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안령 눈강일대 정주한 다우르Dahur部: 타타르部 생존유민 후예? (完)
글 : 솟대 / http://www.coo2.net/ 자유게시판 15671 / 2009-03-12
|
| ||
솟대 선생님, 아래에 첨부하는 추모경 중의 기록에서 보는 北鞨은 末曷과 활동 지역이 다소 다른 듯하지만, 北鞨의 활동 범위는 위에 그려놓으신 삽화와 겹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혹시, 참조하시면 도움이 되실른지요? - - - - - - <東明>十年癸巳,春正月,<涉臣>使,與<莫車>使,入朝献土物. <旒>后<乙>氏,以老衰,請退從其子<乙音>而如<牛壤>,許之. 二月,徵<黃竜>‧<荇南>‧<桂林>民丁万人營「西 都」,<汁水>上<鵞卵原>. <紫蒙>王<廣>公,以其子<西川>為<紫蒙>王,自稱「太上天王」.<西川>遣使来献土物. <北鞨>王<舂臣>為其下<蘇辰>所殺.<大河>酋長<角民>,伐<蘇辰>殺之而自立,盡取<舂臣>財宝妻女以為其有. 三月,鍊民十万於<河>上,還<西川>而親耕籍田. <동명>10년계사{BC28}년, 춘정월, <섭신{선비왕}>의 사신이 <막거{흉노왕,雕陶莫皋=復株絫선우}>의 사신과 함께 입조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류>후 <을>씨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서 자신의 아들을 따라 <우양{順義北隣牛欄山隣近平原境?}>으로 가겠다.'고 청하였고, 허락되었다. 2월, <황룡>・<행남>・<계림>의 민간 장정 1만을 징발하여 「서도」를 세웠다. <즙수>의 북쪽{또는 상류}의 <아란원>이었다. <자몽>왕 <광>공이 자신의 아들 <서천>을 <자몽>왕으로 삼고 자신은 「태상천왕」을 칭하였다. <서천>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쳐왔다. <북갈>왕 <용신>이 자신의 수하 <소진>에게 죽음을 당하였더니, <대하>추장 <각민>이 <소진>을 토벌하여 죽이고서 자신이 보위에 섰으며 <용신>의 재물과 보물 및 처와 딸을 모조리 취하여서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3월, <하>상에 백성 10만을 훈련시켜놓으시고 <서천>으로 돌아와 친히 적전을 일구셨다. 五月,上,聞<舂臣>死後<北鞨>無人,<大河>以北諸部互相爭鬪,命<扶尉厭>‧<馬黎>等鍊兵於<大河>以為討<鞨>之備. <五江>之民能作舟車者,使之賑鹽通貨,置其鹽所‧器所‧衣所等於各地. 六月,上,如<湯>外,巡視鐵山,命<鄭共>採而鑄冶.其金銀銅玉皆納于<召>皇后宮為宮中之用. 5월, 상께서, <용신>이 죽은 연후에 <북갈>땅엔 사람이{임금노릇 하는 사람} 없어서 <대하{현금 遼河}>이북의 여러 부락들이 서로 간에 다투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부위염>과 <마려> 등에게 명하시어 <대하주{현금 遼河河口}>에서 군병을 훈련하게 하시어 <북갈>을 토벌할 계략으로 삼으셨다. <오강五江{五河? 巨流河주변?}>의 백성들이면서 배와 수레 만들기에 능한 이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소금을 나누어주고 재화를 보급하게 하셨으며, 염소{소금 만드는 곳}‧기소{그릇 만드는 곳}‧의소{옷 만드는 곳} 등을 각지에 두셨다. 6월, 상께서 「동도」에서 <탕산{또는 탕하 또는 탕도하}> 바깥으로 가시어서 철산{철이 나는 산}들을 순시하시며 <정공>에게 명하시어 채광하여 녹이고 야금하게 하셨다. 그곳에서 나오는 금・은・동・옥은 모두 <소>황후의 궁으로 보내서 궁중에서 쓰게 하셨다. 七月,至<大河>閱兵,<角民>聞之率其妻子遁入<雪羅山>中,諸酋續續来降自願為先鋒,上曰"朕,豈好用兵哉,但問<角民>之罪而已.<角民>如自来則兵不血刃而定矣."<角民>大惧送<舂臣>財宝‧妻女而請和,上叱其使曰"<角民>不自来則不得免死矣." 命<曹元理>,測定<北鞨>之勢,審其風俗.東自<白熊>西至<肅愼>之界,<元理>曰"測此廣漠之地,審其人情風俗,當用十万人費,二十年之力,然後方可."上曰"如彼其浩繁乎,其止之."上,以此,踈<元理>. <肅愼>王<乾朕>,遣使来献<北海>之「火魚」‧<月山>之「角雁」,而諫曰"臣聞陛下鍊兵十万於<大河>而将屠<北鞨>之衆云.然,<末曷>隨水而移,其源遠自<上谷>之北,從河而上逶迤<太伯>蚕食<黑水>,東至于<海>上,西至于<北海>.此<北海>者「单于」之秘園也.<漢>帝不能侵,<蘇武>老於此者也.臣與<末曷>或和或戦者百有余年,不能根治而抛之者.盖如惡草而難除,不可盡芸也.臣,以為陛下,英勇雖出百王,與此惡草爭利則得不補失,恐非聖人之治也.請罷是役."上謂其使曰"爾王之忠言,朕甚嘉之."厚遺而送之.<乾朕>,恐禍及己而如是言之,聞上之嘉其言而半信半疑,憂惧老病而死.子<胡白>,嗣,秘其丧而不告之. 7월, <대하{대하주?, 현금 遼河中下流지역?}>로 가시어 군병을 사열하셨더니, <북갈>왕 <각민>이 이를 듣고 처자를 데리고 <설라산{어디?}> 속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이에 여러 추장들이 속속 찾아와서 항복하며 스스로 선봉이 되길 원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짐이 어찌 병장기 쓰기를 즐기겠소. 다만 <각민>이 죄를 지었음을 이미 들었음이니, <각민>이 스스로 찾아올 것 같으면 군병들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칠 것이오."라 하셨다. <각민>은 크게 두려웠던지라 <용신>의 재보와 처첩들을 실어 보내고 화친을 청하였더니, 상께서는 그 사신을 질책하여 이르시길 "<각민>이 스스로 찾아오지 않으면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오."라 하셨더라. <조원리>에게 명하시어 <말갈>의 판세를 측량하고 그들의 풍속을 살피라고 하셨다. 동쪽으로는 <백웅>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숙신>의 경계까지였더니, <조원리>가 아뢰길 "그렇게 넓은 땅을 측량하고 그들의 풍속을 조사하는 데에는 마땅히 10만인의 비용이 들 것이며 20년의 노력을 들이고서야 가능하여 질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그대는} 그들이 그렇게 넓고 번성한 듯이 말하는구먼. 그만두시오!"라 하셨으며, 상께서는 이 일로 <조원리>를 멀리하셨다. <숙신>왕 <건짐>이 사신을 보내서 찾아와서 <북해>의 「화어」와 <원산>의 「각안」을 바치면서 간하여 아뢰길 "신이 듣기엔 폐하께서는 군병 10만을 <대하>에서 훈련하고 계시며 곧 <북갈>무리들을 도륙하실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허나, <말갈>들은 물줄기를 좇아서 움직이며, 그들의 근원은 멀리 <상곡{興安嶺山脈北部溪谷들?, 弱水東北方지역?}>의 북방 땅인데, 큰물줄기들{바이칼호수 印ㆍ以南의 물줄기와 黑龍江上流들}을 좇아서 구불구불하고 삐딱하게 <태백산{興安嶺山脈中 太白山?}>에 이르러서 <흑수{嫩江東北黑龍江?}>땅을 잠식하더니만, 동쪽으로는 <해>의 북쪽{현금의 黑龍江 中下流지역? 혹은 印의 오오츠크해 인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북해{바이칼호? 瀚海?}>에 다다랐습니다. 이 <북해>라는 곳은 「선우」{흉노의 임금}의 옛 터전으로, <한漢>의 임금이 능히 칠 수 없었더니, <소무{西漢劉徹가 匈奴로 보낸 使臣}>가 그곳에서 늙었다고 합니다. 신은{신의 나라는} <말갈>들과는 혹간은 화친하다 가 혹간은 싸우기를 100년여를 하였어도, 능히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없어서 포기하였습니다. 개략 지독한 잡초와 같아서 없애버리기가 어려웠었습니다. 신이 폐하를 위해 말씀을 드리자면, 뛰어나게 용맹하시어서 비록 백왕 중에서 특출하시어도, 이 지독한 잡초들과는 이로움을 다투셔보아야 얻는 것이 잃는 것을 메우지 못하실 것이어서, 성인의 다스림이 되지 못하실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이 전쟁을 파하소서."라 하였더니, 상께서 그 사신에게 말하여 이르시길 "그대 왕의 충성스런 말에 짐은 심히 즐겁소이다."라 하시고는 후하게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내셨다. <건짐>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었으며, 상이 기뻐하셨다는 말을 듣고서도 반신반의 하면서 근심하고 걱정하다가 쇠하여서 죽었더니, 아들 <호백>이 뒤를 잇고 <건짐>의 죽음은 감추어 알리지 않았더라. 徵<末曷>人三万人為鄕導編于三路六十軍之中.一軍二千人作五隊,隊用<曷>人百名為之前導,負担皆渡<河>而待期.<北鞨>聞之避去者甚衆.諸将曰"若皆逃去,只得空庭而已,不如速討之."上曰"空庭而易,動必非根據之地也,留而死守者乃其根據也.逃者逃之,留者攻之,可也.浮動者逃則根地必孤矣.或{擭}或誅而不與較殺,萬全之計也." <말갈>인 3만을 징발하여 향도를 삼아서 3로 60군중에 펼쳐놓고, 1군은 2천인을 다섯 부대로 하고, 각 부대는 <말갈>인 100명을 써서 길을 앞세워서, 지고 메고 하여 모두가 <하>를 건너 때를 기다렸더니, <북갈>들은 이를 듣고 피하여 물러가는 이들이 심히 많았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아뢰길 "모두가 도망쳐 가버리면 얻는 것은 빈 땅뿐이니, 속히 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빈 땅이면 쉬울 것이고, 도망쳐 버린 곳이라면 필시 근거지가 아니었던 것이고, 남아서 죽기로 지키면 그들의 근거지일 것이오. 도망하는 이들은 도망하게 하고, 남아있는 이들을 공격하면 될 것이오. 떠돌아 움직이는 이들이 도망한 것이라면 그 근거지는 필시 외딴 곳일 것이오. 혹간은 {붙잡고} 혹간은 주살하면, 맞붙어서 죽이기를 겨루지 않을 것이니, 매우 안전한 계책이 아니겠소."라 하시더라. 八月,北地飛雪寒威早至.上,與士卒,露宿于野,以兵卒冬衣未至不御重丧,沿江積薪爇火,火光連天,賊以為開闢後初有之事.<召>后‧<孟>后聞上有微祟而馳至,上翼衣未至責而還之.未幾,皮衷至,軍得御寒,上還都. 8월, 북쪽 땅에서는 눈이 날리더니 추위의 위세가 일찍 찾아왔다. 상께서는 병사 및 병졸들과 더불어 벌판에서 노숙하고 계셨었는데, 병졸들의 겨울옷이 다다르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에, 강의 언저리에 땔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피우셨더니, 불빛이 하늘에 뻗쳤더라. 적들은 개벽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라 여겼다. <소>후와 <맹>후가 상께서 약간의 불미스런 조짐이 있음을 듣고 내달려왔더니, 상께서는 겨울옷이 오지 않았다며 질책하여 돌려보내셨다. 오래지 않아 겉옷과 속옷이 도착하여 군대는 추위를 이길 수 있게 되었고, 이에 상께서는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九月,<扶尉厭>‧<宝燕>将苐一軍伐<大河>之東南<五加沙部>,<馬黎>‧<鄭福>将苐二軍伐<大河>之西北,<箊狗>‧<羊臣>将苐三軍伐<五河>.去年,有神雀之慶而<荇泉>拔,今有白鸞之慶<北鞨>亡矣.<鞨>衆,自以為南北懸絶,從古未聞鷄犬之驚,穹廬巨創內藏千年宝貨,皆是中國古物也,守貨而死者相連如抱卵之雉矣. 十月,三軍皆出<五河>之北拔<枝河>虜<角民>兄弟三人,<北沃沮>三十余落来降.掃窟者八十三,斬将者百二,拓地千余里,牛羊獹鹿十七万,生口八万,女子居二,駿馬五千匹,兵仗珍宝無数. 9월, <부위염>과 <보연>이 제1군을 몰고 가서 <대하>의 동남인 <오가사부>를 치고, <마려>와 <정복>이 제2군을 거느리고 <대하>의 서북을 쳤으며, <어구>와 <양신>이 제3군을 이끌어서 <오하>를 쳤다. 지난해엔 신작의 경사가 있었더니 <행천>을 빼앗았고, 이번엔 백란의 경사가 있었더니 <북갈>이 망하였다. <말갈>무리들은, 스스로 남과 북이 멀리 늘어져 있어서 사이가 멀었으며, 고래로부터 닭과 개가 놀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음에, 궁려{하늘이 보이게 만든 몽골식의 오두막집}는 거창하고 그 안엔 천년보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가 중원나라의 옛 물건이었더니, 재화들을 지키면서 죽은 이들이 서로 뒤엉킨 것이 알을 품는 꿩과 같았더라. 10월, 3군 모두가 <오하{현금 東遼河 分枝地域 巨流河?}>의 북쪽으로 나가서 <지하{현금 長春지역?}>를 빼앗고 <각민>형제 셋을 사로잡았더니, <북옥저> 30여락이 찾아와서 항복하였다. 쓸어낸 굴들이 여든 셋, 목을 벤 장수들 백 둘, 넓힌 땅은 1,000여 리, 소와 양 및 개와 사슴 17만 두, 생구 8만 명, 여자들의 거소 둘, 준마는 5천 필이었고, 병장기와 진보는 무수하였다. 十一月,置<沃沮>将軍十人,分治降衆.以<曷>女六万三千分賜将士,移其大姓男丁于<杜訥>之西及<梁貊之谷>使垦荒地. 上,遣<桓福>於<五河>,分賜粱酒粱飴於将士.<福>敀献鼠皮于上及三后曰"皇軍之皮衷不如<鞨>衆之鼠衷故,皆奪彼衣而衣之乃免落指傷鼻之患.<曷>女,為皇軍,盡死力者亦多得,以奏功."云.上曰"<曷>女,以獸性木腸,亦知王師之重.其令有司選其佳者賞之."命軍為妻以囯人待之無差.<召>后曰"<曷>乃賤婢也.妻軍可乎."上曰"<曷>亦人也.有何不可.夫物賤則貴又安知後日彼亦貴乎.<漢>,以<胡>‧<曷>為賤,而反為<胡>‧<曷>所困,貢其絮繒公主.貴賤何常固乎.能自樹者必勝,不可以一時之困賤之也.况其迎王師而出死力者乎.盖有拔賤為貴之志也.不酌其情,何以御之." 十二月,冬,暖如春,無氷雪.行<月歌>之會於「西 都」,以慰凱旋軍卒犯夜三日.縱軍恣慾飾以花臺鳳車,使美男女戴行.上,與三后,登臺而賞其衆.巾帶衣領中外會者数十万,女居其三而男其一. 11월, <옥저>에 장군 12명을 두어서 항복한 무리들을 나누어 다스렸다. <말갈>여자 6만 3천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하사하고, 그들의 큰 성씨 집안 장정들을 <두눌{伯都訥?}>의 서쪽과 <양맥곡{達里湖老哈河間지역?}>으로 옮겨서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였다. 상께서 <환복>을 <오하{巨流河?}>땅으로 보내시어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기장 술과 기장 엿을 나누어 하사하셨더니, <환복>이 돌아와서 상과 세 후들에게까지 쥐{족제비?} 가죽을 바치면서 아뢰길 "황군의 겉옷과 속옷이 <말갈>무리들의 쥐 가죽 속옷보다 못하여서, 모두들 저네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코가 상하는 고통을 덜었는데, <말갈>여인으로 황군을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이들이 많았었습니다. 이들의 공을 상주합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말갈>여인들은 성깔은 짐승 같으나 마음은 질박하더니, 역시 왕사{황군}의 중함은 알고 있구먼. 그대가 해당관리에게 령을 내려서 그 어여쁜 이들을 가려내어 상을 주도록 하시오."라 하시고는, 군대에는 명을 내리시어 그들을 처로 삼고 나라사람들로 대우하며 차별하지 말라고 하셨더니, <소>후가 아뢰길 "<말갈>여인들은 천비들인데, 군사들의 처로 삼아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말갈> 역시 사람이거늘 불가한 까닭이 무엇이오? 대저 만물은 천하게 여기면 곧 귀해지는 것이오. 또한, 이에 후일에 저들 역시 귀해질 수 있음을 알기는 하는 것이오? <한漢>이 <호胡>와 <갈曷>을 천시하다가, 도리어 <호>와 <갈>에게 곤욕을 치렀고, 자신들의 솜옷 및 비단옷과 공주를 공물로 하였소이다. 귀하고 천한 것이 어찌 오래도록 변하지 않겠소! 능히 스스로 일어서는 이들은 필시 귀하게 되는 것이니, 잠시 곤경에 빠진 것으로 천시하는 것은 옳지 않소이다. 하물며 그들은 왕사{제왕의 군대}를 맞아들이며 나와서 죽기로 힘쓴 이들인데 어찌 하여야 하겠소? 개략 천함을 이겨내고 귀해지려는 뜻이었을 것인데, 그 정성을 헤아려주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그들을 다스린단 말이오?"라 하셨다. 12월, 겨울인데 따듯하기가 봄과 같아서 물도 얼지 않고 눈도 내리지 않았다. 「서도」에서 <월가회>를 거행하여 개선한 군졸들을 위로하며 3일 밤을 새우도록 하였더니, 풀려난 군졸들은 마음껏 화대와 보거를 치장하여서 잘생긴 남녀로 하여금 높이 들고 행진하였고, 상께서는 세 후와 더불어 그 화대에 오르시어 그 무리들에게 상을 주셨다. 두건을 쓰고 갖춰 입은 옷에 허리띠를 하고서 모여든 이들의 수효가 10만이었는데, 그들 중에 여자가 셋이면 남자는 하나였더라.// | ||
| ||
선생님 자료 감사올립니다. 읽어보고 참조하겠습니다. | ||
| ||
선생님 대략 읽고 놀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추모경 출간될때까지 보류중이실텐데 이렇게 일부를 올려주시니 고마와 같습니다. 타타르부족은 <실위>의 후예이니 말갈과는 관련이 없지만 올려주신 <추모경> 추모성왕 10년의 기록은 그 선조인 <실위>와 <말갈>의 고구려 강역내 정주위치를 비교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추모성왕>이 아닌 <동명>이라 하였네요. 추모께서 북부여의 개조인 <동명>을 무척 숭앙하셔서 이를 연호로 쓰신 것이 아닌지? 북갈과 남갈이 있다는 것을 <추모경>으로 확실히 알게 되네요. 선생님 말씀대로 읽으면 읽을 수록 <추모경>의 북갈이 말씀하신대로 경향신문에 실린 지도상의 바이칼에서부터 하얼빈일대라는 것이 뚜렷해지네요. 북갈의 가장 남부에 위치한 부족이<大河>라 하는데 이는 큰 하천의 지명을 따른 것이라 하므로 이는 현재의 흑룡강의 상류인 아르군강(Argun River)의 상류 즉 후룬호(Hulun He) 상류의 몽골내지에서 뻗어나오는 케를렌 강(Herlen River)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즉, 추모성왕때의 <북갈>은 케를렌 강(Herlen River)변일대부터 그 이북의 제부족을 일컫는 것이 되네요. 이는 금제국 말기 징기츠칸이 일어날때 대부분의 몽골부족이 케를렌 강(Herlen River) 일대와 그 이북에 거주한 것과 일치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어쩌면 그리 같은 전개가 반복되는지... 바로 지리적 여건과 자연환경의 주어진 조건이 초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차이가 크지 않은 듯 하네요. 또한 아래 기록 부분에서 큰 물줄기들을 쫓는다는 말도 현재의 수계흐름과도 일치합니다. 케를렌강이 후룬호수로 유입된후 호수밖으로 북쪽을 향햐여 흘러나오는 강을 아르군강이라 하는데 아르군강은 수많은 큰 지류들을 합수하며 수량이 더 늘어나고 마지막 지류와 합수한 뒤부터는 아르군강이 아니라 흑룡강이라 부릅니다. 큰 물줄기들을 쫓아 태백산에 이르렀다는 말은 바로 현재의 아르군강 수계의 지리처럼 다른 수계들을 합하여 대흥안령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여기서 동쪽으로 <해海>의 북쪽에 이르렀다는 것은 바로 흑룡강성 치치하르일대의 <해海>, 즉 송눈평원의 북쪽지역으로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이 경로는 천몇백년후 징기츠칸에 의한 타타르부족 절멸위기에서 생존해 달아난 유민으로 추정되는 다우르(Dahur)부족의 피신해 송눈평원의 치치하르일대에 정착한 경로와도 일치합니다. 다시, 근대에 러시아 짜르의 코샤크 부족이 짜르의 명에 따라 침략해 들어오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다만. 청의 번병인 치치하르일대의 다우르(Dahur)부족의 반격으로 송눈평원으로는 내려오지 못하고 흑룡강을 따라 계속 동으로 이동해 현재의 송화강과 흑룡강 합수점까지 가서 다시 남하했다는 부분만 다릅니다. 또한, 대흥안령의 그 위도에서 동으로 가면 바이칼호에 이르니 추모경의 기록은 현재의 몽골동부와 북만주일대의 지리와도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 선생님께서 올려주신 추모경 기록중 발췌 "허나, <말갈>들은 물줄기를 좇아서 움직이며, 그들의 근원은 멀리 <상곡{興安嶺山脈北部溪谷들?, 弱水東北方지역?}>의 북방 땅인데, 큰물줄기들{바이칼호수 印ㆍ以南의 물줄기와 黑龍江上流들}을 좇아서 구불구불하고 삐딱하게 <태백산{興安嶺山脈中 太白山?}>에 이르러서 <흑수{嫩江東北黑龍江?}>땅을 잠식하더니만, 동쪽으로는 <해>의 북쪽{현금의 黑龍江 中下流지역? 혹은 印의 오오츠크해 인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북해{바이칼호? 瀚海?}>에 다다랐습니다. " 송눈松嫩[쑹넌]평원 - 흑룡강 수계의 송화강松花江, 눈강嫩江유역일대의 북부 평야지대로 만주의 4대 대평원중 면적이 제일 넓으며 쌀·콩·수수·옥수수·조·밀 등 생산하며 특색작물로 사탕무·아마(亞麻)등이 재배됨. 다만, 남갈에 대한 별도의 기록도 있는지 궁금한데 혹시 있다면 올려주실수 있을런지요. 말갈에 대해 최근 수도가 아닌 지방의 백성을 말한다는 이론이나 여러 가설이 있지만 말갈을 하나의 부족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면 말갈이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동부여의 주요 번국중 하나인 갈사부여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갈사부여가 말갈이면 말갈은 다른 부족이 아니라 바로 부여인으로 고구려인들도 원래 부여인이니 말갈과 고구려인을 분할하여 보려는 차이나측의 동북공정논리는 망상이 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갈사부여가 말갈이고 또한 남갈인지를 확인하려면 남갈에 대한 기록도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혹시 관련기록이 있으며 그 부분만 보여주실 수 있으실 런지요. 추모경이 휼룡히 번역되시길 성원올립니다. 덧붙여 흑룡강성 지형지세도를 구하여 선생님 <추모경>출간에 사용할 지도로 보탬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네티즌 문답란에 올려보겠습니다. | ||
| ||
오늘은 제 생업분야의 학술모임에 갔다가 혹시나 하여 출근하여 보았더니 선생님께서 장문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허나, 갈사국에 대하여는 저는 이미 정착하여 생업을 유지하였던 무리들로 보고 있습니다. 동부여와 북부여 후신인 고구리의 사이 즉 현재의 요하 하류 이동으로 쫓겨난 낙랑과 비슷한 지역 정도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추모경에서의 말갈에 대한 기록은 北鞨과 末曷로 구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추정하건대, 北鞨의 근원지가 肅愼이 알고 있는 上谷{하투 북하 밖의 북방인 上古의 상곡}이라면, 동방의 대하들{현금 동북 3성} 및 연해주 유역으로 물줄기를 따라서 수렵하며 혈거 약탈하던 무리와 가까운 동남방인 황하 주변의 여러 물줄기를 따라서 소위 中原땅 유역을 따라서 수렵 혈거 약탈하던 무리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末曷이 신라나 백제를 성가시게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AD2세기 이전?에 신라 조정이 말갈 정벌을 논의하다가 고구리 땅을 밟아야 하며, 인접한 백제와 왜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음을 들어서 말리는 신하의 의견을 따르면서 그 정벌을 접은 것으로 고구리사초의 {단기2475년/AD142}임오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고구리 사략/사초 및 추모경의 기록 중 末曷은 北靺鞨과 구분하여 南末曷로 보시면 어떠실른지요? 末曷 즉 南末曷에 대한 기록은 마땅히 한꺼번에 덩어리를 이룬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 | ||
| ||
차근한 설명 감사드립니다. 남말갈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다니 아쉽네요. 저도 일반 사서의 末曷은 추모경의 남말갈南末曷만 해당됨을 알고 있습니다. 북말갈北靺鞨은 이후 말갈외의 다른 부족들로 나뉘는 것이 아닌지 추모경의 다른 내용도 궁금해지네요. 출간하게 되시면 꼭 보고 싶습니다. 다만, 남말갈南末曷, 즉 말갈末曷이 언제부터 출현했고 그 기원이 어디서부터 인지가 궁금하네요. 앞으로 차근차근 접근해보아야 겠지요. | ||
| ||
덧붙여서 추모경 위 내용으로 보아 당시 북갈정벌전의 고구려의 북계는 현재의 몽골 케를렌강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
| ||
솟대 선생님, 추모경이나 고구리사초에 남말갈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 아니고, 위의 북말갈같은 뭉터기의 기록이 없나는 말씀입니다. 고구리의 주강역 즉 도성 인근지역이나 신라나 백제와 관련한 말갈은 모조리 남말갈일 것으로 봅니다. 오해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
'역사관련 글들 > 한국사관련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간소개-조선왕조사] 만주 몽골은 조선의 땅이었다 <map추가> (0) | 2009.03.15 |
---|---|
[스크랩]다우르Dahur 부족部族 (0) | 2009.03.15 |
[스크랩]세계 최고(最古) 금속 활자본 삼장문선(三場文選) (0) | 2009.03.02 |
[스크랩](고대사의 핵폭탄)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는 하북성 (0) | 2009.03.02 |
[스크랩] 대진국(발해)의 강역은 원폭 9,000리 (0) | 2009.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