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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이병도의 신수 국사대관의 친일사대모화관

monocrop 2009. 2. 19. 00:21

이병도의 신수 국사대관의 친일사대모화관

 

글 : 대수맥 / http://www.coo2.net/네티즌 자유게시판 15592 / 2009-02-18

 

 

 

제가 [앵무새]의 영원한 떡밥] 환단고기 23가지 실증사례 반박을 보고[2] 부분을 작성하는 가운데 그가 첨부한 <이병도에 대한 모함> 부분의 그가 말년에 최태영박사의 충고를 들어 잘못됨을 뉘우치고 역사관을 수정하였다는 조선일보 기사는 처음부터 사기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국사대관]을 들어 이병도의 고조선 실체를 인정하고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 관점은 변한게 없다는 강변에 저도 어렵게 [신수 국사대관]을 거금 2만원을 들여 구입한 다음 읽어 본 결과를 올려보았습니다.   이 자료는 앞서 말한 저의 반박글에 인용할 것입니다.    좋은 지적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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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신수 국사대관의 친일사대모화관

[머리말]

역사서에 있어서 <총설>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독자로 하여금 그 저서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과 윤곽을 인식하게 하며 또한 역사를 보는 시각이나 관점을 정립하게 하고 그런 바탕 하에서 본장의 의미를 해석하는 기준을 저절로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진행시켜 나갈 내용의 이정표는 물론이고 그가 지닌 역사관의 핵심을 말해주는 본질적인 학문적 자세라고 볼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다시 말해 쓰는 사람의 역사관이나 책 전체를 관통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전체의 흐름을 지배하는 원칙을 규정한다.   그만큼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체계와 내용으로 본 핵심사관]

<제1편  총설>  

□  제 3   지리적 조건에서(7p 2행, 8p 9~12행, 9p 15~16행)

전형적인 반도사관에 기반을 둔 민족의 정체성(停滯性)과 부정적인 성향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의 반도 비정 등의 입장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태도가 여실하게 보인다.   일제강점기의 우리역사 왜곡의 논리적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식민사관]의 핵심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예시>

1) ......고대 조선의 문명이 (반도)서해안 지대에서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이러한 지리적 조건이 일찍이 부락과 소국의 할거독립을 용이하게 하고......상호배제, 시기, 질투 등 양협(量狹)의 습성......반도의 지리가 인성(人性)에 미친 영향이 크다.
3) ......철을 산출하여 한(韓-진한*마한), 예(濊-함경도), 북방 한인(漢人)의 이군(二郡-낙랑과 대방)에 대하여......
4) ......단, 한국은 그 지리적 여건의 적의성에 따라......적극적인 진취적인 활동보다도 보수적인 침체적인 생활이 더 많았던 것은......(제2 국사의 의의  5p  12~15행)

□  제4   한국민족의 구성

반도에 구석기시대가 없다는 추론을 빌미로 삼아 우리 민족 원류의 흐름을 신석기 시대로 비정하면서 반도안의 원주부족과 연결시켜 대륙 서북방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 발전하여 국가를 이룬 역사를 통째로 잘라버리고 반도에서부터 정착 발전해온 존재임을 은연중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야말로 전형적인 <조선사편수회>의 역사연구태도와 비슷하다.

<예시>

1) 원조선족인 맥족(貊族)은 어떻게 하여 대륙 북방에서 동진하여 반도로 들어오게 되었는가?......신석기시대 초중기로부터 동진하여......그 서편과 반도로 물결쳐 내려왔다.

□  제5   원시 사회(19p 말행~20p 5행)

또한 인류문화의 발전을 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구분 짓는 대원칙 아래 우리 문화를 석기에서 철기로 진행한 변칙적인 단계로 슬그머니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철기문화(漢族의?)의 직수입이라는 의도적인 방향으로 유도하여 청동기문화를 발달시킨 고조선을 고의적으로 삭제시키려는 왜곡과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서술체계에서도 <우리 반도에서는....>이라 하여 만주의 역사를 제외시킨다.   나중에는 이런 맹점을 호도하기 위해 일제의 전형적인 조어(造語)인 <금석병용기>라는 단계를 유례없이 적용하여 우리민족 발전단계를 꿰어 맞추게 된다.   이야말로 <일제식민사관>의 논리적 전개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다.   말미의 결론으로 <역사는 금석병용기에서 시작한다. >   참으로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예시>

1) 인류 문화의 발전이 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3대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우리 반도에는 청동기시대를 거치지 않고 철기시대로 들어 온 일종의 변칙적 발전이.....석기시대의 말기에 철기문화가 직수입된 까닭이다.   석기시대 말기에는 흔히 청동기를 병용함으로서 이를 금석병용시대라 하거니와......역사는 금석병용기에서 시작한다.

□  시대의 구분

여기에서도 미리 단정해 둔 의도에 따라 진행시켜나가는 경향성을 보이는데 시대 구분을 1)한군현 설치 이전의 동방사회  2)한군현 설치 이후의 동방사회로 교묘히 재단하여 우리 역사가 한군현 설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큰 의미로 부각시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한군현의 지배로부터 이어져 온 듯한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 내용에도 중심축에 한군현을 자리매김하여 한군현-후방계열 제 사회 혹은 민족 미 통일 일부 피 침략시대로 강조하여 민족의 왜소성과 식민성을 부각시키며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시키는데 애를 쓴다.  전형적인 <일제 역사관>의 신봉이다.  

<예시>

1) 나는 역사의 제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고 한다.
  ○ 한군현 설치 이전의 동방사회 - 고조선과 그 주변 제 종족*부족사회
  ○ 한군현 설치 이후의 동방사회 - 한사군과 후방계열의 제 사회
   ⇒ 민족 미 통일 일부 피 침략시대
  
<제2편  상고사>

□  제1  고조선과 주위 제 종족 및 한(漢)민족과의 투쟁(22p 말행~ 29p 2행)

고조선 역사를 <단군*기자*위만조선>으로 구분하면서 <단군조선>의 실체를 고대 민족국가 형성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단지 수호신(守護神)을 숭상하는 신단(神壇-신역神域) 중심의 원시종족사회의 신정(神政)사회로 폄하시켜 은연중에 국가적 형태와 정치제도를 갖춘 영역국가체가 아닌 초기 부락*읍락단위사회로 축소 규정함으로서 고대국가로서의 형태를 희석시키는 논리적 귀결을 유도한다.

이미 일제의 글자변조로 밝혀진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는 국가적 의미를 <昔有桓因>이라는 개인적 서술의 입장으로 고수하는 태도(그는 지속적으로 桓因을 고집하는 입장을 변하지 않는다)를 보이는데 환웅(桓雄)을 수호신*종족신으로 神壇을 祭壇으로 신단수(神檀樹)를 神의 강하단계 또는 神의 주처(住處)의 상징으로 만드는 가운데 桓雄天王의 천왕을 의도적으로 고대 동방수호신격인 山王*仙王과 동일시하고 수호신에는 女神이 있어 이를 神母*聖母라 한다 하여 모계사회의 잔존유풍이 깃든 무속신앙의 주체로 만들어 버린다.  

아울러 “불전(佛典)에서 차래(借來)한 제석신명(帝釋神名)이다”라고 단정 지음으로서 불교의 윤색을 빌은 신화(神話)로서 인식하게끔 폄훼하여 단군 이전시대의 역사를 일거에 말살시킴으로서 단군조선이 초기 읍락사회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일본사학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런 입장은 [참고  단군고기에 대한 신 해석]이라는 부기(附記)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한 天王(환웅)의 아들로 연결시킨 단군은 자연스러운 논리의 귀결로 天王을 봉사(奉祀)하던 祭主의 성격을 부각시키는 동시에(그는 여기쯤에서 또 한번 <삼국유사>에서만 <神壇樹>로 표현한 壇을 전부인양 내세워 <檀君=壇君>이라는 등식으로 교묘히 들먹여 뜻한 바대로 논지를 만들어간다) 馬韓의 天君과 檀君의 용례가 같다는 주장을 하여 고조선 국가의 제왕(帝王)으로서의 의미를 애써 축소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구태여 天君이라고 하지 檀君이라는 독특한 용어를 썼는지 설명해주어야 한다.   이어 <최남선>씨를 거론하면서 다시 한번 의도한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는데 <당굴>의 對譯이라 들먹이다가 결국 <무당 巫무>으로 속화(俗化)시켜버린다.  

그는 또 왕검(王儉)이라는 이름에 이르러서는 그 존재를 지울 수 없었는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군장이라는 해석을 내리면서도 종전의 祭政一致의 神政時代를 빙자하여 檀君을 祭祀長으로 격하한 입장을 바꾸어 제정이 분리된 후의 다른 존재인 政治君長이라 설명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보이고 있다.   檀君王儉은 분리되어 나타나지 않은 존칭(尊稱)이 아니었음을 모르는가?   아울러 이번에도 전형적인 수법으로 王儉마저 馬韓의 신지(臣智)*읍차(邑借) 등과 동일시하게 유도하여 하나의 부락사회 소군장으로 축소시켜 버린다.

아무튼 <기자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례없이 존속한 [단군왕조]를 신화적인 존재인 天王을 숭배한 일개 소도(蘇塗)의 祭主요 제사장이며 무당의 입장으로 전락시키면서 겸칭(謙稱)한 <왕검>도 마한사회와 교묘히 연결시켜 읍락사회의 정치군장이라는 개념으로 폄훼*왜곡하여 고조선 사회의 국가적인 실체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선입관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둔다.

[참고]  

그는 아예 더 나아가 <한국고대사 연구-단군설화의 해석과 아사달 문제>라는 글에서 <유사遺事>의 <與高(堯)同時>를 들어 고조선의 개국년도를 중국고전의 이른바 당*요(唐*堯)의 시대에 구한 이유가 무엇인가?(허다한 중국의 고제왕古帝王 중에 하필 堯시대를 택하여 여기에 비정하였는가가 도리어 우리의 흥미를 이끄는 문제라 하겠다는 둥) 라고 능청을 떨다가 곧장 얼굴을 바꾸고 사정없이 폄하하기 시작한다.

-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음과 같이(?) 역사적 의식과 민족적 자존심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우리의 역사적 발족이 중국의 그것과 같이 구원하며 堯帝(그는 우리의 역사를 뭉개면서 신화적 설화가 많은 堯에 대해서는 깍듯하게 帝라는 칭호까지 붙여 실체화시키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말할 것 없이 중국의 가장 오랜 역사고전인 <상서尙書> 첫머리에 오른 제왕의 이름이니 그런 것이다.   이런 의식과 자존심은 이미 고려 이전 고구려시대로부터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 다른 하나는 <상서 요전>의 <분명희중 택우이왈양곡 分命羲仲 宅嵎夷曰暘谷>에 근거를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우이>는 산동반도 <동이東夷>의 이름이요 <양곡>은 즉 <양곡 陽谷>으로 <동표일출처東表日出處>를 말함이니 후에 말할 <아사달阿斯達>*<조선> 등과 동의어인 <양곡>이라든지 <우이>의 이름이 <요전>에 나타난 걸 한 꼬투리로 삼아 고조선의 건도개국을 요시대에 구한 것이 아닐 런지?
- 다음으로 단군의 <어국일천오백년御國一千五百年>이니 <壽一千九百八歲>니 또는 그 계산이 잘못되었느니, 혹은 그 <어국향수御國享壽>는 일인의 것이 아니라 단군상전의 역년의 수라는 등의 문제는 여기에서 논란하는 것이 도리어 어리석은 일이므로 이는 덮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기에서도 일관성 있고 꾸준하게 고수하고 있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 연대를 끌어내리려는 <일제사대와 모화사관>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팁 Tip>

원래 [제정일치祭政一致]는 처음 국가가 형성되면서 점차 권력이 집중화되어가는 과정에 실권을 장악한 집단이 그가 가진 권위와 정통성을 담보하기 위해 생겨난 산물이다.   <하늘의 아들>이나 <천손天孫>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그걸 확산 고착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다시 <天帝*天王>이라는 개념을 도출하여 권위를 신성화하는 제의권(祭儀權)과 현실적인 통치권인 군정권(君政權)을 틀어지는 발현양태이다.   이는 처음 군장사회의 연합체에서 대군장(大君長)을 선출할 때 호선(互選)의 방식에서 점차 선양(禪讓)의 형태를 보이다가 마지막에 한 집단이 천제(天祭)를 주관하는 제의권(祭儀權)을 행사함으로서 통치 권력을 정당화하면서 장악하여가는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후 현실적인 통치권이 확립되어가자 이제는 의미가 퇴색해진 제의권(祭儀權)이 형식화되어가는 과정에서 祭政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다(주周나라가 상商을 치면서 하늘을 바꿀 수 있다고 한 말이나 복사卜師*정인貞人의 예를 살펴보라)   그런데 <이병도>는 이걸 정말 이상하게 같다 붙여 단군조선을 억지로 왜소화시키는 도구로 악용한다.

<예시>

1) 고조선의 역사는 재래에 이를 흔히 3대 시기로 나누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함이......단군조선에 대하여 고대 우리 민족사회에 공통된 어떤 형태인 수호신(守護神)을 숭봉(崇奉)하는 신단(神壇-신역神域) 중심의 원시종족사회의 정치인 신정(神政)사회의 모습을 반영시켜준데 지나지 않는다.
2) 檀君 古記에 나타난 환웅천왕과 웅녀는 그때의 수호신*종족신이요.   神壇은 祭壇으로 신단수(神檀樹)는 神의 강하단계 또는 또는 神의 주처(住處)의 상징......
3) 桓雄의 父라 하는 天帝桓因의 이름은 불전(佛典)에서 차래(借來)한 제석신명(帝釋神名)이나 이는 後來 불교도의 윤색한 바일 것이므로......古來 동방에서는 수호신을 흔히 天王 혹은 天王郞이라.....그래서 이를 山王 또는 仙王이라 한다......또 남조선지방의 수호신(天王)에는 여신이 많이 있어 이를 노고(老姑) 神母 聖母라고 하거니와 이것은 일종의 모계사화 잔재(殘滓) 유명(遺名)이라고 보아야 하겠다......요컨대 환웅은 고조선의 시조신인 동시에 國人의 생명*재산*선악*길흉을 맡은 남성의 수호신이다.
3) 어느 민족의 역사고전(歷史古典)치고 처음에 신화전설(神話傳說)로 시작되지 아니함이 없고 특히 개국시조(開國始祖)에 관하여 種種의 神異한 說話가 짝하여 있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시조의 유래출생이 흔히 신이비상한 양으로 믿고 또 그렇게 꾸며서 운운.....
4) 단군은 즉 이 天王의 아들이라 하여 天王을 봉사(奉祀)하던 고조선사회의 祭主요 군장이었던 것이다......檀君(일작 壇君)의 稱은 육당 최남선씨의 설에 의하면 꼭 <당굴>의 對譯인지 아닌지......神政社會의 군장의 직능이 祭主인 무당(巫)의 직사(職司)를 겸하였던 것은......단군의 稱은 마한의 天君과 같은 이름으로서 정치군장의 의의보다도 제사장(祭祀長)의 의의를 내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檀君의 元稱이 壇君으로 되어......실상 神壇에 奉祀하는......

그러면 왜 이렇게 <이병도>의 <신수 국사대관>을 통해 단군조선사 2천여 년이 신화(神話)로 몰려 부정되면서 오늘에 이르도록 그 역사가 싹둑 잘려나가는 엄청나게 잘못된 사태가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따른 일본의 우리 역사 왜곡*축소하기와 그에 충실하였던 일제 강점하의 한국의 식민사학자 집단들과 그 후학들의 조작 및 폄훼 농간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단군조선을 대표적으로 부정하는 일제식민사학의 첫 기록을 여기에 들어둔다.

일본의 사학자 동경제대의 시라도리(白鳥庫吉)교수가 AD 1894년 단군고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仙談)이라 했으며 이어서 나가통세(那珂通世)는 AD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도(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대사를 지칭)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조작했고 1902년 금서룡(今西龍=이마니시류 이병도 박사의 스승)의 「단군고」등이 이를 충실하게 뒷받침하여 단군을 철저히 부정했다.


<팁 Tip>  환웅-단군신화의 현재적 의미

□ 桓雄神話의 재해석

[천강 天降]
서북만주지역에 자리한 환인(桓因)의 나라에서 남쪽으로 민족이동이 일어났음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서자 庶子]
고대의 경우 같은 배에서 난 아들은 물론 형제 자매의 아들도 차이를 두지 않고 모두 아들로 취급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을 모두 통칭하여 庶子라 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하시삼위태백가이홍익인간下視三危太白可以弘益人間]
- 내려다보니 삼위*태백이 인간을 홍익하기에 좋은지라 -

동북아시아의 형세로 보아 이 무렵 천손(天孫)으로 자처하던 桓因의 나라에서 동남쪽은 신천지였다.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환웅(桓雄-뒤에 이어지는 글로 보아 아마 무장집단武裝集團을 어우르는 일을 맡고 있었던 듯 하다)이 개척하여 그곳 부족들을 교화하기를 희망한 것이다.   여기에서 <삼위태백>은 <서경우공書經禹貢>이나 기타 史書에도 나오는 현실적인 山名으로서 그들의 이동경로와 지향점(指向點)을 보여준다(삼위에서 태백까지).

[천부인 天符印]
한 민족의 주류에서 갈라져 이동을 하는데 계통의 동일성을 강조하거나 명을 받든 신분으로서의 권위를 위임하는 신표(信標)나 호부(護符)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세에도 군장에게 내리는 도끼(부월斧鉞)이나 대장군이 출진하는데 어검(御劍)을 하사하는 예를 보아라!   맨체스터 학파의 <엘리오트 스미드>도 고대 민족 이동의 형태에 관해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참고로 <산해경>에서 우리를 가리키는 군자국(君子國)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의관대검衣冠帶劍> 풍습이나 우리 사서 가운데 고(鼓)를 중시하는 경향을 주목하기 바란다.

[웅솔도삼천 雄率徒三千]
古代에는 중(衆)이 곧 용사였다.   더구나 이동시 무장집단이 매우 중요시되는 것은 古來의 상례(常例)인바 그 무렵 3천이라는 즉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집단의 규모는 가히 상상을 넘는다.   한 마디로 강력한 위세를 갖춘 무력집단으로서 환인의 나라(桓國환국)가 그 정도 수준의 병단(兵團)을 서슴지 않고 내주었다는 사실은 주변 어느 곳에서도 두드러진 국력을 가진 국가라는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 고대기록에 小發兵은 100인이며 大發兵을 1000인 이라 했으니 전사집단인 3000인의 도(徒)는 상당규모의 집단이동이며 침입군으로 보여진다.

[강어태백산정 신단수하 위지신시 降於太白山頂 神壇樹下 謂之神市]
<태백산 꼭대기에 내려왔다>는 말은 환웅의 진군에 대한 최종정착지를 이름이다.   <신단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인 <신목사상神木思想>을 일컬음에 다름이 아니다.   혹은 동음반복으로 보아 <박달>에 이른 것을 <태백산 신단수>로 하였을지도 모른다.   <밝달=박달=배달>은 모두 <白山=白岳=백아강白牙崗>으로 넘나든다.   그리고 그곳을 새로운 도읍(新市=神市 새로울 新의 훈독訓讀이 동음차자同音借字의 음독音讀으로 전화된 걸로 추정된다)로 정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민족의 이동시 특징으로 <솟대>와 <동복銅鍑>, 정착 시 특징으로 산을 의지하여 가장 위쪽에 수장(首長)의 택(宅)을 그 아래 언덕에 휘하족장들을 맨 아래의 들을 바라보는 곳에 부족민의 거처를 정해 형세를 관망하여 유사시 즉각 대처능력을 극대화 하던 풍습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말로 단군은 <박달검>으로서 <白山神=檀樹神>을 모두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神壇>도 <祭壇>으로 풀어 제주(祭主)로 해석할 게 아니라 <박달의 검>으로 해야 맞다.

[천왕 天王]
중국 고대에 보이는 天子라는 칭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미 모든 인간(部族부족)의 왕으로서 하늘의 뜻을 받든 존재라는 존칭(尊稱)이 기록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 보이는 最古最初의 칭호로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실적으로 통치권력을 장악한 강력한 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줌에 다름이 아니다.

[풍백 우사 운사 風伯 雨師 雲師]
이미 桓雄을 보좌한 세 측신(側臣)이 있었음을 반영해주며 그 가운데 북(鼓고)을 치며 따른 <우사>와 백검(伯劍)을 쥐고 따랐던 <운사>의 기록으로 보아도 일정 수준의 무장집단에 관한 존재를 짐작케 해준다.

- 風伯은 天符를 거울에 새겨서 들고 나아가며 雨師는 북을 치며 뒤에서 따라가고 雲師는 伯劍으로 왕을 호위했다 <삼한관경본기>

□ 檀君神話의 재해석

[시유일웅일호동혈이거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동북아시아에서 최고의 맹수가 무엇인가?   범과 곰이다.   그만큼 강력한 주력 집단을 단군은 회유하거나 정복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아직 발달된 단군족단을 따라오지 못하였음은 혈거(穴居)와 같은 삶을 살았음으로 비유하고 있다(혹은 두 부족이 원래 같은 혈통에서 갈라졌음을 은유한 걸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다)   이 가운데 배척을 당한 虎族이 후일 동예(東濊)부족과 상(商)나라로 연결되어진다는 점을 명심하면 비로소 신화가 실체로 드러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견일광백일 편득인신 不見日光百日 便得人身]
전후의 기록을 살펴보면 곧 정복전투가 벌어졌음을 추정가능 케 하며 결국 패색이 짙은 두 부족을 포획하여 가둠으로서(전투에서 포획 감금까지를 100일이란 상징적인 숫자로 표현한 듯 하다-이를 타부로 생각하니까 신화적 요소가 발현하는 것이다) 이에 호족은 포위망에서 벗어나고 곰족만이 결국 승복하여 <인간다운 삶의 혜택>을 누렸다는 비유이다.   자꾸만 주술적 의미로 해석하여 신화적 측면을 강조하는 <쑥과 마늘>도 단군의 명을 수행한 감시부대로 추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 환웅이 햇빛(日光일광)을 보지 말라 한 것은 햇빛이야말로 해님의 빛 즉 왕권을 상징하므로 이제부터 주인이 누구인가? 를 깨달으라고 그런 것이다.

[무여위혼 고매어단수하 주원유잉 웅내가화이혼지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 결혼해주는 이가 없는지라 항상 단수(壇樹) 아래서 축원하되 아이를 밸 것을 말하니 환웅이 이에 인간으로 화하여 웅녀와 결혼하다 -

이는 우리 고대의 전형적인 통과의례(通過儀禮)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이칼 정주(定住)때부터 생겨난 풍습으로 이주족(移住族)과의 인식절차가 끝난 후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원주족(原住族)과의 통혼절차가 시작되는데 이때 原住族에서 여자를 보내어 받아들이면 통혼이 이루어지고 안 받아들일 경우 여자를 살해해 되돌려 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