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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필리핀 출신의 흑치상지

monocrop 2007. 10. 2. 03:27

필리핀 출신의 흑치상지

한반도에서 강력한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는 해상을 장악함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눈을 돌리게 된다. 백제는 먼저 황해의 많은 도서를 부속 영토로 하였다. 백제 왕실의 사냥터로 유명한 강화도는 물론이고, 한반도의 서남해안에 사람이 사는 15개의 섬은 모두 백제의 행정지배를 받으면서 기항지 역할을 했다.

이곳을 토대로 한 백제의 해외경영은 다양한 인종의 거주와 물산의 집중을 가져왔다. <수서>에서 『(백제에는)신라, 고구려, 왜인들이 나라 안에 섞여 있으며 중국사람도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서 백제는 해상교역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잡거하는 국제화를 일찍부터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황해바다를 토대로 한 백제의 영역은 이후 더 확장돼 나간다.

『백제의 중이 중인도로 들어가 불경을 얻어 귀국했다』(조선불교통사)

『백제가 부남(扶南: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일본서기)

『백제 사인(使人)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교섭을 시도한) 곤륜(崑崙:남베트남, 캄보디아, 타이, 미얀마, 남부 말레이반도 등을 일괄한 동남아시아지역)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일본서기)

위의 기록들은 백제가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구축한 교역망의 범위를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만으로도 백제의 범위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554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는 「탑등(tapen,tapeten)」이 보이는데, 이것은 양모를 주재료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 북인도지방에서 산출되는 물품이다. 또 일본 나라시에 있는 백제계 후지노키 고분의 부장품 가운데는 남방 동물인 코끼리가 투조된 마안구(馬鞍具)가 있었는데, 이 마안구야말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동남아시아지역과 연결되는 6세기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압축해주는 물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두가 당시 백제의 광범위한 국제해상활동을 알려주는 단편들이다. 이도학씨는 『백제의 동남아시아 항로는 금강에서부터 서해안을 돌아 제주도와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하면서 대만해협을 통과, 중국 남부 연안의 복주와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해상실크로드』였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씨는 백제의 해상실크로드와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존재가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펼친 흑치상지(630`~689년)라는 백제 장군이라고 말한다.

『1929년 10월 도굴꾼들이 허난성 낙양 북망산에 소재한 묘광을 파헤쳤는데, 거기서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발견됐다. 거기서는 백제의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혀주는 보물 같은 글귀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학자들이 묘지석을 해석한 결과 흑치씨(黑齒氏)는 그 선조가 부여씨인데 흑치(黑齒)에 봉해졌으므로 자손이 그것을 성씨로 삼았다고 했고, 흑치는 동남아시아 지역의 군도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최근 중국학자들은 흑치가 필리핀임을 증명한 바 있다』

여기서 백제가 부여씨의 왕족 중 누군가를 흑치(필리핀)에 봉했다는 것은, 흑치가 백제 해상실크로드의 한 거점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막강한 해상교역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조선술은 당연히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일. 실제로 백제는 「방(舫)」이라고 표현되는 대형 선박을 이용하였고, 488~490년에는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북위와의 해전(海戰)에서 북위 선단을 격파할 정도로 비상한 해상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 백제의 선박은 이미 국제적으로 이름나 있었다. 650년에 왜가 제작한 대형 선박 2척의 이름을 「구다라선(百濟船)」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선박을 가리키는 「구다라선」은 크고 튼튼한 선박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 꽃보다남자-데스노트애니*일드쇼핑
글쓴이 : MaxFl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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