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홍원탁-북방민족사

[스크랩] 21. 몽골 원(元)이 한족의 명(明)으로 대체

monocrop 2007. 1. 2. 18:00

21. 몽골 원(元)이 한족(漢族)의 명(明)으로 대체



주원장은 몽골 원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다. 조선은 압록강 아래의 영토는 모두 확보 하였으나, 명과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하 유역을 포기했다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따라 당시의 강자인 한족 명나라에게 신속(臣屬)하면서 조선왕조는 독립을 유지하고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명 영락제(1402-24)는 동몽골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거듭했다 한나라 때, 초원지대의 흉노를 상대로 벌린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오로지 무제의 재위 기간 중뿐이었다. 당 태종 때 일시적으로 초원지대를 지배하였으나, 그의 호전적인 정책은 후계자들에 의해 수동적인 방어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영락제가 죽은 후, 명 조정 역시 유목민족에게 조공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군대를 양성 하거나 장성을 축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방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몽골 원과는 달리,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의 좁은 해안지역 이외의 만주 땅 전체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다.

풍신수길은 1590년에 일본열도를 통일하자,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리라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 무사들을 모두 배에 실어 한반도로 보냈다 명나라 원군(援軍) 덕분에 임진왜란으로부터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한반도 사람들은 만주의 그들 친족 어깨너머로 한족의 중화제국을 우러러보는 성향이 한층 심화되었다 명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극치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와 경제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의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가져온 것은 동만주의 여진족이었다 금-청 정복왕조 지배자들은 여진-만주족의 원류(源流)를 숙신-말갈족과 발해 사람들에서 찾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에게서도 찾으려 했었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원탁 (서울대 교수)


주원장(r.1368-98)은 농민 출신으로 절에서 승려에게 글을 배웠다. 양자강 하류지역의 반란군 지도자로 출발하여, 명나라(1368-1644)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제위를 이어받을 후계자 한 명만 수도인 남경에 남겨두고 나머지 아들들은 북방에 봉토를 주어 변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전방에서의 전투경험도 많고 일반 민중에게 평판도 좋았던 첫째 아들이 조카인 어린 황제를 죽이고 3대 황제(永樂帝, 1402-24)가 되어, 자신의 봉토이었던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고려에서의 몽골지배는 이미 1356년에 끝이 났었다. 원나라 지배자들은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명나라 군대가 요양지역을 점령하는 1387년까지 요하 유역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고려는 전부터 요하 동쪽의 모든 땅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1388년, 신생 명나라는 원의 총관부(雙城摠管府)의 지배를 받아오던 고려의 (철령 이북) 동북 변경 지대까지도 차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에 분개한 최영(1388년에 경쟁자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음)은 요동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이성계를 부원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압록강 어귀) 위화도에서 군대를 되돌려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아 마침내는 신유교를 신봉하는 지식인 관료들에 의해 새로운 조선(朝鮮, 1392-1910)왕조를 시작하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조선은 압록강 아래의 영토는 모두 확보하였으나, 명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하 유역을 포기했다. 1 조선 조정은 명나라와의 군신관계를 받아들였다.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따라 당시의 강자인 한족 명나라에게 신속(臣屬)하면서 조선왕조는 독립을 유지하고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명은 원나라의 십진법으로 된 군대조직을 답습하고, 2백만 호에 달하는 세습적 군호 제도를 유지하였다. 2 1409년, 영락제는 10만의 군대를 보내 동몽골을 공격하였다. 1410년, 영락제는 손수 50만 군대를 이끌고 동몽골을 괴멸시켰다. 그는 1414년에도 오이라트 몽골 원정군을 조직해, 케룰렌 강변에서 대포를 쏘아 전투에 승리를 거두었다. 3


1422년, 영락제는 동몽골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수행했으며, 1424년에는 5번째로 유목민 정벌전쟁에 나섰는데, 그것이 명나라 마지막의 초원지대 원정이었다. 그는 북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영락제의 정복업적은 진 시황제, 한 무제, 당 태종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취향이 전혀 달라, 다시는 초원지대에서 전쟁을 하려 하지 않았다. 4


한나라 때, 초원지대의 흉노를 상대로 벌린 전쟁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오로지 무제의 재위 기간 중뿐이었다. 당 태종 때 일시적으로 초원지대를 지배하였으나, 그의 호전적인 정책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수동적인 방어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5 영락제가 죽은 후, 명나라 조정은 또 다시 고정 방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명나라 군대는 군호에게 농토를 배정해 대충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었다.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확충하는 부질없는 노력은 명나라 조정의 수세적인 방어심리를 표출하는 것이다.


만주족이나 몽골족 왕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경은 만주나 몽골 초원지대로부터 부족들의 군대를 쉽게 동원할 수 있기 때문에 제국의 수도로서 이상적인 위치에 있었다. 한족 왕조에게도, 변방의 전투와 부족들의 정치내막을 잘 파악하는 영락제 같은 지도자를 가졌을 때에는 북방에 위치한 수도가 유리한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진 시황제, 한 무제, 당 태종, 혹은 명 영락제가 없는 한족 조정에게는 북경이 아주 불리한 존재가 되었다. 북경은 중국의 자원이 집중되어있는 남쪽과 거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이 최전방의 방어선상에 위치 해 있기 때문에 유목민족의 불의의 급습을 받을 위험이 컸다.


영락제가 죽은 후에는 초원지대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지 못했고, 북동쪽 혹은 북서쪽 변방지역을 직접 통치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명나라는 유목민족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하였다. 6 Barfield(1989: 246-49)에 의하면, 그 이유는, 명나라 지배자들이 보기에 송나라 조정이 거란, 여진, 몽골 등에 엄청난 물자를 바쳤음에도 북중국을 상실했고, 마침내는 송나라가 완전히 몽골에게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지배자들은 조공물자의 제공이란 것이 단지 유목민족의 힘을 길러주어 결국 송 왕조를 멸망시키게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 역시 유목민족에게 조공물자를 제공하는 것이 군대를 양성하거나 장성을 축조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방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1449년에 명나라 영종이 오이라트 몽골에게 생포되는 수난(토목보의 변)은, 한 고조가 기원전 200년에 흉노족에게 포위되었던 사건을 상기시켰다. 명나라는 마침내 몽골 부족장들과 평화조약을 맺고, 조공물자의 제공, 변경교역의 허용, 부족장들에 직함 수여 등을 통해 몽골 초원지대의 분열된 정치 체제를 고착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7


원나라와는 달리 명나라는 요동과 요서의 좁은 해안지역 이외의 만주 땅 전체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힘이 없었다. 명 조정은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해 고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200여 개의 소규모 여진 부족장들에게 명예 직함을 내려주고 조공 혜택을 주었다. 8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0년에 일본열도를 통일하자,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빌리라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 무사들을 모두 배에 실어 1592년에 한반도로 보냈다. Spence(1990: 18-19)는 “명나라는 조선을,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지켜주어야 할 충성스럽고 종속적인 동맹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위기에 몰린 조선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 내부에서의 혼란상태와 조선 해군에 의한 효과적인 보급로 차단 때문에 왜군은 1598년에 조선으로부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이 계속되어 세 나라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명나라 원군 덕분에 임진왜란으로부터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한반도 사람들은 만주의 그들 친족 어깨너머로 한족의 중화제국을 우러러보는 성향이 한층 심화되었다.


명 왕조 멸망 직전인 1600년경, 명나라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세련된 국가이었고, 인구는 유럽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많은 1억 2천만 명에 달했다. 관료와 무관의 직위는 수도와 전국 방방 곡곡에서 치러지는 각종 과거시험에 합격을 해서 획득되는 것이었다. 명나라의 문화와 예술이 극치에 달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국가와 경제는 해체되기 시작했다. 중국 본토의 혼란을 극복하고 질서를 가져온 사람들은 동만주의 여진족이었다.



돌아온 여진족

청나라(1616-1912) 시조 누르하치(1559-1626)는 건주(建州) 부족장의 아들로 훈룬 부족과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9 1596년 음력 설날, 조선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 신정일에게 누르하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 두 나라는 하나가 될 것이고, 우리의 두 왕실은 하나가 되어, 자자손손 영원히 뭉쳐서 우호적으로 살 것이다” 누르하치는 조선 조정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귀국과 우리 여진족 국가는 앞으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계속 두텁게 해 갈 것이고, 우리 두 나라의 백성들은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0


1616년, 누르하치는 자신이 후금(後金)의 칸이라고 선언하였다. 16세기의 만주에서는 단지 심양(오늘날의 목단)의 최남단 지역에서만 중국식의 집약적인 농경이 이루어졌다. 명나라 지배자들은 요하 유역에 자국 장군들의 지휘를 받는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요동에 주둔하는 명나라 군대 모병에 여진족과 조선족들이 적극 응했다. 11


Crossley(1999: 47)는 Owen Lattimore의 견해를 인용하여, 명-청 교체 이전의 요동-길림 지역은 중국, 몽골, 한국, 그리고 토착 문화의 유동적 요인들이 정치-경제 흐름에 따라 소용돌이치는 “저수지”이었고, 여진-만주족은 변경(邊境)족 혹은 “크리올 (현지출생 이민족)” 모양, 시류에 따라 몽골족, 한족, 혹은 조선족과 어울리는 문화적 “카멜레온”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몽골-한-조선) 목록에 “선비-거란족”도 포함했어야 한다.


1621년, 심양과 요양은 여진족 군대에 함락되었다. 1625년, 누르하치는 심양을 후금의 수도로 정했다. 1636년, 누르하치 후손은 만주 청나라를 수립했다.



만주원류고의 서문에서 건륭제(1736-96)는 금나라 황실의 선조가 말갈연맹의 일원으로 옛 숙신(肅愼) 땅인 장백산(長白山)-흑수(黑水) 지역에서 살았는데, 그 땅이 바로 후에 (숙신의 變音으로) 만주족이라고 불리게 된 여진족이 흥기한 장소이었다고 말한다. 청나라 지배자들은 여진족 금 왕조의 창건자들이 자신들의 직계조상이라고 굳게 믿어, 자신들의 나라를 1636년까지 후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12


만주원류고는 만주족의 원류(源流)를 말갈-여진족과 발해 사람들에서 찾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에게서도 찾고 있다. 부족(部族)편 7권의 완안(完顔)절에 보면, 비록 금사(金史)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본래 고구려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대금국지(大金國志)에서는 그가 원래 신라에서 왔다고 기록되어있다고 말한다. 당서(唐書)는 흑수말갈족을 화살촉에 독을 묻히는 무섭고 사나운 야만족으로 기술하였다. 건륭제는 만주족의 뿌리가 이 같이 호전적인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옛 왕국 사람들에게도 그 뿌리가 있다고 확신했던 것 같다. 13


동아시아 역사 강의: 3-5 (2005. 8. 20)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All rights reserved


[각주]

1. Crossley(1999: 87)는, 많은 여진족들이 조선이 압록강 주변에 설치한 수비대에 가담하였으며, 다른여진족들은 흔히 한국 성을 쓰면서 교역에 종사했다고 말한다.


2. Hsiao (1978: 4)

3. 영락제는 이슬람 돌궐족 출신인 정화(鄭和)로 하여금 1405년부터 142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동쪽 해안에 이르기까지 30여 개국을 순방하도록 하였는데, 첫 항해에 26,800명이 동원되었다. 남경의 조선소에서 2,000여 척의 배를 건조했는데, 그 중 100척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대형 보선(寶船)이었다: 길이가 370-440 피트, 폭이 150-180 피트, 무계가 3,000톤, 90 피트에 달하는 4-9개의 돛대, 16개의 방수 칸막이 방, 거대한 선미(船尾)의 방향타 등 영락제 이후의 황제들은 유교로 훈련을 받은 관료들에 설득되어 외국과의 접촉과 통상을 전면 금지했다. 정화의 함대를 항구에서 썩게 하면서 유럽인들만이 전 세계를 탐험하고 개척하도록 한 것이다. Fairbank and Goldman (1992: 137-8) 참조.


4. Barfield (1989: 236-237)

5. Barfield (1989: 235)


6. Jagchid and Symons(1989: 139-40)는 “일찍이 한나라 때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가 받아내던 세폐(歲幣)가 전례가 되어, 북송과 남송은 거란의 요, 탕구트의 서하, 여진의 금에게 막대한 규모의 세폐를 매년 바쳤다. 이 모든 기간 중, 선물도 보내졌다. 선물 규모는 해당 시기의 농경국가과 유목국가간의 상대적 힘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었다. 비록 선물과 매년 바치는 세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한족 왕조가 주변 유목국가들과의 위험한 전쟁을 벌리는 것과 비교를 해보면 훨씬 저렴한 방책이 되었다”고 말한다.


7. 영락제가 죽고 난 후 1454년에 에센이 멸망할 때까지, 명나라는 몽골에게 계속해서 조공을 바쳤다. Jagchid and Symons(1989: 138)는 명사략(明史略)을 인용한다. “ 그들의 욕심을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했다. 야만족 부족장들은 매년 요구량을 늘렸다. 때로는 우리도 가지고 있지 않는 온갖 사치스럽고 비싼 물품들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조정은 가능한 한 그들이 요구하는 물건들을 모두 구해 주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야만 부족장들은 그들이 요구한 것보다 적게 주면 항상 크게 화를 냈다.”


8. Barfield (1989: 235-6 and 251) 참조 Spence (1990: 26)에 의하면, “명나라의 정책은 공식적으로 여진족의 영역을 중국 국경 방어선의 일부로서 획정을 해놓고, 여진 부족장들에게 명예 직함과 변경 교역권을 제공하는 방법으로 통제를 하는 것이다”


9. 여진족은 크게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건주 부족은 (한국 국경 북변을 따라) 두만강 북쪽의 장백산맥 지역에서 사냥과 농경을 하였으며, 부족생활을 하지 않는 (길들여진) 훈룬족은 (옛 금나라의 중심지인) 요하 동쪽과 심양 북쪽 땅에서 농경과 교역을 하며 “니칸”이라 불렸던 한족 이주정착민들과 어울려 살았다. 반면, 수렵과 사냥, 채집과 원시적 농경에 종사하던 생여진(生女眞)족은 보다 북쪽인 목단강 동쪽에서 (송화강 하류, 흑룡강 중류, 우수리지역에 이르기 까지) 살고 있었다. 누르하치의 계획적인 종족 이주정착 정책에 따라, 대부분의 생여진족들은 재배치되어 건주 부족과 통합되었다 Janhunen (1996: 101-6, 157) 참조.


10. 1595-6년의 겨울에 Fe Ala에 있는 누르하치의 지휘 본부를 방문했던 신정일이 자세하게 기록한 회고록을 Crossley(1997: 57, 59)가 번역한 글에서 발췌한 것이다. Crossley(1997: 60)는 신정일 사절단의 임무가, 건주 여진족에게 조선의 북방경계선을 준수할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누르하치와 정치적 동맹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11. Crossley (1999: 85) 참조.


12. Crossley (1997: 124, 301) 참조. 건륭제는 “숙신(肅愼)”에서 “주신(珠愼)”이, 주신에서 “만주(滿珠)”가, 또 만주에서 “만주(滿洲)”가 나왔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청나라 황실의 혈통은 애신각라(愛新覺羅)로 불린다. 아이신은 “금(金)”을 의미하고, 이것은 건륭제가 청나라 황족이 본래 금나라 여진족의 분파임을 확신하게 하는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13. Crossley (1997: 122-5) 참조



출처 : 동이민족 역사사료
글쓴이 : 稽古諮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