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요서에 대하여 !"
(순 서)
1. 8세기 이전 "요동(遼東)은 "산서성(山西省) 요(遼)의 동쪽"을
의미한다 2.『사기』에서 진(秦)과 요동(遼東) : 진장성연구(秦長城硏究) 3. 한과 요동(창해군으로
연구) 4. 고구리(高句麗)와 요동(遼東) 5. 맥제(백제)와 요동, 요서(遼東 遼西) 6. 왜 遼가 遼東 遼西의 기점이 됐을까
? 7. 왜 遼東, 遼西가 혼돈되었는가 ?
(1) 8세기 이전 "요동(遼東)은
"산서성(山西省) 요(遼)의 동쪽"을 의미한다
- 8기 이전의 요동, 요서의 기준점은 산서성 지명 "요(遼)=지금의
좌권"이다.(기준성 방향언어)


요동, 요서를 부르는 기준점은 동이국가와 장안 중심의 지나족 국가
경계지역에 있고 고구려, 백제의 위치를 밝혀 줄 중요한 기준점 이므로 우리민족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시대별로 반드시 밝혀야
한다
(요동, 요서의 중요성)
- B.C 5세기 연(燕)나라와
조선(古朝鮮)의 경계와 위치를 알 수 있다. - 고구려 서쪽 경계와 고구려 초기 및 말기 위치를 알 수 있다. - 백제의 위치와 수도
한성과 웅진 위치를 알 수 있다. - 대방(帶方)의 위치를 알 수 있다. - 서안평(西安平) 위치를 밝혀 고구려 서쪽과 요(遼)나라
수도 위치를 알 수 있다.
(연(燕)과 요동(遼東))
①
BC5세기 요동은『사기』권69 소진(蘇秦)의 기록으로 위치를 알 수 있다.
→ 일부한자 지원이 안되어 공란으로 나타나는 점
이해바랍니다
"연(燕)의 동서남북 기록"
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樓煩屬雁門郡
林胡國名朔嵐己北) 西有雲中九原(雲中九原秦曰九原郡漢曰五原郡雲中城內楡林縣九原郡在楡林縣西界) 南有 易水( 出鹵城)
㉠
동유조선요동(東有 朝鮮 遼東 :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다) ㉡ 북유임호누번(北有 林胡 樓煩 :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다) ㉢
서유운중구원(西有 雲中 九原 :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다) ㉣ 남유호타역수(南有 易水 :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
있다)
이중에서 누번속안문(樓煩屬雁門 : 누번은 안문에 속하여 있다)과 임호삭람지북(林胡朔嵐之北 : 임호는 삭과 람의 북쪽에
있다)과 구원개오원(九原改五原 : 구원을 오원으로 바뀌었다)과 호타출로성( 出鹵城 : 호타는 노성에서 출발하였다)
위와
같이 각 방향 마다 2개의 명칭이 있어 "연"강역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나라를 나타낼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인데 영역과는 상관없다. 둘째, 영역을 나타내는 방법인데 위치까지도 동시에 알 수 있다.
연의 기록에서 위치를 나타냈는지, 영역을 나타냈는지 밝혀야 한다.
연의 ㉡은
북쪽 표기에서 "임호"는
삭,람의 북쪽에 있고, "누번"은 안문에 속하여 있다고 했는데 안문은 동쪽에 있고 삭, 람은 서쪽에 있다.
㉢은 서쪽 표기이다.
운중과 구원이 있다고 했는데 현재 운중이 있을 뿐 구원은 없으나 구원과 유사한 지명이 북쪽에 "오원"이 있고 남쪽에 태원이 있는데
기록에서는 "구원"을 "오원"으로 변경했다 하는데 현재의 "오원"은 삭, 람, 안문의 서북쪽에 있으니 서쪽이 북쪽의 두 지점보다 더 북쪽에 있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구원을 오원으로 변경했다고 하는 것보다는 비슷한 태원(太原)이 매우 가까운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구(九)에서 대(大)로, 대(大)는 태(太)로 유사형태화(類似形態化)로 본다면 태원(太原)을
구원(九原)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태원은 운중(雲中)의 남쪽에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
㉣은 남쪽 기록인데
역수(易水)와 호타출로성( 出鹵城)이라 하였는데 현지도에 로성(潞城)이 있다. 노성 주변에서 역수와 비슷한 형태의 지명이
wenshu로 발음되는 문수(文水)가 있을 뿐인데 로성(潞城)의 서북쪽에 있다.
㉡㉢㉣에서 북쪽 서쪽 남쪽의 위치가 정하여
질 수 있는데
㉠의 동쪽은 조선과 요동(遼東)이라고 하였다.
조선은 국호인데 고조선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기자가 살던 조선의 기(箕)땅으로 본다면 아래쪽에 둘 수 있으나 고조선의 기비(箕丕)나 위만 및 예군남여(南閭)의
위치를 보면 위쪽에 둘 수가 있다.
㉠㉡㉢㉣의 지명이 있는 곳에서 요동과 닮은 지명으로는
안문과 로성 사이의
"요(遼)"밖에 없는데 요에서 태행산맥까지는 요동(遼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산서성에 8개의 명칭을 배열하니 8각을 형성하고
이중에서 북쪽의 두 지점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서,남쪽이 산맥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며 영역을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8개 명칭중에서 삭, 람지북, 안문, 운중, 로성(鹵城)과 같은 로성(潞城)의 4개의 명칭이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결정되게 마련이다.
----------< 북쪽
>
------林胡-------樓煩 ------朔
嵐------雁門 ---雲中-+-----------+-朝鮮 서------|-----------|--------동 쪽------|-----------|--------쪽 ---九原
+-----------+
遼東 ------?---------鹵城 -----易水
---------< 남쪽 >
이로서 연나라때 요동은 요 동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지도상 표시)

(우적도상
"요")

태원 바로
및에 "요"가 있다
(2)『사기』에서 진(秦)과 요동(遼東) :
진장성연구(秦長城硏究)
BC3세기 요동시점의 연구는 "진장성"에서 밝혀야
한다
(진장성은 104도-113도까지 진나라 때 축성된 성을 말한다. 요의 서쪽(요서)에 있다)
→ 일부
한자지원이 안되는 점 이해바랍니다
< 지도상의 진장성 표시
>

<
설 명 >
▒ 1번 진노란색 : 제일 왼쪽 태행산맥 근처에서 끝나는 장성이
"진장성"이다
분명히 사서의 기록대로 본다면 태행산맥을 넘지 못하였다 진나라 시절에 그랬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전부
후대에 쌓은 성이다 지나족이 BC 3세기에는 여기까지 밖에 성을 쌓지 못했다
▒ 2번 : 후대에 쌓은 성이다
▒
3번 : 고구려 천리장성이다.
이장성의 서쪽에 고구려가 있었다. 이성은 631년 만주까지 지배하였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성이었다 (본문에 자세히 살명되어있습니다)
▒ 4번 : 고려가 쌓은 천리장성으로 보인다
▒ 1번 진장성을
계속 보충설명합니다
아래지도를 보자
북경대에서 출판한 "중국 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상"에 표시된 "진장성"
표시이다. 북경대 교재에 표시된 내용이다 중국인들도 진장성 인식은 태행산맥 서쪽에서 끝났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그렇게 교육하고
있다
진장성이 고구려 천리장성과 맞닿는 산해관까지 구축되었다고 표시하거나 황해도 까지 표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표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
< 중국 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상 "진장성" 표시 >

< 중국 군사지도상에서 만리장성 표시
>

- 노란선이
진시황의 장성이고 - 녹색선은 진시황 후대에 축성한 성인 것 같다
(진시황의 장성은)
서쪽의 임조(臨* : 감숙성) 강중(羌中)에서 남쪽의 북향호를 지나서 북쪽으로 하수를 지나 새(塞)와 음산(陰山 : 산서성)사이
까지이고 음산을 지나면 요동이다.
(西至臨*羌中 南至北嚮戶北據河爲塞*陰山至遼東) (서지임조강중
남지북향호북거하위새병음산지요동)
(지리지에)
서쪽 하수(河水)에 음산현이
있다
(地理志西河有陰山縣) (지리지서하유음산현)
(「사기」에 있는 진시황의 장성(長城)에 대한
기록인데)
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비교하여 보자.
(塞先代反*白浪反謂靈夏勝等州之北黃河 陰山在朔州北塞外 從河傍陰山
東至遼東 築長城爲北界) (새선대반병백랑반위령하승등주지북황하 음산재삭주북새외 종하방음산 동지요동 축장성위북계)
(현재
황하 서쪽은)
감숙성에서 시작하여 령, 하, 승(靈 夏 勝)을 지나 북(北)황하 황석보(滑石堡)에서 동쪽으로 와서
한줄기는 남쪽으로 안문(雁門)까지 이르는 장성과 또 한줄기는 북쪽으로 마니산에 이르고 숭례(崇禮)를 거처 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이
있다.
(진장성은)
서쪽의 임조(감숙성)에서 시작하여 강, 역(羌 域)을 지나서 북쪽으로 황하(黃河)를
거쳐 음산(陰山) 근처에 이르고 음산(陰山)을 지나면 요동이다
라는 뜻이다
장안중심의 진이 장성을 음산 북쪽
장성을 먼저 축성했다면 굳이 남쪽에 장성을 구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서쪽에서부터 안문(雁門)까지 장성이 있고 안문 동쪽에는
장성이 없고 안문 동쪽에는 태행(太行)산맥이 버티고 있다.
안문은 요와 같은 남북축상에 있으니 안문 동쪽을 요동이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태행(太行)산맥 동서의 세력과 안문의 남북세력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축성(築城)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진장성 부분 확대도 : "삭(朔)"북쪽 "음산(지도표시는 산음)"
>

- 노란선 끝부분 바로 직전에 "삭(朔)" - 노란선 끝부분에
"안문(관)" - "삭" 북동쪽에 "음산(산음)" → 장성이 끝난부분이 바로 태행산맥이다 → 장성 동쪽이 요동이라는
의미이다
(분명한 것은)
진장성은 안문(雁門)에서 끝나는 장성으로 볼 수밖에 없다 진시황 장성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임조에서 안문(雁門)까지 도달하는 유적이 현존하고 있다
분명히 진장성은 기록과 일치하게 음산의 남쪽 안문에서 장성이
끝나며 동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안문의 동쪽은 요의 동쪽, 즉 요동으로 표기한 것으로 볼수
있다
(음산지요동:陰山至遼東)은 음산을 지나면 요동에 이른다고 해석된다.
음산과 요동에
대하여
본문(本文) 음산지요동(陰山至遼東)을 정의(正義)에서 해석하여
놓기를
정의(正義) 음산동지요동(陰山東至遼東)이라 하였으므로 요동의 시발점을 어디로 보는가를 밝혀질 수 있게 하고 있다.
두 문장은 동자(東字)의 차이밖에 없지만 뜻은 많은 차이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장성(秦長城)
기록에서)
요동이란 장성이 끝나는 삭, 안문의 동쪽을 요 중심의 동쪽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 삭, 안문, 음산 위치 >

이 음산 위부분에 음산산맥이 있다
< 중국지도상 - 음산산맥 >

진시황때 진장성은 태행산맥에서 그쳤다는 것은 사서와 지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는 장성의 북쪽과 장성의 동쪽 민족이 서로 달랐다는 반증이며 장성의 동쪽은 바로 기원전 3세기에 "동이 조선"이 있었다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장성끝 부분이 기원전 3세기 요동/요서의 경계기점이었다
(중국군사지도 : 자연도 상
진장성)
(안내 : 지도를 클릭하시면 큰 지도를 보실수 있습니다)

- 삭(朔) - 안문관 : 고대의 유명한 전쟁지명 -
음산 - 오대산 - 항산 - 오대산 - 부평 : 고 북평 - 백석산 : 백석산에서 출발하는 조그만 장성이
있다
(3) 한과 요동(창해군으로 연구)
①
BC.1세기 요동의 시점 연구는 한(漢) 창해군 연구에서 알 수 있다.
㉠ 원삭원년에 예왕 남여(濊王 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명을 데리고 요동군에 속하게 하니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하였다.
(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
:『후한서』권85) (원삭원년예군남여등반우거솔이십팔만구예요동내속무제이기지위창해군 :『후한서』권85)
㉡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사기』 권30 ---팽오가멸조선치창해지군칙연제지간미연발동 :『사기』 권30
㉢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한서』 권24 ---팽오천예맥조선치창해군칙연제지간미연발동 :『한서』 권24
㉣
東夷 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 :『후한서』 권85 ---동이예군남여등구이십팔만인항위창해군 :『후한서』
권85
(武濟因文景之畜忿胡奧之害卽位數年嚴助朱買臣等招徠東 事兩奧"江淮之間"蕭然煩費矣
) (무제인문경지축분호오지해즉위수년엄조주매신등초내동구사양오"강회지간"소연번비의 )
창해군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남여(南閭) 등이 요동으로 이동한 지역을 창해군이라고 했을 수도 있고,
둘째는 남여 등이 살고 있는 지역을
명칭만 조선의 우거밑에서 한 무제로 바뀌였다고 볼 수도 있다.
어찌하든 창해군은 요동에 있으며 연제(燕齊)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서(漢書)』권 24 에 의하면 팽오가 예물로써 구멍을 뚫듯 매수하여 예맥조선에 창해군을
설치했다 (팽오아예맥조선치창해군 :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고 하였으니 이동 한 것이 아니고 칭호만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해군이 바로
요동에 있다는 점이다.
이제 창해군의 위치가 과연 어디일까 ? 『한서』권 24 에서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燕齊)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치 창해군즉연제지간마연발동 : 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고 했다.
창해군을 설치하는데 왜 연, 제(燕
齊)(산서성과 산동성)사이에서 소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땅 안에 창해군이 설치되는데 다른 부족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니 소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연(燕)이 전항에서 살펴보았듯이 산서성에 있고 제(齊)가 산동성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 창해가
바로 창해군이라 할 수 있고 창해의 서쪽에 요동의 기준(基準)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창해의 잔영 창과 신해 서쪽에는
태행산맥이 있고 그 서쪽에 요(遼)가 있다. 요의 동쪽에 창해가 있으니 창해군으로 요동의 기준(基準)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4) 고구리(高句麗)와 요동(遼東)
삼국지, 후한서, 송서, 양서, 남사에서
고구리(려음"리")는 요동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동지동천리(遼東之東千餘里)라 하여 '요동에서 천여리 떨어져서 고구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에서 우 북평, 어양, 상곡, 태원(右 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하였다고 하였고, 안평의 서쪽를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위서』에는 광주(光州)를, 『구당서』에서는 항성(項城)과 은산(銀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은산, 북평, 서안평(銀山, 北平(阜平), 西安平)은 하북성에, 광주, 항성(光州 項城) 은 하남성에,
태원(太原)은 산서성에 있다.
요동에 고구리가 있다면 북평 은산 신성 의 하북성, 광주 항성의 하남성도 요동이어야 하고
태원도 요동에 가까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태종 이전의 고구리는 요에 가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唐)태종
이전의 고구리는 요동지동천여리라는 기록으로 보면 은산, 용도(북평), 신성, 서안평(銀山, 甬道(北平), 新城, 西安平) 등에서
서쪽으로 천리(千里)를 가면 요동의 기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은산(銀山)에서 천리(千里)에 가까운 곳은 바로 산서성
요(遼)가 있다.
요동의 시점이 아닌가 그러니 연(燕)과 조선, 진장성(秦長城)과 요동, 한과 창해군에서 나타난 대로
음산보다 서쪽으로 요동 기점이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여리라는 말은 그대로 믿는 것보다 요동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어떤 이유이든 은산, 용도(북평), 신성, 서안평, 항성, 광주보다 요동의 기점은 서쪽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태행산맥의 서쪽에 요동의 기점이 있다는 연, 진장성, 창해지군 사건과 동일한 뜻이라 할 수 있다.

(5) 맥제(백제)와 요동, 요서(遼東 遼西)
(중국 "요나라" 이전 요동요서의 기점인
지명 "요(현재 좌권)" 및 진평2군의 위치도)

유일하게 맥제는 요동과 요서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양서와 남사의
기록)
"요동백제역거유요서진평2군지" (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
(송서(宋書)의
기록)
요동백제유요서백제소치위지진평군진평현 (遼東百濟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
요서와 요동에 대해서 고찰하여
보면 맥제(百濟)가 요동에 있으며 요서에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요동(遼東)에 있어야 할
사서별 지명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남제서 기록)
광양, 조선, 대방, 광능, 청하, 낙랑, 성양 (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
(구당서 기록)
항성, 웅진, 대산, 동명, 박성, 제성, 백마 (項城,
熊津, 大山, 東明, 薄城, 諸城, 白馬)
(삼국사기 기록)
맥제본기에는 석문, 평원, 황산, 사자하, 숭산,
독산, 동성, 잠산. 덕안 (石門, 平原, 黃山, 泗 河, 崇山, 獨山, 桐城, 岑山. 德安) 등이 요동에 있어야 한다.
요서의 진평이군(晋平二郡)은 산서성 요의 서쪽에는 진성(晉城)과 고평(高平)이 있어 한자씩을 취한 지명이다.
요동
지명은
(하북성에) 석문, 청하, 평원(石門, 淸河, 平原)이 있고,
(산동성(山東省)에는) 동명,
황산, 박산, 제성, 백마, 사자하(東明, 黃山, 博山, 諸城, 白馬, 泗자河)가 있으며,
(하남성에는) 항성(項城)이,
안휘성에는 독산, 동성, 잠산(獨山, 桐城, 岑山)이,
(강서성에는) 덕안(德安)이 있다.
분명히 태행산맥의 동서를 가름하는 것이 요동과 요서로 볼 수 있는데 오직 요서에 진평이군이 있다고 했는데 요서의 시발점을
진평이군(晋平二郡)으로 볼 수 있고 요동의 시발점은 음산지요동(陰山之遼東)이었다.
이를 지도상에 맞추어 보면 동경 113도를
중심으로 서쪽에 음산, 진평, 고평(陰山, 晉城, 高平)이 있었다.
태행산맥의 서쪽에 요(遼)가 있는데 음산, 진평, 고평과는
동경으로 0.5도의 차이 밖에 없다. 이것은 연(燕)에서 요(遼)의 동쪽을 요동(遼東)이라 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는 서기 9세기 이전의 요동과 요서는 요(遼)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의 서쪽을 요서(遼西)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연(燕)나라 이후의 요동(遼東)과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요나라 이전
요동과 요서는 산서성의 요(遼)중심의 동서를 말한다. → 구요동 구요서(舊遼東 舊遼西)
☞ 요나라 이후 요동과
요서는 요령성의 요하(遼河)의 동서를 말한다. → 신요동 신요서(新遼東 新遼西)

(6) 왜 遼가 遼東 遼西의 기점이 됐을까 ?
① 진장성에서 하수(河水)까지의 중앙의
지점에 있다. ②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서쪽으로 튀어나온 두 지점에 제일 가까운 지명이다. ③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나족(支那族 :漢部族)과 조선족의 격전지이기 때문에 요충지역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 ④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옛이름이
서개마대산(西蓋馬大山)이다. 그 명칭을 다 쓸수는 없어서 약칭이 필요했던 것이다. ⑤ 요동요서의 표현은 바로 국경 즉 전역(戰域)의
표시인 것이다. 요동에는 조선족의 국가가 요서에는 지나족(한부족)의 국가가 있어 대치되었으므로 자주 거론이 되었던
것이다.
(7) 왜 遼東, 遼西가 혼돈되었는가 ?
요(遼)나라가
907년부터 1124년까지 존재하면서 요동을 기록함에 있어 요동과 9세기 이전 요동기록에서 요동(遼東) 시발점에 대한 혼돈을 촉발 시켰던
것이다.
요나라 상경도 상경임황부(上京道 上京臨潢府)는 한나라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의 땅에 있었으니 요나라는 요동에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동경부(東京府)는 요하(遼河)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서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나라의 동쪽이라하고 요동(遼東)이라 불렀다. 그래서 요동반도라는 지역명칭이 생긴 것이다. (고구리의 땅일 때는
남옥저의 명칭이었다)
요(遼)나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요나라 이전의 요동을 찾으려 하지 않고,요나라 동쪽인 요동으로 9세기 이전
역사에서 요동으로 표현하게 되니 10세기 이후 요동과 혼돈하게 되였고 지금은 遼나라 이전의 요동 요서와 遼나라 이후의 요동을 거듭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혼돈의 시작은 907년 요나라 건국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요동은
산서성 요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였다.
(산서성 요(遼 : 좌권)를 중심으로 동쪽에
우리역사와 관계가 깊은 지명들)
☞ 요(遼:左權)의 동쪽
광영(광녕) 독산성 석문 은산 밀운 북평 양향 탁
역 고안 안차 용성 신성 신농 수성 창주 신해 안평 청하 평원 은 황산 대산(대산) 동명 연주 운주 사수 치주 청주 제성 내주 용도(북평:용도)
고대인성( 주구점) 귀덕 서화 항성 몽성 해 풍 우 서 영국 선성 함산 독산 회영
(廣靈(廣 ) 獨山城 石門
銀山 密雲 北平 良鄕 易 固安 安次 容城 新城 新農 遂城 滄州 新海 安平 淸河 平原 恩 黃山 岱山(大山) 東明 州 州 泗水 淄州 靑州
諸城 萊州) 甬道(北平:龍道) 古代人城( 주구점) 歸德 西華 項城 蒙城 海 豊 虞 徐 寧國 宣城 含山 獨山 懷寧
)
(요의 중심과 서쪽)
숭산 진성 고평 여성 태원 요 남 운중 안문 대 삭 음산
오대산 특히 안평의 서쪽(서안평)에 찬황이 있다.
(崇山 晉城 高平 黎城 太原 遼 嵐 雲中 雁門 代 朔
陰山 五臺山
특히 안평의 서쪽(西安平)에 贊皇이 있다.)

▒ 중국군사지도 산서성 세밀지도 (중요지명
표기)
(안내 : 지도를 클릭하시면 큰지도를 보실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