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속 부여사, 그것이 알고 싶다 | |||||||
뉴스메이커 691호 | |||||||
인터넷 토론방·역사연구단체 등 새로운 주장 봇물 정통 역사학계 “정확한 사료 통해 실증돼야 인정”
잃어버린 한민족의 고리, 부여사. 그 사라진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21세기 벽두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각종 인터넷 토론방과 카페, 블로그에선 부여사에 관한 글이 넘치고 감춰진 역사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실 부여사에 관한 주장은 이전에도 꾸준히 제기됐지만 MBC 드라마 ‘주몽’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덕분에 이같은 주장이 부쩍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다음카페 연구모임 6680여 명 회원 열풍은 온라인 공간이 주도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아고라에선 검색창에 ‘부여 역사’라는 키워드를 치면 무려 3900여 건의 글이 뜬다. 이같은 사정은 또 다른 포털인 네이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밖에 다음카페 ‘우리역사연구모임’은 부여사에 관한 뜨거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최근 부쩍 가입 회원 수가 늘어 6680여 명 회원에 게시물만 2만90여 건에 이른다. 비단 온라인뿐만이 아니다. 사단법인 참역사문화연구회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0여 명 정규직원을 가동하고 있다. 부여사뿐 아니라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등 고대사에 관한 연구와 주장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교과서 개정운동까지 펼쳐 눈길을 끈다. 최근 일간지에 ‘교과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1억 원을 주겠다’는 파격적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 단체는 홈페이지(www.history.or.kr)에 교과서 개정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여 불과 20여 일 만에 500여 명이 동참하는 성과도 거뒀다. 연구회의 김승태 실장은 “실명제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잖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국민 역사인식의 시금석이라 할 고교 교과서는 ‘부여는 1세기 초 왕호를 사용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다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 결국 고구려에 편입됐다’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부여사에 대한 변변한 개설서도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길사 등에서 쓴 ‘한국사’ 통사, 북한에서 출간한 ‘조선전사’의 부여에 관한 부분이 그나마 이해를 돕고 있을 따름. 국내에서 발표된 부여 관련 논문도 30여 편에 불과하다. 송호정·박경철·유태용 교수 정도가 활발한 글을 쓰는 연구자로 꼽힌다. 그렇다면 이같은 무관심에 가까운 역사적 빈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문헌이 매우 부족해 고고학적 발굴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대부분 중국 영토 내에 자리해 어려운 상황”이라며 “국내 연구자도 10여 명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종 이설도 대두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참역사문화연구회의 김종서 박사가 주장하는 ‘1000년 왕국 부여설’. 현재 알려진 부여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는 주장이다. 그는 부여를 한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설정한 뒤 조공까지 받은 대제국으로 묘사하며, 부여가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참역사문화연구회 ‘1000년 왕국설’ 김 박사는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53~기원전 221)의 지리위치와 각 지역 특산물 등을 기록한 ‘사기’ ‘화식열전’을 꼽는다. 이 책은 연나라 북쪽에 부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부여의 건국 시점도 최소 기원전 221년 이전으로 끌어올려진다.
부여도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주몽과 다른 인물로 해석)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부 연해주로 이동해 건국한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다진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까지 다양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의 대부여 조공설에 대해선 옥갑(玉匣)을 예로 들었다. 옥갑은 중국 전한(前漢:기원전 206~서기 8년) 시절 황제와 제후왕을 매장할 때 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해 만든 수의. 이 옥갑을 황제가 미리 만들어 현도군 창고에 보관하다가 부여 왕이 서거하면 곧바로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단초가 됐다.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의 이 기록을 들어 금은보화 등의 조공도 뒤따랐을 것으로 유추한다. 그는 또 수학적 위치고증방법을 고안해 한사군이 알려진 것과 달리 한반도 역외에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의 일부 논객은 “중국은 한 무제 때 사마천이 ‘사기’를 쓴 이후로 조선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고조선을 역사에서 지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부여사를 지우는 것이다”며 의도적 역사 삭제론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네티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놀라운 의견이 제기됐다며 정부가 나서 검증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일개 단체의 주장일 따름이며 종교단체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폄하하는 태도까지 가지각색이다. 정작 역사학계의 반응도 냉담하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역사는 주장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사료와 발굴자료를 통해 실증해야 한다”며 이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특히 김종서 박사가 아직 정식으로 학계에 논문을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아 그의 주장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대국민 인식전환이 목표라 소수만 참가하는 학계를 배제하고 저술과 강의를 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2006년 가을을 달구고 있는 부여사 바로알기 운동의 귀추가 주목된다.
<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 |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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