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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 학자들은 도일(渡日) 한국인이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한다

monocrop 2007. 2. 16. 06:21

일본 학자들은 도일(渡日) 한국인이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을 인정한다

 일본 학자들은 도일 한국인이 일본사회에 큰 영향과 변동을 준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를 4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는 단군조선 말기인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로 일본에 아직 정치권력이 완전히 정립되기 전에 일본 북규슈를 중심으로 한국문화가 파급된 최초의 예로 야요이(彌生)문화의 유물, 유적에 의하여 추측되는 시대와 그 후기에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대륙문화가 전해져서 일본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 시기.
   제2단계는 4, 5세기에 한국인 대집단이 일본에 건너와서 문자와 광산ㆍ제철ㆍ신농경ㆍ토목ㆍ기술 등을 전해준 시기.
   제3단계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에 불교인ㆍ최신 기술자ㆍ예술가ㆍ건축가들이 일본에 건너와서 이를 전해준 시기.
   제4단계는 7세기 후반에 백제의 망명집단이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조정에 참여하고, 또한 고구려 망명집단이 일본에 건너와서 신라인 및 백제인과 함께 도쿄 등지의 광대한 지역을 개척해 농사를 짓고, 옷감을 만들었는데 이미 단군조선 말기에 먼저 일본에 건 너온 한국인들이 기초를 세워놓고 있었다고 일본학자들은 그들의 학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는 한ㆍ일 양국은 도일이나 문화교류의 정도를 넘어서 일본왕조와 일본민족의 시원(始源), 즉 발상지가 '한국'이라는 것 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 학자들 중에는 "한국땅이 일본민족의 핵심 발상지이고, 일본인 선조 중에는 수많은 한인계의 도일인, 즉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 있으며 일본의 일왕가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망명가, 그밖에 이주한 한인들의 후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일본인 다니가와(谷川健一) 씨는 "일본일왕가의 제1대 신무(神武)부터 제14대 중애(仲哀)까지는 모두 다 가공(架空)의 인물이고, 제15대 응신(應神)이 실존 인간인 최초의 일본 왕인데 응신의 혈맥은 한국 태생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1985년 3월에 발행된 구라다(倉田康夫) 씨의《일본역사요설(日本歷史要說)》에 보면, 6세기 초에 백제로부터 각 분야의 학자들이 일본에 초청되어 왔던 사실을 기재하고 나서, "6세기초… 일본 일왕의 주변은 지식인으로서의 귀화인에 의해서 차지되어졌고, 대담한 추측이 허락되어진다면 일왕가(家)도 귀화계의 민족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본인 학자 가시마(鹿島昇) 씨는 "일본왕통보(王統譜)가 한국의 가락과 백제의 두 왕통을 합하여 이룬 것이고, 제38대 천지(天智)일왕은 백제의 끝왕 부여풍(扶餘豊)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시마 씨의 논술인, 1980년《역사와 현대》에 실린〈단군고기와 야마다이국〉의 내용을 보면, "금일에는 한반도를 포함해서《기기(記紀)》(즉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일본열도의 진실한 사서(史書)라고 진심으로 믿으려는 사학자와 고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한인(韓人)이라는 것이 백제인이고, 천지(天智)일왕(626∼672)이 백제인이라고 본다면 그에 의하여 창작된 사서의 원본은 백제사의 일본 번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승리를 과장하고, 패배를 고쳐쓰게 하고, 망명은 기입하지 않는 그 수법은 그들의 사서작성의 기본 법칙이었다.", "우가야 왕조사를 말소해서… 일본 열도에서 자생한 왕조였다고 하는 허구로써 사서를 작성했다. 우가야 왕조는 단군조선으로부터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왕조이다.", "무엇보다도 명치유신 때의 권력자들은 일본이 일본열도 내의 '자생왕조'라는 허구에 대하여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이 한국의 역사서적들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이마니시(今西龍)를 중심으로 하여 긴 세월에 걸쳐서 한국의 '역사'자료들을 대규모로 약탈하여 태워 없앴으며, 대마도의 종가(宗家)에 전해 내려온 역사책들도 몰수하여 그것들을 일본 궁내성의 문고속에 감추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출처 : 살아있는 우리의 역사를 찾아서...
글쓴이 : 이런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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