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1. 북경시 아래쪽의 수계들 통혜하<通惠河>, 혼하<渾河=량수하>, 난하<灤河=영정하>
드디어, 원元과 명明 초엽의 난하<灤河>가 현재의 영정하永定河라는 확증사료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미, 명사가 난주<灤州>의 위치를 밝히고 있었지만 그 이전의 역사서인 원사元史에는 직접적으로 대원제국시대에 난하<灤河>는 통혜하<通惠河>, 혼하<渾河>에 연결된 북경이남의 영정하永定河임을 천명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 원사元史 하거河渠편 서론에서 대원 울루스<元>이 완수한 방대한 치수사업을 설명하면서 역사상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전무후무한 이 치수사업을 오히려 명나라의 사관이 칭송하는 기록을 남기면서 그 기록에 난하灤河가 언급되어 나옵니다.
쌍탑<雙塔>,백부<白浮>의 모든 물길을 터서 연결하여 통혜하<通惠河>를 만들어 조운이 가능하게 하고 이 통혜하<通惠河>르 아래의 혼하<渾河,현재의 량수하凉水河>와 연결하고 이 혼하<渾河>는 아래로 다시 난수<灤水,현재의 영정하永定河>와 연결하여 북쪽의 조운수로를 완성하고 임청<臨清>에서 회통하<會通河>를 열어 남쪽의 산동,하남,안휘,강소,절강,호북등지에서 올라오는 조운<漕運>이 직접, 대원 울루스<元>의 수도인 대도와 연결되도록 하여 남북의 조운이 처음으로 통하게 되는 대역사를 완수하는 천하에 다시없을 공적을 세웠음을 《하거지河渠志》를 인용하여 사관은 떳떳이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속민의 위치였지만 화하족의 무리들이 하북성일대에 들어온 이후로는 최초로 하북과 그 이남을 연결하는 남북의 조운이 개통되었을 때, 남과 북의 재화와 조운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연결하천중 하나가 난하<灤河>로서 이는 수로로 위쪽의 혼하<渾河, 량수하凉水河>와 연결되었음을 아래의 원사元史기록은 말합니다.
더불어, 평란<平灤, 난수수계>을 언급하여 <난주灤州>위치가 영정하永定河일대임을 재차 밝혀 <명사明史>의 기록을 또한 둿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림 2. 북경시 아래쪽의 수계들
● 신교본원사新校本元史 / 志 / 卷六十四 / 志 第十六 하거河渠 一 / 서언序言
[풀이]
대원 울루스<元>는 수리<水利> 사업을 들어 일으키기 위하여 천하에 안으로는 도수감<都水監>을 세우고 밖으로는 하거사<河渠司>를 거하게 하여 하천<河>과 제방<堤>을 고치고 다스리는 일에 힘썼다.
조운<漕運>을 성취하고자 쌍탑<雙塔>,백부<白浮>의 모든 물길을 터서 통혜하<通惠河>를 이루었고 이로서 경사<京師>는 향<餉, 군량,세곡>을 옮기는 고달픔이 없게 되었고 조운이 혼하<渾河>와도 통하고 난수<灤水>와도 트여서 연결 되었다. 그리하여 무청<武清, 혼하수계>과 평란<平灤, 난수수계>이 홍수로 물에 잠기어 빠지는 근심을 없게 하였다. 들판<冶>의 하천을 깊게 파내어서 호타하<滹沱河>를 둑으로 막았고 이로서 진정<真定>이 제방이 붕괴되어 침식되는 우환을 면하게 되었다. 남북의 재화<貨>를 통하게 하고자 임청<臨清>에서 회통하<會通河>를 열어 소통하였다.
밭<田>에 관개하여 물을 대고자 섬서<陝西>의 삼백<三白>일대에서는 강과 호수의 장마로 인한 요수<潦水>가 흘러나오는 것을 해<海,평원>위에 횡으로 둑<塘>을 세워서 막았다. 그리고 절강<浙> 우측의 백성들도 홍수의 환란에서 벗어남을 얻게 하였다. 당시의 휼룡한 계획적 수리<水利>사업은 태사<太史> 곽수경<郭守敬>등이 함께 하였고 아마도 그 사람들처럼 이러한 치수사업을 경험한 사람은 없었다. 일대의 공업이자 업적이니 나라가 멸망함이 맞지 않은 까닭이다. 지금과 옛날의 그 수리를 열고 닦은 세월이 분명하므로 공역<工役>의 다음 차례로 그 공업을 건너서 펼수 있게 하였으니 일의 뼈대를 베풀어준 것이로다. 《하거지河渠志》
☞ 곽수경郭守敬(1231~1316) : 대원 울루스<元>의 천문학자·수학자·수리학자<水利學者>로 도수감<都水監>을 맡아 대도(大都)에서 통주[通州]에 이르는 운하를 수리했다.
[원문] 元有天下,內立都水監,外設各處河渠司,以興舉水利、修理河堤為務。決雙塔、白浮諸水為通惠河,以濟漕運,而京師無轉餉之勞;導渾河,疏灤水,而武清、平灤無墊溺之虞;浚冶河,障滹沱,而真定免決嚙之患。開會通河於臨清,以通南北之貨;疏 陝西之三白,以溉關中之田;洩江湖之淫潦,立捍海之橫塘,而浙右之民得免於水患。 當時之善言水利,如太史郭守敬等,蓋亦未嘗無其人焉。一代之事功,所以為不可泯也。 今故著其開修之歲月,工役之次第,歷敘其事而分紀之,作《河渠志》。
[참조 - 한자사전] 수리水利 : 관개(灌漑),수차(水車),발전(發電),수도(水道)용 인수(引水)등을 위한 모든 물의 이용(利用) 제濟 : 이루다, 성취하다. 성공하다. 향餉 : 군량,군자금, 세금,세곡 점닉墊溺 : 물에 깊이 잠기어 빠지다. 설洩 : 흘러나오다. 퍼지다 음淫 : 장마 요潦 : 큰비, 길에 괸 물=요수潦水 해海 : 넓은 평원, 바다 준浚 : 깊다. 깊게하다. 야冶 : 들,들판, 초야 決 : [음가] 결. (둑,제방등)이 터지다.열리다 [음가]혈. ~이 무너지다. 붕괴하다. 교嚙 : 깨물다,침식하다. 상嘗 : 경험하다. 체험하다.
 그림 3. 19C전반의 여지도 직예성지도의 순천부일대
이제, 평란平灤이나 난주灤州나 갈석산등의 난하灤河일대의 지명을 현재의 산해관지역에서 찾는 차이나와 일본의 엉터리 조작역사는 민족사학계에서 쓰레기통에 넣어 폐기처분하여야 합니다.
더이상, 현재의 영정하일대이동에서 갈석산을 찾거나 한사군을 찾는 가설은 모두 역사조작의 범죄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 참조자료 ☆
<< 혼하渾河, 일명 량수하凉水河 >>
량수하는 북경지구의 일개 하천으로 북운하北運河의 지류이다.
풍태구豐台區 후니와촌後泥窪村에서 발원하며 풍태구豐台區, 대흥현大興縣, 통현通縣(통주구)을 차례대로 지나서 통주구通州區 곽현진漷縣鎮의 유림장榆林莊 갑문 상류에서 북운하北運河에 휘입되어 들어간다. 전체길이 58공리, 유역면적은 629.7평방공리이다.
지류로 초교하草橋河, 마초하馬草河, 마초구馬草溝, 대양방구大羊坊溝, 소태후하蕭太後河가 있다.
목전의 하도위에 4개의 좌란하갑座攔河閘-하천을 막은 갑문-을 세웠으며 대홍문갑大紅門閘, 마구교갑馬駒橋閘, 신하갑新河閘, 화장가만갑和張家灣閘이 있다.
* 마구교馬駒橋 - 통주구 마구교진馬駒橋鎭은 명대부터 고도시로 천안문 동남 20km지점 위치하며 북경서부운하인 량수하가 통과하며 현 인구는 39,000명이다. 량수하의 馬駒橋閘마구교갑이 위치하고 있다.
 그림 4. 혼하<渾河, 량수하凉水河>와 통혜하<通惠河>를 연결하는 혼하의 종점인 유림장榆林莊 갑문
 그림 5. 혼하<渾河>의 종점인 유림장榆林莊 갑문
<< 혼하渾河, 일명 량수하凉水河의 지류들 >>
1. 마초하馬草河 풍태구豐台區경내에 위치하며 차례대로 옥천영玉泉營, 마가보馬家堡를 흘러서 최후에는 량수하에 유입된다. 전체길이는 12.2공리이고 유역면적은 33평방공리이다. 그 상류에는 노구교盧溝橋 오수처리장이 있으며 하류로는 삼환로三環路와 남쪽으로 평행하게 흘러간다.
2. 대양방구大羊坊溝 대양방구는 북경시 동남교외의 하천으로 조양구朝陽區 좌안문左安門 밖 음마정飲馬井에서 발원하며 동남방향으로 향해 흘러서 통현通縣을 지나 흐르다 다시 남류하여 대흥현大興縣으로 유입되어 량수하에 휘입된다. 전체길이 13.5공리이고 넓이는 12-20m이며 유역면적은 18평방공리이다.
 그림 6. 대양방구大羊坊溝 하류와 량수하로의 합류지점
3. 소태후하蕭太後河 소태후하는 북경시 동남교외의 일개 하천으로 통혜배수간거通惠排水幹渠로 휘입된다. 요대에 건설이 시작되어 북경최초로 개착한 인공운하이다. 주요한 발원지는 동남 호성하護城河이며 그 지류인 호성하는 조양구朝陽區 노호동에서 근원한다. 물길은 서북으로 나아가다가 동남쪽을 향해 흐르며 원래 통현通縣경내에서 량수하에 휘입되었다. 1958년 개수공사후에는 조양구 마가만촌馬家灣村남부에서 통혜인수간거通惠引水幹渠에 휘입되어 들어오고 있다. 주요하도길이 11.85공리이고 유역면적은 21.83평방공리이다. 북경남부성구및 조양구남부의 주요 배수통로이다. 지류로는 남대구南大溝, 대교하大橋河, 옥대하玉帶河가 있다.
 그림 7. 소태후하蕭太後河의 지류들, 대교하大橋河, 옥대하玉帶河
 그림 8. 소태후하蕭太後河하류의 량수하로의 합류점
<< 북운하北運河 >>
북운하北運河는 북경시동부교외와 천진시를 흐르는 하천으로 해하海河의 지류이다. 통주通州를 흐르는 간류는 천진에 이르는데 즉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의 북단이다.
옛 이름은 백하白河이며 덧붙여진 수로는 로하潞河(=조백하)와도 합쳐진다. (인공운하를 통해 북운하와 조백하를 연결하는 수로를 뜻함)
창평현昌平縣, 해전구海澱區일대가 발원지이다. 남류하여 통현通縣으로 들어가며 통현通縣의 북쪽관문 상류는 온유하溫榆河라 불린다. 그런 후에는 북운하는 하북성 향하현香河縣, 천진시 무정현武清縣을 지나서 흐르며 천진시 대홍교大紅橋에서 다른 강들과 만나서 해하海河로 들어간다.
전체길이는 120공리이고 유역면적은 5,300평방공리이다. 지류로 통혜하通惠河, 량수하涼水河<=혼하渾河>、봉황감하鳳港減河, 용봉하龍鳳河가 있다.
조운漕運에 있어 인후하咽喉河-경항대운하의 종착기점에 인접한 중요 하천-로 서쪽을 담당하였고 일찍부터 최고의 전성기에 이르러 번성하였다.
 그림 9. 통주通州이북의 북운하수계 [19C이전에는 통주通州이전에 북운하에 합류하던 조백하물길이 20C의 수로사업으로 통주通州이남에서 합류하는 조백신하 물길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줌]
하북성 전체수계 : " http://www.coo2.net/bbs/data/con_4/hebei.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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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 과할런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난하는 명대후기에 만들어진 가짜라는 것입니다. 원사의 난하는 고구려의 강역추정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러니 성훈선생님의 고구려 산서성론과 부딪힐 일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찾아낸 난하는 왕건이 세운 고려시대의 강역과 지명에 관계될뿐 이를 근거로 삼국시대 강역을 찾는다면 언어도단이 되겠지요. 단, 이것으로 강단이 보는 갈석산은 고려시대 난하가 영정하이므로 고구려시대에는 최소한 이보다 서쪽에 있어야 보아야 하므로 강단의 갈석산론은 모두 폐기처분되어야 될 이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치우천왕의 탁록이 섬서성이라는 것과 충돌할 일이 없습니다. 고구려 멸망후 강역이 축소되어 하북성일대로 옮겨온 것 뿐이니까요.
원사에 나온 난하는 바로 고려왕조의 강역을 밝히는 사료로만 쓰일뿐입니다. 시대변천에 따라 차츰 강역이 축소되어왔으므로 언제 어떻게 이동했는지를 차분히 밝혀야 하는데 명사에 나온 지명으로 어떤이는 청대의 강역을 추정하고 어떤이는 고구려강역을 추정하기도 하기때문에 혼란이 있는 것입니다.
당대의 사서기록으로는 당대의 지리를 규명하는 사료로만 보고 그 시대가 아닌 경우를 위해서는 참조자료로서만 써야만 합니다.
고구려시대강역을 알고 싶으면 한,위촉오,북위등의 남북조시대의 역사서를 기준으로 강역을 찾고 다른 시대의 자료는 참조로 활용하여야 하는데 명사로 고구려강역을 추정하는 분들이 계시는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라 샤료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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