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일본의 기원과 한국

[스크랩]어째서 일본은 수십 년간 구석기 유적을 날조했나

monocrop 2008. 2. 11. 03:21

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04&articleId=2742&srchid=BRDBBS07VwB

 

1) 아이누족은 우리나라의 피지배종족이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라 우기는 아이누족이 빙하지대를 건너 중국에서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라 우긴다. 이 얼마나 독창적이지 못한 주장이란 말인가! 오늘날 일본한테 빙하기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어메리카 선주민은 홍적세 마지막 빙기인 1만 5천년 전(이보다 더 오래 전이라는 주장도 있다.)에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어메리카로 이주했다.

지척지간의 한반도를 놔두고 최단거리도 720km나 떨어진 중국 어딘가에서 건너왔다는 것이다. 가끔은 수천 km나 떨어진 인도 어딘가에서 건너왔다고 우기기도 한다. 일본국립유전자협회가 공식 채택한 호라이의 단독연구에서 중국인의 유전자 25.8%는 8세기에 이주한 중국왜의 유전자다. 인도인과의 유전자 비교 연구는 한 적도 없다. 척 보기에도 인종상, 생물학상 틀려도 너무 틀리기 때문이다.

제러드 다이아먼드(Jared Diamond)는 죠몬토기가 지금부터 12,700년경 전에 만들어졌고, 죠몬문화는 농경문화가 아닌 수렵-채집민의 것이면서도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이 높아서 정착생활을 영위한 특이한 사례라는 주장한다. 죠몬토기가 12700년에 만들어졌으면, 죠몬인은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신석기 문화를 영위한 종족이라는 거다. 문제는 그런 우수종족이 발전도 없이 내내 조잡한 죠몬토기 하나로 10500년을 버틴, 가장 늦게까지 신석기 생활을 영위한 최후진종족이라는 거다. 일본은 기원전 3세기까지 석기 시대였다.

더구나 수렵-채집민들이 한 곳에 정착하면, 금방 굶어죽는다. 제아무리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이 높다 해도 짐승도 옮겨 다니고, 과일도 철에 맞춰 영글고, 물고기도 해류를 따라 이동한다. 수렵-채집민은 짐승을 따라, 과일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해야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왜열도(후대의 일본열도)는 주변 자연환경의 생산성조차 극히 낮은 땅이다. 이는 죠몬말기 왜열도의 인구가 고작 10만 내외였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세리자와 죠수케, 야마우치 세이오, 고야마슈조) 한반도인들이 벼농사법을 가져가 기아에서 해방되기는 했으나, 인구가 팽창한 지난 천년간 기아가 또 다시 왜노민족을 찾아왔다. 바로 서양인들 자신이 분석하길, 기아 때문에 일본이 2차 대전도 일으켰다고 했지 않는가.

아이누족이 신석기 민족 죠몬인이며 죠몬토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것은 일본도 인정한다. 그래서 죠몬시대라는 시대명도 생긴 것이다. 그런데 서아시아에서 처음 토기가 만들어진 연대가 5천 년 전에서 7천 년 전 사이다. 한국(桓國)도 기원전 7197년에 개천한 나라다. 그 전에 청동기 시대로 진입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동아시아가 아니라, 시베리아에 있었던 나라다. 따라서 아이누족이 10만 년 전, 혹은 1만 2천 년 전에 열도로 이주했다면 구석기인이어야지, 신석기 문명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아니면 수천 년 전에 뜻한 바가 있어 열도에서 나가 토기 제작법을 배워가지고 돌아왔다는 건가. 그도 아니면 자체적으로 원시토기를 만들어 썼다는 것인가. 전자가 성립할 수 없는 건 일본이 기를 쓰고 빙기를 외쳐대며 걸어서 열도로 건너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의 빙기는 1만 2천 년 전후로 끝났다. 지역마다 약간의 시간 차이가 있어 1만 년쯤이라는 주장도 있다. 후자 역시 성립될 수 없는데, 고대 한반도인이 이주할 때까지도 신석기 문화라는 낮은 문명 단계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자체 제작 가능성도 사라지고 만다. 열도는 기원전 3세기까지 신석기시대였다. 한민족은 유물 조사에 의해서도 기원전 2700년경에 청동기 문화로 진입했다. 철기 시대는 기원전 15세기 이전에 진입했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기원전 2700년경에는 이미 철기시대로 진입했다. 더욱이 새끼줄무늬의 죠몬토기는 지극히 원시적인 토기로 신석기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아이누족은 문화가 낮아도 아주 낮은 것이다.

아이누족의 문화가 극히 낮았다는 점에서 아이누족의 열도 이주 시기는 서아시아에 토기가 등장한 연대인 7천 년 이전일 가능성은 전무하다. 이주 시기는 더 낮춰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죠몬인의 신석기시대가 1만 2000년 전에 시작됐다고 우기는 왜노가 가끔 있다. 이 말은 곧 기원전 3세기까지 초기 신석기문화를 영위한 열등민족이 신석기 문화를 가장 먼저 만들어낸 우수민족이라는 모순에 빠진다.

사실 일본은 모순이고 문제고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 주장이나 마구 한다. 모순점을 해결할 머리조차 없는 것이다. 일례로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일본의 베스트셀러인 ‘국민의 역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야요이문화(기원전 약 3세기~기원후 3세기)는 도래인(한국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 선주민인 죠몬인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했고, 야요이문화의 주체는 죠몬인이었으며 북 규슈와 남조선(한국)과는 같은 시기 동일문화권에 가까웠으나 사람의 왕래나 교역이 있었던 것뿐이다.




요컨대 기원전 3세기까지 신석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열등민족이 어느 날 갑자기 청동기문화는 건너뛰고 스스로 철기문화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일본국립유전자협회도 왜노민족이 한국인의 유전자를 24.2% 가지고 있다던데, 다른 나라와 공동연구하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65%라는데, ‘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전부 아이누족이라 우기니, 손발이 안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이다.

죠몬‘인’이자 아이누‘족’도 모자라, 한 종족을 두고 죠몬인이니, 야요이인이니 달리 불렀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달리 불렀다고 하니, 이후에도 야마토<통일국가 야마토국이 있었다고 날조해서 만들어낸 시대명. 원래는 왜국이 있었다고 하다가 요즘은 그 의미가 지극히 아름답지 못하다고 해서 야마토국으로 바꿨다. 그래도 역사책 보면, 다 왜(倭)로 써 있다. 눈이 많이 괴롭겠지?>인, 아스카인, 나라인, 헤이안인, 가마쿠라 무로마치인, 아즈치 모모야마인, 에도인, 메이지인, 다이쇼인, 헤이세이인이라 불러야 하지 않는가. 자그마치 12개다! 한 인종을 두고 12개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일본이 구석기인도 죠몬인이라고 우긴다면, 13개가 된다.

‘일본이 4대 문명의 하나’라고 주장, 70만부 이상이 팔렸다(필시 지금은 훨씬 더 많이 팔렸을 것이다.)는 ‘국민의 역사‘라는 역사책(?)의 서두는 날조한 가미타카모리 유적으로 시작된다. 왜노들의 조상인 구석기인은 가미타카모리인으로 불렀으리라. 일본에는 구석기 시대에도 ‘민족’이 있었단 말인가. 일본에는 신석기 시대에도 ‘민족’이 있었단 말인가. 가미타카모리인(?)이 일본인의 조상이란 말인가. 구석기인은 멸종했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회장인 니시오 간지는 날조한 유적들을 들며 “일본 역사는 자바 원인이나 베이징 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부심을 가지라”고 했다. 일본이 30만 년 전, 전기구석기 시대 것이라 주장해온 인골(도치기 현 구즈)은 15세기 것이었다.

일본의 자부심이란 게 고작 타종족인 구석기인에 기대어 세계 4대 문명이 되고, 세계 1대 문명이 되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오천년(문헌상으로는 9천 2백 년.)의 역사라고 하지, 한대륙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을 가지고 수십만 년 된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왜노 땅에서는 이런 게 먹혀들어간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왜노 땅에 이주했고 왜노민족으로 죽 죽 진화해왔다고 우겨댈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왜노민족에게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곧 호모 사피엔스다. 귀찮게 이주는 뭣하러 하나? 조만간 38억 년 전, 화학진화 시대에 왜노민족이 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열도에서 단세포생물이 태어나고 이윽고 진화해서 왜노민족이 된 거라고 우기겠지?

아이누족은 일본열도의 구석기인종이 아니다. 구석기인은 좀 있다 검토하고 아이누족이 어떻게 열도로 이동했는지부터 검토해보자. 이에 대한 단서를 왜노학자들이 제공한다. 이들은 아이누족이 ‘빙하’를 건넜다고 했다. 다시 말해 아이누족은 배를 만들어 한대륙과 일본열도 사이를 이동할 그런 기술이 없었다는 시인이다.

그런데 이미 고고학적 유물 발견으로 한민족이 4700년 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꽃피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4700년에는 이미 철기시대로 돌입했다. 신시씨가 시베리아에서 남하한 5898년에 우리 역사에는 동아시아를 무대로 하는 대제국이 성립했다. 배달 이전에는 시베리아에서 인류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 기원전 7197년에 한국(桓國)을 세웠다는 것은 최소한 이 당시부터 청동기시대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청동기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 남하하자, 신석기문화를 가진 아이누족이 열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누족의 열도 이주시기는 기원전 3898년 이후다. 한동안 우리민족의 지배하에 있었다면, 5천년 전후로 열도로 이주했다.

항해술이나 조선술이 없었던 아이누족이 열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타타르 해협을 건너는 것뿐이었다. 타타르 해협의 가장 좁은 부분은 폭이 7km에 불과하다. 11∼5월에는 얕은 곳이 얼어붙으니까, 걸어서 해협을 통과했다.

우리민족은 타종족을 억압하지 않았다. 아이누족이 수렵, 채집 생활을 한다고 농경생활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화하족도 4300년 전까지 수렵, 채집 생활을 했다.(중국고대신화) 쌀을 본 적이 없어서 밥을 먹던 자오지 한웅의 정복군을 보고 모래를 먹는다고 했다. 자유롭게 떠도는 신석기인이라 구한의 최소한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 게 아닐까.

기원전 3세기부터 한반도인들이 개별적으로 오늘날의 규슈 일대로 이주했다. 수렵, 채집 생활을 고수하던 아이누족이 혼슈나 북해도로 물러나지 않고, 어째서 기원전 3세기부터는 벼농사법을 가져간 고대 한반도인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동화되기로 했을까. 어째서 태도를 바꿔 정착생활을 하는 피지배계층의 지위를 받아들였을까.

그건 아이누족(죠몬인)의 인구가 식량부족 등으로 대폭 감소했기 때문이다. 식량 위기는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하거나 죠몬인이 급격히 늘어나 식량부족 상태에 처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쨌거나 더 이상 수렵, 채집생활을 고수하다가는 종족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왜노민족은 문명의 정도가 극히 낮아 멸종의 위기에 직면했던 자신들의 조상 신석기인들이 자체적으로 청동기 시대는 건너뛰고 철기문명을 꽃피웠다고 우긴다. 식량위기부터 타파하지 않으면 멸종을 감수해야 했던 죠몬인이 어떻게 철기문명 시대로 자체진입 할 수 있는가. 타종족의 피지배계층이 되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세리자와 죠수케는 죠몬말기의 인구를 약 12만 명, 야마우치 세이오는 약 15만 명으로 추계한다.

일본 국립 민속학박물관의 고야마슈조는 1984년 일본인류학회에 보고한 “죠몬시대의 인구”라는 논문에서 아이누족의 인구 변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죠몬말기(기원전 약 3세기) 일본 총인구는 극심한 추위 등의 영향으로 겨우 7만 5천 8백 명에 불과했고, 그후 야요이 시대에 접어들자 59만 4천 9백 명으로 급격히 늘었으며, 하지키(김해 토기. 즉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토기다. 가야는 한반도에 없었다. 백제토기다.)를 사용한 나라시대(710~784)에는 무려 5백 39만 9천 8백 명으로 증가했다.







2) 중국을 출발한 구석기인은 빙하를 건너 열도에 도착할 수 없다.







미야기현 쓰기다테초 가미타카모리 유적 발굴현장에서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소장으로 발굴 조사단장을 맡았던 후지무라 신이치가 석기를 땅에 파묻는 장면이 생생하게 보도됐다.

10월 27일 일본 언론들이 ‘70만 년 전 석기 발굴’을 대서특필하기 5일 전인 10월 22일 아침 6시18분께의 행동이 마이니치 신문 취재팀이 몰래 설치한 비디오카메라에 그대로 잡혔다. (일본은 역사왜곡의 천국인가, 2000/12/12, 주간한국)




아이누족은 한대륙 거주 당시, 한민족의 피지배종족이었다. 비록 지배를 거부하고 열도로 이주하기는 했어도.

그런데 왜노는 아이누족이 자신들의 조상이라 주장한다. 이들마저 한민족의 피지배층이라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것이다. 이제 일본에 구석기 문화마저 없으면 독립 일본사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고약한 심보에 한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은 종족을 창조해내야 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을 것은 분명하다.

90년대 초반까지 왜노 땅에는 전기구석기 문화가 없었다. 소박하게 후기구석기 문화만으로 만족하려 했는데, 과도한 욕심을 부린 후지무라가 연이어 발굴을 조작하면서 불과 몇 년 사이 일본의 역사는 3만여 년에서 70만 년 전까지 연대가 올라갔다.

후지무라가 발굴한 가미타카모리 구석기 유물들은 주변국가들의 구석기 유물과 눈에 띄게 차이난다고 한다. 발굴단장이라는 사람이 유물의 연대를 70만 년 전으로 끌어 올리려고 자신이 갖고 있던 석기 수집품을 발굴현장에 묻은 것이다. 보나 마나 일본은 이를 두고 자신들만의 ‘독자 문화’라 주장했으리라.




원래 일본 국사 교과서는 구석기라는 용어 대신 ‘선토기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다 발굴의 ‘신의 손’으로 일컬어지는 후지무라에 의해 잇달아 구석기가 발굴되고 일본의 구석기 연대가 무려 70만 년 전까지 올라갔으니 ‘구석기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2000년 11월 후지무라가 유적지에 석기를 파묻는 모습이 마이니치신문의 ‘몰래 카메라’에 잡혔다.

한반도에서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 발견될 즈음인 1970년대 말부터 일본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후지무라에 의해 10만 년 전에 근접하거나 이보다 오래된 유적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전기구석기 유적이 잇달아 발굴된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얻어서 새로운 발견마다 신문 지면을 크게 장식하였고, 학계의 큰 주목을 끌어 일본 국사 교과서까지 바뀌게 되었다.

이번에 발표된 조사결과에서 구석기 유적 중에서 162곳이 날조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4만 년 전 이전의 구석기 유적은 거의 대부분 날조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오랫동안 대단히 조직적이며 치밀하게 짜여진 날조였다. 물론 지난 80년대에 일본의 구석기 학자 중에는 이러한 유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이가 있다. 그럼에도 20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날조사건은 드러나지 않았고 결국 고고학자가 아닌 신문기자의 눈에 발각된 것이다.([기고]日 ‘구석기 날조’ 왜 이제야 공개됐나, 2003년 05월 29일, 경향신문)




이것을 두고 “일본 열도의 사람 흔적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올리려는 집단적 강박 관념과 여론의 압력을 반영하는 것”이라든가, “일본 역사를 70만 년 전으로 끌어올리고,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일본의 집단의식이 빚어낸 비극”쯤으로 치부하고 만다. 사람 흔적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올리려는 것이 집단적 강박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 구석기 시대가 있다고 하여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던 것이 되는가. 집단적 강박관념은 노예사를 지우고 문명사로 창조하려 할 때 생겨난다. 이집트 문명과 맞먹는 고대 문명은 철기 문명을 날조할 때(왜노 땅에는 청동기 시대가 없다.) 생겨난다.

일본은 지금 역사를 얼마나 끌어올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한민족에게 지배받지 않은 선주민을 만들어내는 게 더 시급하다. 억지주장만을 계속하는 일본도 그 같은 사실을 잘 안다. 무조건하고 신석기 문화도 자생, 철기문화도 자생, 구석기문화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우기고는 있으나, 누가 아이누족마저 피지배종족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낼까봐 내심으로는 떨고 있다.

일본이 4만 년 전 이전의 구석기 유적은 다 가짜라고 발표했다 하니,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4만 년 전 이후의 구석기 유적은 다 진짜란 말인가.

어메리카 선주민이 이주한 1만 5천 년 전은 빙기 최성기 즈음이었다. 이들이 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 어메리카로 이주했을 때, 베링 해협의 환경은 어떠했을까?

다른 데서 찾아볼 것 없다. 뉴턴 한국판 2003년 9월호에 나와 있으니까. 뉴턴은 일본 출판사가 발행하는 잡지다. 6 페이지, ‘베링 해협의 초원’이라는 제목 하에 이런 내용이 있다.




당시의 해면은 현재보다 100m 이상이나 낮았다. 그래서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사이에 있는 베링 해협은 육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당시의 환경을 알아보기 위해 해협 부근의 지층 속 꽃가루와 식물 화석을 자세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빙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초목류가 무성하게 자라 매머드와 들소 등이 생활할 수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베링해협 동부에서는 샐비어류 등이 연중 자라고 있어 매머드의 식용 식물이 된 것도 알려졌다.

한편 해협 중앙부에서는 이들 화석이 발견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중앙부의 식생이 듬성듬성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링해협은 오늘날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대륙 사이를 분리시키는 해협으로, 넓이가 약 90km, 깊이가 약 55m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빙기 최성기 즈음, 베링해협 중앙부의 식생은 듬성듬성했다. 그렇다면 4만 년 전에는 동중국해가 얼어붙고 인류가 이동할 수 있었는가? 다행이 지구 빙하기에 관한 역사는 잘 알려져 있다.




제 4기에 나타나는 마지막 빙하기를 최종 빙기(뷔름기)라 하는데, 이 빙기는 약 7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중 기온이 가장 낮았던 최종 빙기 최성기는 약 18,000년 전 경으로 이때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약 100m정도 낮았고, 황해 및 동중국해의 대부분이 육지화되었었다.(http://www.gri.pe.kr/hyang/hyang_jeon4.html)




중국에서 일본에 왔다면 가장 가까운 규슈지방에 도착했을 것이다. 동중국해를 일부라도 건너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중국과 일본의 최단거리는 육지화되어 있었는가. 4만 년 전은 빙기 최성기에서 2만 2천 년이나 벗어나 있다. 나는 모르겠으니까 인심 써서 육지화되어 있었다고 해주자.

이제 중국과 일본의 최단거리를 알아보자. 세계전도를 펴놓고 봐도 베링해협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최단거리가 720km라는 글은 라이프 2차 대전, 일본의 전시생활편에 나온다. 라이프 2차 대전은 일본의 날조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책이다.

짧은 거리는 목표가 보이므로 직선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거리가 720km나 되면, 보이지 않는 낯선 목표를 찾아 이리 저리 헤매야 하므로 직선으로 이동할 수 없다. 곡선이나 지그재그로 이동해야 하므로 이동거리는 훨씬 더 길어지게 마련이다.

이 시기, 동중국해의 식생은 어떠했을까. 베링해협도 중앙부의 식생이 듬성듬성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배링해협보다 8배나 넓다. 수심은 최대 2700m다. 이것은 동중국해 대부분이 식생으로 덮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냥 얼음이었던 것이다. 식물이 없으니 동물도 존재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이제 인도를 떠나, 중국을 떠나 빙하지대를 건너 열도로 이주한다고 가정해보자. 도중에는 식량을 전혀 구할 수 없다. 처음부터 먹을 것을 가지고 출발해야 한다. 이 당시, 동물의 힘으로 운반할 수 있었던가. 다시 말해 동물을 가축화했던가.

가장 오래된 가축의 화석은 1만 2천 년 전의 강아지 화석이다. 강아지 가지고는 식량을 운반할 수 없다. 그 다음으로 1만 년 전, 서남아시아에서 양과 염소, 돼지를 길들였다. 이것들도 얼음 위에서 식량을 운반할 수는 없다. 양과 염소, 돼지가 식량 아니냐고 하겠지만, 서남아시아에서 가축화한 거다. 일본은 제 조상이 서남아시아에서 왔다고는 하지 않았다. 8,000년 전부터 소가 사육되었지만, 터키에서였다. 7,000년 전에는 순록이 유럽에서 가축화됐지만, 중국, 인도에는 없었다. 같은 시기에 남아메리카에서 라마와 알파카가 길들여졌지만, 이 역시 아시아로 유입되지 않았다. 열도에는 4세기 말까지 말조차 없었다. 백제 황제가 아직기를 보내 말 두 필을 하사한 후부터 한대륙에서 말을 지속적으로 보내줬다. 결론적으로 중국, 인도에서 이주한다고 해도 모든 식량을 인간이 짊어지고 운반해야 했다.

구석기인의 이주는 개인별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큰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내에는 노약자도 있고 여자도 절반이나 차지한다. 노약자와 여자가 먹을 식량은 어떻게 하는가. 열도로 건너온 구석기인은 제 부모, 제 자식을 팽개치고 왔나. 아니면 잡아먹으면서 왔나. 식량만 가지고 다른 것은 포기한 채 이주했을까? 구석기인이니까 가구나 전자제품, 여벌의 옷은 필요 없다. 하지만 얼음 위에 그대로 잘 수는 없다. 바람에 거세게 몰아치는 허허벌판, 아니 허허얼음판에서 더구나 빙기가 아닌가. 제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요를 깔고 바람을 막을 천막이라도 있어야 한다. 이걸 모두 건장한 남자들이 운반해야 한다. 썰매를 이용했다고? 그러나 썰매를 끌 동물이 없다. 사람이 끌어야 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어린아이를 안고 손잡고 따라왔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군대가 행군하듯 신속하게 이동할 수는 없다. 하루에 잘 해야 10km. 20km씩 이동한다 해도 중국에서 일본까지 30일이 넘는다. 한 남자가 가족이 덮고 잘 이불과 천막, 30일 동안 가족이 먹을 식량을 날라야 한다. 불가능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 혹은 인도에서 빙기에 열도로 구석기인이 이주했다는 소리는 헛소리다.

중국, 인도(과연 일본민족이 100여 년 전만 해도 인도라는 곳을 과연 가본 적이 있었을까. 인도에서 일본민족의 조상이 왔다고 우기니, 처음 이주 후에는 결코 가보지 못한 땅이다. 2차대전 중 인도까지 침략하려고 한 적이 있지만, 문턱에서 패하고 도주했다. 주로 제 조상들을 침략하는 게 일본민족의 천성인 듯.)에서 떠났다고 해도 육지로 갔다. 빙하지대로 갔다고 해도 한대륙 해안선을 따라갔지, 바다 한복판은 아니다.

차라리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로 갔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상들은 얼어붙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육지로 오면 되었으니까.

그래도 일본이 구석기 유적 있다고 끝까지 고집한다면, 과연 이들은 어디서 갔는가. 바로 옆에 있는 한반도인가. 가장 좁다는 대한해협은 55.8km이다. 베링해협보다 좁다. 근데 아메리카 선주민은 1만 5천 년 전에야 겨우 베링해협을 건너 어메리카로 이주했다. 90km를 건너는 데는 1만 5천 년 전에야 가능하고, 55.8km를 건너는 것은 4만 년 전에도 가능하다는 건가.

일본에 정말 구석기인이 있었다면, 신석기인들처럼 얼어붙은 타타르 해협을 건너 사할린으로 이주하고 역시 얼어붙은 라페루즈해협을 건너 북해도로, 쓰가루 해협을 건너 혼슈로 남하했을 것이다.

가짜 구석기 유물을 열도에 묻는 일본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 #50788;까. 그러고는 후기구석기니, 선토기문화니 하고 발표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일본은 2차 대전을 통해 엄청나게 약탈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신들이 한대륙에서 문물을 전수받은 사실을 없애느라, 닥치는 대로 유적을 파괴했다. 한반도만이 아니다. 왜노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만주에 진출하고, 이어서 동북아, 1937년 노구교 사건(노구교는 마르코 폴로가 세계 경이의 서에서 “세계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아름다운 다리”라 평했던 다리다. 1189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192년에 완공한 노구교는 당연히 고려의 작품이다. 이 당시 중노는 티벳고원 북부도 벗어나지 못했다.)으로 중일 전쟁을 시작해 중국 대륙도 태반을 점령했다. 한국 고대사 문헌 수만 종(어쩌면 수십 만종)을 분서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덤 속의 부장품들까지 모조리 훔쳐갔다. 그 당시 구석기유물도 약탈해 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웃기는 민족이다. 2차대전 중에는 일본민족이 그 옛날 태평양을 표류해 멕시코로 가서 잉카민족이 됐다고 우겼다지? 그 미개인들이 태평양에 표류했으면 바다 속에 다 가라앉았다. 9세기에 와서야 외항선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나마 다 난파당하고 침몰했다. 아이누족도 고작 얼어붙은 타타르 해협을 건넜다. 5천 년 전만 해도 열도는 무인도였다. 표류할 인간은 어디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