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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史, 하북성 대통하는 白河,楡河,渾河의 합수: 현 혼하는 조선 압록강으로

monocrop 2009. 2. 17. 22:39

明史, 하북성 대통하는 白河,楡河,渾河의 합수: 현 혼하는 조선의 압록강으로

글 : 솟대 / http://www.coo2.net/네티즌 자유게시판 15589 / 2009-02-17 12:36:42

 


그림 1. 동북지역 개략지도 [난하<영정하>와 압록강<삼차하, 현 요하>]


혼하<渾河>에 대하여 명사<明史>는 분명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명말기 만력제때까지도 혼하<渾河>는 하북성-북경시일대에 위치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신교본명사新校本明史 / 지志 / 권卷 八十六 / 志第六十二 하거河渠 四 / 운하運河 하下

[풀이]
대통하<大通河>는 원<元> 곽수경<郭守敬>이 그것을 뚫었다. 대통교<大通橋>동쪽 아래에서부터 통주<通州> 고려장<高麗莊>까지 밀어 젖혔으며  더불어 백하<白河>와 합류하는데 바로 고하<沽河>에 이르르며 하수가 모이어 바다로 들어간다. 길이는 백육십여리가 넘게 되면 십리마다 수문<閘>이 하나 있어 물을 저장하여 쓸모있게 운용하였으므로 이름을 통혜<通惠-은혜를 두루 베풀다는 뜻>라 하였다.
또한, 백하<白河>, 유하<榆河>, 혼하<渾河>와 합류하여 다시 이름을 로하<潞河>라고도 하며 홍무<洪武>중에 점차로 폐하였다.

[원문]
大通河者, 元郭守敬所鑿.由大通橋東下,抵通州高麗莊,與白河合,至直沽,會河入海,長百六十里有奇.十里一閘,蓄水濟運,名曰通惠.又以白河、榆河、渾河合流,亦名潞河.洪武中漸廢.


그런데, 명사明史에서 현재의 만주에 있는 현재의 혼하渾河를 처음 언급하는 것은 이전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명 멸망기에 이르러서야 처음 언급합니다.


그림 2. 명사明史본기의 시기별 혼하渾河기록 - 明말기 만력제때의 혼하渾河도 하북의 수계로 기록


이렇듯, 명나라 멸망기외에는 명왕조의 존속기간동안 혼하渾河는 사서에서 백하白河<조백하>,楡河<온유하>와 더불어 하북성의 대통하大通河<=통혜하通惠河=로하潞河>의 한 지류인 현 하북성의 혼하<渾河=량수하凉水河>만을 오직 가리킬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와 명나라가 혼하渾河라 부른 것이 하북의 대운하인 대통하大通河의 지류 혼하<渾河=량수하凉水河>였었는데 도대체 만주에 있는 현재의 혼하渾河는 그 당시에 무엇이라 불렀던 것일까요?


그림 3. 19C전반의 여지도 직예성지도의 순천부일대  - 조백하<朝白河>가 순의현 서쪽에서 남류함


그림 4. 청말민국초 19C말 고지도 - 조백신하<朝白新河>의 수계가 등장함, 순의현 동쪽에서 남류함


그림 5. 북경시 아래쪽의 수계들, 통혜하<通惠河>, 혼하<渾河=량수하>,  난하<灤河=영정하>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등으로 고려해보건대 저는 조선<朝鮮>의 압록강이었음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류지역인 삼차하<요하의 현재의 동요하,혼하,태자하의 합수후의 하류>는 명나라가 멸망할때까지 조선-명의 변함없는 압록강이었으되 그 압록강 상류지역에서의 朝鮮과 明의 경계를 가누는 국경선은 지나인들의 영토확장야욕에 의해 고려멸망직전에는 현재의 동요하를 국경으로 하다가 강계부의 明 귀부와 위화도 회군이후 점차 후퇴하여 세종조에는 현재의 혼하를 국경으로 하고 임진왜란전후로 후금이 등장할 무렵에는 현재의 태자하까지 밀려난 것으로 추정되어집니다.

조선왕조 전기, 즉 명나라시대의 국경은 임진,병자등의 전란이 일어나기전까지 국제정세가 안정적이었던 대부분의 시기에는 압록강<鴨綠江>, 즉 현재의 혼하<渾河>를 경계로 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이전에 소개드린 태종조의 기록에도, 태종 11년(1411년)인 명明 영락제때 후금의 선조 동맹가첩목아가 개원로<開元路>로 이주하였음을 밝히면서 그곳이 바로 봉주<鳳州>로  “봉주(鳳州)는 곧 개원(開元)이다”라고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압록강에 봉주(鳳州)가 있었음은 맞지만 조선 태종때에는 현재의 조작된 압록강이 아니라 당대 조선의 압록강인 혼하<渾河>북변에 봉주<鳳州>가 있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현재의 봉주<鳳州>는 명대의  봉주<鳳州>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

4월 26일(병진)  
동북면 오음회의 동맹가첩목아가 개원로로 이주하다
太宗 21卷, 11年(1411 辛卯 / 명 영락(永樂) 9年) 4月 26日(丙辰) 2번째기사

동북면(東北面) 오음회(吾音會)의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가 개원로(開元路)로 이주(移住)하였다. 오음회는 올량합(兀良哈)의 지명(地名)이다. 맹가첩목아가 일찍이 경원부(慶源府)를 침범하였다가, 그가 정벌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봉주(鳳州)로 이사하였으니, 봉주는 곧 개원(開元)이요, 김어허출(金於虛出)이 사는 곳이며, 어허출은 바로 황제의 제 3 황후(第三皇后)의 아버지이다.

○東北面吾音會童猛哥帖木兒, 徙于開元路。 吾音會, 兀良哈地名也。 猛哥帖木兒, 嘗侵慶源, 畏其見伐, 徙于鳳州。 鳳州卽開元, 金於虛出所居。 於虛出, 卽帝三后之父也。

【태백산사고본】 9책 21권 17장 B면
【영인본】 1책 580면
【분류】 *외교-야(野)


그림 6. 건주위 치소였던 봉주(鳳州), 즉 개원(開元)의 현대지도

이렇게 대략 새로이 추정되는 조선왕조때의 조선의 강역을 살펴보면 현재의 강단이 말하는 동부여와 고구려쟁패시기의 강단이 말하는 고구려강역과 같습니다.

강단이 말하는 고구려강역은 축소된 고구려강역임은 이미 여러 사실로 분명한되 그 실상은 바로 조선왕조의 강역이 아니었을까요?

일제가 남긴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사 36권>은 조선왕조 전기의 강역을 고구려강역이라 견강부회하는 작업이 아니었는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림 7. 강단이 제시한 고구려강역도 [초기 고구려강역이 새로운 조선왕조 추정 강역의 북계와 비교해 거의 비슷하다]
사진출처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1249365

 


 

<< 좌계선생님 부탁하신  조선 전기때- 명나라 시대 -  압록강 국경선 >>

조선전기도 선조때의 강역은 태자하쪽으로 더 축소되었지만 명나라가 존속하였던 대부분의 시기는 혼하를 국계로 하였다고 보여집니다.
단, 혼하라인에서 축소된 것이 조선 성종때부터인지 명종-선조때부터인지는 사서들-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의 기록이 혼선되는 부분이 있어 확정적인 시기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빠르면 성종대왕때부터 늦으면 이여송의 아비인 이성량이 활약하던 선조때부터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개략적으로 보신다면 혼하를 따라 그으시면 대략 맞다고 보여집니다.
혼하상류이동으로는 조선의 동북계로 야인여진정벌이 활발하였던 성종때까지는 거의 길림성과 요녕성 교계를 따라 북으로 올라갔지만 중종이후 명종,선조때에는 점차 조선의 동북계가 남으로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대략, 이성량 등장전까지는 조선에 려진이 복속되었으므로 조선강역으로 단순히 보셔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물론, 이는 청나라때가 아닌 명나라때 조선과 명의 국계임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나라때는 이보다 후퇴합니다.  청나라때는 조선의 강역변화가 가장 변화가 극심했던 시기인지라....


별첨 1.  명대의 조선국계라인추정 : 혼하 라인 ~ 길림.요녕 교계


별첨 2.  휘발하의 지류인 아길선하, 도문하(=토문하),삼둔하가 보인다.


좌계 (2009-02-17 17:45:31)  
/솟대님
조선(朝鮮) 시대의 압록강(鴨綠江)이 <혼하(渾河)-요하(遼河)>를 연결하는 선(線)으로 추정하는 것은 ‘정계비(定界碑)의 수수께끼’를 풀수 있는 ‘또 하나의 실마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향고도 님’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淸)과 ‘동(東)은 토문강(土門江) 서(西)는 압록강(鴨綠江)’으로 정계비(定界碑)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이 몹시 좌계에게는 혼란(昏亂)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즉 청조(淸朝)는 자신들의 조상(祖上)의 성지(聖地)이기 때문에, 국경(國境)을 조선(朝鮮)과의 마찰을 해소하기 위해 새롭게 정립하여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는데,
오늘날 두만강(豆滿江)이라고 칭하는 곳이 토문강(土們江)으로 표시된 지도도 현셜적으로 발견이 되고, 또 정계비(定界碑)가 있던 위치 역시 두만강(豆滿江) 상류 쪽임이 확실해 보입니다.

좌계가 “이 정계비(定界碑)는 미스테리이다.”라고 생각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두만강(豆滿江)으로써 경계를 삼는다면, 굳이 ‘청조(淸朝)의 조상들의 성지(聖地)’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재조정해야한다“는 것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향고도님’ 께서는 자신의 홈페이지 (http://blog.daum.net/sabul358)의 ‘만주 고지도 카테고리’에서 ‘토문하(土們河)가 표기된 동북지도-로국동방경영부전면’이란 글에서 새로운 토문하(土們河)를 발견하였읍니다.

좌계는 ‘향고도님’의 글을 읽으면서 아 ‘토문강(土門江)은 원래 정계비(定界碑)를 세울때 2개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쪽의 ‘토문강’ 사이는 조선(朝鮮)의 강역이긴 하나, ‘청조(淸朝)의 성지(聖地)’가 있는 곳은 예외라 한다.“는 것이 그 실질적인 내용이라고 좌계는 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좌계가 볼때에는 “조선(朝鮮)의 압록강(鴨綠江)도 2개가 되는 것을 원래 정계비(定界碑)를 세울 때의 실제 상황이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즉 오늘날 압록강(鴨綠江)이 조선(朝鮮)과 청(淸) 혹은 그 이전의 명(明)과의 국경선(國境線)이기도 하고, 또 솟대님이 말씀하신 요하(遼河)-혼하(渾河)라는 압록강(鴨綠江)도 국경선(國境線)으로 하기도 하는등 혼선(混線)이 계속 있었으나,

“정계비(定界碑)를 세울 때에, 2개의 토문강(土門江) 사이의 ‘청조(淸朝) 성지(聖地)’를 인정하는 대신 그간 혼선(混線)을 빚던 조선(朝鮮)의 국경 문제를 ‘솟대님’께서 말씀하신 압록강(鴨綠江)으로 확정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만약 이런 내용이 아니라면, 사실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는 협상을 무엇때문에 했으며, 또 조선(朝鮮) 측에서 그런 귀한 협상을 하였으면서도, 굳이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려 갈때에는 올라가지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좌계가 추측하는 대로 협상이 타결되었다면, 사실 굳이 올라가서 확인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솟대님’께서 말씀하신 요하(遼河)-혼하(渾河) 지역으로 조선(朝鮮)의 관리가 가서 확인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즉 청(淸)은 ‘청조(淸朝)에게 중요한 정계비(定界碑) 쪽인 두만강(豆滿江) 상류(上流)로!“
“조선(朝鮮)은 조선(朝鮮)에게 중요한 혼하(渾河) 상류로!” 각기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러 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봅니다.

이런 면에서 ‘솟대님’의 압록강(鴨綠江)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좌계는 보고 있습니다.

한가지 청(請)이 있다면, 지금 비정하는 요하(遼河)-혼하(渾河)의 국경선을 ‘댓글’로 지도(地圖)에 그려서 올려주실수는 없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