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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1400년전 수세식 뒷간-일학자 "한·일 고대사 통틀어 유일한 유적"

monocrop 2009. 4. 14. 01:17

“1400년전 백제인, 수세식 변소 썼다”

한겨레 | 입력 2009.04.13 19:40 | 수정 2009.04.14 00:50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전라




[한겨레] 익산 왕궁리 대형 뒷간터 석축 수로 등 분석


일본학자 "한·일 고대사 통틀어 유일한 유적"

시대와 공간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의 배설 욕구는 변치 않는 법이다. 1400여년전 이땅에서 살았던 선조들은 어떤 방식으로 대소변이 마려운 '생리 현상'을 해결했을까.

흥미로운 단서가 있다. 지난 2004년 6~7세기 백제 궁궐터로 유력한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처음 발굴한 대형 뒷간터다. < 한겨레 > 보도로 처음 알려진 이 유적은 왕궁리 궁터 서북쪽 공방터 부근에서 발견된 깊이 3.4~1.5m정도의 대형 분뇨 구덩이 세 개가 핵심. 동서 방향으로 잇따라 열을 지어 판 구덩이들은 각기 한쪽 끝에 꼬리 모양의 작은 물길을 틔워 옆 석축 수로로 오수를 흘려보내는 얼개다. 구덩이 안에서 밑닦이용 나무 막대(주목)와 나무 기둥, 기와 조각 등이 수십여점 나왔고, 바닥 흙을 파서 분석해보니 기생충알들도 다량 검출됐다. 백제인의 분뇨로 가득했던 국내 최고의 뒷간임이 입증된 셈이다. 국내 화장실 유적 조사는 1990년대 이후 광주 신창동 선사 유적과 경주 신라 왕경 유적 등에서 변소터 혹은 인분으로 추정되는 유적, 유물들이 보고된 것이 단초였다. 하지만 이들 유적은 명확한 실증 분석 자료를 남기지 못해, 왕궁리 유적은 지금껏 국내에서 공인된 유일한 고대의 뒷간 유적으로서 국내 '화장실 고고학' 의 모태로 자리잡았다.

연구소쪽은 왕궁리 변소터가 구덩이 위에 나무 판재로 배변 발판을 대고 그 위에 풀과 기와로 지붕을 올린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후대 고고학자들의 짓궂은 물음은 계속된다. 정말 구덩이 위에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봤을까? 궁터의 주인이었을 귀족들도 하층민들과 얼굴을 마주보면서 볼일을 봤을까? 실제로 2001년 이 유적에서는 좌변식 변기 비슷한 휴대용 변기가 출토된 적도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9, 10일 열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왕궁리 발굴 20주년 국제학술대회(원광대)에서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화장실 유적을 처음 비교 검토한 일본 학자의 가설이 나와 눈길을 모았다. '일본 고대 도성의 분뇨처리 구덩이론'을 발표한 일본 나라 문화재연구소의 이노우에 가즈히토 부장은 "왕궁리 변소 유적은 지금껏 발굴된 고대 한일 유적 가운데 사실상 유일한 수세식 변소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비슷한 7~8세기 고대 일본 왕경인 헤이조쿄, 후지와라쿄의 경우 발굴된 서너곳의 변소터들은 볼일 보는 곳이 아니라 휴대용 변기통의 분뇨를 버린 투기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왕궁리 변소 유적의 경우 연속된 분뇨 구덩이가 물길로 인근 수로와 이어져 있고, 위에 건물을 올린 흔적이 뚜렷해 쪼그린 채 볼 일을 보고 오수는 밖으로 흘리는 기능을 했다는 견해다. 다만 위치가 궁터 중심부에서 떨어진, 공방 근처여서 하층 장인들이 변소를 쓰고, 왕족들은 매우틀(요강)로 배변한 뒤 내용물을 담아 이 변소에 버렸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노우에는 "일본의 경우 고대 궁궐 안팎 도로변 하천이나 인근에 변소터를 썼으리라 추정해왔지만, 궁성 규모에 비해 숫자가 너무 적고, 하천보다 유적이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물을 끌어들이는 수세식 구조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전용호 부여연구소 학예사도 "왕궁리 변소터를 신분별로 다르게 썼다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다"며 "인분 구덩이에서 수로로 틔운 물길의 경사도가 낮은 점으로 볼 때 오수는 흘려보냈지만, 인분 등 내용물은 퍼서 치우는 반수세식 얼개였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고대인의 배설물과 배설 공간을 탐구해 당시 생활 문화의 실상을 파악하는 화장실 고고학은 서구와 일본에서는 1970년대 이래 보편화한 연구조사 방법론이다. 노르웨이의 바이킹 유적, 인도의 모헨조다로 고대 유적, 일본 규슈 하카타의 외국 사신 숙소터인 고로칸 유적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일본 학계의 경우 고대 궁성 화장실에 쌓인 분뇨의 악취 때문에 수도를 이리저리 옮길 수 밖에 없었다는 '분뇨 정치사'까지 거론될 정도로 화장실 고고학이 활성화되어 있기도 하다. 아직 연구는 걸음마 수준이지만, 국내에서도 화장실 유적은 추가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유적 발굴 과정에서 화장실 용도를 고려하지 않거나 발굴갱 구덩이의 유기물 분석에 주목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의 관점만 바꾼다면, 다른 신라, 고려, 조선시대 유적에서도 화장실 유구가 잇따라 나올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2006년 경기도 양주의 조선초 거찰인 회암사터 발굴 현장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조선시대 해우소(변소) 유적이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적도 있다.

한편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백제 무왕의 본거지로 알려진 익산이 당시 수도 사비성(부여)에서 천도한 별도의 도읍이었는지도 쟁점이 됐다. 최완규 원광대 교수는 < 삼국유사 > 등에 언급된 미륵사, 왕흥사 창건 기록 등이 문맥상 무왕의 천도를 암시한다면서 "선왕인 법왕 때부터 천도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익산/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