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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로 윤색된 허황옥 설화

monocrop 2011. 9. 29. 16:33

수로왕비 허왕후는 과연 인도인일까

[오마이뉴스 김대갑 기자] 허황옥. 가락국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 또한 김해 허씨의 시조. 한국 문화사에서 허황옥만큼 신비로운 인물은 없다. 그리고 그녀만큼 후세 사가들에 의해 수많은 논쟁과 논란을 일으킨 인물 또한 없다. 한국 고대사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인 허왕후의 혼인 설화. 이 설화는 후대에 상당한 불교적 윤색을 거쳤다는 것이 거의 통설로 굳어지고 있다.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 간택을 건의하자, 수로왕은 자신이 천손강림하였으니 배필도 하늘이 정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곧 이어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허왕후가 탄 배가 서남쪽에서 나타났다. 망산도(진해 용원으로 추정)에 정박한 허황옥은 수로왕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이 아유타국이며, 상제의 명에 따라 그대와 혼인하러 왔다고 수줍게 고백한다. 그 모습에 수로왕 또한 기뻐하였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사람은 근동에 차려진 신방에서 달콤한 신혼의 첫 밤을 보내게 되었다.

수로왕비릉 정문
ⓒ2006 김대갑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수만리 바닷길을 건너왔다는 신비의 왕녀. 그녀가 타고 온 배에는 한사잡물을 비롯한 온갖 진기한 보물이 가득했다. 가장 신령스러운 것은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다. 갈색 바탕에 붉은 반점이 감도는 돌탑은 가락국 사람들에게 왕녀에 대한 경외심을 품게 만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오다니. 로맨스도 이런 로맨스가 없다. 이런 걸 두고 운명적인 사랑,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해야 하나. 그 후 둘 사이에는 자식이 10명 생겼는데, 그중 첫째는 왕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는 허왕후의 성을 따라서 김해 허씨라는 씨족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따라 불가에 출가하여 일곱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가야와 관련된 신화는 크게 보아 3가지다. 김수로왕의 개국신화와 허왕후 도래신화, 그리고 고령 대가야
이진아시왕의 개국신화. 이중에서 허왕후 도래신화는 독자적인 형성과정을 거쳤다기보다는 김수로왕의 개국신화와 밀접히 연관된, 일종의 보조적인 신화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수로왕의 개국신화도 허왕후의 도래신화와 맞물리면서 비로소 완결되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수로왕비릉 전경
ⓒ2006 김대갑
그런데 가야의 신화가 실린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대에 편찬되었으며, 이때 불교가 가장 성행했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허왕후 도래 신화는 철저한 불교적 윤색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된다. 이 불교적 윤색과정의 결과, 허황옥이 불교의 나라 인도에서 왔다는 것으로 암시되고 있으며 그녀가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이 등장하는 것이다. 탑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사리와 관계된, 철저히 불교적인 유물이지 않는가.

재미있는 것은 이 설화의 기본 줄거리가 신라
문무왕 대에 만들어졌을 거라는 추론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문무왕 자신이 옛 가야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추정도 존재한다. 그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이며,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다. 그래서 문무왕은 옛 가야 왕족의 외손이라는 자각 하에 김수로왕과 수로왕비에 대한 제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며, 그에 관련된 이야기도 신비하면서도 장엄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 파사석탑각
ⓒ2006 김대갑
허왕후 도래 신화는 일종의 혼인 설화이다. 그리고 이 혼인설화는 양성간의 혼인을 통해 집단과 집단 간의 정치적 결합 혹은 연합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분명히 ‘허황옥족’과 ‘김수로왕족’은 상호 필요에 의해 정치적 혼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여러 물품을 참고하건대, 허황옥족은 일종의 중계무역을 담당하던 종족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가장 궁금하면서 중요한 것은 허황옥이 과연 어느 지역 출신이냐는 것이다.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일단 대표적인 것이 인도설인데, 그의 근거로서 많이 등장하는 것이 파사석탑과 쌍어문 양식이다. 이 설의 핵심은 ‘아유타국’이 인도
갠지스강 상류에 있던 불교 왕조인 아요디아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아요디아에서 불교를 전래하였다는 것이다. 수로왕릉 정문에 걸린 쌍어문 양식과 태양 장식은 현재 아요디아 주 정부의 공식 문장이라는 점도 주요한 근거라고 한다.

▲ 천오백년의 신비, 파사석탑의 붉은 빛
ⓒ2006 김대갑
그러나 이 설은 현재까지 김해지역에서 인도와 관련된 유물이나 유적지가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결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수로왕릉의 쌍어문 양식도 조선 시대에 와서 새겨진 것이며, 파사석탑의 돌도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 남해지역에서도 생산된다고 한다. 오히려 김해지역에서는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기에 허황옥도 중국계라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중국계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수로왕비릉 비문에 새겨진 ‘보주태후’라는 문구이다. ‘보주’라는 지명은 ‘사천성 안악현’을 말하는데, 허황옥 일행은 바로 이곳 출신이라는 것이다.

중국계 설은 허왕후가 배에 싣고 왔다는 중국계 물건과 그녀의 신하들이 쓰는 관직명이 중국식 명칭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회현리 패총에서 출토된 중국식 화폐 ‘화천’과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세발 달린 청동솥, 그리고 중국계 거울 등도 허왕후가 중국계라는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연대적으로도 가락국이 건국된 42년을 전후해서 요동 지역에 한사군이 존재했으며, 가락국이 이들과 직간접으로 교류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 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가는 길
ⓒ2006 김대갑
그 외 아요디아 왕조의 식민지였던 태국 메남강의 아유티야국 출신이라설, 일본 열도에서 돌아온 가락국 왕녀설, 낙랑에서 온 상인설 등이 있으나 현재로선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 그래서 허황옥의 출신지에 대한 시비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신비의 여인, 허황옥.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역사학자들과 문인, 예술가들의 두뇌를 채찍질하고 있는 미지의 여인. 허황옥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가야사 전체의 미스터리만큼이나 온갖 상상과 허구로 가득차 있다. 중요한 것은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가 한국 문화사의 단면을 풍부하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화와 설화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상상력을 제공하는 샘의 원천인 것이다.

/김대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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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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