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스크랩] 하, 상은 어떻게 하여 얻어진 이름인가?

monocrop 2006. 12. 25. 14:50

                   하(夏), 상(商)은 어떻게 하여 얻어진 것인가?






역사상의 모든 국가는 각자의 명칭, 즉 국호가 있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말하는 조대(朝代)가 바로 ‘국호’를 가리킨다. ‘국호’는 국가 탄생 후에 형성된 것으로 국가 정권의 일종의 형식을 반영하며 각각의 구체적인 ‘국호’는 모두 특정한 내력이 있다. 그렇다면 선진시기의 ‘하(夏)’와 ‘상(商)’ 두 왕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빨리 건립된 국가인데, 이들의 ‘국호’는 어떻게 하여 얻어진 이름일까?

중국 역사상 하 왕조가 진짜로 존재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학술계에서 일찍부터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근 반세기 동안 학술계는 하 문화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대량의 조사를 통해 하 왕조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국가라는 것을 확정지었으며, 그 지역과 어느 고고문화에 속하느냐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다른 견해를 보인다.

하 왕조의 역사 기록에 관하여 문헌 중에는 주로 《상서(尙書)》, 《시경(詩經)》중의 몇몇 편과 전국(戰國) 진한(秦漢)시대의 제자서 등의 저작 중에 보이며, 춘추(春秋) 중엽의 《서이박(敍夷鎛)》,기 《진공기(秦公㲃)》의 동기 명문 중에서도 언급되었고, 비교적 체계적인 하 왕조에 대한 역사 기록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하본기(史記 夏本紀)》이다.

따라서 상술한 조건에 기초하여 사람들의 하 왕조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상당히 모호하며 하 왕조의 개창자가 우(禹)인지 아니면 계(啓)인지에 대해서조차도 여전히 논쟁하고 있다. 이로써 하 왕조 ‘국호’의 내력도 말하는 사람마다 틀리다. 어떤 이는 하 왕조는 ‘하 부락’, 즉 우(禹)에서 기원한 칭호로 그의 아들 계(啓)가 대하(大夏)로 이주한 것이 시작이 아니라고 여긴다.

“하는 원래 한 부락의 명칭이었다.”

소위 ‘하 부락’은 우가 대표로 하는 부락(혹은 부락 연맹)을 가리키는데, 하후씨(夏后氏), 유호씨(有扈氏), 유남씨(有男氏), 짐심씨(斟尋氏), 동성씨(彤城氏), 포씨(褒氏), 비씨(費氏), 기씨(杞氏), 증씨(繒氏), 신씨(辛氏), 명씨(冥氏), 짐과씨(斟戈氏)의 12개 동성(사성(姒姓))씨족(혹은 부락)으로 조성되었으며 하후씨가 이 무락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가졌으므로 이를 ‘하 부락’으로 통칭한 것이다.

그 중 하후씨의 ‘하’가 하 지역에서 시작한 우(禹)의 봉국(封國)이다. 하후씨의 우두머리 우(禹)는 곧 ‘하 부락’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 왕조가 건립되었다는 견해이다.

어떤 이는 하 왕조의 명칭이 지명에서 기원했으며 ‘하 부락’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범문란(范文瀾)은 《중국통사(中國通史)》에서 일찍이 말하길, “전국(戰國) 이전의 서적에는 하우(夏禹)라 칭하지 않고 단지 우(禹), 대우(大禹), 제우(帝禹)라고만 칭하였으며, 계(啓)는 하계(夏啓), 하후계(夏后啓)라 칭했다.

이러한 구별은 두 사람의 시대가 다르다는 의미를 보존한 것이다. 대하(大夏)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계(啓)이며 자손은 비록 이주 정착하였지만 하의 명칭은 여전히 답습되어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하’는 ‘대하(大夏)’라고도 불리며 원래는 지명으로 계(啓)가 그 부친인 우(禹)로부터 권력을 계승하여 ‘대하’에서 중국 최초의 노예제 국가를 창건한 후에 ‘하’는 곧 국가의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장은 ‘하’를 ‘하 부락’이라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고적 중에는 우(禹)의 부친인 곤(鯀)을 ‘숭백(崇伯)’이라 칭하고 우(禹)는 ‘백우(伯禹)’라 칭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대표하는 부락은 마땅히 ‘숭(崇)’이라 불려야지 ‘하(夏)’라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숭’은 바로 ‘숭산(崇山)’을 가리키며 곤(鯀)과 우의 발상지로, 즉 지금의 숭산(崇山)이다. 또한 ‘대하’라는 이름은 이르게는 고신씨(高辛氏)의 시기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우(禹), 계(啓) 부락의 고유 명칭이 아니다.

‘대하’의 지리적 위치는 지금의 산동성 내이다. ‘숭’과 ‘하’는 명칭이 다를뿐만 아니라 지리적 위치도 다르므로 우(禹)와 계(啓)가 대표하는 부락은 ‘사성부락(姒姓部落)’이라고 칭하는 것이 비교적 타당하다.

이에 대해 전자는 ‘하’의 이름이 우(禹)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계(啓)가 아니라는 생각을 견지한다. ‘하’는 우의 봉지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으로 계의 ‘대하(大夏)’와는 수백리의 거리가 있으므로 ‘하 부락’은 우가 하지를 봉지로 받아 얻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는 원래 한 부락의 명칭”이라는 설명이 성립하는 것이다. (주영호(朱永浩) 《아국역대왕조명칭적유래(我國歷代王朝名稱的由來)》, 《임기사전학보(臨沂師專學報)》1983년 제2기; 《재담하상조대적칭호(再談夏商朝代的稱號)》, 《임기사전학보(臨沂師專學報)》1984년 제2기; 이형미(李衡眉) 《야담선진조대명칭적유래(也談先秦朝代名稱的由來)》, 《임기사전학보(臨沂師專學報)》1984년 제1기)

상(商) 왕조의 국호에 대해서는 자고이래로 그 칭호에 대해 매우 혼란하였다. 그 칭호는 ‘상(商)’, ‘은(殷)’, ‘은상(殷商)’과 ‘상은(商殷)’이 있다. 선진 시기에 사람들은 이미 ‘상(商)’과 ‘은(殷)’을 혼용해서 썼다. 예를 들어 《상서(尙書)》, 《시경(詩經)》, 《좌전(左傳)》, 《순자(荀子)》, 《상군서(商君書)》, 《묵자(墨子)》 등의 책에서 상 왕조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때로는 ‘상’이라 하고 때로는 ‘은’이라 하였다.

오로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그리고 훗날의 한비자(韓非子)만이 시종 ‘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한대(漢代)에도 ‘은’과 ‘상’이 혼용되었는데 유일하게 사마천만이 《사기》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은’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는데 《은본기(殷本紀)》가 그 증거이다.

당대(唐代) 사람들도 ‘은’과 ‘상’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한유(韓愈)는 줄곧 ‘은’이라고 칭했다. 송대(宋代)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상’으로 칭하였다. 명청(明淸)이래로 사람들은 ‘은’, ‘상’ 두 이름에 대해서 여전히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워했다.

지금의 문제는 우리가 말하는 상 왕조의 국호가 도대체 ‘상’인가 아니면 ‘은’인가이며 ‘상’이라는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은’이라는 이름이 먼저인지 하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이는 ‘상’이 성탕(成湯)에서 반경(盤庚)시기까지를 가리키는 것이며 반경이 은(殷)으로 이주한 후부터 제신(帝辛: 주왕(紂王))이 멸망할 때까지를 ‘은’이라 칭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상서 반경상(尙書 盤庚上)》공소(孔疏)에 “정현(鄭玄)이 이르길, ‘상가(商家)가 이곳으로 옮겨오고부터 은(殷)이라 하였다’고 했으며 이전에는 은이라는 명칭이 아직 없었다고 했다.”고 하였다.

당대(唐代) 사마정(司馬貞)은 《사기 은본기(史記 殷本紀)》의 《색은(索隱)》에서 “설(契)이 처음으로 상(商)에 봉하여지고 그 후예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이주하였는데 은은 업(鄴)의 남쪽에 위치하였고 곧이어 천하의 이름이 되었다.”고 명확히 말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반경이 은으로 이주한 것을 경계로 하여 상 왕조의 역사를 두 부분으로 너누어 마치 두 개의 국호가 존재한 것 같다. 사실상 상주(商周)의 문헌 중에 반경이 은으로 이주한 후에 국호를 ‘은’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은 없다. 따라서 어떤 이는 ‘상’과 ‘은’으로 나누는 것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경이 은으로 이주하기 이전 및 그 후에도 상나라 사람들은 시종 스스로를 ‘상’이라 칭하였으며 ‘은’이라 칭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청말(淸末) 갑골문 전문가 나진옥(羅振玉)은 《은허서계고석(殷墟書契考釋)》의 서(序) 중에서 일찍이 “역사에 반경 이후 상을 은으로 바꾸어 칭했다고 하는데 복사(卜辭)를 두루 찾아보아도 은(殷)이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고 누차 ‘상’이라는 말만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곽말약(郭末若)은 “은나라 사람들은 자신을 시종일관 모두 상이라고 칭하였으며 은이라 칭하지 않았다. 주(周) 초기의 청동 명문 중에서 비로소 은이라 칭하였다. 처음에는 의(衣)자를 사용하다가 후에야 ‘은(殷)’으로 규정되었다. 의(衣)는 복사 중의 한 작은 지명으로 은왕이 사냥하던 지역이다. 주나라 사람은 상을 의라고도 하고 은이라고도 하였는데 대체로 적개심에서 나온 것이다.”(《노예제시대(奴隸制時代)》)

주나라 사람들이 상을 ‘의’, ‘은’이라 칭한 것이 과연 정말로 적개심에서 나온 것인가? 어떤 이는 이것이 주나라 사람의 ‘상’에 대한 존칭이라고 생각한다. ‘의’는 지명으로 지금의 하남(河南) 심양현(沁陽縣) 경계이며 상나라와 주나라의 접경지역에 위치하는 당시 상나라의 서부 변경의 요충지여서 양국이 왕래하는 중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의’(은)이라는 지명은 주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상나라의 별칭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명을 빌어 국명을 대신하는 것”이다. (정혜생(鄭慧生) 《은상명칭적유래(殷商名稱的由來)》, 《역사교학(歷史敎學)》1981년 제7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국호의 칭호 중에서 ‘상’자가 가장 적절했다고 주장한다. 일찍이 삼국시대에 위소(韋昭)는 《국어 주어(國語 周語)》의 “상왕 제신(帝辛)은 백성에게 크게 악행을 저질렀다(商王帝辛, 大惡于民)”는 구절을 주석할 때 “상은 은의 원래 명칭이다(商, 殷之本號)”라고 하였다.

범문란(范文瀾)도 “반경(盤庚) 이후에 상(商)은 은(殷)이라고도 칭하고 은상(殷商)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본래 명칭은 여전히 상이라고 칭하였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상’과 ‘은’이 지명이라고 여기고 또한 그 민족의 명칭과 국호에 대해서 매우 밀접하게 연계시키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지명은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가? 상나라 사람의 선조는 언제 이곳에 온 것인가?

《은본기(殷本紀)》에 이르길, 설(契)이 우(禹)의 치수를 도와 공을 세워 순(舜)에 의해 “상(商)을 봉지로 받았다”고 하였는데, 사마정(司馬貞)은 오히려 설의 손자 상토(相土)가 하(夏)를 보좌하여 공을 세워 “처음으로 상(商)을 봉받았다”고 하였다. (《사기 은본기(史記 殷本紀)》색은)

‘상’은 어느 지역인가?

첫째는 상락(上洛: 혹은 상락(商洛)이라고도 함)이라고 하는 설이다. 한대(漢代) 정현(鄭玄)은 “설이 처음으로 상에 봉해지고 곧이어 상이 천하의 이름이 되었다. 상나라는 태화(太華)의 남쪽에 위치한다”(《상서 탕서(尙書 湯誓)》주)고 하였다.  황보밀(皇甫謐)과 《괄지지(括地志)》는 이 말을 따랐다.

둘째는 송국(宋國: 상구(商丘)라고도 함)이라는 설이다. 《사기 정세가(史記 鄭世家)》집해(集解)에 복건(服虔)의 말을 인용하여 “상나라 사람은 설이 선조이고 탕의 시조 상토가 알백의 옛 땅에 봉해졌으므로 그 옛 나라를 따라 이를 교체하였다(商人, 契之先, 湯之始祖相土封閼伯之故地, 因其故國而代之)”고 하였다.

셋째는 은허(殷墟)라는 설이다. 가규(賈逵)는 “상구(商丘)는 장(漳)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은허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고학자 추형(鄒衡)은 설(契)이 상(商)에 봉해진 것도 단지 상나라 사람이 최초에 상 지역에서 활동했었다는 것을 말하며, “이 상이라는 이름의 지역은 바로 지금의 장하(漳河) 지역이고……상나라 사람이 상이라 칭해진 것은 아마도 상나라 사람의 먼 조상이 장수(漳水)에 거주하였기 때문인데 최초의 장수를 혹자는 상수(商水)라고도 불렀다”(《하상주고고학논문집(夏商周考古學論文集)》참고)고 생각하였다.

보통은 먼저 ‘상’의 칭호가 있고 나서 후에 ‘은’이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 이유는 상의 시조가 아직 상 지역으로 이주하기도 전에 그들은 ‘은’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할 예로는 “친의여하(親郼如夏)” 등의 한마디 말의 자료가 있는데,(《여씨춘추 신대람(呂氏春秋 愼大覽)》)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의(郼)’와 ‘은’은 상통한다고 한다.(앞에서 인용한 《임기사전학보(臨沂師專學報)》참고)

요컨대, 선진시기 하상(夏商)의 국호의 내력은 비교적 복잡한 문제로 몇몇 구체적인 역사적 진실은 좀더 연구하여 증명할 필요가 있다. (황현공(黃顯功))

 

출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출처 : 넘버원 대한민국
글쓴이 : 용화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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