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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漢武帝)가 민중(閩中)의 공지화(空地化)를 명령

monocrop 2011. 9. 30. 01:31

좌계 (2008-10-18 22:11:25, Hit : 1831, Vote : 20

 (계속)


 

한무제(漢武帝)가 민중(閩中)의 공지화(空地化)를 명령하다.!

 

 

[원문(原文)]
 餘善刻「武帝」璽自立,詐其民,為妄言。天子遣橫海將軍韓說出句章,浮海從東方往;樓船將軍楊僕出武林;中尉王溫舒出梅嶺;越侯為戈船、下瀨將軍,出若邪、白沙。元封元年冬,鹹入東越。

[해석(解釋)옮김]
  여선이 ‘무제(武帝)’라고 새긴 옥새로 백성들을 속이고 망언을 하였다.
이에 천자는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에게 구장(句章)으로가 바다를 거쳐 동쪽으로부터 나아가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에게 무림(武林)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는 매령으로 진격하고, 월후(越侯) 두사람을 각각 과선장군(戈船將軍)와 하뢰장군(下瀨將軍)으로 삼아 약야(若邪)와 백사(白沙)로 나아가게 하였다.  원봉(元封) 원년 - 이는 기원전 110년임 - 겨울에 이들은 한꺼번에 동월(東越)의 경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 주의(注意) 말씀-9 (*)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런 여선(餘善)이 군부대 이름은 탄한(呑漢)- “한(漢)나라를 삼켜버리겠다.”라는 것을 붙이고서 “한무제(漢武帝)가 옥새(玉璽)로써 나에게 한무제(漢武帝)를 협박하여 대한국(大漢國)과의 약속한 것 - 즉 ”민중(閩中)지역을 비워주겠다.“는 것을 이행못하게 하도록 하는 뭇 신하(臣下)와 장군(將軍)들을 토벌(討伐)하라.”고 밀명(密命)을 내렸다.“는 식으로 선전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도저히 사마천(司馬遷)이 쓸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이는 실제로 쓰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합니다. 신의(信義)없는 황제(皇帝)로 낙인을 찍는 것이니깐 말입니다.)

이렇게 되니깐, 가뜩이나 흉노(匈奴)의 관습의 냄새만 맡아도 ‘넌더리’가 나는 한무제(漢武帝)가 “이 여선(餘善)이라는 놈!! 흉노보다 더한 흉노!! 같은 놈!!”하면서 한무제(漢武帝)도 약이 오를 대로 오른 것이지요.

[*]‘백송 선생님’의 일깨움에 의해서 수정(修正)한 곳[*]

① 그래서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에게 구장(句章)으로 나아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구장(句章)을 정범진(丁範鎭) 선생은 주(註)하기를 ‘절강성(浙江省) 여도현(餘桃縣)’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못찾았는데, 이 여도현(餘桃縣)은 여요현(余姚縣)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부탁의 말씀 = 혹 여도현(餘桃縣)이 따로 있음을 발견한 동학(同學)들께서는 ‘댓글’로 꼭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오늘날 절강성 지도에 보면 주산군도(舟山群島)의 중심인 주산도(舟山島) 쪽으로 흐르는 강(江)이 있고, 여기에 진해(鎭海)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강(江)은 영파(寧波)에서 두 강이 합류(合流)하는데 남쪽에서 동북류(東北流)로 흐르는 강이 용강(甬江: 융장강)이고, 동남류(東南流)하는 강이 여요강(餘姚江: 위야오강)입니다.
그런데 이 여요강(餘姚江) 위로 올라가면 여요현(余姚縣)이 나옵니다.
따라서 여요현(余姚縣)을 장악한다는 것은 주산군도(舟山群島)에서 해전(海戰)을 벌리는 것을 막기 위한 포석(布石)으로 볼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 주산도(舟山島)를 통제할 수 있는 <구장(句章)=여도현(餘桃縣)=여요현(余姚縣)>을 볼수 있는 절강성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julgang.JPG


② 그리고 ‘분노(忿怒)한’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에게는 무림(武林)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고 되어있는데, 이는 ‘백송 선생님’께서 ‘고금 지명 대조표’에 의하면, 오늘날 항주시(杭州市)의 옛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즉 “(무림(武林)은) 항주(杭州) 서(西)쪽의 영은산(灵隱山), 천축산(天竺山) 등 여러 산을 총칭(總稱)하는데, 또 이를 호림(虎林)라 칭한다. 이로 말미암아 무림(武林)이라는 말은 항주(杭州)의 별칭이다.(②杭州西灵隐、天竺诸山总称,又称虎林。因而又 以武林为杭州别称) 라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참고의 말씀 - ‘백송 선생님’은 댓글을 통해서 무림(武林)이란 지명이 두 곳이 있다고 일깨움을 주셨읍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무림(武林)은 오늘날 강서성(江西省)의 여간현(余干縣) 북쪽의 무릉산(武陵山)입니다.  그런데,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선풍포(旋風砲)를 최소 5문(門) 설치한 ’오늘날 항공모함‘과 비슷한 누선(樓船) 함대들을 거느리고, 공격하는 부대였기 때문에, 이 누선(樓船)-함대(艦隊)가 주로 공격하는 것은 항구(港口)를 지닌 수도(首都)가 적절합니다.  따라서 동월열전(東越列傳)에 언급된 무림(武林)은 강서성(江西省) 여간현(余干縣) 무릉산(武陵山)이라기 보다도 오늘날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가 분명해 보입니다. (*)

③ 또한 원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전략적으로 선점(先占)했고, 또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이 탄한장군(呑漢將軍)을 보내 휩쓸었던 매령(梅嶺) 부근에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를 보내게 됩니다.

④ 그리고 월후(越侯) 두 사람인 - 이는 정범진(丁範鎭)선생은 귀순(歸順)한 남월(南越) 출신의 <엄(嚴)>과 <갑(甲)>이란 두 사람에게는 각기 약야(若邪)와 백사(白沙)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야(若邪)는 정범진(丁範鎭) 선생은 주(註)에서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의 산(山) 이름이라고 했는데, 이들이 수군(水軍)인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뢰장군(下瀨將軍)으로 각기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서 찾아보았더니 약야계(若邪溪)의 다른 이름이 완사계(浣紗溪)이고, 이는 미인(美人)으로 유명한 서시(西施)가 건넌 강이라는 것입니다. (참고 : 若邪溪又名浣纱溪,传为西施浣纱处)

그런데, 오늘날 ‘아래’의 절강성 지도에서보면, 전당강(錢塘江)이 흘러오는 항주시(杭州市)가 있고 이 항주만(杭州灣)를 향하여 북류(北流)하는 포양강(浦陽江)이란 강이 있습니다.
그 우편에 바로 소흥현(紹興縣)이 있는데, 아뭏든 이 포양강(浦陽江) 중간 쯤에 저기(渚曁)라는 도시가 있고 그 위에 “서시(西施)가 살던 옛 동네”라는 뜻으로 서시고리(西施故里)가 있읍니다.
따라서 소흥(紹興)쪽에서 이 포양강(浦陽江)쪽으로 흐르는 어떤 작은 강이 바로 약야계(若邪溪)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아뭏든 이 약야계(若邪溪)는 월후(越侯)가운데 과선장군(戈船將軍)인 <엄(嚴)>이 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선(戈船)는 배의 이물(船首)에 철각(鐵角:Ram)을 들이받아서 적선(敵船)을 침몰시키는 군선(軍船)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는 무림(武林)인 ‘항주시’에 누선(樓船)-함대를 공격하러 가는 동월(東越)의 군선(軍船)이 포양강(浦陽江)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저지(沮止)시키기 위해서 이곳에 과선(戈船)부대를 배치시켰다고 볼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 부탁의 말씀: 좌계의 추측이 틀렸으면 동학(同學)들께서는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

(*) 포양강(浦陽江)으로 흐르는 약야계(若邪溪)를 추측할 수 있는 절강성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julgang.JPG

그런데, 하뢰장군(下瀨將軍) <갑(甲)>이 진출(進出)한 곳은 백사(白沙)라는 것입니다.
하뢰(下瀨)의 의미는 하(下)가 “하선(下船)하다.”는 뜻이고 뢰(瀨)가 ‘여울’을 뜻하기 때문에 결국 ‘여울에서 하선(下船)하다’는 의미가 있고, 이는 < (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한계점에서 하선(下船)하는 상륙(上陸)부대>를 뜻합니다.

그런데, ‘댓글’을 통해 ‘백송 선생님’이 일깨워준 지리(地理) 정보 - <파양군(鄱阳郡) 소개자료>에 의하면, “백사(白沙)는 여간현(余干縣)에 있다.”는 것입니다.  

(*) 참고 :

그런데 이 여간현(余干縣)은 아래 지도에 보다시피 강서성(江西省)의 파양호(鄱陽湖) 동편에 있는 도시입니다.  즉 파양호(鄱陽湖)의 서(西)쪽에 남창시(南昌市)가 있다면, 그 동(東)쪽으로 같은 위도 높이에 이 여간현(余干縣)이 것입니다. (맞은 편이라는 뜻임)

그런데, 이 고대의 백사(白沙)인 여간현(余干縣) 남(南) 쪽으로는 절강성(浙江省) 쪽으로 갈수 있는 신강(信江)이 길게 좌우(左右)로 흐르고 있음은 물론, 여간현(余干縣) 북(北)쪽으로는 낙안강(樂安江)과 창강(昌江)이 서류(西流)해서 파양호(鄱陽湖)에 들어가는데, 이를 회통시키는 강(江)이 - 이 강(江)의 이름이 바로 여수(余水)입니다. - 남(南)의 여간현(余干縣) 동(東)쪽을 통해서 북(北)쪽의 파양(波陽)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백사(白沙) 즉 오늘날 여간현(余干縣)은 매우 문자 그대로 민중(閩中)지역으로 갈수 있는 중요한 모든 강(江)을 네트위킹(networking)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백사(白沙)=여간현(余干縣)>이 세 강(江) - 신강(信江), 낙안강(樂安江), 창강(昌江)을 남북(南北)으로 꿰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강서성(江西省)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gangseo.JPG

따라서 하뢰장군(下瀨將軍) <갑(甲)>이 이 백사(白沙)지역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결국 낙안강(樂安江) 상류 쪽에 있는 무원(婺源)과 신강(信江) 상류(上流) 쪽에 있는 상전(上錢)이란 두 개의 통로를 통해서 오늘날 절강성(浙江省)지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 <신강(信江)의 상류(上流)의 상전(上錢)>과 <낙안강(樂安江) 상류(上流)의 무원(婺源)>이 절강성(浙江省)으로 급습할수 지름길임을 보여주는 절강성(浙江省)지도
(절강성 서(西)쪽 경계를 넘어 상전(上錢)과 무원(婺源)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parkchina.com.ne.kr/map/julgang.JPG

이런 ‘현실지리’을 감안하면, 우리는 이 백사(白沙)지역에서 절강성 지역으로 넘어오는 하뢰장군(下瀨將軍) <갑(甲)>의 ‘공격로(攻擊路)’가 오늘날 상전(上錢)과 또 무원(婺源)임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실은 “일직이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이 백사(白沙)를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미리 선점(先占)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백사(白沙)지역을 점령하였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한(漢)나라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었겠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무이산맥(武夷山脈)과 선하령(仙霞岭)의 천험(天險)을 넘어서서 이미 낙안강(樂安江)과 신강(新江)의 보급로를 확보한 상태에서 백사(白沙)를 여선(餘善)은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낙안강(樂安江)과 신강(信江)이 천험(天險)의 무이산맥(武夷山脈)-선하령(仙霞岭)을 넘어 서류(西流)하여 파양호(鄱陽湖)로 들어감을 볼수 있는 중국전도
http://www.coo2.net/files/lim030203-6chi.gif

아무튼, 이 백사(白沙)지역을 소개한 ‘백송 선생님’의 ‘댓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 백송 선생님의 백사(白沙)지역 관련 ‘댓글’ 옮김 (*)

또 鄱阳郡 소개자료에는 강서성 여간현이 과거의 민월지역이라고 하고요.
元鼎五年(前112)秋 南越丞相吕嘉杀汉使节叛汉。汉遣楼船将军杨仆,分兵经余汗县白沙(白沙湖在康山北部,今沦于鄱阳湖)、武林(今余干县石口乡武林塘一带),南下灭南越王国。

(*) 주의(注意)말씀-1 (*)
해석(解釋)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정(元鼎)5년에(서기전 112년) 가을 남월(南越)의 승상(丞相) 여가(呂嘉)가 한(漢)나라 사절(使節) -이는 한(漢)나라의 ‘공식적인 문서(文書)’를 전달하는 사절단(使節團)을 뜻하는데, 안국소계(安國少季) 일당임 -을 죽이고, 한(漢)에 반란을 했기 때문에, 한(漢)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냈는데, 이 양복(楊僕)은 일부 군사를 내어서 여간현(余干縣) 백사(白沙)와 (백사호(白沙湖)는 강산(康山)의 북부(北部)에 있다. 오늘날 파양호(鄱陽湖)로 물이 빠지는 곳이다.) 무림(武林: 오늘날 여간현(余干縣) 석구향(石口鄕) 무림당(武林塘) 일대(一帶)를 경략(經略)했다.  (그런 연후에) 남하(南下)해서 남월왕국을 멸(滅)하였다.”

그런데, 동월열전(東越列傳) 전체를 읽어보면, 무림(武林)은 오늘날 절강성 항주시(杭州市)로 볼때에 더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이 배신(背信)한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이 급습을 대비해서 이 백사(白沙)지역을 선점(先占)해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선(餘善)이 이 지역을 탈취(奪取)한 사실은 위 문장을 통해서 은폐(隱蔽)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 주의(注意)말씀-1. 마침 (*)

  六年(前111)秋 东越余善叛汉,命驺力为吞汉将军,率军顺余水北上,驻余汗县境的武林、白沙,攻杀汉军三校尉。

(*) 주의(注意) 말씀 - 2 (*)

위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년(기원전 111) 가을, 동월(東越)의 여선(餘善)은 한(漢)나라에 반역하였다. 추력(騶力)을 탄한장군(呑漢將軍)으로 임명하여 군사(軍事)를 이끌고 여수(余水)에 따라 북상(北上)하였다.
여한현(余汗縣) 경계에 있는 무림(武林)과 백사(白沙)에서 한군(漢軍)의 3 교위(校尉)를 공격하여 죽였다.

그런데, 솔군순여수북상(率軍順余水北上)의 여수(余水)는 오늘날 신강(信江)과 낙안강(樂安江)을 남북(南北)으로 꿰고 있는 강 이름인 듯 합니다.  따라서 “이 여수(余水)를 따라서 북상(北上)하였다.”는 것은 결국 여수(余水) 자체가 남북(南北)으로 나있기 때문에, 영어의 에프(F)자 모양으로 즉 오늘날 여간현(余干縣)에서 ① 일차적으로 우회전해서 동(東)쪽으로 낙안강(樂安江)을 타고 상류(上流)인 무원(婺源)을 통해서 절강성(浙江省)으로 넘어가는 통로까지를 확보해서 ‘보급선(補給線)’과 연결되게 하고, ② 이 보급을 받아서 여수(余水)의 북쪽에 있는 파양(波陽)을 향하여 서류(西流)해오는 강(江) - 즉 창강(昌江)을 타고 올라가서 오늘날의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과 부량(浮梁)을 거쳐서 계속 동북방(東北方)으로 올라가 이윽고 안휘성(安徽省) 기문(祁門)쪽으로 나아갔음을 뜻합니다.

(*) 여선(餘善)이 에프(F)자 모양의 여수(余水)를 타고, 낙안강(樂安江), 창강(昌江)을 타고 북상(北上)한 지역을 추측할 수 있는 강서성(江西省)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gangseo.JPG

이는 당시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이 “나는 한무제(漢武帝)가 ‘민중(閩中)지역을 돌려주겠다.’는 본래의 뜻을 가로막는 한(漢)나라 간신(奸臣)들을 토벌(討伐)하라는 밀지(密旨)을 받았다.”는 공세(攻勢)가 얼마큼 위력(威力)을 떨쳤는가를 알려주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 주의(注意) 말씀 - 2. 마침(*)

  元封元年(前110) 汉楼船将军杨仆击败东越兵,经白沙、武林,溯余水而上,经分水关(今属铅山县)入闽。平定叛军后,大量徙移闽越人民,经余水北上定居江淮。
" http://baike.baidu.com/view/437681.htm "

(*) 주의(注意)말씀 - 3 (*)
이를 해석(解釋)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봉(元封)원년 - 기원전 110년 - 한(漢)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동월(東越)의 군대를 공격하여 패배하였는데, 백사(白沙: 이는 여간현(余干縣))과 무림(武林)을 경과(經過)해서 여수(余水)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는 남행(南行)한다는 뜻임 : 좌계 주(註)) 분수관(分水關)을 (오늘날 연산현(鉛山縣)에 속(屬)한다.) 지나서 민중(閩中)으로 들어갔다. 대량의 민월(閩越)의 사람들이  여수(余水)를 거쳐서 북상(北上)하면서 이민(移民)하여 강회(江淮)에서 거주(居住)를 정(定)했다.

그런데,  민중(閩中)지역으로 들어온 것은 양복(楊僕)이 아니라, 바로 월후(越侯)인 하뢰장군(下瀨將軍) 갑(甲)인데,  현지의 ‘향토사학’의 소개로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여간현(余干縣)동쪽에 남북으로 나 있는 여수(余水)라는 강은 마치 한글의 티긑(ㅌ)처럼 생겼는데, 위(북(北))에서 부터 아래(남(南))으로 말하면, 창강(昌江), 낙안강(樂安江), 신강(信江)인데,  이 신강(信江)의 상류에 오늘날 연산현(鉛山縣)이 있는데, 아마도 이 연산현(鉛山縣)과 상전(上錢) ‘사이’에 고대에는 분수관(分水關)이라는 관문(關門)이 있었던 듯 합니다.  결국 이 월후(越侯) 갑(甲)은 이 신강(信江)을 타고 오늘날 연산현(鉛山縣)-분수관(分水關)-상전(上錢)을 통해서 민중(閩中)지역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 있습니다.

(*) 하뢰장군(下瀨將軍)이 민중(閩中)으로 들어가는 길인 <백사(白沙)=여수(余水)> -신강(信江)-연산현(鉛山縣)-분수관(分水關)-상전(上錢)을 살펴볼 수 있는 강서성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gangseo.JPG

아무튼 일종의 ‘향토사학’이라고 할수 있는 ‘파양군 소개 자료’에는 “강회(江淮)지역으로 대규모 이민(移民)도 역시 하뢰장군(下瀨將軍)이 취한 진격로(進擊路)를 역(逆)으로 해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좌계가 볼때에는 이 길이 아니라, 그냥 선박을 타고 장강(長江)을 통해서 들어갔다고 여겨집니다.
(*) 주의(注意)말씀 - 3. 마침 (*)


- 각설(却說) 결국 지금까지 동월열전(東越列傳)의 기록, 또 백송 선생께서 ‘일깨워준’ 자료를 바탕으로 하면,  동월(東越)에 대한 분진합격(分進合擊)의 전략은 다음과 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① 첫째,  선풍포(旋風砲)를 지닌 막강한 군선(軍船) 누선(樓船)을 지휘하는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절강성(浙江省)의 주요 강(江)이 집결하는 항주시(杭州市)인 무림(武林)에 모든 수군(水軍) 기지(基地)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를 책임 집중 공격한다.
② 둘째, 이 무림(武林)을 구원하기 위해 복건성(福建省)쪽에서 오는 군선(軍船)을 막기 위해서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은 주산도(舟山島) 쪽으로 흐르는 여요강(餘姚江)의 여요현(余姚縣)을 중심으로 해서 군선(軍船)을 잠복(潛伏) 대기시키며,
③ 셋째, 이 무림(武林)을 구원하기 위한 쾌속선(快速船)들이 절강성 지역 내부(內部)에서 내려올 경우를 대비해서 월후(越侯) 과선장군(戈船將軍)은 포양강(浦陽江)지류인 약야계(若邪溪)를 중심으로 과선(戈船)을 포진(布陣)하고 기다린다.

④ 넷째, 육상(陸上)으로는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가 매령(梅嶺)인 - 오늘날 강서성(江西省)의 우도(于都)에서 공수(貢水)를 타고 마치 영어의 유(U)자처럼 올라가서 오늘날 서금(瑞金)을 통해 장정(長汀)을 넘어서 <복건성(福建省) 지역>으로 대군(大軍)을 끌고 밀어닥친다.

이 장정(長汀)은 이곳에서 동(東)쪽으로 가면 민강(閩江)으로 합류하는 사계(沙溪)가 있고, 또 남행(南行)하면 정강(汀江)과 그 하류인 한강(韓江)으로 갈수 있는 요충지(要衝地)인 것을 고려하면, 주력부대가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요충지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 중위(中尉) 왕온서(王溫舒)가 최종 확보해야하는 장정(長汀)의 전략적 가치를 알수 있는 복건성(福建省)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bokgun.JPG


⑤ 다섯째, 이를 보조(補助)하는 육군으로는 월후(越侯) 하뢰장군(下瀨將軍) 갑(甲)이 오늘날 강서성 여간현(余干縣)에서 니은(ㄴ)자 모양으로 흐르는 신강(信江)을 타고 와서 연산현(鉛山縣)-분수관(分水關)-상전(上錢)을 통해서 <절강성(浙江省)지역>으로  군사를 이끌고 간다


따라서 이 작전의 핵삼은 수군(水軍)은 그 본진(本陣)인 무림(武林)인 항주시(杭州市)를 공격해서 선취(先取)하고, 이를 ‘구원하려는 군선(軍船)’을 2중의 매복부대로써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군(陸軍)은 하뢰장군(下瀨將軍)은 결국 신강(信江)을 타고 연산현(鉛山縣)-분수관(分水關)-상전(上錢)을 통해서 옥산(玉山: 강서성(江西省))을 거쳐서 상산(常山: 절강성(浙江省)) -구주시(衢州市: 절강성(浙江省))을 통해서 오늘날 부춘강(富春江)을 통해 전당강(錢塘江)으로 해서 무림(武林)을 훑어내려 온다는 전략입니다.

(*) 하뢰장군(下瀨將軍)의 경로(徑路)를 짐작할수 있는 절강성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julgang.JPG

요컨데 이 전략은 수군(水軍)의 발(足)을 묶고 육군(陸軍)으로써 출기불의(出其不意) - “예상치 못한 길로 공격한다.” 하되 천험(天險)의 요충지(要衝地)를 선점(先占)한다는 전략인 것니다.
좋은 작전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 주의(注意) 말씀-9 마침. (*)

[*]‘백송 선생님’의 일깨움에 의해서 수정(修正)한 곳. 마침[*]


[원문(原文)]
東越素發兵距險,使徇北將軍守武林,敗樓船軍數校尉,殺長吏。樓船將軍率錢唐轅終古斬徇北將軍,為禦兒侯。自兵未往。

[해석(解釋)옮김]
  동월(東越)은 처음부터 군대를 출동시켜 험고한 곳을 방비하고, 순북장군(徇北將軍)에게는 무림(武林)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누선장군의 교위 몇명을 격파하고 장리(長吏)들을 베었다.  누선장군의 졸개인 전당(錢塘)의 원종고(轅終考)가 순북장군을 베어 죽이고 어아후(禦兒侯)가 되었다.  한(漢)나라의 군대가 미처 무림(武林)에 당도하기도 전이었다.

(*) 주의(注意) 말씀 -10 (*)
그런데 이런 군사작전(軍事作戰)의 핵심지는 무림(武林)- 즉 오늘날 항주시(杭州市)였는데, 이를 동월국(東越國)의 여선(餘善)은 순북장군에게 이를 수호(守護)하게 하였는데, 한(漢)의 회계태수(會稽太守) 밑에 있는 군대 가운데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올때 배속(配屬)되기로 되어있는 원종고(轅終考)라는 사람이 전당강(錢塘江)을 타고내려와 이 순북장군을 베어죽였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원정군(遠征軍)이 도착하기도 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동월열전(東越列傳)에서 여선(餘善)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한무제(漢武帝)의 원정군(遠征軍)을 막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읽으면 정말 아리송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 주의(注意) 말씀 -10 마침.(*)

[원문(原文)]
 故越衍侯吳陽前在漢,漢使歸諭餘善,餘善弗聽。及橫海將軍先至,越衍侯吳陽以其邑七百人反,攻越軍於漢陽。從建成侯敖,與其率,從繇王居股謀曰:「餘善首惡,劫守吾屬。今漢兵至,眾彊,計殺餘善,自歸諸將,儻幸得脫。」乃遂俱殺餘善,以其眾降橫海將軍,

[해석(解釋) 옮김]

  월나라의 연후(衍侯)였던 오양(吳陽)은 이전에 한(漢)나라에 있었다. 그래서 한(漢)나라는 그에게 돌아가 여선(餘善)을 타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여선(餘善)은 듣지 않았다.  월나라의 연후(衍侯) 오양(吳陽)은 횡해장군(橫海將軍)이 일단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 자기 고을의 700명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한양(漢陽)에서 월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또 건성후(建成侯) 오(敖)와 그 무리들은 함께 요왕(搖王) 거고(居股)에게 가서 모의하였다.  “여선(餘善)은 반역의 우두머리로 우리를 협박하였습니다. 이제 한(漢)나라 군대가 도착하였는데, 그 수가 많고 강대합니다.  여선(餘善)을 죽이고 한(漢)나라의 장수들에게 제 발로 투항한다면 용케 죽음은 면할 것입니다.” 드디어 여선(餘善)을 죽이고는 군사를 이끌고 횡해장군(橫海將軍)에게 투항하였다.

(*) 주의(注意)말씀 - 11 (*)

일단 이 글을 읽으면 가장 놀라운 것이 연후(衍侯) 오양이 자신의 고을에서 700명을 데리고 한양(漢陽)에서 공격해서 결과적으로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을 처단(處斷)했다는 것인데, “뮈?? 700명으로 여선(餘善)을 잡아죽여??”하는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번연히 적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양(吳陽)이 공격을 한 한양(漢陽)의 위치에 대해서 정범진(丁範鎭) 선생은 주(註)하기를 오늘날 복건성(福建省)의 건포성(建捕城)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원래 포성(捕城)인 것을 정범진(丁範鎭)선생의 착각이거나 출판(出版)과정 중에 건(建)이란 글자 하나 더 들어간 오식(誤植)인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인터넷(internet)에 찾아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글이 있기 때문입니다.

在福建省的北部、浦城縣的縣境上, 發見了「漢陽城」的遺址。報導說,這城址是漢武帝元鼎六年(公元前一百一十一年),東越王余善背叛了漢王朝時所築建的城堡,

즉 오늘날의 포성(捕城)인데 이것이 고대의 한양성(漢陽城)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성(捕城)은 복건성(福建省) 북부에서 남류(南流)하는 남포계(南捕溪)란 강(江)의 북쪽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포성(捕城)의 <포(捕)>란 글자 자체가 “체포(逮捕)하다.”, “사로잡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원래 한양성(漢陽城)이었는데, 이곳에서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을 연후(衍侯) 오양(吳陽)이 체포(逮捕)한 것을 기념해서 이름이 포성(捕城)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아무튼 이 포성(捕城)은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을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이 동시에  지휘하기 매우 좋은 ‘위치’임에는 틀림없습니다.

(*) 복건성(福建省) 북쪽의 남포계(南捕溪) 상류에 있는 포성(捕城)을 볼수 있는 지도
http://parkchina.com.ne.kr/map/bokgun.JPG

그런데, 700명으로써 과연 전쟁을 총지휘하는 여선(餘善)을 사로잡을 수 있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700명이 오늘날 말로 하자면 헌병(憲兵)일 경우 가능한 것이지요.

문제는 사마천(司馬遷)이 오양(吳陽)이 700명으로 동월왕(東越王) 여선(餘善)을 체포-사형(死刑)에 처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을 붙여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 재인용(再引用) (*)
또 건성후(建成侯) 오(敖)와 그 무리들은 함께 요왕(搖王) 거고(居股)에게 가서 모의하였다.  “여선(餘善)은 반역의 우두머리로 우리를 협박하였습니다. 이제 한(漢)나라 군대가 도착하였는데, 그 수가 많고 강대합니다.  여선(餘善)을 죽이고 한(漢)나라의 장수들에게 제 발로 투항한다면 용케 죽음은 면할 것입니다.”
(*) 재인용(再引用) 마침 (*)


- 즉 “여선(餘善)을 죽이고” 뒤에 붙인 - “한(漢)나라의 장수들에게 제 발로 투항한다면 용케 죽음은 면할 것입니다.”는 곡필(曲筆)하기 위해서 붙인 말에 불과하고, 그 앞의 말인
<從繇王居股謀曰:「餘善首惡,劫守吾屬。今漢兵至,眾彊,計殺餘善>말 가운데서도
<今漢兵至,眾彊> 역시 “이제 한(漢)나라 군대가 도착하였는데, 그 수가 많고 강대합니다.” 역시 곡필(曲筆)하기 위해서 붙인 말에 불과합니다.

진짜 사실은 <從繇王居股謀曰:「餘善首惡,劫守吾屬。計殺餘善>인 것입니다.
즉 이들은 바로 금관(金官) 즉 법관(法官)으로써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건성후(建成侯) 오(敖)와 그 무리들은 함께 요왕(搖王) 거고(居股)에게 가서 모의하였다.  “여선(餘善)은 반역의 우두머리로 우리를 협박하였습니다. -- ”여선(餘善)을 죽이자.“>라고 말입니다.

건성후(建成侯) 오(敖)의 무리들은 바로 금관(金官)이고, 요왕(搖王) 거고(居股)는 ‘화백회의 의장(議長)인 단군(檀君)으로 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래 단군(檀君)은 소도(蘇塗)를 타고 다른 지역에 가서도 비상계엄(非常戒嚴)을 걸수가 있는데 그것은 두가지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천독(天毒)들의 <신성(神聖)한 권리>를 짓밟는 행위를 할 때 영역을 초월해서 비상계엄(非常戒嚴)을 걸어서 군사지휘권이 있는 왕(王)을 대동(帶同)하고 올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개로왕(蓋鹵王)이 도미부인(都彌夫人) 부부의 ‘신성한 권리’를 짓밟아서 장수왕(長壽王)께 비상계엄을 걸어서 결과적으로 일종의 인민재판을 받아서 사형(死刑)당하신 것을 삼국사기(三國史記)로 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신성(神聖)한 기다림’을 짓밟았을 때에는 역시 비상계엄을 걸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즉 삼한(三韓)사람들이 민중(閩中)지역을 ‘한고제(漢高帝)와 해모수(解慕潄) 성제(聖帝)와의 굳은 약속 민중(閩中)지역과 홍택호(洪澤湖)-고우호(高郵湖) 지역 - 합쳐서 “강회이남(江淮以南)을 비워주겠다.”는 약조(約條)에 대한 ’신성한 기다림‘을 지니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선(餘善)은 함부로 “이런 신성한 약조(約條)를 위반케 하는 것은 한무제(漢武帝)의 뜻이 아니라, 한무제(漢武帝)를 둘러싼 간신(奸臣)들이 강요해서 이행 안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한무제(漢武帝)의 밀지(密旨)를 받아서 토벌하는 것이다.”는 등의 말을 해서 “한무제(漢武帝)가 자발적(自發的) 의사(意思)로써 비워주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는 우리들의 신성한 기다림을 짓밟은 것이다.”라고 판결하였고,  이에 의해서 헌병(憲兵) 700여명이 가서 여선(餘善)을 체포해서 사형(死刑)시켰던 것이지요.

만약 이 체포(逮捕)를 거부하면, 수많은 ‘벅수군’의 위수사항(衛戍事項)에 저촉이 되어서 여선(餘善)을 따르는 병사들은 전멸(全滅)을 면(免)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세(細細)한 사정(事情)을 사마천(司馬遷)으로써는 도저히 쓸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
쓰는 즉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함이 너무나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마천(司馬遷)은 한무제(漢武帝)의 자존심(自尊心)이 안상하는 식으로 동월열전(東越列傳)을 쓴다음, 이를 읽는 독자(讀者)가 “뭐?? 이것 말이되나?” 하고 세심(細心)하게 자기자신이 곡필(曲筆)한 부분을 들어내도록 한 것입니다.

(*) 주의(注意)말씀 - 11 마침 (*)

[원문(原文)]
故封繇王居股為東成侯,萬戶;封建成侯敖為開陵侯;封越衍侯吳陽為北石侯;封橫海將軍說為案道侯;封橫海校尉福為繚嫈侯。福者,成陽共王子,故為海常侯,坐法失侯。舊從軍無功,以宗室故侯。諸將皆無成功,莫封。東越將多軍,漢兵至,棄其軍降,封為無錫侯。

[해석(解釋)옮김]
그 때문에 요왕 거고는 동성후(東成侯)에 봉해져 만호후(萬戶侯)가 되었고, 건성후 오는 개릉후(開陵侯)에 봉해졌으며, 월나라의 연후 오양은 북석후(北石侯)에 봉해졌다.  또 횡해장군 한열은 안도후(案道侯)에 봉해졌고, 횡해 교위 유복(劉福)은 요앵후(繚嫈侯)에 봉해졌다.  유복은 성양(成陽)의 공왕(共王)의 아들로, 해상후(海常侯)에 봉해졌다가 법에 저촉되어 후의 지위를 잃은 적이 있었다.  일찍이 종군하여 공이 없었으나, 종실(宗室)이기 때문에 후의 작위를 얻었다.
그밖의 장수들은 이룬 공이 없었기 때문에, 봉해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동월의 장수 다군(多軍)은 한 나라의 군사가 진격해오자 자기의 군대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다군(多軍)은 무석후(無錫侯)에 봉해졌다.

[원문(原文)]
於是天子曰東越狹多阻,閩越悍,數反覆,詔軍吏皆將其民徙處江淮間。東越地遂虛。

[해석(解釋)옮김]
  이에 천자는 “동월(東越)은 좁고 험한 곳이 많고, 민월(閩越)은 사람들이 사나워 다스리기 어렵고 언제 반역이 있을는지 모른다.”라고 하고, 군리(軍吏)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강회(江淮) 일대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동월(東越)의 땅은 마침내 무인지경이 되었다.

(*) 주의(注意) 말씀 - 12 (*)
일이 이렇게 되자, 한무제(漢武帝)는 정말 ‘넌더리’가 났던 것입니다.
원래 제국주의(帝國主義)가 힘을 쓰려면 이 힘에 부응하는 측(側)이 내전(內戰)을 해주어야하는데, 이 민월(閩越) 지역의 사람들은 부응(符應)해 들어온 사람인 여선(餘善)이란 인간이라는 작자(作者)가 돌연히 자기자신과 제권(帝權)을 다투는 경쟁자 비슷하게 생각을 하면서 “원래 한무제(漢武帝)는 민중(閩中) 지역을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 밑의 신하들이 방해를 하기 때문에 내가 이를 밀지(密旨)를 받아 토벌하노라!”라고 나오지를 않나 -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안돌려주는 것이 원래 나 한무제(漢武帝)의 뜻이다.”라고 공표(公表)하기에도 참으로 쪽 팔리는 일이고, 더욱이 “이런 신성(神聖)한 기다림을 여선(餘善)이 망쳐버렸기 때문에 사형(死刑)에 처한다.”는 판결을 자체적으로 내린 이 이상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아니야. 난 안돌려줘!” 하고 공표(公表)하기도 그야말로 천자(天子)의 체면이 말이 아닌 이상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더욱더 곤란한 것은 대한국(大漢國)의 그 막강한 군사력(軍事力)이 전부 ‘벅수군’으로 화(化)해서 비록 자의적(恣意的)인 공격권은 없지만, 한무제(漢武帝)가 계속 이 민중(閩中)지역을 지배하려고 하는 순간에 계속 위수사항(衛戍事項)을 건드려서 전투를 하는 늪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가 제국(帝國)을 운영하는 천자(天子)의 군대가 ”이거 위수사항(衛戍事項)에 저촉이 되나?“하고 일일히 신경쓰면서 이 지역을 계속 통치를 할려니 더욱더 넌더리가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무제(漢武帝)는 “민월(閩越)은 사람들이 사나워 다스리기 어렵고 언제 반역이 있을는지 모른다.” 는 참으로 이상한 변명(辨明)을 하고는 회계태수(會稽太守) 아래 있었던 주둔군(駐屯軍)과 모든 관리들을 총 철퇴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Mimesis 님이 올린 “민중(閩中)지역의 공지화(空地化)된 부분이 어찌 비워지게
되었는가?“하는 그 실제 사정이었던 것입니다.

(*) Mimesis 님이 올린 민예허왕국의 공지화(空地化)된 지역의 지도를 볼 수 있는 곳.
http://blog.daum.net/innomy/13002096 (*)
정확히 오늘날의 무이산맥(武夷山脈)으로 둘러싸인 민중(閩中)지역인 것입니다.

이 미스테리(mystery)는 이곳 동월(東越)이 바로 전(前)-가락국의 영향권 다시 말하면 대한국(大漢國)의 영향력 권(圈)에 있었고, 순방체제(淳庬體制)가 지닌 신비한 전략이 저절로 펼쳐지는 그런 지역으로 보지 않는한 전혀 설명이 안되는 미스테리(mystery)인 것이지요.




Mimesis (2008-10-19 05:12:52)  
아시아 질서의 핵심 원리가 내재되고 관여된 일이었군요.
지금까지 이르게 되니 대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겠습니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여러번 다시 읽어야 다 들어올 것 같네요.

단지 몇 줄의 설명으로 단서를 얻어보고자 했던 저로서는 상상조차 불가했던 내용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통찰이라고 생각되고 좌계님의 각고의 노력들이 느껴집니다.
설명 정말 감사드립니다.
백송 (2008-10-19 17:18:36)  
좌계님 글 잘 읽었습니다.
무림은 고금지명 대조표에 따르면 강서성 여간현 북쪽, 또하나는 항주의 별칭이라고 나옵니다.
武林——①即今江西余干北的武陵山。②杭州西灵隐、天竺诸山总称,又称虎林。因而又
  以武林为杭州别称

또 鄱阳郡 소개자료에는 강서성 여간현이 과거의 민월지역이라고 하고요.
元鼎五年(前112)秋 南越丞相吕嘉杀汉使节叛汉。汉遣楼船将军杨仆,分兵经余汗县白沙(白沙湖在康山北部,今沦于鄱阳湖)、武林(今余干县石口乡武林塘一带),南下灭南越王国。
  六年(前111)秋 东越余善叛汉,命驺力为吞汉将军,率军顺余水北上,驻余汗县境的武林、白沙,攻杀汉军三校尉。
  元封元年(前110) 汉楼船将军杨仆击败东越兵,经白沙、武林,溯余水而上,经分水关(今属铅山县)入闽。平定叛军后,大量徙移闽越人民,经余水北上定居江淮。
" http://baike.baidu.com/view/437681.htm "
좌계 (2008-10-20 10:12:46)  
/ Mimesis 님.
동월열전(東越列傳)은 대역사가인 ‘토인비’마져 혀를 내두르며 ‘참 이상하다.’라고 생각한 묘한 기록입니다.
본시 님께서 이 민월(閩越) 지역의 공지화(空地化) 사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지니고 계셨다는 자체가 사마천의 곡필(曲筆) 안 쪽의 (inner-side)의 ‘이야기’를 납득하실 수 있는 눈(眼)을 지니고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단(講壇) 사학의 최대 문제점은 사서(史書)의 원문(原文)을 읽고 생기는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유난히 복잡한 글 숙독(熟讀)해 주신다니 고마 와 같습니다.

/백송 님.
참으로 고마 와 같습니다.
무림(武林)이 “항주(杭州)일 것 같다.”는 좌계의 생각에 ‘확실한 근거’를 올려주셨습니다.
또한 좌계가 감히 고증(考證)할 엄두를 못낸 백사(白沙)를 ‘강서성 여간현’이라고 관련근거를 찾아서 일깨움을 주셨습니다.
덕분(德分)에 한무제(漢武帝)가 동월(東越)을 공격하는 전략에서 ‘빠진 부분’이 보강되어 동월열전에 대한 해석이 보다 ‘현실성’을 띠게 되었읍니다.
좌계는 이 항주(杭州)가 ‘신라의 수도(首都)인 경주’로 믿고 있는데, ‘박혁거세’ 이전(以前)에 우리 조상들이 ‘신라라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해온 것’이 ‘고금 지명 대조표’를 통해 더욱더 분명해졌기에 매우 기쁩니다.

두 지명(地名) 고증(考證)을 본문(本文)에 반영하여 ‘가르침’을 옮겨놓도록 하겠습니다.
좌계 (2008-10-20 14:17:01)  
/알림 :
백송 님의 백사(白沙) 지역에 대한 ‘일깨움’ 때문에 본문(本文)을 수정(修正)하였습니다.
이미 읽으신 분은 [*]‘백송 선생님’의 일깨움에 의해서 수정(修正)한 곳[*] 부터 [*] ~ 동문(同文)~ 마침 {*]까지 읽으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