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수심자님의 백제일본사

[스크랩] 의자대왕 서명천황기 1

monocrop 2007. 10. 2. 02:04
 

백제 위덕대왕의 적자인 아좌태자가 구주백제에서 죽고, 그 아들 의자왕자가 구주백제왕이 되는데,

백제 대왕으로 법대왕 부자가 차례로 즉위하자, 의자대왕은 백제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2품 관제를 시행하고 수나라와 외교하며 백제의 상국을 자처한다.

일본 대화조정의 성덕태자가 구주백제를 치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패전하여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에 복속하고

대화조정은 구주백제의 12품관제를 도입하고 성덕태자는 의자왕자 앞에 굴복한다.

1. 성명대왕 왕녀 추고천황과 손자 성덕태자

   聖明大王 王女 推古天皇과 孫子 聖德太子

                [記] 豐御食炊屋姬命 / [紀]豐御食炊屋姬天皇


592년에 즉위한 추고천황推古天皇(536~628)도요미기카시키야히메豐御食炊屋姬라고 불렀는데 성명대왕의 딸이며 이복 오빠인 민달천황의 황후였고, 용명천황의 윗누이였다.

추고천황의 모후는 성명대왕의 황태부인皇太夫人이었던 기다시堅藍媛로서 소아도목숙녜蘇我稻目宿禰의 딸이다.

[원흥사연기]에서는 도요미기가시기야等與彌氣賀斯岐夜라고 했고 613년에  원흥사를 지었다.


추고천황 즉위 당시에 우헤노미야노우마야도노도요도미미上宮廐戶豊聰耳태자를 황태자로 하였는데, 백제 혜대왕이 되었던 용명천황의 아들이다.

추고천황을 세운 때부터 성덕태자는 대화의 조정을 모두 섭정하였고, 만기를 위임받아 실제적인 왕권을 가졌다고 기록되었다.

성덕태자는 불교를 장려하여 신하들이 다투어 절을 지었다.

이때 위덕천황은 구주백제왕이던 법대왕을 대신하여 자신의 큰 아들인 아좌태자阿佐太子를 구주백제왕으로 보냈다.



2. 위덕대왕의 적장자 아좌태자

  威德大王의 嫡長子 阿佐太子


[신찬성씨록]에서 민달천황이 백제왕 선광善廣(=光)의 조부라고 기록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 선광善廣은 의자대왕의 아들이다.

즉, [신찬성씨록]만 보면 민달천황은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된다. 백제 의자대왕의 아버지가 민달천황일까?


그런데 [고사기]에서는 민달천황이 광희廣姬와 결혼하여서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572~598)를 낳았고 이를 [일본서기]에서는 오시카사히코히토오호에押阪彥人大兄皇子라고 하였는데, 그가 서명천황舒明天皇을 낳았다고 전한다.

일본 34대 서명천황舒明天皇(재위629~641)이 백제 의자대왕(재위641~660)이 되었다. 이는 재위기간이 옮겨간 것으로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백제 의자대왕이 일본의 서명천황인 것은 여러가지 정황상 틀림없다. 자세한 것은 뒤에 있다.

그렇다면 민달천황은 선광왕의 증조부가 되고 의자대왕의 할아버지가 된다.

[신찬성씨록]과 조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역사 조작이 있다. 일본의 34대 천황인 서명천황이 백제 왕계가 아니라, 일본 천황계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서 서명천황의 부왕을 백제 위덕대왕에서 떼어내서 그 동생인 민달천황에게로 옮겨붙인 것이다. 물론 민달천황도 백제 성명대왕의 아들이지만 일단은 일본 천황이다.


[고사기]에 기록된 서명천황의 부왕인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는 실제로 백제 위덕대왕 때에 구주백제왕으로 임명된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였다.

즉 위덕대왕의 적장자嫡長子였다.

백제 아좌태자는 구주백제왕으로서 구주 동북부 오오이타현大分縣 우좌시宇佐市의 우좌팔번신사宇佐八幡神社 터의 우좌궁에 있었다.

이 지역의 성씨가 우좌씨宇佐氏와 일자씨日子氏인데,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에서 비롯된 것이 우좌시의 일자씨日子氏이고, 민달천황에서 비롯된 것이 우좌씨宇佐氏였다.

본래 민달천황의 구주백제왕 시절 도읍은 오사다譯語田, 즉 구주 대분현의 우사시宇佐市였고 우사씨宇佐氏를 남겼다. 그러나 이 우사시에 또 일자씨日子氏를 남긴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는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였던 것이다.


히코히토태자日子人太子의 아들인 서명천황舒明天皇(593~660)에 대해 좀더 밝히면 그의 시호는 능비에서 오기나가-대광액息長帶廣額이었고 [일본서기]에서는 오기나가-족일광액명息長足日廣額命이다.

타라시라고 읽으라고 [고사기] 서문에서 저자 야스마로가 말했는데 이 대가 [일본서기]에서는 모두 족으로 바뀌었다. 둘 다 우리말 다리와 관련된다.


그런데 [수서]에 기록된 서기 600년의 왜왕의 호가 아배阿輩雞彌이면서,  자字는 다라시북고多羅斯北孤라고 했으니 서명천황의 시호 족일광액足日廣額와 똑같다.

또한 액은 당시 우리말 발음이 “아이”고, 이는 아배阿輩의 당시 발음인 아히와 비슷하다. 계미雞彌는 우리말로 닭미인데 이를 일본에서는 서명천황을 다무라田村 황자라고 하였다.

즉 서기 600년에, 구주백제왕이었던 아배계미가 629년에 일본 서명천황이 되고 641년에 백제 의자대왕이 된 것이다.

보충 증거로는 600년의 [수서] 기록에 나타난 왜왕의 부인에 대한 기록이다. [수서]에서 600년의 왜국왕비 이름은 계미雞彌라고 하였다. 우리말로 닭미인데 추고천황의 딸로서 서명천황에게 시집간 다미왕多米王이었던 것이다.

즉, 우리말로 닭(鷄)미왕이 다미왕多未王도 되고 계미雞彌왕도 되고 다무라왕田村王도 되고, 그리고 다카라왕寶王((=닭라)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수나라에 간 사자가 백제, 신라가 왜국을 상국으로 섬긴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무대왕武大王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서 아배계미는 백제 무대왕의 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의자대왕이 [삼국사기]에서 백제 무대왕의 원자元子라고 했는데 이는 위덕대왕의 적장자인 아좌태자의 적장자로서 원자元子라고 주장한 것이 된다.

대신에, 의자대왕의 후비인 제명천황齊明天皇이 모정왕茅渟王의 딸이라고 했는데 바로 백제 무대왕武大王의 딸이었던 것이다.


의자대왕이 백제의 원자라는 것은 그가 위덕대왕의 동생인 민달천황의 손자가 아니라 위덕대왕의 적손자라는 것이니, 의자대왕의 부왕인 아좌태자, 즉 히코히토태자는 민달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위덕대왕의 아들인 것이다.


아좌태자는 후손으로 일자씨日子氏를 남긴 우좌시에서 구주 백제왕을 지냈다.

우좌시에는 흠명천황 때에 처음 광번廣幡이 나타났다. 성명대왕의 동생인 흠명천황이 백제로부터 광번廣幡을 들고 왔던 것이고 구주 춘일시의 광정궁廣庭宮國에서 광번이 유래된다.

아좌태자는 추고천황의 딸인 다카라왕寶王(~618)과 결혼하였다. 이때 다카라왕을 다무라왕田村王이라고도 했으며, 그래서 아들인 서명천황을 다무라황자田村皇子라고도 불렀다. 다카라왕의 또다른 이름은 누카데히메糠代比賣인데 누가데는 액전額田이라고도 기록할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좌태자(572~598)는 부왕인 위덕대왕(~598)보다 며칠 먼저 죽었다.

아좌태자의 고분인 히코히토 태자 고분은 나라현의 법륭사 서쪽에 만들어졌는데, 후지노키고분藤木古墳이라고 부르며 원분인데 지름이 48m다.

도굴당하지 않아서 엄청 많은 귀중한 장식품들이 나왔다. 금동제 마구류와 코끼리 장식, 봉황장식, 귀면 장식등이다. 그리고 수많은 옥구슬과 옥전대도玉纏大刀가 나왔고, 유체는 20세 전후의 남자였다. 능비에서 598년 11월 27일에 죽은 것은 확인되었는데 나이가 정확히 해독되지 않았다. 27세로 추정하고 있다.

위덕대왕은 12월에 서거하였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었으니 며칠 앞서 태자가 죽은 것이다.

아좌태자의 부인인 보왕寶王의 고분도 역시 618년에 서거한 것만 밝혀지고, 출생년을 알 수가 없다. 오사카 태자정 관음총고분観音塚古墳이라고 한다.

위덕대왕의 태자인 아좌태자를 민달천황의 태자라고 [일본서기]나 [고사기]가 조작한 이유는 서명천황을 백제 왕자가 아닌 것으로 조작하기 위한 것뿐이다. 그런 조작이 없으면 일본 서명천황의 뿌리를 만세일계로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592년 숭준천황이 죽고 추고천황이 즉위하니 구주백제왕으로서는 법대왕이 있고, 일본 황태자로는 혜대왕의 아들인 성덕태자가 있었다.

법대왕은 594년에 포로로 잡고 있던 대화의 장군 5명을 돌려보냈다.

그들은 591년 숭준천황의 구주 침공 때에 잡힌 장군들이다.


596년 위덕대왕은 자신의 아들인 적장자 아좌태자阿佐太子를 구주백제왕으로 보내어 법대왕과 교체하였다.

아좌태자는 구주에 가서 우좌시 팔번신궁宇佐八幡神宮에서 다스리면서 일본의 추고천황을 만나러 갔다. 이때 성덕태자의 그림을 일본에 남겼다고 전하는데 현재 일본 국보다.


598년 11월말에 아좌태자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죽었다.

위덕대왕은 아좌태자를 대신하여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武大王을 구주백제왕으로 보냈다.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으로 간 것도 추정이지만 확실하다. 무대왕의 아들이 구주에 남아 있다가 구주백제왕을 하고, 또 대화의 효덕천황孝德天皇(596~654)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대왕이 구주에 가서 세력을 심어놓지 않았다면, 그의 아들에게 기회가 생길 수 없는  일들이다.

또한 무대왕의 모후인 오오타마왕大俣姬王이 길비황조모명吉備皇祖母命인데, 643년 9월에 일본에서 죽어서 나라현의 암옥산岩屋山에 묻힌 것도 고려해야 한다. 고분은 한변 40m의 방분方墳이다. 물론 이는 백제 법대왕도 일본에 살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무대왕의 다른 이름이 무광왕武廣王이다. 따라서 그가 구주백제왕으로 있던 곳은 복강현福岡縣 춘일시春日市 광정궁廣廷宮일 가능성이 높다.


아좌태자가 죽은 다음달 598년 12월에 위덕대왕이 서거하여서, 동생인 혜대왕慧大王(=용명천황)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혜대왕도 단 1년만에 서거하고, 위덕대왕의 막내 아들인 법대왕法大王이 즉위하였다.

백제 법대왕은 전국에 살생을 금하였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599년 대화의 성덕태자가 반란의 기미를 보였다. 구주백제인 임나를 위한다면서 신라를 쳤다. 이때 대화조정이 대마도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고려된다. 

[일본서기] 기록만으로 보면 백제 무대왕인 모정왕과 아좌태자는 둘 다 민달천황의 아들이지만, 각기 법대왕의 아들과 위덕대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하다.


서기 600년 법대왕이 역시 1년만에 서거하고, 법대왕의 아들인 무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무대왕이 구주백제왕에서 백제대왕으로 옮겨가면서, 아좌태자阿佐太子의 아들인 8살의 아배阿輩 왕자가 새로운 구주백제왕으로 즉위하였다. 뒷날 서명천황이 되고 또 의자대왕이 되었다.

백제 무대왕은 아배阿輩 왕자에게 후비로서 딸을 주었는데 제명천황齊明天皇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백제 무대왕을 제명천황과 효덕천황의 부왕으로서 모정왕茅渟王으로 기록했다.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이 백제 무대왕인데 서동을 맛동이라고 하며, 이 맛동과 모정왕의 발음이 관련된다.


출처 : 일본사 X-file /일본천황은 백제왕자였다
글쓴이 : 수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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