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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대사 발굴특종 1,500년만에 드러난 百濟대향로의 숨은 眞實

monocrop 2007. 10. 15. 23:49
 
고대사 발굴특종
1,500년만에 드러난 百濟대향로의 숨은 眞實
 
“국립중앙박물관과 학계는 5가지 오류를 범했다”

고대사 발굴특종 1,500년만에 드러난 百濟대향로의 숨은 眞實 上


서정록 (
sucr@popsmail.com)
· 1956년 경기 평택 출생
· 서울대 철학과, 同 대학원 졸업
· 김지하 시인과 함께 ‘한살림 운동’활동
· 7월중 “백제금동대향로” 출간 예정


  발굴 당시 국내 역사학계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결정적인’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재야학자인 서정록씨가 지난 5년여 동안 향로에 매달려 이루어낸 집념의 성과물이다. 서씨는 향로의 비밀을 벗기는 데 미술사와 문화사·고고학·동서교류사 등 다양한 접근법을 통해 그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백제향로의 기원으로부터 제작연대, 용도,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고대 동북아인들의 사상과 정신세계를 차례로 추적해내 기존 학계의 연구성과들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월간중앙”은 이를 上·下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漢代 박산향로 양식 아닌 北魏시대 양식의 영향
■연꽃은 불교 연화화생 아닌 東夷계 ‘태양꽃’을 상징
■백제 성왕때 製作돼 사비神宮 왕실제례에 사용됐다

  향로의 전체 높이는 64cm 이며, 전체적으로 좌대격인 용과 노신의 연꽃, 뚜꼉의 산악도, 그리고 정상에 배치된 봉황의 네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3년 12월 부여 능산리 유적지의 한 건물터 수조(水槽)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 그 향로가 온전한 모습으로 1,500년만에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언론이나 관련 학자들이 보였던 그 흥분이란….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한병삼씨는 이와 관련해 “향로는 전체적으로 천계-선계-인간계(天界-仙界-人間界)라는, 고대 중국과 무관한 백제인 고유의 생사관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이 백제대향로 하나만 가지고도 수백편의 논문이 나올 것”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같은 박물관 학예실장이었던 강우방(이화여대 교수)씨도 “향로는 천계-선계-인간계 속에 형상화한 천인 등 각종 인물과 맹호·이무기·물고기에서 반인반수(半人半獸)에 이르는 동식물 등을 염두에 둘 때 불교 유입 이전 한국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 민속신앙 전체를 상징하는 ‘100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백제대향로가 기존의 유물과 달리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의 정신세계를 새롭게 열어 줄 열쇠가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내비친 것으로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입만 열면 5,000년의 역사를 주장하면서도 막상 뒤로는 정체성 문제로 고심했던 우리이고 보면 혹시 유·불·선(儒佛仙)을 넘어선 고대 동북아인들의 정신세계를 밝혀 줄 그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자못 컸던 것이다.

  그러나 발굴된 지 7년이 지나도록 백제대향로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잠겨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향로를 ‘언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제작했는가’는 물론이고, 대향로의 구성이나 여러 상징체계들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물음표로 남아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문제의 대향로가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표급 문화재에 대해 이론적으로 정리된 견해의 제시 없이 심정적으로만 우리의 선조가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무령왕릉 동탁은잔과 형식 흡사

  하지만 ‘초국보급’ 유물이 아무런 문화적, 역사적 배경 없이 임의로 만들어졌을 리 없고 보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실제로 그 증거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유물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첫번째 증거는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탁은잔’(銅托銀盞·아래 사진)이다. 이 동탁은잔의 뚜껑과 잔의 겉표면에 음각으로 장식된 무늬들을 보면, 뚜껑의 중심부에는 연꽃 장식이 있고 그 위에 연꽃 형태의 손잡이가 달려 있다. 뚜껑의 둘레에는 봉우리가 3개인 산들이 장식되어 있으며, 뚜껑 중앙의 연꽃과 산들 사이에는 봉황 두 마리가 천공(天空)을 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잔(盞)의 상단에는 고형(古形)의 정형화된 흐르는 구름문양(流雲紋)이 있고 그 아래에는 3마리의 용이 잔의 하단에 묘사된 연꽃을 둘러싸 호위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뚜껑 중앙의 연꽃과 손잡이를 제외하면 동탁은잔은 전체적으로 ‘봉황-산악도-류운문-연꽃과 용’의 구성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은 백제대향로의 ‘봉황-산악도-테두리의 류운문-연꽃과 용’의 수직적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비록 잔(盞)과 향로라는 기물(器物)상의 차이가 있고, 동탁은잔의 장식내용이 백제대향로보다 조금 고식(古式)이라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구성상의 일치는 양자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게다가 백제대향로나 동탁은잔에 장식된 이러한 ‘봉황-산악도-테두리의 류운문-연꽃과 용’의 구성은 중국의 향로에서는 발견된 예가 없다. 이것은 위와 같은 구성이 전통적인 중국적 구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동탁은잔은 525년 무령왕(武寧王·501∼523)의 무덤에 수장된 유물이다. 따라서 백제대향로를 제작한 장인들은 동탁은잔이 수장되기 전에 실물을 보았거나 동탁은잔의 구성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동탁은잔이 수장된 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백제대향로가 제작되었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부여 외리(外里)에서 출토된 ‘산수산경문전’(山水山景文塼) ‘산수봉황문전’(山水鳳凰文塼) 등의 문양전(325쪽 사진)이다. 백제대향로의 산악도는 이른바 ‘삼산형’(三山形) 산들이 중첩된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산악 양식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위의 문양전(紋樣塼)에 묘사된 산의 양식과 기본적으로 같다. 게다가 ‘산수봉황문전’의 산악도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와 그 정상에 장식된 봉황의 구도와 거의 동일하다. 또 백제대향로의 용 장식 역시 같은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반룡문전’(蟠龍文塼·325쪽 사진)에 장식된 용과 대단히 흡사하다. 따라서 이들 문양전과 백제대향로 간에는 명백한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와도 공통분모 있다

  세번째는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에 장식되어 있는 ‘수렵도’(狩獵圖)다. 백제대향로와 비슷한 시대에 제작된 중국 향로의 산악도에는 수렵도가 장식된 예가 없다. 비록 한나라 때의 ‘박산향로’(博山香爐) 중에 이러한 류의 수렵도를 가진 향로들이 있다지만, 그러한 향로들은 후한(後漢)시대에 이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해 위·진시대(魏晉時代)에 이르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산악도가 한나라때 박산향로의 산악도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수세기 전에 사라진 이국(異國)의 향로를 복원해 재현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대향로의 수렵도가 갖는 의미와 별도로 백제대향로가 중국에서 왔을 가능성을 차단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네번째는 백제대향로의 공간 구분 방식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공간 구획 방식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고구려의 덕흥리고분 (326쪽 사진)을 보면 도리(平台)의 류운문을 경계로 천장의 천상계(무덤의 주인공이 돌아가고자 하는 타계(他界)로서의 천상도 영역)와 그 아래의 지상계(무덤 주인공의 생전 생활상이 그려진 사방(四方) 벽의 공간)로 권역이 나뉘어 있는데, 류운문을 경계로 한 이와 같은 권역 구분 방식은 백제대향로에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즉 향로 본체의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테두리에 류운문이 장식되어 있고, 이 류운문을 경계로 그 위의 산악도와 아래 연지(蓮池)의 수상생태계가 나뉘어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덕흥리고분의 도리 위에는 이른바 천공의 광명(光明)을 상징하는 불꽃 형태의 ‘박산문양’(博山紋樣)이 반복해 장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류의 박산문양이 백제대향로의 류운문 테두리 위에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그뿐만 아니다. 쌍영총 현실의 두 팔각기둥(326쪽 사진)을 보면 상단과 하단에 연꽃이 장식되어 있어 일종의 연꽃주두(柱頭)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바로 그 기둥에 황룡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다. 이 황룡은 마치 기둥을 휘감고 연꽃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인데 백제대향로의 용이 노신(爐身)의 연꽃을 물고 비상하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여기서 우리는 백제대향로와 고구려 고분벽화 사이에 양식적으로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백제대향로의 삼산형 산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백제대향로가 고구려 고분벽화와 또 다른 양식상의 특징을 갖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밖에도 백제대향로를 백제인들이 제작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많다. ‘봉황을 중심으로 하는 5악사와 기러기’의 상징체계만 해도 그렇다. 이러한 상징체계는 중국의 향로사는 물론 중국의 미술사에도 등장한 바 없다. 또 5악사가 들고 있는 악기의 구성은 남조(南朝)보다 오히려 고구려의 주악도(奏樂圖) 구성과 친연관계를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궁극적으로 백제대향로의 문화적 배경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상의 몇가지 양식적 특징과 중국 향로에서 볼 수 없는 독자적 상징체계들은 부여 능산리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와 함께 백제대향로가 백제인들의 손에 의해 직접 제작된 기물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대향로는 언제 누가 만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백제의 성왕(聖王·523∼554)이 538년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를 준비하면서 사비에 세워질 신궁(神宮)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백제대향로의 제작 시기부터 살펴보자. 그동안 백제대향로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박물관측에서 발표한 7세기 중엽설과 능산리 유적지의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의 명문(銘文)- 昌王 十三年, 곧 위덕왕 13년, 567)-에 근거하여 6세기 후반으로 보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이 경우 전자는 백제대향로의 노신의 연꽃에 주목하여 불교가 성했던 무왕(武王·600∼641)때 제작된 것으로 본 것이며, 후자는 사리감 발굴 후 명문에 나타난 567년의 연도에 따라 제작 시대를 소급해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주장은 상황논리에 따른 것일 뿐 객관적 근거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백제대향로에는 제작 연대나 제작자, 그 목적 등을 밝혀 줄 만한 명문(銘文)이 없다. 게다가 백제대향로와 관련된 어떤 문헌적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제작 연대를 밝히는 작업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향로 등 관련 미술사 연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앞의 두 추정 연대에는 이러한 미술사적 연구가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
  그나마 일부 미술사적 접근을 한 사람들도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에 장식된 수렵도와 동물들 그리고 신선풍의 인물들이 장식되어 있는 한나라 때의 향로에 주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러한 향로는 백제대향로가 제작될 당시에는 이미 그 맥이 끊어진 지 오래다. 그 동안의 미술사적 연구가 별다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한 데는 이와 같은 잘못된 방향설정도 한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백제대향로와 미술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북위(北魏)시대의 향로다. 북위라면 동호(東胡)의 일파인 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한족을 강남으로 내쫓고 북중국을 장악하여 흉노 쇠퇴 이후 끊겼던 북방문화의 붐을 다시 일으킨 민족이다. 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월등히 수가 많은 한족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대대적인 종교운동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다. 중국과 동북아에 불교가 보편화된 것은 바로 그들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불교를 통해 한족을 이념적으로 통합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향로가 새로 불당의 공양향로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백제대향로와 양식적으로 유사성을 보이는 향로가 바로 이 시기의 북위향로다.


  본체 양식은 북위시대 향로 양식과 일치

  이러한 사실은 양자를 비교해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실제로 백제대향로와 북위향로의 본체 양식을 비교해 보면 양자 모두 ‘산악도의 삼산형 산형’ ‘노신의 (연)꽃장식’ 그리고 가운데 ‘테두리의 류운문’이라는 세 양식적 요소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적 요소들은 이전의 중국 향로에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식적 요소를 향로에 도입한 것은 북위인들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북위향로의 구성이나 양식적 요소들과 관련해 특별히 주목할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성이나 형태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위의 세 양식의 변화 추이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대향로의 본체 양식이 대충 어느 시기에 위치하는가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우선 삼산형 산들이 장식된 북위향로들 중 몇개를 살펴보자.
첫번째로 주목할 향로는 윈강(蕓崗)석굴 제10굴 후실(後室) 남벽에 나 있는 굴 문의 천장에 새겨진 것이다(위 사진). 이 굴의 축조 연대는 484~489년이므로, 대략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향로의 산악도는 백제대향로에서 볼 수 있는 산삼형 산들이 피라미드처럼 일정한 배열로 중첩되어 있으며, 노신에는 연꽃과 유사한 모종의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산악도와 노신의 로제트 문양 사이에는 ‘∽’자를 반복한 형태의 테두리장식이 있으나 깨어져 선명하지 않다.

  두번째는 518년에 손보희(孫寶憘)가 만든 삼존불좌(三尊佛坐)의 기단에 새겨진 향로(328쪽 사진)다. 연화대 위에 서 있는 거인이 향로를 들고 있으며, 이 향로의 노신에는 역시 동일한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향로의 산악도에서 주목할 것은 윈강석굴 제10굴 향로의 산악도와 달리 삼산형 산들이 자연스러운 산악 형태로 변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정형화된 삼산형 산형이 현실의 자연스러운 산악형태로 변화해 가는 과정의 모습으로, 그 완곡한 능선이 백제대향로의 삼산형 산형과 매우 닮아 있다.

  세번째는 525년에 제작된 것으로 조망희(曹望憘)가 만든 불상(石佛像)의 기단에 장식된 3개의 향로(329쪽 사진참조) 중 하나다. 향로의 산악도는 삼산형 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신에는 역시 동일한 꽃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본체 중간의 테두리에는 류운문이 선명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같은 불상에 장식된 나머지 향로들 역시 같은 양식을 보여 이때쯤 테두리의 류운문 장식이 크게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백제대향로 본체의 세 양식적 요소와 위의 북위향로 본체의 양식적 요소들을 비교해 보면, 삼산형 산형은 518년 비성에서 출토된 불상에 새겨진 북위향로의 산형과 테두리의 류운문은 525년 조망희 불상의 향로에 새겨진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이것은 백제대향로의 삼산형 산악도의 양식이 518년 이후의 양식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테두리의 류운문은 525년 전후의 것에 해당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만 북위의 향로들 중에는 위의 예처럼 향로를 받치는 승반이 연화대(蓮華臺)의 형태로 바뀐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 시기의 북위향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 준다(329쪽 우측 그림)이러한 연화대 장식은 북위 말기에 주로 나타나기 시작해 북위가 멸망한 534년 이후에는 연화대에 더하여 향로 주위에 인동초문양이나 연꽃까지 장식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향로 본체의 세가지 양식적 요소마저 거의 끊어지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백제대향로의 본체 양식이 대체로 북위가 멸망하기 이전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위향로 본체의 세 양식적 요소들이 파괴된 뒤 백제대향로가 북위향로의 세가지 양식적 요소들을 재구성해 만들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백제대향로의 제작 시기는 대체로 520년대 중반에서 534년을 넘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있으니 바로 백제대향로의 산악도에 장식된 바위문양이다. 백제대향로의 바위들을 보면 안에 테가 쳐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북위시대의 석각(石刻)에 새겨진 산악도에서 이와 동일한 바위문양을 볼 수 있다.

  보스턴예술박물관에 소장된 불상에 새겨진 북위시대의 산악도(330쪽 사진)를 보면 산에 조그만 바위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워싱턴 프리어 화랑에 소장된 불상에 그려진 산악도에 장식된 바위들은 전자보다 크게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전자는 445년에 제작된 것이고, 후자는 북위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대체로 북위의 산악도에 장식된 바위들은 말기로 갈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북위시대의 둔황(敦煌)벽화에 새겨진 산악도에서도 똑같이 확인된다.


  향로 제작은 백제의 사비 천도와 관계 있다

  여기서 백제대향로 산악도의 바위장식이 북위말기 이후가 아닌 중기 양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본체 양식을 중심으로 봐도 그 제작 시기가 534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무령왕릉에 수장된 동탁은잔보다 백제대향로의 양식이 보다 발전된 것임을 고려하면, 백제대향로는 실질적으로 520년대 후반에서 534년 사이에 제작되었거나 최소한 제작에 착수되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미술사적 결론은 백제대향로에 장식된 다른 문양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예를 들어 봉황의 경우 날갯죽지가 두번 접힌 ‘궁형’(弓形)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북위시대에 새로이 등장한 양식이며, 산악도에 장식된 소나무의 양식은 이미 동진(東晋)시대의 화가 고개지(顧愷之·346∼407)가 그린 ‘낙신부도’(洛神賦圖) 등에 등장한 이래 남북조시대의 미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 백제대향로의 테두리에 장식된 류운문과 동일한 구름문양이 무령왕과 함께 매장된 무령왕비의 족좌(足座) 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용에 장식된 인동초문양은 6세기 북위의 인동초문양과 동일하다. 산악도의 하단에 장식된 귀면상 또한 5세기말 남조의 포수(鋪首)의 형태와 아주 가깝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장식물들 중 어느 것 하나 백제대향로가 520년대 후반에서 534년 사이에 제작되었다는 앞서의 결론에 어긋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왕이 즉위한 것이 523년이므로 그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백제대향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는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를 준비하던 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성왕이 538년에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일반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적혀 있다. 계체천황 23년(529년)조에서는 백제를 ‘부여’(扶餘)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백제가 529년 이전에 이미 국호를 부여로 바꾸었음을 뜻한다. 고대에는 왕도를 천도하기 전에 먼저 국호를 바꾸는 예가 흔히 있으므로, 사실상 성왕이 529년 이전에 이미 천도 계획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천도 준비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물이 있으니 부여의 부소산성 동문지(東門址) 부근에서 발굴된 ‘대통’(大通)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그것이다. 대통 명문이 새겨진 기와는 본래 웅진의 대통사(大通寺) 건립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기와로 “삼국유사”‘원종흥법’(原宗興法) 조에는 ‘대통 원년(丁未) 양나라 무제(武帝)를 위해 웅천주(웅진)에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대통사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대통 연간은 527~528년이므로 대통 명문이 새겨진 기와 역시 그 무렵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대통사 건축용으로 제작된 기와가 사비 부소산성의 축성에까지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시 이미 사비 천도를 위한 준비가 진행 중 이었으며, 물자가 부족하자 대통사 건축용 기와까지 차출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529년 당시 이미 백제의 국호가 ‘부여’로 바뀐 앞의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은 왜 사비 천도를 준비하던 시기에 백제대향로를 만들었을까?
  우선 사비 천도를 하게 된 배경을 보면, 한성의 몰락과 함께 옮겨 온 웅진은 고구려의 잦은 침입으로 위험부담이 큰 데다 곰나루의 좁은 물길로는 점차 늘어나는 해양으로의 진출과 교역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백제는 웅진 천도 초기부터 보다 안전하고 해양으로의 진출이 용이한 곳으로 꾸준히 천도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이러한 현실적 필요성과 함께 494년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만주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새로이 백제의 국력을 부흥시키려는 의도에서 국호를 부여로 바꾸고 왕도를 옮기는 일대 천도를 단행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백제대향로는 이 무렵 이러한 국가적 천도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문제는 성왕이 백제대향로를 과연 어디에 사용하려고 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두가지 방향에서 접근해 들어갈 수 있다. 하나는 백제대향로와 그것이 출토된 능산리 유적지의 관계를 살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대향로의 구성과 상징체계가 함축한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전자가 능산리 유적지의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향로와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백제대향로 자체의 상징체계가 갖고 있는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향로가 정확히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는지 밝히는 것이다.


  기존 연구, 漢代 박산향로 양식에만 집착

  먼저 백제대향로의 구성과 상징체계에 대한 그 동안의 논의부터 살펴보자.
향로의 구성과 상징체계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 측의 공식 견해가 제시된 것은 1994년 4월19일, 박물관 측에서 향로를 일반에 공개하며 내놓은 안내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용중 학예연구사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안내서의 요지는 대체로 다음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백제대향로가 중국 박산향로의 양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불교의 ‘연화화생’(蓮花化生)이 그 사상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물관 측의 이러한 견해는 한나라 때의 박산향로가 대체로 신선사상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라든지, 북위시대의 향로가 불교의 공양향로로 사용된 점을 고려할 때 일견 그럴 듯해 보이지만 당초 많은 이들이 기대하던 무언가 새로운 것과는 사뭇 거리가 먼 것이었다.

  어쨌거나 박물관 측의 견해가 발표되자 몇몇 불교학 연구자들이 동조하고 나섰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94년 4월22일자 “문화일보”에 실린 서울대 최병헌 교수의 기고문이었다. 최교수는 박물관 측의 연화화생 주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백제대향로는 불교의 이상향인 ‘연화장(蓮華藏)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화장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風輪)이 있고 풍륜 위에는 향수해(香水海)가 있는데, 그 향수해에서 큰 연꽃이 피어 연화장세계라는 이상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백제대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용은 향수해를 의미하고 연꽃잎이 장식된 노신(爐身)은 연화장세계(산악도에 해당)를 화생(化生)하는 연꽃에 해당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불교학자 홍윤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백제대향로의 산악도가 불교의 성산(聖山)인 수미산(須彌山)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들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는 경우에도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백제대향로가 불교와 관련된 유물이라는 데는 별다른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백제대향로가 양식적으로 중국 박산향로의 연장선상에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세부 조형은 백제와 고대 동북아의 전통사상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는 이례적인 글을 발표해 주목을 끈 중국의 온옥성(溫玉成) 역시 백제대향로의 연꽃에 대해서는 다른 학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95년 10월4일 부여박물관 측은 백제대향로가 발굴된 능산리 유적이 백제왕실 사찰터로 확인되었다면서 건물 배치도를 발표하였다(335쪽 좌측그림). 그리고 다시 그 얼마 뒤인 10월22일에는 능산리 사찰터의 목탑지(木塔址)에서 ‘昌王 十三年’이라는 명문이 적힌 사리감(탑 안에 사리를 넣어두는 용기·아래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각 일간지의 1면을 장식했다. 그 결과 능산리 유적지는 사실상 백제 왕실의 사찰터로 결론난 듯했고 이에 따라 백제대향로의 성격 역시 불교와 관계된 유물로 정리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연꽃은 불교의 연화화생 아닌 동이계의 ‘태양꽃’상징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문제는 막상 백제대향로에서 연꽃을 제외하면 딱히 불교와 관련된 상징물이랄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연꽃의 줄기를 물고 비상하는 용을 불교의 용(naga·蛇神)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지만, 이 경우에도 단지 그런 것 같다는 견해일 뿐 그 근거로 제시된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최병헌 교수의 향수해에 관한 주장 역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불교와 관계된 유물이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상징체계를 갖췄을 법한데 연꽃을 제외하면 전혀 그러한 요소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백제대향로의 연꽃을 연화화생으로 규정하는 과정에서 관련학자들이 방법론적으로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다는 사실이다.

  백제대향로의 연꽃을 연화화생설로 설명하려면 그 전에 먼저 백제대향로 본체 양식의 조형(祖形)격인 북위향로와 백제대향로의 본체 양식을 비교분석했어야 하는데 이를 빠뜨린 것이다. 말하자면 백제대향로의 연꽃이 연화화생을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그에 앞서 백제대향로의 모델격인 북위향로의 노신에 장식된 꽃장식이 불교의 연화화생을 표현한 것임을 밝혀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제대향로의 연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북위향로 노신의 꽃장식에 대한 설명 없이 백제대향로의 연꽃을 불교의 연화화생으로 단정지어 설명한 셈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백제대향로의 ‘삼산형 산형’이나 ‘테두리의 류운문’ 그리고 ‘노신의 연꽃’은 한눈에 봐도 북위향로의 양식과 닮아 있다. 동아시아 향로의 노신에 ‘꽃’이 장식되기 시작한 것은 북위향로가 처음이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노신에 장식된 연꽃의 의미를 말하려면 먼저 북위향로의 노신에 장식된 꽃장식의 의미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북위향로의 노신에 장식된 꽃은 본래 연꽃이 아니라 태양과 그 빛을 상징하는 서역의 ‘로제트문양’이다. 그리고 이러한 로제트문양은 북위시대 내내 변함이 없다. 따라서 북위향로 노신의 로제트문양은 불교의 연화화생과 관계가 없음이 분명하다. 북위 말기에 향로의 받침을 연화대로 꾸미고 향로 주위에 인동초문양이나 연꽃을 장식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은 이 로제트문양이 불교와 그 계통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위향로의 본체 양식을 조형으로 하는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 또한 불교의 연화화생과는 다른 맥락을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백제의 장인들은 백제대향로의 노신을 북위향로 노신의 로제트문양에 대응하는 고대 동이계의 ‘광휘(光輝)의 연꽃’으로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백제대향로의 ‘연꽃과 용’의 상징체계다. 실제로 이러한 연꽃과 용의 주제는 불교가 전래되기 훨씬 이전인 고대 은나라 이래 동아시아의 유물에 간간이 나타나던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동탁은잔이나 고구려의 무용총에서도 이러한 주제를 만나볼 수 있다. 따라서 백제대향로의 연꽃은 불교의 연화화생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서역의 로제트문양에 대응하는 고대 동이계의 광휘를 상징하는 연꽃을 장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동북아인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연꽃을 태양의 광휘를 상징하는 ‘태양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늘에는 지상의 연못에 대응하는 ‘하늘연못’이 있으며, 지상의 연꽃은 이 하늘연못에 거꾸로 심어진 연꽃(또는 태양)의 광휘를 받아 이 세상을 환히 밝힌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왕궁이나 고분의 천장에 ‘하늘연못’, 즉 천정(天井)을 만들고 거기에 연꽃을 거꾸로 심었던 것이다. 고구려 고분이나 한나라 때의 기남화상석묘(沂南畵像石墓)의 천장에 장식된 연꽃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이 경우 연꽃과 짝을 이루는 용에 대해서도 고대인들은 일찍부터 지상의 연못과 하늘연못 사이를 순환하며 물을 조절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관계로 용이 연꽃을 호위하거나 그러한 모습으로 승천하는 모습을 자주 남기고 있는 것이다.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이 연화화생설과 무관하다는 것은 백제대향로의 또 다른 상징체계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백제대향로 노신의 연꽃과 산악도 사이 테두리에 장식된 류운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 류운문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 그 위의 공간과 아래의 공간을 분리해 주는 상징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백제대향로 역시 이 류운문을 경계로 그 위의 산악도와 아래 연지의 수상생태계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이 류운문은 노신의 연꽃이 연화화생의 관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따라서 그 위의 산악도가 노신의 연꽃으로부터 화생했다는 기존 불교학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류운문은 한대에 발생한 문양으로, 불교와는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나 동아시아의 연화화생과 관련된 어떤 미술품이나 조형물도 화생(化生)중인 연꽃과 그로부터 화생한 대상 사이에 이와 같은 류운문을 장식한 예가 없다.


  산악도를 신선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

  이런 점은 박물관 측에서 제시한 신선사상도 마찬가지다. 박물관 측은 당초 그 동안의 통설에 의지하여 백제대향로의 산악도가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인 봉래산(蓬萊山)을 상징하고 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박물관 측의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박산향로가 신선사상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그간의 통설과 고구려·백제에 도교가 일부 전해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그 동안 서구 학자들의 북방문화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박산향로의 산악도가 중국보다 북방과 서역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들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어 온 사실을 고려할 때 역시 성급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박산향로의 출현은 전국시대 말기 서역에서 전래되기 시작한 향료(香料·incense)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향을 피우는 문화는 중동지방에서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 시작된 문화로, 본래 중국에는 그러한 향료문화가 없었다. 따라서 향을 태우는 박산향로의 등장은 전국시대말 이래 동서문화 교류의 바람을 타고 향료가 중국에 전해진 사실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말하자면 새로운 진귀한 물질인 향료가 서역에서 전해지자 그것을 태워 향을 피울 도구(향로)가 필요해졌으며, 그에 따라 중국의 전통 제기인 두(豆)의 형식에다 서역과 북방에서 새로 전해진 산악도가 결합되어 박산향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중국의 신선사상은 초나라와 산둥(山東)성, 발해 연안 출신의 방사(方士)들이 새로운 이상향을 모색하던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서역-북방의 향료문화를 배경으로 한 박산향로와 고대 동이계 방사들에 의해 유포된 신선사상 사이에는 문화적 배경에 현격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박산향로의 사상적 배경을 신선사상으로 간주해온 그동안의 시각 또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백제대향로와 북위향로의 삼산형 산형은 고대 아시리아에서 발원해 사산조 페르시아를 거쳐 북위시대에 동북아로 전래된 것이다(332쪽 사진 참조). 따라서 중국의 연화화생과 신선사상이라는 기존의 발상을 가지고는 백제대향로의 구성과 상징체계의 핵심에 다가갈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북위는 서역의 양식들을 채용하여 나름대로 새로운 형식의 향로를 만들기는 했으나 불교의 국교화(國敎化)와 함께 모두 불당의 공양향로로 전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북위향로에는 단순히 서역의 양식들이 장식되어 있을 뿐 그것이 독자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지 못했으며, 또한 공양향로로 바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비불교적 양식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백제인들은 북위향로의 본체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봉황과 용을 수직선상에 조성한 것이라든지, 봉황을 중심으로 한 5악사와 5기러기의 상징체계 등 독자적인 상징체계를 구성함으로써 북위의 향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북위향로에 없는 수렵도라든지, 노신의 연꽃에 날짐승과 물고기를 장식함으로써 이른바 ‘연화도’(蓮花圖)의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 것 등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백제대향로는 단순히 서역의 양식을 채용한 북위향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독자적인 상징체계와 신화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백제대향로의 구성이 무령왕때 제기(祭器)로 사용된 동탁은잔의 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백제대향로가 특별히 사비 천도후 왕실의 중요한 제례(祭禮)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렇다면 백제대향로가 출토된 능산리 유적지의 성격은 무엇일까?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물관 측은 목탑지와 금당지가 발굴되자 이곳을 왕실 사찰터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을 단순히 백제의 왕실사찰터로 보기에는 몇가지 근본적인 의문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무엇보다 그 구조가 백제의 여느 사찰터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얼핏 1탑1금당1강당(一塔一金堂一講堂)식 가람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서 회랑(回廊)의 북단에 부속건물이 있는 점이라든지 남쪽 회랑(回廊)이 동서회랑이 시작되는 곳을 지나 양쪽의 배수로까지 연장되어 있는 점, 그리고 사찰의 대문격인 남문(南門)이 없고 수레가 왕래했을 것으로 보이는 나무다리와 돌다리가 있는 점 등은 모두 백제의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중문(中門) 앞의 연못터에서 이곳이 제사터임을 암시하는 ‘천’(天)‘봉천’(奉天)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목간(木簡)들이 발굴된 점 역시 이곳을 단순히 사찰터로 보는 것을 어렵게 한다. 더욱이 일반 사찰이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강당 자리에 강당 대신 동실(東室)과 서실(西室)의 두 본채가 있고 그 주위에 회랑이 둘러쳐 있는데, 이 또한 백제 사찰의 양식으로는 전례가 없는 것이다.


 
능산리 유적지 단순한 사찰터 아니다

  이러한 능산리 유적지의 독특한 구조와 관련해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백제의 시조사당(始祖廟)과 신궁(神宮)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는 온조왕이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이래 백제의 왕들이 즉위 이듬해에 시조사당을 찾아 배알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러한 시조 동명왕 사당에 대한 배알이 406년 전지왕(?支王)의 배알을 끝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단순히 기록의 누락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신궁과 관련된 중요한 기사가 있다. 성왕의 아들 창왕(昌王·나중의 위덕왕)의 동생 혜(惠)가 바다 건너 왜에 가서 성왕의 죽음을 알리는 과정에서 왜의 소가(蘇我) 대신이 성왕의 죽음을 탄식하며 백제의 ‘건방지신’(建邦之神)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 소가신(蘇我臣)이 물었다. 성왕은 천도지리에 통달하여 이름이 사방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 어찌 뜻밖에 서거하여 흘러간 물과 같이 돌아오시지 않고 무덤에서 쉬시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찌 아픈 것이 이렇게 심하고 슬픔이 이렇듯 간절합니까. 무릇 마음이 있는 자 그 누가 애도하지 않겠습니까. 혹 어떤 죄라도 있어 이런 화를 불렀습니까? 이제 또 어떤 묘책을 써 국가를 안정시킬 것입니까? (…) 옛날 웅략천황(雄略天皇) 때에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에 공박당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천황이 신지백(神祗伯)에게 명하여 신지에게 계책을 물어보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지가 신의 말을 빌어 말하기를, (백제의) 건방지신을 청하여, 가서 망국의 위기에 처한 왕을 구하면 반드시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 또한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건방지신을 청하여, 가서 백제를 구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라의 사직이 안녕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건방지신이란 하늘과 땅이 나뉠 때 초목도 말하던 시절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신입니다. 요즈음 들으니 그대 나라에서는 건방지신을 방치해 두고 제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지금이야말로 지난 죄를 뉘우치고 신궁을 수리해 신령들을 모시어 제사지내면 나라가 번성할 것입니다. 그대는 부디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일본서기” 흠명천황 16년(555년) 2월조의 기사)

  여기서 우리는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뒤 건방지신, 즉 나라의 건국신을 청하여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건방지신을 모시는 곳은 신궁이므로, 백제의 제사체계가 이미 한성시대에 시조묘(始祖廟) 제사에서 신궁 제사로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조와 건방지신 사이에는 신격의 차이가 있다. 시조가 단순히 나라를 건국한 조상이라면, 건방지신은 나라를 건국한 ‘신’(神)인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뒤의 신라에서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제21대 왕인 소지마립간이 487년 시조 탄강지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지었으며 495년에는 직접 그 자신이 신궁에 제사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본디 신라 왕실에서는 남해왕 이래 박혁거세의 시조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는데, 소지마립간 때에 이르러 시조 사당과 별도로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을(奈羅)에 신궁을 세운 것이다. 새로 신궁이 세워지면서 그때까지 왕들이 즉위한 이듬해 시조사당을 찾던 관습은 신궁을 중심으로 바뀐다.

  그렇게 볼 때 전지왕 이후 시조묘 배알 기사가 없는 것은 백제가 이미 한성시대에 신궁을 세우고 이 곳에 조상신과 각종 신령들을 모시게 되면서 따로 시조사당을 찾을 필요가 없어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한성백제의 기틀이 잡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귀족 및 토착세력 등 여러 세력집단들이 모셔 오던 시조들과 신령들에 대한 제사체계를 왕실을 중심으로 정리할 필요성이 커졌을 것이다.


  능산리 유적은 고구려 國社터 동대자 유적과 같은 기능

  신궁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왕은 사비 천도를 계획했을 때 응당 신궁의 이전 문제도 함께 고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이 사비에 세운 신궁은 어디에 있는가?
  이와 관련해 우리는 능산리 유적지, 그 중에서도 특히 강당 자리에 있던 두 채의 본실과 그 주위를 둘러싼 회랑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본실과 그를 둘러싼 회랑의 양식은 불교사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도의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는 건축양식이기 때문이다.

  먼저 서실을 보면, 북쪽과 동쪽의 안벽에 연도(煙道)가 있고 동벽의 중간에 아궁이가 있어 이 곳에서 불을 피우면 연기가 연도를 통해 북벽의 서쪽 끝에 있는 굴뚝으로 배출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서실 내부에 설치된 이같은 연도 시설은 놀랍게도 고구려의 국사(國社) 터로 추정되는 지안(集安)의 동대자(東臺子) 유적에서도 똑같이 확인되고 있다. 동대자 유적의 제1건물지 중앙에는 초석이 놓여 있는데, 능산리 유적지 강당 자리의 서실 중앙에도 초석이 놓여 있다. 두 유적은 이러한 구조상의 일치점 외에도 모두 도성 밖 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두 유적의 기능이 기본적으로 같았다는 것을 암시한다(아래 우측 그림).
  한편 서실과 220cm의 통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동실은 서실보다 동서 길이가 약간 더 길다. 내부는 초석이 없는 통칸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통칸 구조는 일반적으로 고상식(高床式)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동실터에 고상식 가옥 형태의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대 동북아의 고상식 가옥으로는 고구려의 부경과 일본의 이세신궁·정창원(正倉院) 등이 잘 알려져 있는데, 사찰터의 강당 자리에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이 고상식 가옥터는 당초 사비에 세워졌던 신궁의 건물지로 생각된다.

  고상식 가옥 하면 일반적으로 강가나 저습지에 짓는 남방식 건축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북유럽에서 서시베리아에 이르는 유라시아 지역과 동시베리아 아무르지역의 북방민족들의 신전과 창고를 보면 거의 고상식가옥 형태로 되어 있다(위 오른쪽 사진). 게다가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도 고상식 가옥 형태의 토기가 여러 점 발굴되는 것을 보면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도 고상식 가옥이 신전이나 창고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능산리 유적은 신궁에 사찰 형식 가해진 것

  따라서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할 때 능산리 유적지의 독특한 구조는 위덕왕이 본래 신궁이 있던 이곳을 불사(佛事)를 겸한 ‘신궁사’(神宮寺)로 개편하면서 그와 같은 복합구조를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능산리 유적지가 갖는 독특한 구조의 비밀, 즉 금당과 목탑이 있는 사찰이면서 동시에 전통신앙의 대상과 고상식 가옥이 있는, 따라서 사찰양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말하자면 능산리 유적지는 처음부터 사찰이 있던 곳이 아니라 본래 사비의 신궁이 있던 곳으로, 후대에 이곳에 불교의 목탑과 금당이 들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탑지에서 발굴된 사리감의 ‘창왕 13년’이라는 명문이 이를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사비에 신궁이 세워진 것은 천도 전후가 거의 분명한 데 반해 이 곳에 금당과 목탑이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다시 30년 정도가 경과한 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강당 자리의 신궁 건물지와 그 양쪽의 동서 건물지, 회랑 건물지 등의 기단 구조가 할석(割石)을 이용한 데 반해 목탑과 강당지의 기단 구조는 장대석(長臺石)을 이용한 데서도 드러난다. 신궁 건물지 기단의 구조와 목탑·금당지의 기단 구조가 이렇듯 다르다는 것은 건축양식이나 시기에서 양자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위덕왕은 신궁을 방치해 두어 성왕이 서거하는 불상사가 생겼으므로 이제라도 신궁을 수리해 건방지신을 다시 정성껏 모시라는 소가 대신의 기왕의 지적도 있는 터였으므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안정되자 그 동안 방치해 두었던 신궁의 앞마당에 불교식 금당과 목탑을 세워 신궁과 사찰의 형식을 겸한 신궁사로 개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를 계기로 성왕 말기에 방치되었던 신궁은 다시 그 기능을 회복했던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제사체계는 ‘신·불(神佛) 양립’이라는 독특한 구조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간 것으로 생각된다.

  능산리 유적지가 본래 사비의 신궁이었다는 이상의 사실과 백제대향로가 사비 천도 당시에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백제대향로가 이곳 능산리 유적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 등을 종합할 때 우리는 성왕이 당초 이 곳 사비의 신궁에 배향할 목적으로 백제대향로를 만들었다는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류운문 테두리를 경계로 위쪽의 산악·수렵도와 아래쪽 연지의 수상생태계를 묘사한 향로 본체의 구성과 상징체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다음 회에서는 백제대향로 본체의 상징체계를 분석할 것이며, 그것을 통해 백제인들과 고대 동북아인들의 세계관, 우주관, 정신세계 등을 보다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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