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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명사(태조)로 본 당시 朝鮮과 明의 변경은 <토 곡 혼 지 경>

monocrop 2009. 2. 24. 03:32

❈ 명사(태조)로 본 당시 朝鮮과 明의 변경은 <토 곡 혼 지 경> 이다.

글 : 문무  / http://www.coo2.net/고려.조선 자유토론방 1846 / 2009-02-22


   ▶ 잃어버린 조선의 역사를 되찾자는 것이 이곳 카페의 주목적일진대 요즈음 이상한 기류가 흘러 반도주위로 U 턴하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현 정치판도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면 우려스러운 일이다. 명사를 가지고 조선(朝鮮)의 강역을 파악하려 한다면 본기보다는 열전이 더 객관적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명사의 본기는 왜곡시키기에 아주 쉬운 일이나 열전속의 각 나라와 종족의 영토는 고유한 영역이 있기 때문에 쉬운 것이 아니다.

   <아래 글 내용에 경어는 생략되어 있으며, 특정 개인이나 단체를 겨냥하여 비난, 비방코자 쓴 글이 아니오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예를 들면 본기는 지명과 위치를 년도에 맞춰 끼워 넣기만 하면 되지만, 열전속의 종족과 국가의 기록은 각 종족의 고유한 영토나 지명이 수천 년 이어져 온 곳이기 때문에 왜곡한다는 것이 어렵다. 서강(西 羌)종족을 현 만주에 있었다고 하면 모든 종족의 이동 사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또 토 곡 혼을 현 만주지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모든 역사서를 바꿔야 하기 때문에 이들의 주 거점지인 “청해 호”주변을 벗어나 다른 지방에 있었다고 바꿀 수가 없다.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려 한다면 이러한 사실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이러한 점을 생각지 않고 조선사를 해설한다는 것은 계란을 던져 바위를 깨뜨리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인은 말할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이미 이곳 토론방에 소개한 적이 있는 내용이나 보충을 했으며, 명사 열전을 가지고 당시 조선(朝鮮)과 명(明)의 국경 또는 변경지방이 어느 곳이었나를 알아보려 한 것이다. 이러한 원전의 내용도 모르면서 조선(朝鮮)의 강역을 동북삼성 지방이나 반도로 이식(移植)하려는 분들은 각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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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明史 列傳 第216 外國 九 <瓦 剌 . 朵 顏(福 余 . 泰 寧)>

   1) 瓦 剌, 蒙 古 部 落 也, 在 韃 靼 西.

   : 瓦 剌(와 랄)은 蒙古(몽고)의 部落(부락)으로써 韃 靼(달단)의 서(西)쪽에 있었다. 韃 靼(달단)은 어디에 있었을까........열전을 보면 韃 靼(달단)은 陝(섬)서성 서북방지대의 황하(黃 河)서북방주변에 있었다. 이들 韃 靼(달단) 亦是(역시) 元(원)의 後裔(후예)이다. 元의 支 配 層(지배층)들이 漠 北(막북)으로 물러간 뒤 남아있던 種族(종족)들이다. 즉 원(元)의 지배층들이 막북(漠 北)으로 달아나 버리고 난 뒤에 남아있던 원(元)의 유종(遺 種)들이다.

   : 달단(韃 靼)의 서(西)쪽에 와랄(瓦 剌)이 있었다고 명사(明史)는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와랄(瓦 剌)은 감 숙성의 서북(西北)변인 신 강성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달단(韃 靼)은 내몽고 액 제 납 기(額 濟 納 旗)지방과 그 북쪽지방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지리적 관계다.

   : 삼위(三衛)의 하나였던 타 안(朵 顏)을 기준으로 보면...........西界(서계)는 태 녕 衛(위), 北界(북계)는 福 余 衛(복 여 위)가 있었다. 특히 여기서 <복 여 위>의 땅은 옛 부여(夫餘)의 땅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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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二十年,瓦剌侵掠哈密,朝廷責之,遣使謝罪。

   : 瓦 剌(와랄)이 哈 密(합 밀)을 侵掠(침략)했다고 한다. 여기서 哈 密(합 밀)이라는 國家(국가) 또는 종족은 어디에 있었을까를 알아보자. 列 傳 哈 密편을 보면 “東 去 嘉 峪 關 一 千 六 百 裡, 漢 伊 吾 盧 地.(동쪽으로 가 욕 관까지 1,600 리 떨어져 있고, 한(漢)나라의 ”이 오노(伊 吾 盧 : 신 강성 이오)”의 땅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 즉 哈밀의 위치는 ; <其 地, 北 瓦 剌, 西 土 魯 番, 東 沙 州、罕 東、赤 斤 諸 衛 : 그 땅(합 밀의 땅)은 북쪽에 瓦랄이 있고, 서쪽은 吐노번이 있다. 동쪽으로는 東사주(사주 : 燉황) 및 罕 東(한 동), 赤 斤(적 근)제위까지이다.

   (여기서 “罕 東(한 동)”은 감 숙성 燉(돈)황현 동남, 明나라 때 설치했으며, 罕(한)동 좌위가 있었다. 赤(적)근은 적근산주위이다. 즉 감 숙성 玉 門 縣 東南(玉문현 동남)에 있었다.)

   : 지리적, 지형적인 위치를 찾아보면 - ❶ 합 밀(哈 密)은 <신 강성 토 노번과 돈 황 사이>에 있었다고 보면 된다. ❷ 와랄(瓦 剌)은 <신 강성 토 노번과 돈 황의 북방과 서북방>에 있었고, ❸ 달단(韃 靼)은 <감 숙성 옥문관과 가 욕 관과 그 북쪽지방>에 있게 된다. (그러나 실제 옛 기록으로 보면 오늘날의 옥문관은 동쪽으로 이동된 것이며, 옛 옥문관은 한(漢)의 반초가 지나온 현재의 옥문관 서북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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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也 先 攻 破 哈 密, 執 王 及 王 母, 既 而 歸 之。♦又 結 婚 沙 州、赤 斤 蒙 古 諸 衛, 破 兀 良 哈, 脅 朝 鮮。

   : (와랄)의 “야선”이 <합 밀>을 공격하여 破(파)하고, (합 밀의)왕과 왕의 어머니를 잡고는 돌아갔다. 또 사주(沙 州 : 옛 사주는 신 강성 이오의 바로 동쪽에 있었다.)와 적 근 몽 고, 몽고의 여러 위(衛)들과는 혼인하여 화친을 맺고, “올 량 합”을 깨뜨리고 조선(朝鮮)을 위협했다.

   ▶ 朝 鮮 國(조선국)을 脅迫(협박)했다는 이 역사적 事實(사실)을 현재의 우리들은 어떻게理解(이해)할 수 있겠는가 ! 瓦 剌(와랄)이 그 동쪽에 있던 “올 량 합”을 깨뜨리고 “조선(朝鮮)”을 위협 또는 협박 또는 으름장을 놓았다면 당시의 “와랄”은 현재의 신 강성 토 노 번 북쪽지방에서 그곳의 동쪽에 있던 사주(沙 州)와 동남쪽에 있던 “적 근 몽고” 등의 여러 지방과는 화친을 맺고 그 북쪽지방(감 숙성 주천과 장액의 북방지대)에 있던 “올 량 합”을 깨뜨리고는 그 동쪽에 있던 “조선”을 위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 만약 <조선(朝鮮)이 하 북 성이나 그 동쪽이나 반도지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말하는 명사(明史)의 기록은 허무맹랑한 판타지 소설 줄거리밖에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열심히 명사(明史)를 들먹이며, 조선은 반도 북방(동북삼성)과 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무언가 하나는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 잘못된 것은 명사(明史)가 아니라 여러분들인 것이다. 즉 명사(明史)에 나오는 지명이나 산의 이름, 하천의 이름 등을 모조리 하 북 성 동쪽지방에 있다고 하고 때문인 것이다. 고지도를 보더라도 그 고지도에 있는 지명의 위치와 역사서속의 지명의 위치와 비교, 검토 후 확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 <와 랄>이 “조선(朝鮮)”을 협박했든, 위협을 했든, 화친을 맺자고 졸랐던 간에 그 상대인 “조선(朝鮮)”의 땅은 <와 랄 과 올 량 합>과 접경지대를 이루고 있어야만 위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조선”의 영토가 이들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때만이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생길 수 있으며, 명사(明史)를 편찬한 학자들도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으니 기록하여 편찬했을 것이 아닌가.

   (재구성 해 보자--------▶신 강성 토 노번의 서북쪽과 북쪽지방은 반도와는 10,000(萬 里)리쯤 떨어져 있을 것이다.---------▶돈 황과 옥문관지역과 그 동남지방의 적 근 몽고 제위들과 화친을 하고---------▶그 동쪽과 북쪽에 있던 “올 량 합”을 파하고,-------▶그 동쪽에 있던 명(明)나라의 수십만 기병과 보병들로 구성해 주둔하고 대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3 개의 삼변(三 邊)진지들을 무섭게 돌파하고,----------▶ 초스피드로 산서 성을 통과 한 다음---------▶다시 명(明)나라의 한 가운데를 뚫고--------▶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명(明)의 변방 진지의 명군을 돌파한 다음---------▶다시 동쪽으로 말 머리를 향하게 하여---------▶朝鮮조선 땅(현 만주의 조선 땅)에 들어가 조선왕을 위협했다는 것이 된다.)  

   : 여러분들이 이러한 일들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여러분들은 당시의 신(神)과 같은 존재다.

   다른 견해로 당시 명(明)이 기초를 다지기 전의 상황으로 명(明)나라의 북변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라 가정한다고 해도 <일 만 리>쯤 떨어져 있던 조선(朝鮮)에 무엇을 가지고 위협, 또는 협박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러한 일들이 분명 있었으니 기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회상이나 당시의 과학수준을 감안해 “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 수천里 옮겨져야 마땅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역사서를 왜곡하면서 까지 “조선”의 영토를 반도나 그 북방지대로 한정해 가둬두려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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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嘉靖九年,復以議婚相仇隙.土魯番益強,瓦剌數困敗,又所部輒自殘,多歸中國,哈密復乘間侵掠.卜六王不支,亦求內附.朝廷不許,遣出關,不知所終.❶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地也.元為大寧路北境.高皇帝有天下,東蕃遼王,惠寧王,朵顏元帥府相率乞內附。❷遂即古會州地,置大寧都司營州諸衛,封子權為寧王使鎮焉.已,數為韃靼所抄.洪武二十二年置泰寧,朵顏、福余三衛指揮使司,俾其頭目各自領其眾,以為聲援.❸ 自 大 寧 前 抵 喜 峰 口, 近 宣 府, 曰 朵 顏; ❹自 錦、義 歷 廣 寧 至 遼 河, 曰 泰 寧;❺ 自 黃 泥 窪 逾 瀋 陽、鐵 嶺 至 開 原, 曰 福 余。獨 朵 顏 地 險 而 強。

   : ❶ 朶 顔(타안), 福 余(복 여), 泰 寧(태 녕)의 三衛(삼위)는 高 皇帝가 設置(설치)했다. 이 三衛(삼위)의 땅은(其 地)..................(朶:늘어질 타)

   兀 良 哈 地는 黑 龍 江南쪽으로부터 漁 陽 塞 북쪽의 땅인데,

   1) 漢나라 때의 鮮卑의 땅이요,

   2) 唐나라 때의 吐谷渾의 땅이며,

   3) 宋나라 때의 契丹(글란)의 땅이며, 이 모두의 땅이다.

   ❈ 위의 명사(明史)에서 기록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1) <올 량 합>의 땅은 한(漢)나라 때의 <선비(鮮卑)>의 땅이라 했다----------▶ 후한서를 보면 “선비”는 부여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부여(夫餘)는 <하서회랑>의 만리장성 주위 즉 한(漢)의 거연 군 지방에 있었다. 그 서쪽이라면 신 강성지방이다.

   2) 당(唐)나라 때의 <토 곡 혼>의 땅이라 했다---------▶ 당나라 때 “토 곡 혼”은 설산 즉 <기련 산의 서남쪽에 있었으며, 청해 호 주위와 그 북쪽 일부까지다>

   이러한 땅에 설치된 것이 삼위의 땅이며, 이 삼위의 땅은 위에서 말한 올 량 합의 땅이며, <와 랄>이 깨뜨렸다는 “적 근 몽고와 한 동 좌위”의 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兀 良 哈 地는 黑 龍 江南쪽으로부터 漁 陽 塞 북쪽의 땅> 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이들의 땅은 중원의 서쪽 <돈 황과 기련 산(설산)사이>의 동서, 남북의 땅을 말하고 있다. 흑룡 강은 이곳에 있는 흑수를 말하는 것이며, <어 양 새는 어 양 령으로 (원사 하원 부록 편에 기록되어 있다) 신 강성 포창해 북쪽을 흐르는 흑수의 남쪽과 감 숙성 조주(洮 州)의 북쪽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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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❷ 遂即古會州地,置大寧都司營州諸衛,封子權為寧王使鎮焉.已,數為韃靼所抄.洪武二十二年置泰寧,朵顏、福余三衛指揮使司,俾其頭目各自領其眾,以為聲援.❸自 大 寧 前 抵 喜 峰 口, 近 宣 府, 曰 朵 顏; ❹自 錦、義 歷 廣 寧 至 遼 河, 曰 泰 寧;❺ 自 黃 泥 窪 逾 瀋 陽、鐵 嶺 至 開 原, 曰 福 余。獨 朵 顏 地 險 而 強。】
   : 위의 글을 보자.
    
   ❷ 이곳을 모두 이루었는데(차지했다). 이곳은 옛 會 州(회주)의 땅이다. 이곳에 <대 녕 도사> 營 州(영주)제위를 설치하고 아들인 “권”을 <녕 왕)에 봉하고 관리를 보내 진을 두었다.洪 武 22年에 <태 녕, 타안, 복 여>에 三衛(삼위)지휘사사(使 司)를 설치했는데, 두목 각자가 영토 및 무리를  존중하고, 이에 성원했다.

   ❈ <이곳은 회주(會 州)의 옛 땅이다>라 했으니 “회주”에 대해 알아보자.

   【會 州 : 古 西 羌 地(옛 서강의 땅이다). 周 太 祖 爲 西 魏 相, 來 巡(주 태조가 서위의 상으로 와 돌아봤다). 會 師 於 此(이곳에서 장수를 만났다). 因 置 會 州(그 연유로 회주를 설치했다). 이곳은 그 후대로 粟주(속주)로, 또 회주로, 또 토번에 함락당하여 이곳을 “회 녕(會 寧)에서 다스렸고, 이곳은 감 숙성 정원 현 동북의 땅이다. 서하(西夏)에서 이곳을 ”회주“라 했다. 원나라 때는 이곳을 "서 녕”이라고 했다.】이곳은 동북삼성이나 河북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寧하성 서쪽지방이다.

   ❸ 타 안은 ; 대 녕 前으로부터 희 봉 구에서 선부 근처까지이며,

   ❹ 태 寧(녕)은 ; 금주, 의주를 지나 광 寧(녕)의 요하에 이르고,

   ❺ 복 여는 ; 황니 와를 넘어 심양, 철 령에서 개원에 이른다. “타안”만이 홀로 떨어져 있는데 지형이 험하여 굳세었다.

   ▶▶▶ 위의 글을 잘 보면 조선(朝鮮)의 영토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우리 역사의 비밀”!!!!!!!!!!!!! 운영자의 본의는 아니겠으나 이곳 카페도 관료적인 구태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분명 “잃어버린 조선(朝鮮)의 역사(歷史)를 찾자”는 취지에서 이러한 카페가 비록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나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어떤 단체든 초심을 잃고 나면 그 단체는 그것으로 힘을 잃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곳의 주요 논객 분들의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면, 아주 천천히 반도방향으로 U턴하는 모양새가 그려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 본인 혼자만의 느낌일까? 새로 발굴한 것처럼 거창하게 구사하고는 그 거창한 발굴 사 내용은 결국 반도 방향으로 U턴하는 모양새를 그리고 있다.

   ▶▶▶ 위의 ❷❸❹❺ 글 내용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분명 하북성 북쪽과 동쪽지방의 현 만주지방을 칭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분들이라면 최소한 영토와 관계되는 것에는 본기와 열전과 지리지와 그 전대(前代)와 그 후대(後代)의 과정을 소상히 알아야 한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곳은 河북성이나 동북삼성인 현 만주지방과도 전혀 관계없는 지방에 있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이곳의 땅은 <卽 이 삼위의 땅은 漢시 鮮卑의 땅이고, 唐나라 때의 吐谷渾(토 곡 혼)의 땅이며, 송나라 때의 글 란의 땅 이라는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기록은 보지 않고 조선(朝鮮)의 영토에 대해 엉뚱하게도 반도로 U 턴하는(본인이 느끼기에)그런 설명을 한다면 욕은 할 수 없고, 참으로 답답한 것이다. 본인이 이러한 분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바로 이건이다.

       【현 만주지방이 당(唐)나라 때의 “토 곡 혼”의 땅이었습니까?】

   위에서 말하는 <흑룡 강 남쪽>과 <어 양 새의 북쪽>지방이 분명 <토 곡 혼>의 땅이 맞다 면 위의 <흑룡 강과 어 양 새>는 <토 곡 혼>이 있었던 청해 주변으로 이동되어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그 동쪽에는 누가, 어떤 국가가 있었습니까. 명 태조가 명을 건국시킬 때는 원(元)은 북원(막북으로 도망을 갔다)으로 이미 막북지방으로 도망을 간 상태였고, 명(明) 동쪽에는 “조선(朝鮮 : 당시엔 고려가 있었으나 총칭)”밖에 없었다. 결국 <토 곡 혼>의 땅은 명나라의 동쪽 최 변방지방이었으니 그  동쪽지방은 “조선의 땅”이었다는 말이 된다.

   제발 부탁이니 조선사를 더 이상 왜곡하지 말기를.............!!!!!!!!!!!!!!!!!!!!!!!!!!!!!!!!!!!!! “잃어버린 역사를 찾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카페에서 조선사를 다시 왜곡하는 짓은 하지 말자. 비웃을 자들이 너무 많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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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十二年春,總兵曹義,參將胡源,都督焦禮等分巡東邊,值三衛入寇,擊之,斬三十二級,擒七十余人。其年,瓦剌賽刊王復擊殺朵顏乃兒不花,大掠以去.也先繼至,朵顏、泰寧皆不支,乞降,福余獨走避腦溫江,三衛益衰.畏瓦剌強,不敢背,仍歲來 致貢,止以利中國賜賚;又心銜邊將剿殺,故常潛圖報復】

   ▶▶▶<十二年春,總兵曹義,參將胡源,都督焦禮等分巡東邊,值三衛入寇,擊之,斬三十二級,擒七十余人 : 12년 봄. 총 병(總 兵) 조의, 참장(參將) 호원, 도독(都 督) 초례等(등)이 나누어 東邊(동변)을 돌 때(巡), 삼위(三衛 : 朵 顏, 福 余, 泰 寧, 高 皇 帝 所 置 三 衛 也)에 쳐들어온 瓦 剌(와랄)을 쳐부수고, 32급을 참수하고, 70餘(여)인을 붙잡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명나라의 동변(東邊 : 동쪽의 변경지방)을 순시할 때”라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기록은 明나라의 東邊(동쪽 변경)이 어디냐는 것이다.............<와랄> 의 거점지역이 <신 강성 토 노번의 북쪽지방>이라고 위에서 설명했으니, 이곳으로부터 동남지방과 동쪽의 옥문관과 돈 황 부근의 종족(또는 국가)들과 화친을 맺고, <올 량 합>을 격파하고 “조선”을 위협했다고 했다. 이때 명나라 주원장(태조)은 토 곡 혼의 땅에 삼위(三衛)를 설치했다는 설명을 했다. 결국 명나라의 당시 동쪽 변경은 이 삼위 땅 즉 “토 곡 혼”의 땅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대한민국의 주류 사학계는 압록강이고, 이곳의 카페에서 말하기를 “조선과 명”의 변경 즉 국경지방은 압록강이나 조금 진보적인 논객 분은 심양지방일 정도이다.

   ▶▶ 위의 본문에 있는, <12년 봄. 총 병(總 兵) 조의, 참장(參將) 호원, 도독(都 督) 초례等(등)이 나누어 東邊(동변)을 돌 때(巡), 삼위(三衛 : 朵 顏, 福 余, 泰 寧, 高 皇 帝 所 置 三 衛 也)에 쳐들어온 瓦 剌(와랄)을 쳐부수고, 32급을 참수하고, 70餘(여)인을 붙잡았다.>라는 말은 결국 이곳(네티즌 자유 게시판)이나 주류 사학계의 해설로 본다면 ; 압록강변이나 심양부근이 당나라 때의 토 곡 혼의 땅이었다는 말이 되며, 흑룡 강 남쪽 땅이며, 어 양 새 북쪽의 땅이 된다는 말이 된다.

   ❈ <토 곡 혼>이나 <와 랄> 등은 청해 호 주변과 신 강성 토 노번의 북쪽지방에 있었다는 역사해설은 고금이 똑같다. 여러분(네티즌 자유 게시판)이나 대한민국 주류사학계에서는 고금(古今)의 역사기록을 완전 무시하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는 조물주 한 분으로도 충분하다.

   명나라를 건국시켜 명나라의 태조가 된 “주원장” 그의 휘하 장군들 즉 <총 병, 참장, 도독>들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자신들이 새롭게 만든 나라의 영토 중에서 동쪽의 변경지방을 순시하는 도중의 일(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동변(東邊)은 동쪽의 변경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명나라의 동쪽 변경이 토 곡 혼의 땅과 와 랄 의 동쪽에 있던 올 량 합의 땅이었다고 했을 때 그 동쪽지방에는 어떤 나라가 있었는가, 바로 조선(朝鮮)이었으며, 그곳이 조선의 서쪽변경이며, 명나라의 동쪽변경이 되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문집 속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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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二十二年,韃靼別部那孩擁三萬眾入大寧,金山,涉老河,攻殺三衛頭目伯顏等,掠去人畜以萬計.三衛乃相率攜老弱,走匿邊圉.邊臣劉潺以聞,詔予芻糧優颻之】

   ▶ 22年, 달단의 별부 那 孩 擁(나 해 옹)이 三 萬(삼만)의 무리를 이끌고 老 河(노하)를 건너(涉: 건널 섭) 대 녕 (大 寧), 金山(금산)에 들어왔다. 공격하여 三衛(삼위)두목 백안等을 殺害(살해)하고, 사람과 가축을 약탈해 갔는데 萬(만)에 달했다.

   ❈ 韃 靼(달단)은 <와랄>의 동쪽에 있다고 明史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달단(韃 靼)은 신 강성 토 노번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곳의 남쪽과 서남지방 등에 있었던 삼위(三衛)의 땅에 쳐들어 온 것이다. 이곳은 명(明)나라의 동(東)쪽 변경지방이다.

   달단(韃 靼)이 대 녕(大 寧)과 금산(金山)에 들어가 노하(老 河)를 건너 삼위를 쳤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금산(金山)”이 어디에 있었던 산일까를 알아보자.

   ▶▶ 金山(금산) - (1) 감 숙성 山丹 縣 西南.   (2) 감 숙성 西 寧 縣 西 70里.

   물론 금산(金山)은 천산(天山)이나 천산산맥 중의 한 봉우리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열전의 기록내용과 지리적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보면 <산단 현 서남과 서녕 縣 70 리>에 있는 금산(金山)일 가능성이 많으나 어느 것이 확실한 것인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두 산이 있다는 곳은 먼 곳이 아닌 같은 감 숙성 내이다. 달단의 지리적 위치를 보면 ; 산 단현일 가능성이 많다. 이곳에서는 흑수(장 액 하=약수)의 발원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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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三十年,薊遼總督何棟購捕至京,伏誅.朵顏通罕者,俺答子辛愛妻父也.】罕(그물 한) : 甘숙성(列傳 哈 密편 參照) 燉황현 서쪽지역

   30년, 계요(薊 遼 : 계지방과 요지방의 총독)총독 하동구가 경(京: 왕성. 서울)에 이르러 주살되었는데 타안(朵 顔)과 한(罕)자들은 통하는(왕래하는) 자들인데, 암 답 자(庵 答 子) 신의 사랑하는 처(아내)의 아버지(장인)이다. (암 답의 아들인 신(辛)의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라고 해도 상황은 똑같다).

   ▶▶▶罕 東(한 동)은 甘(감)숙 燉(돈)황현 동남에 있으며, 明(명) 나라時에 設置(설치), 燉황성내에 罕 東(한 동) 좌위가 있었다. 따라서 罕(한)지역은 燉황현 서쪽지역을 말한다. “타 안”과 통하는 것은 罕 者(한자)들 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은 사주지로(하서회랑)로 들어가는 중간지역인 돈 황의 동서(東西)지역에 있었던 종족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에 있던 타안 (朵 顔)은 명 태조 주원장이 설치한 세 개의 위(衛)중에서 하나였다.

   계요(薊 遼)총독이라면 계(薊)지방과 요(遼)지방을 다스리는 총독(總督)이다. 여러분들은 계(薊)는 현 河북성에,  요(遼)지방은 동북삼성지방에 요수 또는 요하주위를 말한다고 하니 “계요(薊 遼)”지방은 현 河북성과 동북삼상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이란 말이다.

   이러한 계요(薊 遼)총독이란 자가 일만 리쯤 떨어져 있는 하서회랑의 돈 황(燉 煌)주위에서 살아가던 자들과 무슨 연관성이 있겠는가. <계요(薊 遼)>지방은 돈 황(燉 煌)의 동쪽지방에 있었다. 이곳의 총독이 삼위(三衛)들을 다스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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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朝鮮)의 역사 전개과장이나 조선(朝鮮)의 영토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과장이 아니다. 그렇게 쉽게, 그렇게 간단하게 판별이 된다면 “잃어버린 역사”란 말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거창한 제목보다는 내실이 중요하며,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2009년    02월     22일

                                                                                                     필 명 : 문     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