 연구를 폄하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위 예시한 글의 지역비정에 저 역시 백프로 동감하지도 않습니다만, 공부가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복공정을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지역비정만 쫓는 것은
필요한 일이긴 하나 '적절한 절대의 방법'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륙의 역사를 왜 잃었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남의 문화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위치나 지역과 지명의 변천은 지속적으로 찾아야할 연구과제이고
한편으로 중공이 주장하는 주장에 어떤 헛점이 있는지 밝히고,
고대 한족이라 주장하는 나라들이 현재 기록에도 어떻게 나타나있는 지를 비교해
잘못을 찾아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대의 넓은 지배영역을 찾아내도 그들의 조상이 한족이라는 왜곡에 동조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위의 글은 종족의 계통과 기원 중심으로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카오스 (2011-10-03 13:40:00)  
열띤 논란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결국에는 관련될 수 밖에 없으므로...한마디만 합니다...

고죽국(古竹國) = 고대국(古大國)
====> 하,은,주 이전 상고대시기(古)의 동아시아에 유일하게 존재(大)하였었던 나라(國)
====> 조(朝)라는 국호를 가진 나라(國)
====> 후대 역사서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표현된 나라

....로 보면 풀리게 됩니다.....당연히 이 (고)조선(古朝鮮)은 현,하북성의 동쪽으로는 결코 올 수 없는 것이지요...
Mimesis (2011-10-03 15:43:33)  
카오스님께/
어찌보면 크게 다른 이야기로 생각하진 않고요...
그리고...
고죽국=고대국-조-조선 이런 관련 내용을 알려면
어떤 것을 봐야 하는지 일러주시면 좋겠습니다.
관련 사서라든지 발행된 책도 좋고 아니면 site 어디를 보라든지 하는...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백랑수 (2011-10-03 20:19:26)  
Mimesis 님께
동북공정에 철저하게 대응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상을 세운 민족이 동이족이며 조선족이라 주장하는 것에 딴지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북이.현이와 자몽의 들을 제대로 해석하고 지명 비정이 옮바를 때, 결국 상을 세운 조선족 주장 등의 강력한 뒷 배경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동북공정의 핵심 목표는 탐원공정 내용이고 그를 완성하는 실체적인 작업이 바로 지역 확보이며, 이를 지명 비정함에 있어 동쪽으로 이동시키고 또한 고착시킴으로써 해소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1980 년 대에 유국상이 발굴.발표한 요하문명 지역을 멀뚱멀뚱거리며 동호의 지역이라느니, 진개가 침입한 조선 서쪽 2000 리 지역이라느니 하며 그대로 인정하고서는 지나의 사서 기록을 읽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서/지리지> 유주 요동군에 주석된 1250 리 대요수가,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조남부.해룡부.창도부.봉천부를 흐르는 요하가, 어찌 지금의 요하라 인정하는 것입니까?

지금의 요하 중 서랍목륜하인 서요하는 <후한서/동이열전/부여>부터 약수로 기록. 낙양으로부터 동북쪽으로 5000 리 떨어져 있는 부여 북쪽에 있다고 기록된 후, <삼국지/동이전> 약수, <위서/열전/물길>에서 그 지류들인 難河.太魯水.速末水가 기록되었고, <구당서/열전/실위>에서는 那河.忽汗河.黑水 등으로 기록되어 요.명 시기를 지나 청 시기에는 <청사고/지리지>흑룡강성에 기록된 흑룡강입니다. 이 흑룡강은 1911 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국이 멸망한 후 왜인들이 만주국을 세우면서 서요하로 바꾼 것입니다.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요하는 <한서/지리지> 기록처럼 오로지 서남류하며 대략 1300 여리에 불과한 하수입니다. 그런 연유로 서긍이 요하가 미덥지 못하여 물러나 압록강을 지켰다고 하였고 원만경이 천남건에게 압록의 천험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

지나인들이 탐내는 요하문명의 핵심지가 어딥니까?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로 불리는 출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곳이 지금의 대릉하 상류 건평.능원지역입니다. 바로 님께서 말한 현.북이의 자몽의 들입니다.

또한 <한서/지리지> 유주 낙랑군 속현인 패수현과 탄열현이 있던 곳이며 고구려.요.震.고려를 지나 후조선 중기까지도 열수와 패수는 압록수로 불리웠습니다. 즉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와 대릉하를 압록수 1.2 로 구분하여 파악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단군조선이나 그 이전 선조들의 근거지가 바로 지금의 조양.평천.능원.진황도 지역이였기 때문에 인근 고죽국을 병탄하고 더 서쪽 깊숙히 진출하여 주 선왕 때 韓이나 追.貊, 기원전 7 세기에는 회.대 지방에서 서언왕, 춘추시기의 晉 북쪽에서 호맥이 기록된 것입니다.

대형 적석총.옥.신전.제단.흉상 등의 출토물과 비파형동검과 명도전 출토물 분포지가 겹치는 지금의 란하 동쪽 지역인 폭하와 청룡하.대릉하 상류 지역이 현토.낙랑군 지역이며 이는 <한서/지리지>부터 <청사고/지리지>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고증을 등한시 하여 빼앗긴다면 아무리 조선족이 상국을 세웠다고 강조하고 반복하여 주장하더라도 허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곳에 단군조선의 태백산과 열수.장당경과 백악산아사달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압록수가 있었고, 대조영의 진국 상경.중경.서경이 있는 곳이며,고려 시기 거란족 요국과 대치한 압록수도 지금의 한반도 경계 압록수가 아니라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청룡하이며, 그곳 북쪽에 윤관이 찾은 구성이 있었으며 지금의 요하 하류 북쪽에 백산 즉 백두산이 있었고 선춘령과 공험진이 그곳에 있었으며, 후조선의 빈기 지역 역시 지금의 요하 하류 북쪽 부신 북쪽 지역입니다.

지나 문명과 확연히 차이나는 발해 북안 지역 요하문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또한 지금의 압록강과 요양 사이 지역가 자몽의 들이라면 과연 지금의 발해 북안 지역을 건너뛰어 지나 중심 지역으로 진출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카오스 (2011-10-03 21:36:04)  

Mimesis님> 음....

카오스가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지도 벌써 몇년이 된 것으로 여겨지는데,...'정색해서 반응을 보이신 분'은 Mimesis님이 처음이군요...대부분이 아마 ‘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황당한 이야기 정도로 취급하는 것’ 같더군요...어쨌든,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그 대답은 좀 애매할 수 밖에 없겠군요...

굳이 답변을 드린다면,...위와 유사한 일련의 카오스의 주장들은....어느 구체적인 사서를 보아서는 쉽게 답을 찾을 수 없고 또 아직 이런 내용을 취급하는 싸이트도 없으므로 답을 바로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즉, 아직 ‘오직 카오스 혼자만 주장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답을 찾는 하나의 방향을 말씀드린다면,...

(1) 제일 먼저, 어떠한 경로나 연구성과를 통하든지 간에... ‘우리역사가 왜곡되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역사왜곡’이 있었다는 사실의 확인]
(2) 그 다음에, ‘역사왜곡의 방법론’들을 찾아내시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셔야 할 것입니다.[‘역사왜곡’ 방법들의 확인]
(3) 마지막으로, 나름대로 ‘왜곡되지 않은 역사[實史]’를 재구성해 보아서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실제사건들과의 모순이 있는지를 검증해야 할 것입니다.[실사역사의 재구성]

....이러한 수순으로 역사연구를 진행하여서 대체적으로나마 ‘(3)항이 증명됨’을 보게되면,...(2)항에서 찾아낸 ‘방법론’들이 정당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즉, 위와같이 ‘고죽국=고대국-조-조선’으로 추론하는 카오스의 견해들은...이 (1),(2),(3)의 과정을 거친 뒤에 비로소 그 방향을 잡게 된 결과물이므로 카오스가 (3)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는 이 (2)의 방법론들을 미리 공개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즉, (1)은 일단 그대로 인정받는다하더라도 (3)을 누구나 수긍할 수 있고 또 명확하게 알기쉬운 내용으로 공개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2)를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해 보아야 아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위와 같이 ‘고죽국=고대국-조-조선’으로 추론된 것은 카오스가 찾아낸 ‘역사왜곡의 방법론’ 중 대표적인 방법인

[音變 혹은 意變에 의한 文字의 變造]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만 (3)을 알지 못하고 또 (2)에 대한 연구가 없으신 분들에게는 이게 무슨소리인지? 도데체 감이 잡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1)이 확신이 되셨다면,...다음에 (2)를 몇가지로 가정해서라도 (3)을 완성해 보시면서 계속해서 (2)와 (3)을 반복해 보시면 자연히 (2)가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활용되는 재료들은 중국의 25사와 한국과 일본의 모든 역사서 그리고 현재 공개된 모든 싸이트들의 글들이 모두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때때로 전혀 황당하고 엉터리같은 글들이라도 힌트를 주는 경우가 있으므로 소흘히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 :
(1)에 대한 확신이 있으시다면,...../ Mimesis님이 역사왜곡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한다면,...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역사왜곡’을 하시겠습니까?/.......
-- 만일 (1)에 대한 확신이 없으시다면, 오히려 혼란만 가중될 것이므로 아예 (2)와 (3)을 시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와 (3)을 시도하신다면, ‘역사왜곡을 한 사람들’은 당대의 최고 석학들이었으며, 생사여탈의 힘을 가진 최고권력자들이었음을 결코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답이 좀 애매하고 또 엉뚱하지요?...카오스도 ‘(3)이 완성되어야 (2)를 밝힐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지적 감사했습니다...

Mimesis (2011-10-03 22:07:25)  
백랑수님께/
하나하나 짚어서 알려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부분들 유념해서 듣고 읽고 하겠습니다.

카오스님께/
저는 쫓아가는 입장이라 알려주셔도 퍼뜨리거나 할만한 위치도 아닌 것 같은데요^^...
아뭏든 언젠가는 알려주신다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저는 여러 의견들을 좇아가는 수준과 입장인데 상나라와 관련하여 동명님께 의견나누다가
본론이 아닌 지역비정이 더 커져 버렸네요.
사실 예시로 든 글 쓰신 분이 워낙 만주어와 몽골어, 중국어에 익숙하신 분이라 지역에 관련된 내용이
이상한 부분이 있어도 제가 수정해서 올릴 수는 없었습니다.
어쨋든 전 중원왕조를 다 파헤쳐놔서 ...잘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 전에 몇가지라도 의견 수렴이 되서 수정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제게 참 쉬운 일은 아닌 듯 합니다.
그래도... 모자라도 제시를 해봐야 얻어가는 것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