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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산해경에 기록된 조선

monocrop 2007. 1. 4. 15:41
 

산해경에 기록된 조선


2002-02-28


단군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위서(魏書)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삼국유사는 종파적인 차원에서 단군의 선인도(仙人道)를 신화로 처리했다.


그러나 왜곡의 와중에도 실재했다는 문구가 있어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문정창 등이며 근자에는 신용하 교수도 삼국유사 기사 속에서도 실증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토크쇼에 참여했던 박성수 교수가 아마 안되겠다 싶어 착수했는지 노구를 이끌고 정인보의 한문본「조선사연구」를 편역 해 출간했다. 이 책은 수많은 기록을 제시해 단군 역사가 실증했음을 보여주는 아주 잘 된 책이다.


지나족의 주장이라면 독약도 약으로 마실 모화 사대주의자라면 당연히 믿어야 하는 사마천의「사기」열전과 우(禹)임금 때 출간된「산해경(山海經)」에도 실증역사로 나오는 단군이, 수많은 사서 중 그나마 위서(魏書)를 왜곡 인용한 것을 가지고 신화라 하는 것은 실로 무지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정인보에 의하면 그나마 척발(拓拔)씨의「위서(魏書」가 아니라 왕침(王沈)이 쓴「조위서(曹魏書)」이다.


오히려 이보다 더 정통성이 있어 지나족도 경전을 뜻 할 때나 쓰는 경(經)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산해경(山海經)」에는 더 자세히 나온다. 「산해경」이 어떤 책인가?


지나족의 정사를 지은 사마천조차도 감히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저울질 할 수 없다던 우 임금 때의 성스런 지리서 아닌가. 그렇다면 이 책은 바로 정사인데, 바로 이 지리서에 단군조선이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나온다.


더 이상 무슨 잔말이 필요한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진왕(秦王) 정(政) 3년조요령성(遼寧省) 요양(遼陽)이 옛 단군 조선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나오며


同書 원봉(元封) 2년조에도 요동(遼東)에 왕험성(王險城:壬儉城)이 있고 거기가 바로 조선의 구도(舊都)였다는 사실이 나온다.


박문기는 "조(朝) 자와 우리역사"란 타이틀에서 중국의 사서인「구당서(舊唐書)」 <헌종기(憲宗紀)>에 '조(朝)는 천자가 다스리는 곳이다',


후한(後漢) 시대의 채옹(蔡邕)이 <독단(獨斷)>에서 '천자라는 이름이 동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풍속이 아비를 하늘이라 하고 어미를 땅이라 한다. 그러므로 천자라 하였다(天子之名 號始於東夷 其俗 父天母地 故曰天子<獨斷>)한 대목을 들이대고,


천자가 있는 궁실을 조궁(朝宮), 천자의 명령을 조명(朝命), 천자의 위엄을 조위(朝威), 천자가 정사를 살피는 곳을 조정(朝廷), 관리들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옷을 조복(朝服)이라 하였으며, 제후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근(朝覲)이라 하였고, 제후의 신하가 조선의 천자를 뵙는 일을 조빙(朝聘)이라 했으며, 천자국인 조선에 공물을 바치는 것을 조공(朝貢)이라 했다고 한다.


정인보는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고)조선인을 가리켜 군자라 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다투지 않았다(互讓不爭)고 말하고 있다.


「동방삭신이경(東方朔神異經)」에는 좀더 자세히 조선인을 설명하고 있다.(신이경이 동이족 문서 산해경을 모델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방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남자는 모두 흰 띠에 검은 관을 썼고 여자는 다 색 옷을 입었다. 언제나 겸손하여 말솜씨가 험하지 않으며 서로 칭찬은 하되 헐어 말하지 아니하고 누가 환란(患亂)이 있는 것을 보면 죽음을 무릅쓰고 구출하는데, 얼른 보면 어리석게 보이지만 이들을 부르기를 선인(善人)이라 한다 하였다.


정인보가 인용한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최고의 인문지리서로 사마천도 감히 이러쿵저러쿵 저울질 할 수 없는 신성한 책이라 했다.


그래서 인문지리서 치고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경전을 뜻하는 성스런 경(經) 자 칭호를 제목으로 달고 있는 책이다. 못난 우리의 국사편찬위원회가 이 책의 신빙성이 없다고 토를 단 적이 있다. (見「上古朝鮮三千年史」崔在仁 著)


그래서 단군조선을 인정 못하겠단다. 과연 그런가?


「산해경(山海經)」<해외북경>동해 안쪽 북해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국명을 가진 나라가 있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고 명쾌하게 고증하고 있다. <自由中國 藝文印書 발행. 참고로 국내판에는 안나온다.>


우(禹)는 누구인가. 요(堯) 밑에서 치수사업을 하던 부친 곤을 이어 순(舜) 밑에서 양자강 치수사업을 하면서 2대 부루 단군을 사천성 중경의 남산(南山) 끝 양자강가에 있는 도산(塗山)에서 만나 여요동시 또는 여고동시라 해서 단군조선이 요임금과 동시대라 한 바로 그 단군조선의 치수 노하우인 5행치수법의 금간옥첩을 전수받은 당사자다.


순의 제위를 빼앗은 바로 그 우(禹) 때 쓰여진 책이 바로 산해경인데 이 「산해경(山海經)」<해외북경>에 동해 안쪽, 북해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국명을 가진 나라가 있다고 명쾌하게 고증하고 있는 것이니 더 이상 얼마나 확실한가?



산해경에 기록된 조선 2


전통적으로《산해경》의 저자를 우(禹) 임금과 백익(伯益)이라 고 한다. 우(禹)임금이 위(位)에 있었던 것이 기원전 2183∼2175년의 9년 동안이므로 [동작빈(董作賓)의 연표학(年表學)에 의함] 《산해경》은 지금으로부터 4,200여 년 전 우리나라 상고의 단군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산해경(山海經)」<해내북경>에는 조선을 천독국이라 하고, 천독국은 외인애지((朝鮮天毒 畏人愛之)의 경천애인, 홍익의 나라임을 말하고,


단군조선의 소도(蘇塗)사상을 말하고 있다.(貴道德有浮屠(蘇塗)) 게다가 석가불 이전의 전불시대가 있음을 고증하고 있으니 이 대목은 「삼국유사」와 일치하는 기록이다.(出此國也 道法流通 漢記云 浮屠佛也 其敎以修善慈心不殺生)


「서전」은 이 천독을 뭐라 하고 있냐면 은(殷)의 명신 기자가 왕자인 미자(微子)에게 '하늘(천독)이 재앙을 내려 은이 황폐하도록 버려두고 있거늘(天毒降災荒殷邦) 임금(紂)과 백성은 하늘을 두려운 줄 모르고 있다' 했다.


기자가 정의한 이 같은 천독의 해석「회남자」<수형훈>숙신을 하늘백성인 천민(天民)이라 해서 숙이 공경 경이요, 신이 두려울 외(有修服民 肅愼氏天民 肅敬也 愼畏也)라 한 것과 서로 상통하는 풀이이다.


농학박사 유달영, 농학박사 염도의가 저술한「나라꽃 무궁화(학원사)」를 보면, <산해경>은 상고대의 지리와 풍속을 기록한 책으로서 백익(伯益)이 저자라고 전하여지는데, 백익은 우(禹)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해경」에 우리 민족, 특히 무궁화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대목이 들어 있다.


「산해경」의 제9권<해외동경>에 보면,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그들은 의관을 정제히 하고 칼을 차며 짐승을 먹이고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리며,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기를 싫어하는 겸허의 덕성이 있다. 그 땅에는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든다.'고 기록되어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우리 조상들이 군자의 나라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용감하고도 겸허한 양면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곳곳에 아름다운 무궁화가 만발해 있는 것이 아주 인상적인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무궁화가 단군시대 때 이미 한반도전역에 분포되고 있었으며 배달민족이 무궁화를 매우 사랑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인 정재서 역주의「산해경」<해외동경>을 보면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려 곁에 두고 있으며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라는 식물이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 혹은 간유시의 북쪽에 있다고도 한다(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一日在肝楡之尸北)"라 하고


첫째, 대호(大虎)에 대해 주석하기를 문호(文虎)의 잘못(학의행)이라 하고 문호(文虎)는 얼룩무늬가 있는 호랑이로 최남선은 군자국의 이러한 정경을 우리 민속 중의 산신 혹은 독성(獨聖)의 자태를 묘사한 것으로 보았다 하고


둘째, 호양부쟁(好讓不爭)에 대해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인용해 "동이(東夷)는 대(大)를 따랐다. 대인(大人)이다. 이(夷)의 풍속이 어질고 어진 자는 오래 살기 때문에 군자국과 불사국이 있다"하고


셋째, 훈(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이 훈(薰) 자가 어떤 판본에는 근(槿)으로 되어있다 하고(곽박), 목근(木槿) 혹은 근(槿)은 일명 순(蕣:무궁화 순)이라고도 하는데 순(蕣)과 훈(薰)은 발음이 상통하다(학의행) 했다.


또 "군자국에는 무궁화꽃이 많은데 백성들이 그것을 먹는다. 낭야(瑯邪)로부터 3만리 떨어진 곳이다(君子之國, 多木 之花, 人民食之, 去 瑯邪三萬里)"「예문유취(藝文類聚)」라 했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에 훈화초(薰華草)(=목근화)로 기록된 무궁화(蕣)


이로 보면 현대에 와서 무궁화를 뜻하는 목근화(木槿花)라는 말이 바로 목근화(木 花)에서 왔음을 알 수 있고 이는 훈화초(薰華草)에서 비롯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면 사마천이 태어나기 전의 우(禹) 임금(단군성조와 동시대) 때의「산해경」은 사마천이 태어나기 전이라 우리민족 고유의 무궁화 역사의 유장함을 가히 알 수 있다.


여기서 최 재인의 주장을 핵심만 뽑아서 소개한다.

상고 단군 시대의 고기(古記)에 의하면 조선은 해 돋는 동방의 나라로 아침의 신선한 햇빛을 제일먼저 받는 나라라는 뜻으로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한다.(東史年表 古記云 東方有先光朝日光鮮故謂之朝鮮)


중국「사기(史記)」1권에도 '제요이친구족(帝堯以親九族)'이라 하여 요(堯)가 9이(夷)족과 친하다 했으며 9족(9夷) 중에 욱이(郁夷)가 있어 욱이의 땅은 해 돋는 동방의 양곡(陽谷)이라 했다.(「사기」권1 <오제본기> 分命羲仲居郁夷曰陽谷 正義 堯命羲仲理東方夷之地日所出處 名曰陽明之谷 羲仲主東方之官 徐廣云尙書日出陽谷蓋郁夷亦地之別名也)


단군 조선의 실재를 밝힌 신라인 박제상의 「부도지」는 차치 하더라도 발해인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단기고사」가 증거하는 단군조선의 실체 증언은 일연의 「삼국유사」보다(1268) 무려 600여 년이나 앞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삼국유사」보다(1268) 140여 년 앞선 「삼국사기」에도 단군 조선 유민이 6촌에 나누어 살아 진한 6 부가 되었으며(先是朝鮮遺民 分居爲六村 是爲辰韓六部) 동서 <고구려 본기 제5>에도 고구려 동천왕 때 환도성에서 천도한 평양이 단군왕검이 도읍한 곳임을(平壤者仙人王儉之宅也) 밝히고 있다.


이 사료도 못 믿겠다는 지독한 종파주의 환자나 식민사대주의자를 위해 중국 측 사료를 정리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사기」권1에 산융발숙신(山戎發肅愼)이 조이(鳥夷)로 동북방의 이족(夷族)이라 했다(山戎發肅愼鳥夷東北之夷) 단재 신채호 선생은 숙신이 조선의 이두문 음사(音寫) 표기임을 밝혔다.


동 기록을 보면, 동북이(東北夷)의 중심은 숙신 곧 조선(곧 단군조선)으로 그 남쪽에 장백산(백두산)이 있으며 그곳 사람은 백의민족이라 나온다.(「사기」 권2 <하본기> 鳥夷皮服 正義 地理志云 靺鞨國古肅愼也 其國南有白山 皆白其人處)


「죽서기년」을 보면 단군조선인 숙신이 단궁(檀弓)을 제후국 순에게 수출 것을 말하고 있다.


단궁이라는 글자 조어(造語)만 보아도 사실은 숙신이 단군 조선임을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얘기가 끝난 것이다.


수많은 상고사 자료들은 숙신이 길이 4척이 되는 거대한 단궁과 호시(楛矢), 석촉(石鏃)을 사용했으며(東北之人 古肅愼氏 多勇力善射 弓長四尺 弩矢用靑石爲矢鏃)


지나인은 단궁과 호시, 석촉의 비밀을 알려 노력했고 고구려 연개소문시절 까지도 이러한 대궁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見「韓國의 再發見」 伏草 崔仁 著)


「후한서」115 <동이전>에도 주무왕의 은(殷) 혁명 때 숙신은 단군조선의 무기 단궁과 호시, 석촉을 제공했다 하고(乃武王滅紂 肅愼來獻石弩楛矢)


「사기」38 <송미자세가>에 은 말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하여 조선의 실재를 증거하고 있다.(箕子東走朝鮮聞之 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이 대목은 학자들 사이에 기자가 과연 조선으로 간 것이냐 아니냐의 학술적 논쟁이 있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에 갔느냐 안갔느냐가 아니라 조선이 분명히 은나라와 동시대에 있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이 책은 중국의 정사인 사기가 아닌가? 한국의 미친 종파주의자는 이 대목도 못 믿으면서 어찌 역사적으로 고증도 안되는 아브라함의 역사는 믿는단 말인가.


「삼국유사」왕검 조선 편에 단군 조선이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로 옮길 무렵이 주나라 무왕 때임을 밝히고 있으니 숙신으로부터 단궁과 호시, 석촉을 지원받은 무왕이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말한 바로 그 조선이 숙신임을 몰랐을 리 없다.


「사기」<하본기>에 의하면 순(舜)과 무왕에게 단군조선의 명물인 단궁, 호시, 석촉을 제공한 숙신조선은 그 지역이 하우(夏禹)의 도읍지 태원(太原) 근방의 기주(冀州)로부터 1만리나 되었다.(古肅愼在京冀州東北萬里己下 其國南白山(白頭山)皆白人其處)


그 외 「사기」 권69 <소진열전>에 연(燕) 문후가 말하기를 연 동쪽에 조선이 있고 그 동쪽에 요동이라 했으니(燕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동서 <흉노열전>에 의하면 당시 산융(山戎)이라는 동이 예맥조선은 연을 정벌했는데, 연은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인 제(齊)나라의 도움으로 산융을 물리친 것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에서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바로 산융 또는 동호(東胡:동쪽 조선을 동쪽 오랑캐로 기술) 곧 예맥조선에 인질로 와있다 진개를 돌려보내자 조선땅 천여리를 빼앗고 장성을 축조했다고 하고 있으나


해방이후 망국적 반도사학자들은 진개가 빼앗은 천여리 땅이 반도內 땅이라고 은폐 왜곡 축소시켜왔다.(「사기」<흉노전> 秦開爲質於胡 胡甚信之 還而襲破走東胡 東胡 千餘里 燕亦築長成)


「전한서」94 상 흉노전도 동일하다 다만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른다고 한 장성의 설명에서 양평(襄平)을 설명한 안사고의 주석에 조양(造陽)의 지명이 현재 상곡계(上谷界)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위략(魏略)」집본(輯本)은 주 왕조의 제후국인 연이 장수 진개를 통해 연 동쪽의 조선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까지의 조선땅을 공파하고 취한 땅이 2천리인데,


그 결과 조선과 연의 경계가 요동의 만번한(滿番汗:진번조선, 예맥조선)이었다고 말한다.(燕乃遣將秦開 攻具取之朝鮮二千里 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

 


출처 : 동이민족 역사사료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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