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국 조선족은 조국과 모국 사이, 또는 국민의식과 민족의식 사 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소 모호한 듯 하나마 입장정리를 해가 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중국 한족(漢族)과도 다르고, 모국의 동포와도 다른 중국 조선족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이 말하는 특수한 위치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막연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생각해보면 그러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우리 나라"라고 할 때는 거의 예외없이 중국을 의미 하며, "우리 중국"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중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와의 관계를 정서 적 측면에서 물으면 스스럼없이 모국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조국과 모국 을 엄격히 구별하여, 중국은 조국이고 한반도는 모국이라고 한다. 조국과 모국은 어떻게 다르며 왜 중국은 조국이고 한반도는 모국이냐고 물으면, 명확한 개념 정리는 못하면서도 그저 막연하게 중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어버이의 나라이고, 한반도는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이주해오기 전에 태어 나서 살던 나라라고 묘한 설명을 덧붙인다. 다소 애매하나마 그들의 뜻이 전달되는 듯한 감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의 말들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국적상으로는 중국 국민이고, 민 족적으로는 조선족이며, 중국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 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 한족과도 다르고 모국 동포와도 다른 중국 조 선족이라는 특수한 위치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노인층과 젊은층 간에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50대 중반 이상은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젊은층으로 내려갈수록 중국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여행 중이던 어느 날 한.중 축구경기가 있었는데 텔레비전 앞에 할아버지.아버지.손자 3대가 함께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필자도 동석했다. 경기를 관전하면서 3대는 각 각 다른 관심과 반응을 표출시켰다. 70대 할아버지는 한국이 이기기를 은 근히 바라고, 20대 손자는 중국 쪽에 열렬히 응원을 했으며, 50대 아버지 는 어느 편이 꼭 이겼으면 하는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 경기를 관전하는 태도에서 중국 조선족의 국가의식과 민족의식의 변화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이 거의 대부분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족끼리 모여 살면서 도 중국을 자기 나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체의식(正體意識)에 있어서 대 단히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중국 국가에의 귀속의식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생긴 관념이다. 그 이전, 그들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을 때나 일본 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청나라 또는 일본의 국민의식을 전혀 갖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미 근대민족으로 형성된 후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거주지를 중국에 옮겨왔을 뿐 한반도에 사는 조선족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조선족이 신생 중국이 탄생된 후 불과 50년 사이에 중국 국민의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과정과 요인이 있다. 1956년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이 일어나 연변 조선족 사이에는많 은 학자와 문화인들이 한글로 쓴 학술.소설.평론.시 등을 통해 독특한민 족적 색채를 띄면서 조선족의 중국 한족에 대한 지적 수준과 문화적 측면 에 있어서 상대적 우수성과 독창성을 과시하며 1949년 후 중국 사회주의건 설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비판했다. 이 당시 조선족 소학교와 중 학교의 교과서에는 모택동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있었고, 연변대 학의 교과서는 김일성대학에서 많이 가져다 이용했다. 심지어 연변을 조선 의 연속으로 생각하고 고구려의 고토 운운하면서 중국당국을 극도로 자극 하였다.
그런데 사실 백가쟁명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중국당국이 사회주의 건 설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에 대한 여론을 수렴한다는 명분으로 통제의 고 삐를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2년여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주의 우파의 목소리와 지방 민족주의의 주장 이 통제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에 공산당은 소위 민족정풍운동을 일으켜 백화제방(百花齊放)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퍼부어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게 철퇴를 가하였다. 주로 반당 편향주의자와 반사회주의자, 그리고 반한족(反漢族) 민족주의자가 비판의 표적이었다. 특히 연변 조선족에게는 복수조국론(중국과 조선)자로 규탄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중국 조국관을 강 요하였다.
중국 조선족은 이와 같은 백화제방과 민족정풍운동의 과정을 겪으면서 중국을 조국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 조국관이 심화되 어 갔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요인은 중국 조선족들은 스스로를 중국 개척자 인 동시에 국가 보위자이며 경제건설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개척자라고 함은 중국으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고 수전(水田)을 개척한 농경의 선구자적 역할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인연이 깊은 땅에 대해서는 향수가 어리고 정이 있게 마련이다.
조상들이 이주해 와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일구어놓은 만주벌에 대해 애착이 있으며 내 삶의 고장이란 정감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또 한가지 자신들을 국 가보위자로 생각하는 것은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국공내전.國共內戰) 때 참전하여 국내외적을 물리치고 혁혁한 공을 세우며 공동의 나라를 건설 하는 과정에서 중국정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조선족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였고 일제 패망 후 중국 내전기에 공산주의 세력을 도와 싸웠다. 국공내전 때 연변에 서 5만2천명이 인민해방군에 참전했는데 그중 85%가 조선족이었고 그밖에 10만명이 비전투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건설자로 자부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논리가 아니다.
이주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 경제 건설에 역할을 한 것도 사 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을 이국(異國)으로 보던 인식이 바뀌 고 앞으로 대를 이어 살아갈 고장, 자신들의 운명과 같이할 나라(조국.祖國)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다른 하나의 요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의 성공적인 결실이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소수민족을 중국사 회에 통합시키고 국가의식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중국은 소수민족에게 평등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대접하여 소외감을 불 식시키고 호감을 샀다. 소수민족에게 자치제를 실시하여 그들의 문화적 전 통과 유산을 보전할 수 있게 하고, 소수민족 언어에 의한 민족교육을 실시 할 수 있도록 용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의 중국어 장애로 인한 불 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소수민족 언어로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했으며, 더 나아가 명문대학 진학에 있어 소수민족 학생에게 가산점 수(5점)를 주어 입학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산아제한정책에 있어서 한족 (漢族)은 자녀 하나만을 갖게 하고 있으나 소수민족에게는 두 자녀를 가질 수 있도록 혜택을 주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치지역에 대해서 같은 급의 일반행정단위에 비해 보다 강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혜택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소수민족정책은 한족과 소수민족간에 공동운명체적인 의식을 고 취하였으며, 조선족은 중국당국에 고마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어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했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민족의식이 국가의식에 결코 부정 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에 입각하여 수립되었다. 오히려 높은 민 족의식은 중국에 대한 국가의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발상은 조선족사회에서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 다.
조선족은 중국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밝고 희망에 찬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 많은 인구 등 강대국으로서 갖출 요소는 다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지금은 비록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 지만 개혁.개방정책 후 급성장하고 있고, 군사적으로도 어떤 나라와도 필 적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국제정치 사회에 있어서 도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어 불원 미국과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초강대국의 위치를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조선족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희망찬 미래에 자신의 꿈을 실현시 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국민으로서의 귀속 의식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밝은 미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이곳이 그들의 삶의 고장이며 조국이라는 관념이 굳어져가고 있다.
끝으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선족 집거구가 점차 해체되어가 고 인구가 줄고 민족교육과 민족출판업들이 쇠퇴되면서, 그리고 조선어 사 용의 생활공간이 좁혀지면서, 중국에로의 귀속의식이 가속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중국에서 살아갈 바엔 지나친 민족의식에 집착하 기보다는 중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사고정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 행스러운 것은 민족적으로는 자랑스런 조선족이라는 확고한 의식을 갖고 있는 점이다. 중국 조선족의 이러한 민족의식은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 는 동포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usjang7@hanmail.net
그들이 말하는 특수한 위치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막연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생각해보면 그러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우리 나라"라고 할 때는 거의 예외없이 중국을 의미 하며, "우리 중국"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중국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와의 관계를 정서 적 측면에서 물으면 스스럼없이 모국이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조국과 모국 을 엄격히 구별하여, 중국은 조국이고 한반도는 모국이라고 한다. 조국과 모국은 어떻게 다르며 왜 중국은 조국이고 한반도는 모국이냐고 물으면, 명확한 개념 정리는 못하면서도 그저 막연하게 중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어버이의 나라이고, 한반도는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이주해오기 전에 태어 나서 살던 나라라고 묘한 설명을 덧붙인다. 다소 애매하나마 그들의 뜻이 전달되는 듯한 감을 받게 된다.
지금까지의 말들을 종합해보면 그들은 국적상으로는 중국 국민이고, 민 족적으로는 조선족이며, 중국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 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 한족과도 다르고 모국 동포와도 다른 중국 조 선족이라는 특수한 위치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노인층과 젊은층 간에 극명하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체로 50대 중반 이상은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젊은층으로 내려갈수록 중국 국민으로서의 의식이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중국여행 중이던 어느 날 한.중 축구경기가 있었는데 텔레비전 앞에 할아버지.아버지.손자 3대가 함께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필자도 동석했다. 경기를 관전하면서 3대는 각 각 다른 관심과 반응을 표출시켰다. 70대 할아버지는 한국이 이기기를 은 근히 바라고, 20대 손자는 중국 쪽에 열렬히 응원을 했으며, 50대 아버지 는 어느 편이 꼭 이겼으면 하는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 경기를 관전하는 태도에서 중국 조선족의 국가의식과 민족의식의 변화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중국 조선족이 거의 대부분 조선어를 사용하고 조선족끼리 모여 살면서 도 중국을 자기 나라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체의식(正體意識)에 있어서 대 단히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중국 국가에의 귀속의식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생긴 관념이다. 그 이전, 그들이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을 때나 일본 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청나라 또는 일본의 국민의식을 전혀 갖지 않았다. 중국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미 근대민족으로 형성된 후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므로 거주지를 중국에 옮겨왔을 뿐 한반도에 사는 조선족과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조선족이 신생 중국이 탄생된 후 불과 50년 사이에 중국 국민의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의식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과정과 요인이 있다. 1956년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운동이 일어나 연변 조선족 사이에는많 은 학자와 문화인들이 한글로 쓴 학술.소설.평론.시 등을 통해 독특한민 족적 색채를 띄면서 조선족의 중국 한족에 대한 지적 수준과 문화적 측면 에 있어서 상대적 우수성과 독창성을 과시하며 1949년 후 중국 사회주의건 설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비판했다. 이 당시 조선족 소학교와 중 학교의 교과서에는 모택동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있었고, 연변대 학의 교과서는 김일성대학에서 많이 가져다 이용했다. 심지어 연변을 조선 의 연속으로 생각하고 고구려의 고토 운운하면서 중국당국을 극도로 자극 하였다.
그런데 사실 백가쟁명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중국당국이 사회주의 건 설 과정에서 야기된 문제점에 대한 여론을 수렴한다는 명분으로 통제의 고 삐를 늦추었기 때문이었다.
2년여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주의 우파의 목소리와 지방 민족주의의 주장 이 통제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에 공산당은 소위 민족정풍운동을 일으켜 백화제방(百花齊放)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퍼부어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게 철퇴를 가하였다. 주로 반당 편향주의자와 반사회주의자, 그리고 반한족(反漢族) 민족주의자가 비판의 표적이었다. 특히 연변 조선족에게는 복수조국론(중국과 조선)자로 규탄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중국 조국관을 강 요하였다.
중국 조선족은 이와 같은 백화제방과 민족정풍운동의 과정을 겪으면서 중국을 조국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 조국관이 심화되 어 갔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요인은 중국 조선족들은 스스로를 중국 개척자 인 동시에 국가 보위자이며 경제건설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개척자라고 함은 중국으로 이주하여 황무지를 옥토로 일구고 수전(水田)을 개척한 농경의 선구자적 역할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인연이 깊은 땅에 대해서는 향수가 어리고 정이 있게 마련이다.
조상들이 이주해 와서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일구어놓은 만주벌에 대해 애착이 있으며 내 삶의 고장이란 정감이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또 한가지 자신들을 국 가보위자로 생각하는 것은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국공내전.國共內戰) 때 참전하여 국내외적을 물리치고 혁혁한 공을 세우며 공동의 나라를 건설 하는 과정에서 중국정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중국 조선족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였고 일제 패망 후 중국 내전기에 공산주의 세력을 도와 싸웠다. 국공내전 때 연변에 서 5만2천명이 인민해방군에 참전했는데 그중 85%가 조선족이었고 그밖에 10만명이 비전투요원으로 복무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건설자로 자부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논리가 아니다.
이주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 경제 건설에 역할을 한 것도 사 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을 이국(異國)으로 보던 인식이 바뀌 고 앞으로 대를 이어 살아갈 고장, 자신들의 운명과 같이할 나라(조국.祖國)로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또다른 하나의 요인은 중국의 소수민족정책의 성공적인 결실이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소수민족을 중국사 회에 통합시키고 국가의식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중국은 소수민족에게 평등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대접하여 소외감을 불 식시키고 호감을 샀다. 소수민족에게 자치제를 실시하여 그들의 문화적 전 통과 유산을 보전할 수 있게 하고, 소수민족 언어에 의한 민족교육을 실시 할 수 있도록 용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소수민족의 중국어 장애로 인한 불 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소수민족 언어로 대학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했으며, 더 나아가 명문대학 진학에 있어 소수민족 학생에게 가산점 수(5점)를 주어 입학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산아제한정책에 있어서 한족 (漢族)은 자녀 하나만을 갖게 하고 있으나 소수민족에게는 두 자녀를 가질 수 있도록 혜택을 주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자치지역에 대해서 같은 급의 일반행정단위에 비해 보다 강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혜택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소수민족정책은 한족과 소수민족간에 공동운명체적인 의식을 고 취하였으며, 조선족은 중국당국에 고마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어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했다. 중국의 민족정책은 민족의식이 국가의식에 결코 부정 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에 입각하여 수립되었다. 오히려 높은 민 족의식은 중국에 대한 국가의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가정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발상은 조선족사회에서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된 다.
조선족은 중국의 미래에 대하여 매우 밝고 희망에 찬 장밋빛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 많은 인구 등 강대국으로서 갖출 요소는 다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지금은 비록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 지만 개혁.개방정책 후 급성장하고 있고, 군사적으로도 어떤 나라와도 필 적할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국제정치 사회에 있어서 도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어 불원 미국과도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초강대국의 위치를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을 한다.
조선족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중국의 희망찬 미래에 자신의 꿈을 실현시 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국민으로서의 귀속 의식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밝은 미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이곳이 그들의 삶의 고장이며 조국이라는 관념이 굳어져가고 있다.
끝으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선족 집거구가 점차 해체되어가 고 인구가 줄고 민족교육과 민족출판업들이 쇠퇴되면서, 그리고 조선어 사 용의 생활공간이 좁혀지면서, 중국에로의 귀속의식이 가속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중국에서 살아갈 바엔 지나친 민족의식에 집착하 기보다는 중국사회에 적응하려는 사고정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 행스러운 것은 민족적으로는 자랑스런 조선족이라는 확고한 의식을 갖고 있는 점이다. 중국 조선족의 이러한 민족의식은 다른 나라에 거주하고 있 는 동포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usjang7@hanmail.net
출처 : 중국통 심양 (Shenyang)
글쓴이 : 파트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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