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홍원탁-북방민족사

[스크랩] 9. `예맥 퉁구스`와 `말갈 여진 퉁구스`의 연합

monocrop 2007. 1. 2. 18:05
 

9. "예맥 퉁구스"와 "말갈 여진 퉁구스"의 연합



광개토왕대왕 이후, 고구려는 250여년간 흑수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 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나타난다.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하여 200년 이상 만주 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게 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원탁 (서울대 교수)



5세기가 시작될 무렵,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391-412)은 백제 수도 한성을 (396년에) 포위공격하고, 요동을 정복한 후, 만주 동북쪽의 숙신(肅愼)마저 굴복시켰다.1 광개토왕 생전에 이룩한 군사적 위업을 계기로, 고구려는 그 후 250여 년간 흑수 말갈을 포함하여 동부 만주의 말갈족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고구려를 위해 싸웠던 기록들이 여러 정사(正史)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삼국사기에는 말갈 병사들이 고구려를 위해 전쟁에 동원된 기록이 여섯 번 나타난다. 장수왕(長壽王, 413-491)이 만명의 말갈 병사들을 몸소 거느리고 468년에 신라의 주(州) 하나를 공격 해 빼앗았고; 문자명왕(文咨明王)이 507년에 고노(高老)장군과 말갈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영양왕(嬰陽王)이 598년에 직접 만명의 말갈 병사를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고; 보장왕(寶藏王)은 645년에 안시성의 포위를 풀기 위하여 고구려군과 함께 말갈 병사 15만명을 파견했다. 고구려군은 말갈군, 백제군과 함께 655년에 신라를 공격하였으며, 보장왕은 661년에 어느 장군에게 말갈 병사를 인솔하고 신라의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2


금사(金史)에는 15만명의 흑수말갈 병사들이 645년의 안시성 전투에서 고구려를 위해 당태종의 군대와 싸웠다고 적혀있고, 구당서(舊唐書) 역시 15만의 말갈군이 안시성을 구하러 왔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 당태종이 사로잡은 말갈 병사 3,300명을 생매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3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436년에, 북위의 공격을 받은 북연(北燕, 409-36)의 왕과 그 가족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으며, 494년에는 숙신-말갈에 의해 쫓겨난 부여왕 일족을 받아들여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말한다. 위서(魏書)는, 장수왕이 98세의 나이로 서거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가 몸소 흰 두건에 베옷을 입고 대동(大同)의 동쪽 교외에서 추도식을 거행했다고 말한다. 4


수나라와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여러 차례 패한 곳은 바로 요하 유역과 산악 지형의 요동반도 이었다. 요동지역은 마침내 668년에 당나라의 지배아래 들어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관할하게 되었다. 당 조정은 요동의 옛 고구려인들을 달래기 위해, 마지막 왕인 보장왕을 (677년에)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함께 반란을 도모했기 때문에 귀양을 보냈다.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동무가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동무의 직계 후손들이 태수직위를 세습하면서 역사가들이 요동을 소고구려(小高句麗)라 부르게 되었다. 5


고구려 유민들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땅에 발해(689-926)를 세웠다. 발해의 시조는 옛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689-719)이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자 포로로 잡혀 영주(營州, 오늘날 朝陽)에 정착하게 되었으나, 거란족의 폭동이 발생하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가 진(震)을 건국하고, 713년에는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기록을 보면 대(大)씨족과 조영은 고구려 왕족 중 핵심 부족인 계루(桂樓)부에 속했거나, 아니면 고구려에 귀화한 말갈족이었던 것 같다. 6


732년에 발해의 무왕(大武藝, 719-737)은 바다건너로 군대를 보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 오늘날의 봉래)를 공격하였다. 733년,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아래위로 동시에 공격했다. 통일신라와 발해 왕국의 출현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정복하겠다는 당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발해가 처음으로 야마토 왕국에 사절단을 보냈던 것은 727년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옛 고구려 땅을 모두 회복하여 부여의 옛 풍속을 이어가고 있다며, 발해가 바로 옛 고구려임을 천명했다. 발해왕은 798년에 야마토 왕에게 국서를 보내, 발해가 고구려(또는 고씨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7


금사(金史)는,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과 흑수말갈족을 포함한 동부 만주의 모든 말갈부족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8 후에 거란족이 발해를 정복한 후, 요(遼)에 편입된 흑수 말갈족은 숙여진(熟女眞)이라 불렀고, 요에 편입되지 않은 나머지 흑수말갈족은 생여진(生女眞)이라 불렀다. 생여진족들은 이른바 백산-흑수 (장백산맥과 흑룡강 주변) 지역에서 살았다.


발해는 안녹산의 난(755-757)을 틈타 요동을 점령하고 소고구려를 흡수하였다. 9 742년 당시의 당나라 지도는 요하 서쪽의 요서 연안이 당나라 영토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10 그런데 763년의 지도에는 당나라 국경이 만리장성 뒤로 물러갔음을 보여준다 Ledyard (1983: 341)는 “676년에 요동에 사령부를 설치했던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는 단지 8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한 후, 756년에 철폐되었다”라고 구당서(39志19地理2)를 인용한다


당나라는 717년에 평로군사(平盧軍使)를 영주에 설치하였고, 765년부터는 평로군사가 신라와 발해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도록 했다. 11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발해가 요동반도 남쪽 끝에 있는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해 남해부를 설치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요사(遼史)는 발해가 요동 지역의 신성(新城), 개모성(蓋牟城), 백암성(白巖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뿐만이 아니라, 요서 지역에도 여러 곳에 주(州)를 설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12


발해왕은 796년에 야마토 왕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기들이 이제 옛 고구려 영토를 모두 회복하였으며, 발해왕의 권위가 요하의 서쪽에까지 떨치고 있다고 말했다. 13 발해는 송화강, 우수리강 유역으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만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은, 발해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이며,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를 포함한 6개의 주(州)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4 요사(遼史)에 의하면 현주를 포함한 6주가 모두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과 서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신당서 지리지(地理誌)는, 안록산의 난(755-757)이 발생하기 이전인 건국초기의 발해 강역을 기술하면서, “현주”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 하나가 장백산맥 깊숙이 위치해 있다고 기록을 했다. 15 신당서 기록을 근거로, 현대 중국, 일본 역사가들은 발해의 “현덕부” 전체가 장백산맥 일대에 위치했었다고 단정을 하고, 당이 멸망하는 907년까지, 당나라 강역이 요동 전체를 포함하는 지도를 그리고 있다. (안록산의 난 이후 발해는 요서를 점령하여, 당나라는 만리장성 이남으로 후퇴하였음 ; 재편집자 주)


요사는 몽골 원나라 말기인 1343-44년 기간 중, 11개월 이라는 단기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들도 많이 발견된다. 금사(金史) 역시 원 조정이 1343년 4월부터 20개월 만에 편찬을 완료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당서는, 당나라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는 북송(北宋) 조정이 1044년부터 1060년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을 투입 해, 중화사상 이념을 바탕으로, 아주 치밀하게 편찬을 한 것이다. 그러나 소위 “동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것이 덜 왜곡된 역사 기록인지 자명할 것이다.


거의 500여 년간 지속된 고구려-말갈족의 연합국가는 직접적 상호작용과 언어적 동화 과정을 통해, 양측 언어에 어휘적-구문적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여-고구려-신라어에서 유래하는 한국어와 숙신-말갈-여진어에서 유래하는 만주어는 모두 모음회전과 조직적인 모음전이 현상이 나타나, 모음 역할의 성격이 재구성되었고, 모음조화에 새로운 형태가 나타나게 되었다. 16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후, 중부만주의 예맥-퉁구스는 서부만주의 선비족과 동부만주의 말갈족에게 밀려, 오래 전에 한반도로 내려와 쌀 재배를 하며 살아 온 예맥 친족들과 합쳐야 할 운명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해(689-926)의 출현은 예맥 퉁구스와 말갈-여진 퉁구스가 다시 한번 연합을 해 만주전역을 지배한 왕국을 200년 이상 유지했음을 의미한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와는 달리, 말갈-여진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발해왕국의 말갈-여진족 지배층이라는 존재도 대부분 한때에는 고구려의 구성원이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enthorn (1971: 54)이 “발해는 고구려가 용접을 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나라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맥-말갈 연합의 전반부는 분명히 예맥-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후반부는 말갈-여진 퉁구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을 수도 있다. 급기야 말갈-여진의 금과 청나라가 출현하면서 순수한 예맥-퉁구스의 존재는 한반도에 한정되었으며, 만주에 남게 된 예맥 친족들은 이른바 “만주족”으로 완전히 동화되기에 이르렀다. 이 예맥-퉁구스의 역사는 바이킹 왕국의 역사를 연상시킨다. 덴마크 사람들이 지배하던 바이킹 제국(1397-1523)은 스웨디쉬 바이킹의 반란으로 해체되었고, 대니쉬 바이킹은 1658년에 스웨덴 남부의 룬트(Lund)지역 마저 상실했다. 1814년에는 스웨디쉬 바이킹이 주도하는 스칸디나비아가 등장 하여, 스웨덴 왕이 군림하는 스웨도-노르웨이 연합왕국의 형태로 1905년까지 지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순수한 대니쉬 바이킹의 존재는 유틀란트 반도와 2개의 섬에 한정되게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3 (2005. 3. 19.)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광개토왕 비문에는 398년 이후 어느 때인가 흑수 말갈이 굴복된 것으로 되어있다.


廣開土大王碑文 八年 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俗 … 自此以來 朝貢論事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 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2.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는 백제가 말갈군과 32번이나 싸운 기록이 있으며, 신라본기에는 신라가 말갈군과 23번 싸운 기록이 있다.


3.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五十六年(468)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上 高麗 … 靺鞨之衆十五萬來援 安市城…太宗…收靺鞨 三千三百 盡坑之


4.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二十三年 秋 魏人數伐燕 … 燕王馮弘曰 若事急且 東依高句麗 二十四年 五月(436) 燕王率龍 城見戶東徙… 魏主…令送燕王 …以王違詔議擊之 …乃止 七十九年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魏書 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5. 舊唐書 卷 一百九十九 上 列傳 東夷 高麗. Lee (1984: 71-73) 참조


6. 舊唐書 卷一百九十九下 列傳 北狄 渤海靺鞨 …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 則天命… 先破斬乞四比羽 …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靺鞨之衆及高麗餘燼…自立爲振[震]國王 … 風俗與高麗及契丹同 … 開元七年 祚榮死 …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 大武藝襲父爲


新五代史 四夷附錄 第三 渤海 …唐高宗滅高麗 徙其人散處中國…高麗別種大乞乞仲象…子祚榮痲中宗時置忽汗州…封渤海郡王 … 其國土産物與高麗同


欽定 滿洲源流考 卷八 疆域一 …渤海 …遼史言 渤海大氏始…東牟山 … 舊唐書作桂婁之東牟山 桂婁爲高麗部名 高麗五部 西漢以還桂婁部爲王 三國志 魏書東夷傳 高句麗傳 …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7. 聖武 神龜四年 九月 渤海郡王使首領. . . 來着 . . . 十二月 渤海郡者 舊高麗國也 五年 正月 . . . 上其王書. . . 曰 . . .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續日本紀 二: 182, 186, 188)


渤海康王與日本國桓武書[796] … 可尋踨於高氏 … 日本逸史 卷七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柳得恭, 渤海考 國書 考三, 1779-84 편찬, 참조.)


8.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朝貢遂絶 五代時 契丹盡取渤海地 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 其在南者籍契丹 號熟女直 其在北者 不在契丹籍 號生女直 生女直地有 … 長白山 … 黑龍江


9. Lee (1984: 71-73)


10. Twitchett (1979: 403, 488) 참조


11. Kim (2004: 385-6) 참조.


12. 欽定滿洲源流考 卷十 疆域三 渤海國境 遼史 東京海州南海軍…渤海號南京南海府…舊五代史 自鐵州行七八日至南海府 元一統志 澄州本海州南海府…高麗時卑沙城…卽此渤海爲南海府 隋大業十年 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敗高麗兵…明一統志 海州…高麗爲沙卑城 渤海國爲南海府


遼史 東京遼州 本…渤海爲東平府 唐太宗親征高麗 李世勣拔遼城 高宗詔程名振蘇定方討高麗至新城大破之 皆此地也 …遼州有遼河


遼史 東京巖州白巖軍 本渤海白巖城 太宗撥屬瀋州白巖縣 渤海置州 按唐太宗貞觀十九年 伐高麗 旣得遼州 進軍白巖城 克之置巖州 …


遼史 鐵州 … 本漢安市縣地 高麗爲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卽此渤海置州 蓋州 遼史辰州 本高麗蓋牟城 … 渤海改爲蓋州

金史 地理上 咸平府 本高麗銅山縣地 遼爲咸州 … 南有柴河 北有淸河 西有遼河


遼史 地理志二 咸州 … 本高麗銅山縣地 渤海置銅山郡… 唐 安東都護治永平二州間卽此


遼史 瀋州本挹婁國地 渤海建瀋州 遼東行部誌 瀋州在唐時 爲高麗侵據


遼史 銀州 … 本渤海富州 韓州 金史 … 本渤海鄚頡府


遼史 東京信州 本…渤海置懷府 穆州 遼史 … 本渤海會農郡


欽定 滿洲源流考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遼史 顯州…本渤海 顯德府地 … 以奉顯陵 … 本漢無盧縣 卽醫巫閭 … 自錦州八十里至…自…一百里 至顯州 … 遼西州…本漢遼西郡地 世宗置州屬顯州 … 遼東行部誌 廣甯本陽羅郡渤海顯德府 遼世宗改顯州 … 乾州 …本漢無慮縣 …本渤海…縣 元一統志 乾州故城在 廣甯府西南七里


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顯州 本渤海顯德府地…以奉顯陵… 置醫巫閭山絶頂築堂曰望海…穆宗葬世宗於顯陵西山 … 有十三山


金史 地理上 廣寧府本遼顯州… 廣寧有遼世宗顯陵 閭陽遼乾州 廣德軍 …有凌河 有遼景宗乾陵


13. 渤海 康王與日本國桓武書 [796] … 土統舊封 …金印紫綬 遼外光耀 … 日本後紀 卷五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柳得恭, 渤海考 國書考二 참조.


14. 新唐書 列傳 北狄渤海…中京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15. 新唐書 志第三十三下 地理七下 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 …東北三十里…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 至丸都縣城 …又東北泝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742-756]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16. Janhunen (1996: 153)



The Union of the Ye-mack Tungus and the Mohe-Ruzhen Tungus


Wontack Hong

Professor, Seoul University



By the turn of the fifth century, King Kwang-gae-to (391-412) of Koguryeo overran Paekche’s capital (in 396), and conquered Liao-dong as well as the Sushen people of northeast Manchuria.1 Owing to the great military exploits of King Kwang-gae-to, Koguryeo ruled the entire Mohe tribes in eastern Manchuria, including the Black-Water Mohe, for more than 250 years. As a result, there appear in various dynastic chronicles rather conspicuous records of Mohe soldiers fighting for Koguryeo until the very last moment of its existence.


In the Samguk-sagi, there appear 6 records of Mohe soldiers being mobilized to fight for Koguryeo. King Chang-su (413-491), in personal command of 10,000 Mohe soldiers, captured a Silla province in 468; King Mun-ja-myung sent a general with Mohe soldiers in 507 to attack Paekche; King Yung-yang personally led 10,000 Mohe soldiers and attacked Liao-xi in 598; King Bo-jang sent a general to relieve the An-shi Fortress in command of the Koguryeo army as well as the 150,000 Mohe soldiers in 645; the Koguryeo army, together with the Mohe and Paekche soldiers, attacked Silla in 655; and King Bo-jang sent a general in command of the Mohe soldiers to attack a Silla castle in 661.2


According to the History of Jin, “150,000 Black-Water Mohe” soldiers fought on the side of Koguryeo against the Tang Tai-zong’s army at the An-shi Fortress in 645. The Old History of Tang corroborates the fact that “150,000 Mohe” soldiers came to rescue the An-shi Fortress, and further states that Tai-zong buried alive the captured Mohe soldiers numbering 3,300 at the Fortress.3


According to the Samguk-sagi, the Koguryeo provided shelter to the king of Northern Yan (409-36) and his family who were under attack from the Northern Wei in 436; and also to the king of Puyeo and his family who were driven out by the Sushen-Mohe in 494. According to the Wei-shu, when King Chang-su died at the age of 98, the Wei emperor Xiao-wen-di himself, wearing a white crown and a hempen robe, conducted the mourning ceremony at the eastern suburbs of Datong. 4


It was along the Liao River basin and the mountainous Laio-dong peninsula where the Sui and Tang armies had repeatedly lost battles against Koguryeo. The Laio-dong region at last came under Tang control in 668 and was placed under the jurisdiction of “Protectorate-General to Pacify the East.” In order to placate the former subjects of Koguryeo, however, Tang enfeoffed the last Koguryeo king, Po-jang, as the “King of Chosun” and appointed him governor of Liao-dong (in 677), but Po-jang plotted rebellion in collusion with the Mohe people and hence was recalled and banished. Subsequently, his son Tong-mu was appointed the governor of Liao-dong in 699. Tong-mu’s immediate descendants, who succeeded him in that position, gradually were able to secure virtual autonomy for the region they governed, to the point where historians sometimes refer to Liao-dong as “Lesser Koguryeo”5


The remnants of the Koguryeo people, together with the Mohe tribes, established the Parhae dynasty (689-926) in Manchuria. The founder of Parhae (Bohai) was a former Koguryeo general, Tae Cho-young (r.689-719). Upon the fall of Koguryeo, he had been taken prisoner and forced to settle at Ying-zhou (modern Chao-yang), but seizing upon the occasion of an insurrection by the Qidan people, he led a band of followers eastward and proclaimed himself king of Chin, renamed Parhae, in 713. The “Tae” clan and Cho-young himself seem to belong to the core Koguryeo royal clan, “Kye-ru,” or to a naturalized Mohe clan.6


In 732, King Mu (719-737) of Parhae sent an army by sea to attack the port of Deng-zhou on the Shan-dong peninsula. Silla and Tang joined hands in 733 to strike at Parhae in concert from two sides. The advent of the Parhae kingdom and the Unified Silla dashed the Tang’s dream of conquering Manchuria and the Korean peninsula.


When the Parhae envoy arrived at the Yamato court for the first time in 727, they apparently claimed that Parhae was old Koguryeo, stating that it recovered Koguryeo’s old territory and was maintaining the Puyeo customs. The Parhae sovereign’s message to the Yamato Kingdom in 798 states that the King may dare say that Parhae has been faithfully following the Koguryeo (or the footsteps of the Ko lineage).7


The Parhae came to rule over the people of both Koguryeo ethnic stock and all of the Mohe tribes then living in eastern Manchuria, including the Black-Water Mohe tribes, according to the History of Jin.8 When the Qidan Liao conquered the Parhae, the Black-Water Mohe tribes that became incorporated into the Liao were called “Tamed” Ruzhen, and the rest of the Black-Water Mohe tribes that were not incorporated into the Liao were called “Wild” Ruzhen. The Wild Ruzhen inhabited the so-called “White Mountain, Black Water” area (i.e., the area around the Long White Mountains and Amur River).


Parhae took advantage of the An Lu-shan rebellion (755-757), and occupied the Liao-dong area and absorbed Lesser Koguryeo.9 A map of Tang shows the coastal region of Liao-xi to the west of the Liao River having been included in Tang’s territory as of 742, but another map of Tang provinces shows its borders as having been pushed behind the Great Wall by 763.10 Ledyard (1983: 341) quotes the Old History of Tang (Geography 2): “Tang’s An-dong Military Command, with its headquarters in Liao-dong after 676, lasted only eighty years before its abolition in 756.”


In 717, the Tang had established the position of Ping-lü military governor 平盧軍使 at Ying-zhou, and in 765 let the Ping-lü governor take care of the envoys from Silla and Parhae (see Kim, 2004, p. 385-6). Manzhou Yuanliu Gao provides records which show that the Parhae had occupied the Bi-sa Fortress at the southern tip of the Liao-dong Peninsula. The History of Liao records that the Parhae established provinces at the Shin-sung, Kae-mo Fortress, Paek-am Fortress, Liao-dong Fortress, and An-shi Fortress area in Liao-dong, as well as a substantial portion of the Liao-xi area. 11 The Parhae sovereign’s message to Yamato Kingdom in 796 states that it has recovered the entire old Koguryeo territory and its ruler’s authority now shines beyond the Liao River.12 The Parhae came to occupy almost the whole of Manchuria, including the Song-hua and Ussuri basins as well as the whole adjoining coastal zone along the East Sea.


According to the Lie-zhuan section of the New History of Tang, the Middle Capital of Parhae, called Xian-de-fu, had six “zhou” including “Xian-zhou,” Tie-zhou and Tang-zhou.13 According to the History of Liao, those six provinces including Xian-zhou were located around the Liao River, some in the east and some in the west. Apparently measuring the distances from an early Parhae border prior to the An Lu-shan rebellion (755-7), however, the geography section of the New History of Tang mentions a place named “Xian-zhou” that had been located deep in the Long White Mountains.14 On the basis of this record, Chinese and Japanese scholars locate the entire “Xian-de-fu” deep in the mountains, drawing the map of Tang territory that includes the whole Liao-dong area until the fall of Tang dynasty in 907.


The History of Liao was compiled rather hastily at the end of the Mongol Yuan dynasty in a mere 11 months during 1343-4, and hence one can find quite a few inconsistencies in the records. The History of Jin was also compiled by the Yuan court within 20 months from April 1343. The New History of Tang, on the other hand, was compiled very systematically under the auspices of the Han Chinese Northern Song court, the self-proclaimed heir to the Tang dynasty, over the 17 year period from 1044 to 1060. From the viewpoint of the so-called “Barbarians,” however, it is obvious to tell which history represents a less distorted presentation of the facts.


Direct interaction and linguistic assimilation between the Koguryeo and the Mohe for nearly 500 years would inevitably have affected the lexical and the structural properties of both languages. The Korean language originating from the Puyeo-Kogurye-Silla language and the Manchu language originating from the Sushen-Mohe-Ruzhen language both reveal the phenomenon of vowel rotation and a systematic shift of vowel qualities which led to the restructuring of the vowel paradigm as well as to the reorientation of the pattern of vowel harmony.15


After the fall of Koguryeo in 668, the Ye-maek Tungus of central Manchuria began to be squeezed by the Xianbei wolves in the west and the Ruzhen tigers in the east down into the Korean peninsula to join their cousins who had decided a long time ago to make their living by cultivating rice. The appearance of the Parhae kingdom (689-926), however, represents yet another union of the Ye-mack Tungus and the Mohe-Ruzhen Tungus that lasted for more than two centuries. The leadership element of Parhae could have been drawn from the Mohe-Ruzhen people, but they after all had been part of Koguryeo. The Parhae state “was based upon the foundations welded together by Koguryeo” (see Henthorn, 1971, p. 54).


The first half of the union was apparently dominated by the Ye-mack Tungus, but the second half of the union seems to have been dominated by the Mohe-Ruzhen Tungus. With the appearance of the Mohe-Ruzhen Jin and Qing empires, the pure-blooded Ye-mack Tungus came to be confined to the Korean peninsula, and their cousins who stayed behind in Manchuria came to be thoroughly assimilated into the so-called “Manchu” people. Their assimilation might remind one of the Viking kingdoms. The Danish-dominated Viking empire (1397-1523) was dissolved by the Swedish rebellion, and Denmark lost southern Sweden around Lund in 1658. By 1814 there appeared the Swedish-dominated Scandinavia, in the form of the Suedo-Norwegian union under the Swedish king (that lasted until 1905), confining the pure-blooded Danish Vikings to the Jutland peninsula and the two islands.




[각주]



1 The Kwang-gae-to epitaph suggests the subjugation of the Black-Mohe tribes sometime after the year 398.


廣開土大王碑文 八年戊戌 敎遣偏師觀息愼土俗 … 自此以來 朝貢論事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 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2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五十六年(468)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


There appear 32 records of Paekche fighting against the Mohe soldiers in the Paekche Pon-ki, and 23 records of Silla fighting against the Mohe soldiers in the Silla Pon-ki.


3 舊唐書 列傳 第一百四十九 上 高麗 … 靺鞨之衆十五萬來援 安市城… 太宗 … 收靺鞨 三千三百 盡坑之


4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長壽王 二十三年 秋 魏人數伐燕 … 燕 王馮弘曰 若事急且 東依高句麗 二十四年 五月(436) 燕王率龍 城見戶東徙… 魏主…令送燕王 …以王違詔議擊之 …乃止 七十

九年 …王薨 … 魏孝文聞之 制素委貌 布深衣 擧哀於東郊


魏書 高祖 紀第七下 … 帝爲高麗王璉 擧哀於城東行宮


5 舊唐書 卷 一百九十九 上

列傳 東夷 高麗

See also Lee (1984: 71-73)


6 舊唐書 卷一百九十九下 列傳 北狄 渤海靺鞨 …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 祚榮與靺鞨乞四比羽各領亡命東奔 … 則天命… 先破斬乞四比羽 … 祚榮合高麗靺鞨之衆以拒楷固 …靺鞨之衆及高麗餘燼…自立爲振[震]國王 … 風俗與高麗及契丹同 … 開元七年 祚榮死 … 乃冊立其嫡子桂婁郡王 大武藝襲父爲


新五代史 四夷附錄 第三 渤海 …唐高宗滅高麗 徙其人散處中國…高麗別種大乞乞仲象…子祚榮痲中宗時置忽汗州…封渤海郡王 … 其國土産物與高麗同


欽定 滿洲源流考 卷八 疆域一 …渤海 …遼史言 渤海大氏始…

東牟山 … 舊唐書作桂婁之東牟山 桂婁爲高麗部名 高麗五部 西漢以還桂婁部爲王 三國志 魏書東夷傳 高句麗傳 …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7 聖武 神龜四年 九月 渤海郡王使首領. . . 來着 . . . 十二月 渤海郡者 舊高麗國也 五年 正月 . . . 上其王書. . . 曰 . . .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續日本紀 二, pp. 182, 186, 188.


渤海康王與日本國桓武書[796] … 可尋踨於高氏 … 日本逸史 卷七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See also 柳得恭, 渤海考 國書 考三, compiled during 1779-84.)


8 金史 卷一 世紀 金之先 出靺鞨氏 靺鞨本號勿吉 古肅愼地也 元魏時 勿吉有七部 曰粟末部 … 曰黑水部 …唐初 有黑水靺鞨 粟末靺鞨 其五部無聞 粟末靺鞨始附高麗 姓大氏 李勣破高麗 粟末靺鞨保東牟山 後爲渤海 … 黑水靺鞨居肅愼地 … 亦附于高麗 嘗以兵十五萬衆助高麗拒唐太宗 敗于安市 開元中 來朝 置黑水府 以部長爲都督 … 其後渤海盛强 黑水役屬之 朝貢遂絶 五代時 契丹盡取渤海地 而黑水靺鞨附屬于契丹 其在南者籍契丹 號熟女直 其在北者 不在契丹籍 號生女直 生女直地有 … 長白山 … 黑龍江


9 Lee (1984: 71-73)


10 Twitchett (1979: 403, 488)

11 欽定滿洲源流考 卷十 疆域三 渤海國境 遼史 東京海州南海軍…渤海號南京南海府…舊五代史 自鐵州行七八日至南海府 元一統志 澄州本海州南海府…高麗時卑沙城…卽此渤海爲南海府 隋大業十年 來護兒出海道至卑奢城敗高麗兵…

明一統志 海州…高麗爲沙卑城 渤海國爲南海府


遼史 東京遼州 本…渤海爲東平府 唐太宗親征高麗 李世勣拔遼城 高宗詔程名振蘇定方討高麗至新城大破之 皆此地也 …遼州有遼河


遼史 東京巖州白巖軍 本渤海白巖城 太宗撥屬瀋州白巖縣 渤 海置州 按唐太宗貞觀十九年 伐高麗 旣得遼州 進軍白巖城 克之置巖州 …


遼史 鐵州 … 本漢安市縣地 高麗爲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卽此渤海置州

蓋州 遼史辰州 本高麗蓋牟城 … 渤海改爲蓋州


金史 地理上 咸平府 本高麗銅山縣地 遼爲咸州 … 南有柴河 北有淸河 西有遼河


遼史 地理志二 咸州 … 本高麗銅山縣地 渤海置銅山郡… 唐 安東都護治永平二州間卽此


遼史 瀋州本挹婁國地 渤海建瀋州 遼東行部誌 瀋州在唐時 爲高麗侵據


遼史 銀州 … 本渤海富州

韓州 金史 … 本渤海鄚頡府


遼史 東京信州 本…渤海置懷府

穆州 遼史 … 本渤海會農郡


欽定 滿洲源流考卷十一 疆域四 遼東北地界 遼史 顯州…本渤海顯德府地 … 以奉顯陵 … 本漢無盧縣 卽醫巫閭 … 自錦州八十里至…自…一百里 至顯州 … 遼西州…本漢遼西郡地 世宗置州屬顯州 … 遼東行部誌 廣甯本陽羅郡渤海顯德府 遼世宗改顯州 … 乾州 …本漢無慮縣 …本渤海…縣 元一統志 乾州故城在 廣甯府西南七里


遼史 地理志二 東京道 顯州 本渤海顯德府地…以奉顯陵… 置

醫巫閭山絶頂築堂曰望海…穆宗葬世宗於顯陵西山 … 有十三山

金史 地理上 廣寧府本遼顯州… 廣寧有遼世宗顯陵 閭陽遼乾州 廣德軍 …有凌河 有遼景宗乾陵


12 渤海 康王與日本國桓武書 [796] … 土統舊封 …金印紫綬 遼外光耀 … 日本後紀 卷五 類聚國史 卷一百九十三 (See also 柳得恭, 渤海考 國書考二.)


13 新唐書 列傳 北狄渤海…中京曰顯德府 領盧顯鐵湯榮興六州


14 新唐書 志第三十三下 地理七下 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 …東北三十里…得渤海之境…又泝流五百里 至丸都縣城 …又東北泝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742-756]王所都 又正北如東六百里 至渤海王城


15 See Janhunen (1996: 153).

출처 : 동이민족 역사사료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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