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의자대왕 서명천황기 2

monocrop 2007. 10. 2. 02:09
 

3. 의자대왕 서명천황의 일본 성덕태자 정벌

義慈大王 舒明天皇의 日本 聖德太子 征伐

                [陵碑] 息長帶廣額命 / [紀] 息長足日廣額天皇


8살의 아배阿輩 구주백제왕이 수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수서隋書]에서 서기 600년의 왜왕에 대하여 성은 천天(=阿每)이고, 이름 (字)은 다리시북고多利思北孤라고 했는데, 이 왜왕은 바로 서명천황舒明天皇(구주백제왕 재위600~629, 일본천황 재위629~641, 백제대왕 재위641~660) 이름이다. 서명천황의 능비는 오기나가타라시히로누카명息長帶廣額命이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타라시히히로누카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오기나가息長는 시가현慈賀縣의 지명이고, 어머니 다가라왕寶王(~618)이 태어난 고향일 것이다.

[수서]의 다리시多利思는 대의 일본 발음이다. [고사기]에 대帶를 다라시로 읽으라고 했다. 이를 [일본서기]에 옮길 때는 족足으로 바꾸어왔다.

북고北孤는 비고比古, 즉 일자日子다. 따라서 다리시북고는 대일帶日, 또는 족일足日이다.

광액廣額의 광은 당시 구주백제 광국廣國을 가리키는 말이다.

은 우리말 발음 “아이”가 의자대왕의 호인 아히阿輩에 해당한다.

또 그의 호는 아히-계미阿輩雞彌라고 했는데, 계미雞彌는 우리말로 “닭미”로서 서명대왕의 호칭이었던 다무라황자田村皇子와 같은 말이다.

아히阿輩은 액인 것이다. 액전촌額田寸은 누카다무라라고 할 수도 있다.

이때 그의 왕비도 계미雞彌라고 하였다. 이것도 역시 닭미로 읽으면 추고천황의 딸로 기록된 다미왕多米王이 된다. [일본서기]에서는 다메田眼로 기록했는데 똑같은 말이고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기록이 있다.

단, 추고천황이 536년생이고 다미왕이었던 다카라황녀寶皇女 즉, 황극천황皇極天皇은 594년생이므로 추고천황이 58세에 낳은 것이 되고, 추고천황의 남편인 민달천황은 585년에 죽었기 때문에 부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즉, 서명천황은 이미 600년에 수나라와 교섭하여 스스로 왜왕이라고 자처하였다. 또한 당시 왜왕의 후궁이 6~700명이라고 하였다. 의자대왕이 종국에 사비성에서 삼천 궁녀를 거느릴 전조가 보였다.

즉, 수나라와 교류한 600년의 왜왕은 겨우 8살의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추고천황과 성덕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600년의 국서에서 하늘을 형이라 하고 태양을 동생이라 부르는데 “해뜨기 전에 정사를 보고 해가 뜨면 일을 마치고 동생(즉 태양)에게 맡긴다. ”고 하여서 수나라 문제를 왜왕의 동생격인 태양에 비유하였다.

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云委我弟


[수서]의 기록에 이때 600년에 이미 의자대왕은 구주백제에 12관제를 시행하였다. 덕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이용하여 대덕大德, 소덕小德, 대인大仁, 소인小仁, 대의大義, 소의小義, 대예大禮, 소예小禮, 대지大智, 소지小智, 대신大信, 소신小信 등으로 12관제를 만들었다.


구주백제가 백제의 관위를 받지 않고, 스스로 관제를 만든 것은 본토백제에 대한 독립선언이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가 그를 섬긴다고 국서에 기록했는데, 스스로 위덕대왕 이후의 적손으로서 본토백제 무대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이는 그가 무대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607년의 국서에서는 더욱 광오한 표현으로, 수양제를 화나게 하였다.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고 하였다.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 

국서에서 신칭臣稱을 하지 않고, 편지를 올린다고 하지도 않았고 동등한 입정에서, 뜨는 태양이, 지는 태양에게 보내는 편지였으니, 수나라 양제가 지는 태양으로 놀림을 받아서 화를 낸 것이다.

608년 수양제는 배청裴清을 사자로 왜국에 보냈다.

수나라 사자 배청은 백제를 거쳐서 죽도竹島(=진도珍島),남망라국南望羅國(=남해도南海島), 쓰시마都斯麻國(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支國를 지나 구주 북부의 축자竹斯國에 상륙하였다. 그 동쪽에 중국인들이 사는 진왕국秦王國이 있었으니, 침류대왕 때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다. 다시 10여국을 지나 해안(구주 동해안)에 달하니, 왜왕倭王이 소덕小德이라는 벼슬을 가진 아배이阿輩台를 마중시켰다. 이는 의자대왕과 같은 아배阿輩를 사용하니 왕자였을 것이다.

이 구주 동해안에서 수나라 사자 배청은 왜왕을 알현하고 돌아갔다. 일본 본토인 대화에는 수나라 사자가 가지 않은 것이다.


600년 기록의 왜국 수도는 야먀퇴邪靡堆, 야마대耶馬臺였다. 지금의 대분현大分縣 중진시中津市 산국천山國川이 야마쿠니가와이니 중진시中津市가 당시 의자대왕의 왜국 수도 위치다.

한편 600년에 의자대왕의 태자로 이가미다불리利歌彌多弗利가 기록되었다. 리利가 이름이고, 가미다(=神田)-불리(佛)는 다리시-북고와 같은 경칭일 것이다. 신전神田은 구주九州 경도군京都郡 신전정神田町의 지명이다.

이곳 주변에 전방후원분을 비롯하여 많은 고분이 남아있다.

[고사기]에서 의자대왕의 동생으로 중진왕中津王과 다량왕多良王이 있다. 중진왕中津王은 구주백제의 중진시中津市를 다스리고, 다량왕多良王은 구주 다라국多羅國, 구마모도熊本城를 통치했을 것이다.


[일본서기/추고천황기]에서 서기 600년, 대마도에서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를 잡아서 유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는 성덕태자가 신라와 전쟁을 개시하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가마다는 규슈의 경도군에 있단 가마다(神田)로 고려되니 신라가 아니라 규슈와의 전쟁이다.

[일본서기]는 구주백제를 삭제하였으므로 구주백제와 일본의 전쟁을 기록할 수가 없어서 신라를 들먹이고 있다.

실제 성덕태자가 공략한 곳은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었다.

601년 2월 성덕태자의 이복형인 래목황자來目皇子가 장수가 되어서 25000의 병사를 이끌고, 구주백제에 상륙하여서 축자筑紫(후쿠오카福岡市)와 지마군島郡(후쿠오카 서쪽 경계군 지마군志馬郡)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4개월 뒤인 6월에 장수들이 쫓겨왔고, 래목황자來目皇子는 다음해 2월에 시체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02년 6월에 구주백제가 왜국으로 쳐들어왔다.

[일본서기]에서는 래목황자의 형인 당마황자當摩皇子를 장군으로 다시 오사카難波에서 출병하여 신라를 치려고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효고현兵庫縣에 있던 옛 파마국播磨國 서쪽에서 당마황자의 부인이 죽었다고 장수들이 돌아온다.

올바로 말하면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이 쳐들어왔고, 효고현의 전투에서 구주백제 의자대왕이 또다시 승리한 것이다.


추고천황은 나라현奈良縣 고시군高市郡 풍포궁豊浦宮에서 즉위했었는데, 이때 백제군의 침입으로 오하리다궁小治田宮으로 옮겨야 했다. 풍포궁이 불탔는지, 혹은 구주백제에서 온 점령자들에게 뺏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날로 성덕태자는 공손하게 의자대왕의 교화敎化를 받들어야 했다.

그래서 600년에 구주백제에 만들어진 12품의 관위제도를 일본에서도 강제로 도입하여 602년에 시행하였다.

602년에 성덕태자의 왜국은 구주백제의 신하국이 된 것이다.


[일본서기]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의자대왕이 만든 12품의 덕인의예지신德仁義禮智信을 덕인예신의지德仁禮信義智로 그 순서를 성의없이 옮겨적었다.


그리고 603년초에 헌법 17조가 공표되었다. 모두 좋은 말씀이었다.

의자대왕을 중국에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광오할 정도로 참으로 유식했던 것이다.

헌법 17조를 성덕태자가 만들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의자대왕의 공포일 뿐이다.

의자대왕은 그해 여름에 불상을 만들도록 하면서 성덕태자 등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았다.

성덕태자는 추고천황 즉위시부터 상궁上宮의 왕이었으니, 일본 왜왕인 추고천황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조카인 의자대왕의 아래가 되었다.


성덕태자는 600년 2월, 이가루가斑鳩에 궁을 지었다. 반구 법륭사터는 윤공천황의 원비조 궁터였다.

592년 추고천황 즉위 때에는 그가 상궁上宮 태자였으니 우에노미야노도요도미미上宮豊聰耳 태자였다.

그러나 602년 의자대왕에게 도전하여 전쟁을 일으켜 철저히 패배한 이후에는 상궁태자가 아니라 마굿간 태자가 되니 마야도요도미미廐戶豊聰耳가 된다. 廐戶를 고대에는 마야馬屋라고 기록하였다.

즉, 그의 처지가 격하된 것이다. 그리고 정치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는 식으로 화를 모면했을 것이다.


이후 일본이 당나라의 외교 답서를 백제에게 강탈당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오기인데다가 [일본서기] 저자가 가공해서 만들어놓은 기사다.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예속되어 외교권이 없으니 받을 국서가 애초에 없다.

형식적으로 강탈당한 왜국 사자는 죄를 논하지만, 강탈한 구주백제왕에게는 항의도 못한다. 또한 수나라 사자 배청은 구주에서 돌아간 것이 [수서]에 명백한데 [일본서기]는 대화에까지 왔던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추고천황은 모후인 황태부인 견람원의 능을 화려하게 새로 만든다.

그리고 천황기天皇記와 국기國記를 만들었는데, 뒤에 소아씨蘇我氏의 난으로 불타버렸다. 소아씨는 의자대왕의 수족이 되어 전횡하였으므로 주요한 역사 기록이었을 것이다.


622년에 비운의 성덕태자(574~622)가 49세로 죽었다.

성덕태자가 죽고 그의 아들인 산배대형山背大兄이 즉위하려고 하였는데, 구주백제왕인 의자대왕이 허락하지 않았고 아예 산배대형의 수족을 죽여서 경고하였다.

628년에는 추고천황도 93세로 죽었다. 그러나 능을 따로 만들 형편이 아니라서 596년에 죽은 죽전황자竹田皇子의 능에 합장하였다.


추고천황이 죽자 629년에 구주백제의 의자대왕은 대화에서 서명천황舒明天皇(593~641)으로 즉위하였다.

위덕대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598)의 적장자였고, 모후는 성명대왕의 아들인 민달천황의 딸인 누대희糠代姬였는데, 훗날 다카라왕寶王으로 추증되었다.

아좌태자의 구주백제 왕궁을 구주의 우좌시宇佐市로 밝혔는데, 의자대왕의 구주백제궁도 [수서]에 의하면 중진시中津市거나 우좌시宇佐市가 된다.


서명천황은 600년, 8살 때부터 해뜨는 쪽의 천자를 자처하고, 수나라 문제와 양제 두 황제를 기분 나쁘게 만든 국서로 유명한 왜왕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알려진 그의 별명이 해동증자海東曾子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영민했으면 그와같은 성인의 칭호를 받았을지 상상해볼 일이다.

서명천황은 구주에서 추고천황의 딸인 황극황녀皇極皇女, 즉 다미왕인 보황녀寶皇女(594~663)를 통하여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명천황은 무대왕의 딸인 제명천황齊明天皇(601~661)을 통하여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天智天皇614~671)와 진인황자眞人皇子(=天武天皇622~686)와 간인황녀間人皇女(~657), 그리고 선광왕善光王을 낳았다.

그런데, 서명천황에게 시집오기 전에 제명천황은 백제에서 고향왕高向王의 아들을 낳았었으니, 이는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이며 아직 아들이 없던 의자대왕의 양아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서명천황에게서는 선광왕까지 2남 1녀를 낳은 것이 된다.

의자대왕이 떠날 때에 동궁이 16세라고 하였는데, 이는 429년 의자대왕이 구주에서 대화로 떠날 때에 중대형황자의 나이다. 즉, 중대형황자가 구주백제왕을 계승한 것이다.

서명천황은 또 소아도대신蘇我島大臣의 딸 법제랑원法提郞媛(588~636)을 통하여 고인대형황자古人大兄皇子(~645)를 낳았다.

서명천황은 다시 본토백제에서 은고恩古 황후를 통하여 백제 태자 융을 낳았다.


서명천황은 630년 대화에 오카모도궁岡本宮을 지었다.

631년에 왜국의 인질이 되었다는 의자대왕의 아들 부여풍장夫餘豊璋은 의자대왕과 제명천황의 적자이며, 구주백제에서 모후인 제명천황과 떨어져 대화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구주백제가 따로 반란하지 못하게 조치한 것이다.

631년 당나라 사자 고표인高表仁이 왔는데, 왜국 왕자와 서로 예법을 다투다가 당나라 사자가 그냥 쫓겨갔다. 이 당시도 당나라 사자는 구주九州까지 왔을 것이고, 왜국왕의 왕자가 구주 책임자로 있었으니, 바로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로 고려된다.

서명천황 의자대왕은 본토백제를 통합하려는 목적이 있었는지, 대화의 백제천百濟川에 백제궁百濟宮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다. 의자대왕은 640년 백제궁을 지어 옮겨갔다.


본토백제에서는 639년에 무대왕이 익산益山 미륵사지로 천도를 시도하였다.

[육조고일관세음응험기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에서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地慕蜜地(=익산益山)로 천도하여 새로 사찰을 지었다. 그러나, 639년 겨울 11월에 크게 번개치면서 비가 왔는데, 제석정사帝釋精舍, 법당法堂, 부도浮圖들이 다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하였다,

지모밀지地慕蜜地는 금마저金馬渚 지반현支半縣(唐나라 도독부시대때 금마의 칭호)의 다른 표기니 익산益山이다. 무대왕의 능이 제석사 터에 있는 쌍릉이다. 모밀지慕蜜地에서 [일본서기]의 모정왕茅渟王이 유래한다. 무광왕武廣王, 무강왕武康王과 같고, 시호는 무대왕武大王인 것이다.

[일본서기]에서는 모정왕도 민달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했는데, [삼국사기]에서는 무대왕이 법대왕의 아들이다. 민달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도 그의 형제들인 위덕대왕과 법대왕의 아들들이 섞여 있다. 민달천황도 흠명천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어도 실제는 그 형인 성명대왕의 아들이었다.


641년 백제 무대왕이 서거하자 백제왕위를 받기 위해서 본토백제로 향했다.

일본 대화조정에는 의자대왕의 황후였던 황극천황이 즉위하였다.

의자대왕 부부가 각기 본토백제와 일본백제를 나누어 다스린 것이다.


일본에 만들어진 의자대왕 서명천황릉은 오시카 단총고분忍阪段ノ塚古墳이라고 하는데 하방상원분下方上圓墳이다.

아래는 삼단의 방형 제단이고 위는 2단의 원분으로서 직경 42m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수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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