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산동성 동이문화와 홍산문화 기사들

monocrop 2006. 12. 19. 19:20
우선 고인돌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실제론 거석문화를 의미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됩니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영국의 스톤헨지, 스칸디나비아까지 모두 "dolmens"라고 사용하고 있군요. 정말로 이것이 고인돌에서 유래하는지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할 거 같습니다.


예1)The `dolmens' of southern Britain (영국)


예2)the peoples of Atlantic Europe, the inhabitants of western North Africa build dolmens of huge stones in association with tombs for the prominent dead. The dolmens are of a shape peculiar to the region. (아프리카 사하라 지역)


3)3500 2500 B.C. Communities in Scandinavia build passage tombs and dolmens of megaliths, undressed stone blocks weighing up to forty tons. (동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


 홍산문화에 대해선 업코리아에서 맘먹고 보도한 자료가 있네요. 중국동해안지역에 고조선문화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논문에 없었다고 주장했다가 맞겠군요. 오즈의 맙소사님의 말씀처럼 산동성엔 고인돌이 존재여부에 대해서 오즈의 맙소사님의 소개하신 자료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가 좀 더 명확한 자료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업코리아의 기사 내용중 국문으로 번역된 부분입니다. 홍산문화의 특이성과 광범위만 문화공통성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홍산(紅山)문화의 후예: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

[업코리아 2005-02-02 09:17]

 

Fagan (2004: 201)은 “초원지대는 마치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가 충분히 올 때는 목초와 가축들이 잘 자라 유목민들을 흡수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유목민들을 주변지역이나, 이웃나라로 내몰게 된다. 기원전 9세기경, 초원지대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는데, 몽골고원의 목초지가 제일 먼저 이러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경, 가뭄이 초원지역 유목민들을 중국대륙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한족에게 격퇴되었고, 연쇄반응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나, 일부 기마(騎馬)유목민들은 당시 켈트족 세상이었던 유럽의 동부 변경인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몰려가게 되었다.

 

” 몽골고원은, 만주의 서쪽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군데군데 높은 산들을 돌아가며 헝가리 평원에까지 도달하는, 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반부를 구성한다. 언뜻 보면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이 서로 만나서 유라시아 대초원을 절단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가타이의 이밀강(江) 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초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고원의 돌궐-몽골 기병들에게는 유라시아 초원이란, 바이칼호(湖)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콘 강둑에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초원을 거쳐 헝가리 평원까지 계속 달려갈 수 있는, 일기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의미했다. 자고 이래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리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가는, 천산산맥 남쪽 실크로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교통로 이었던 것이다. 발카쉬호(湖) 서쪽의 (터어키쉬)초원지대는 평균고도가 해수면에 가깝지만, 몽골초원은 평균 해발 1500미터로, 한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가고 한 겨울에는 영하 42도까지 내려간다. 고비는 건조한 초원지대로, 내몽골과 외몽골을 가른다. 북쪽의 목초지는 바이칼호와 흑룡강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들의 유역과 알타이산맥의 동쪽 경사지로 구성되어있다.

 

알타이지역은 여름의 한낮에는 섭씨 40도를 상회하며, 일조량이 18시간에 달한다. 바이칼호 주변지역은 몽골 초원지대가 시베리아 삼림지역으로 바뀌는 접경지대에 해당된다. 황하(黃河)에 의해 말편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오르도스 평원에 접하면서, 남쪽의 대마군산(大馬群山), 서쪽의 만주 등을 경계로 하는 내몽골도 수많은 유목민들을 부양하였다. 돌궐-몽골 족들은 양고기를 주식으로 했고, 염소, 낙타, 소, 말, 등을 길렀다.

 

만주는, 북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남으로는 칠노도(七老圖)-연산(燕山) 산맥 등을 경계로, 몽골초원과 분리된다.  샤라무렌강(西拉木倫)-노합하(老哈河) 유역으로부터 서요하(西遼河) 유역에 걸쳐 만주 서부의 목초지대가 펼쳐지는데, 이 지역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기슭과 눌루얼후(努魯兒虎)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여기가 바로 선비족(東胡)의 본고장인데, 문화적으로 몽골의 영향이 강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송화강유역의 평원지대는, 동쪽은 울창한 삼림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시베리아 끝자락에서 한반도의 압록강변까지 내려가는 도중, 남서쪽의 요하(遼河)유역 평원과 연결되어, 소위 동북평원을 형성한다.

만주의 중부 평야와 동부 산림지역에 살던 이른바 동이(東夷)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돌궐말로 돼지를 “통구즈”라 부른다는 사실을 근거로 “퉁구스”의 어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Janhunen(1996: 221)에 의하면, 이는 언어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접근방법이다.


신석기 홍산(紅山)문화(4000-3000 BC)의 유적은 요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홍산문화는 황하(黃河)중류-위수(渭水)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황하하류 유역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킨 종족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이룩한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유물로는 각종 의례용 도구를 포함하여, 점토로 빚은 인체조형물,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 염료를 칠한 통형관(筒型管) 등이 발견되었고,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전통과 양과 돼지를 포함해 가축들을 길렀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竪穴式) 움집과 함께 저장고, 불 때는 화로 등도 발견되며, “Z”자 모양의 문양, 빗살 문양, 칼끝으로 판 문양으로 장식된 적색 혹은 회색의 사질성(沙質性) 토기와 채색토기 및 토기제조용 가마, 수수를 수확할 때 쓰는 조개로 만든 칼 등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했던 공공건물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사회적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른 지역 문화유적의 조각품들을 보면 다분히 추상적으로 정형화 되었지만, 홍산문화의 조각품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 모양을 하고 있다. Barnes(1993: 109)에 의하면,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형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홍산문화는 즐문토기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동을 사용하는 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2000-1500 BC)로 이어진다.

 

*다음은 중국의 고고학자가 홍산문화를 자국의 문화로 끌어들이기위한 논리를 전개하는 부분입니다. 홍산문화의 직접적 대상자는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연나라라는 것이죠. 하지만 계속 읽어보면 자신들의 문화 소위 한족문화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은)문화에 영향을 끼친 문화를 자신들의 역사에 포함시키기위한 시도라고 생각되네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는 것처럼 역사학도 조국이 존재하는가 봅니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 Nelson, 1995: 178)은, 연(燕, 1027?-222 BC)나라 문화는 청동기를 사용하던 하가점 하층문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가점 하층의 채색토기에 그려진 동물 가면문양은, 그 출현시점이 매우 이르고, 상당히 발전된 형태였다. 상(商)나라 도철(饕餮-전설상의 흉악하고 탐식하는 야수) 문양의 근원이 된, 이 괴물문양의 전통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00년경까지, 연나라에 존속 되었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서주(西周, BC 1122-771)시대의 연나라는, 주나라와는 크게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신탁(神託) 갑골(甲骨)에 이미 연(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시 연나라는 이미 상(商, BC. 1766-1122)나라 시대에 존재해 있었고, 그 문화적 전통이 서주 시대의 연나라에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곽대순은 옛 연나라 문화의 연원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찾았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나라 문화를 일으켰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 남아 연나라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Nelson, 1995: 148-9, 179 참조.)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를 주나라 때 연(燕)문화의 전 단계로 이해한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Barnes(1993: 157-8)는, 하가점 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린 동제품이 (비록 기마전투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기마전통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말한다.

 

Barnes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시기를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 하층문화를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해를 한다. Barnes(1993: 153)는, 홍산문화 시대에 이미 그 흔적을 보인 청동기는, 하가점 상층문화 시기에 와서 아주 본격적으로 다양한 품목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문양의 청동제품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라시안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 상층문화가 한반도로 전승되면서 기원전 700년경부터 한반도에 본격적 청동기시대를 연 것으로 보았다.

Barnes는 또, 고대 연나라가 남부만주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문화적으로 융합했다고 주장한다. 하가점 상층 유적지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발굴되는데, 이들은 한족들이 만든 동검과 달리,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었다.  한반도의 비파형 동검은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유래하며, 후에 세형동검으로 바뀌어 철기시대 초까지 사용된다.

하가점 상층에서는 하층과 달리 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의 여타 지역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는데, 하가점 상층문화는 (곽대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하 유역방향으로부터 이들 민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武王)은 자신의 친족인 소공에게 “북연(北燕)”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봉해주었고 (c.1027-1025 BC), 그가 연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각주(註)에는, 이 봉토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연나라, 즉, “남연(南燕)”이 존재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는, 당시 무제가 멸망한 상나라 왕실의 기자(箕子)에게 조선을 봉해주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기원전 311-279년 기간 중, 연은 진개(秦開)를 시켜 동호(東胡)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혀, 오늘날의 난하(灤河) 유역에 (요동과 요서를 포함하는) 5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한 고조(r.206-195 BC)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후에 흉노한테 도피를 했고, 흉노는 그를 동호왕으로 임명했다. 연나라에 관한 기록에 “동호”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후세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 한족들한테는 모반을 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Nelson(1995: 252, 14)은 동북지역에서 청동 제품이 상당히 일찍 발견되는데, 특히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 제품들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상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차도 동북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의 어설프고 야만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Nelson은 홍산문화는 중원의 문화와 분명히 다르며, 단지 그들이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Janhunen(1996: 224)은 고대의 연나라는 애당초 중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원시 투르코-몽골족이 바로 초창기의 연나라를 구성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구사하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모두가 홍산문화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한족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말 한다면, 선비-퉁구스족은 홍산문화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대륙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른, 요서의 신석기 홍산문화 유산의 상속-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범“선비-퉁구스” 계통의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옛 전통을 공유하는) 문화-역사 공동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5 (2005. 1. 22.)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고대의 연(燕)과 예맥 조선(濊貊朝鮮): 연 나라를 통한 철기문화의 전파

[업코리아 2005-03-20 17:35]

wthong@wontackhong.pe.kr.ⓒ2005 by Wontack HongAll rights reserved

 

 알타이 산맥을 넘어 바이칼호 주변에 정착했던 원시 투르크-몽골족의 일부가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만주 땅에 들어와 원시 선비-퉁구스가 되었고, 또 그들 중 일부는 좀더 따뜻하고 습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 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한반도는 만주의 중심부가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형상으로,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들이 줄이어 서있고 서쪽으로는 평야들이 이어져 있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범-만주 권역(圈域)은, 유사한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며 밀접한 역사를 함께한 “선비-퉁구스”계통 집단의 민족사학적 범주로서, 동아시아 역사체계 안에서 3대 핵심 권역의 하나를 구성해 왔다.

 

1 원시 알타이 계통 언어들을 사용하는 선비-퉁구스 역사공동체는 신석기 홍산문화와, 고인돌, 비파형-세형 동검,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등의 전통을 공유한다.

(거대한 문화권이 존재했다는 유물적 증거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비-퉁구스라고 부르던지, 동이라고 부르던지 상관은 없다 생각됩니다. 단일 문화권에 대해서 그 명칭을 어떻게 하던지 동일한 문화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

 

 

 한반도는 민족사학적 존재로서뿐만 아니라, 실제 지정학적 현실로도 만주대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부 만주의 요서(遼西) 초원지대는, 선비와 그 후예인 거란족을 포함하는 소위 동호(東胡)의 본고장이다. 흔히 “목초지대의 늑대들”로 불리는 이들 선비계(鮮卑系) 집단은 몽골고원 유목민과 유사한 생활을 하였다.  소흥안령 산맥으로부터 장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동부 만주의 삼림지대는, 숙신-읍루의 후예이며, 후에 만주족의 핵심이 되는 말갈-여진 퉁구스의 본향이다. 흔히 “삼림의 호랑이”로 불리는 이들 말갈계(靺鞨系) 집단은 사냥과 채집에 크게 의존하면서 소규모 밭떼기 농사를 지어왔다 송화강-요하 유역의 중부 만주평원(소위 동북평원)과 훈강(渾江, 佟佳江)-압록강 -대동강 일대의 산악지대는, 바로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인들을 포함하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이다. 이들은 주로 수수를 심고 가축을 기르면서, 강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단백질을 보충했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에 의하면 요동의 신락(新樂)유적지에서 발견된 수수는 기원전 5000년 경의 것이다.


2 한반도 남부는 쌀 농사를 짓는 예맥계 분파 집단의 본고장이었으며, 이들은 중국의 사서에서 총괄적으로 진, 한, 혹은 삼한으로 불렸던 원시 정치적 실체를 구성했다. 영어로 “Korea Proper”라는 표현은 중부만주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예맥-퉁구스의 본고장을 지칭하는 민족사학적 범주로서의 한국을 의미한다. 소위 만주유역(Manchurian Basin)과 한반도를 합친 공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중부만주-한반도 지역에서 빗살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8000년경에 시작된다.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 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형태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Barnes(1993: 109)는 말한다. 후기 신석기를 상징하는 새로운 형식의 민 무늬 토기가 기원전 2000년경에 중부만주-한반도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요녕성과 흑룡강성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기타 만주지역과 한반도에서 출토된 민 무늬토기와 유사하다.


3 신석기 유적에서 발굴된 빗살무늬 토기에서 볼 수 있는 만주유역과 한반도 사이의 유사성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도 민 무늬토기, 고인돌, 청동검 등의 형태로 지속된다.


4 고인돌은 예맥 지배층의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며, 만주유역과 한반도의 “동이” 문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인돌 축조 관행은 기원전 300년경에 사라졌다.


5 만주 유역에서는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된다.

(현재의 통설입장입니다.)

 

6 Barnes(1993: 162)는 “한반도에서의 청동기시대 그 자체는 만주 유역으로부터 요녕식 (비파형)동검이 진입 해 오는 것으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요녕식 동검은, 한족들이 만든 청동검과는 달리, 칼의 날과 자루가 각기 따로 주조된다. Nelson(1993: 133)은 “요녕식 동검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요동반도와 발해만 연안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지만,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본토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청동으로 단검, 화살촉, 거울(銅鏡), 낚시 고리, 도끼 등을 만들던 거푸집과 종, (동물형상) 혁대고리, 단추, 마구류(馬具類), 마차의 장식품 등 기타 청동제품들이 한반도 전역의 민 무늬토기 유적지에서 출토된다.


7 한반도에서 풍부하게 발견되는 동검과 동경의 유래는 하가점 상층 문화로 추적된다.


8한반도 서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쌀은 기원전 2400-2100년경의 것으로 측정된다.

9 중국 남부에서 쌀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황해를 건너 한반도의 남부에서 생태학적으로 비슷한 적소를 발견하고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름철에 북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타면, 양자강 하구로부터 한반도의 남서부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다.

(중국의 양자강 유역의 사람이 옮겨와서 우리 나라에 정착해 농경문화가 시작되었다는 논리는 오래전에 있었습니다. 제가 본 논문에도 그렇게 그려져있더군요. 소로리볍씨가 발견된 지금 과연 이것이 맞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래 21번과 마찬가지로 원문을 살리기 위해 삭제하지 않습니다.) 


10사기를 보면, 주나라 무왕이 소공(召公)에게 상나라 마지막 왕에 의해 투옥된 기자(箕子)를 석방 해 주라고 명한다. 사마천은 무왕이, 기원전 11세기경에, 소공을 (북)연의 통치자로 봉했고, 또 기자를 그 이웃 조선의 통치자로 봉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붓으로 몇 글자 적어, 고대 한족 왕실 종친을 전통적으로 동호와 예맥-퉁구스의 영역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의 시조로 만든 것이다.

사기에는 주공이 섬서(陝과 그 서쪽, 혹은 섬의 서쪽)를 다스리고, 소공이 그 동쪽을 다스린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소공에게 봉해주었다는 북연(燕) 말고 남연 이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11전국시대에 편찬된 관자(管子)를 보면, 제(齊)의 환공(桓公 685-43 BC)에 대한 기록에서 조선이 등장하며, 전한(前漢)때 쓰여진 사마천(145-90 BC)의 사기에는 연 나라에 대한 기록 속에 부여와 고조선이 함께 나타난다. 후한서(後漢書)는 예(濊),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말한다.


12 주(周, 1122 혹은 1027-256 BC) 조정이 쇠망의 길로 접어들어 기원전 403년경부터는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위략(魏略, 東夷傳 三韓전에 인용)에 의하면, 주 왕실이 쇠약해지자 연의 지배자가 [기원전 323년에] 스스로 왕을 칭했다 그러자 기자의 후손인 조선의 지배자도 스스로 왕이라 칭했고, 이들 두 나라는 서로 전쟁 직전까지 갔다. 결국 기원전 300년경에 조선과 연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연은 진개(秦開, BC 311-297년에 활약)를 시켜 조선을 공격했다.


13 사기의 흉노전은, 당시 연이 영토를 크게 넓혀 오늘날의 난하(灤河) 주변에 요서와 요동군을 포함하여 5개의 군을 설치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장성을 쌓았다고 말한다.


14사기에 의하면 처음에 연나라가 쌓고, 후에 진나라가 다시 쌓은 장성이 요동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하지만 12세기에 제작된 지리도를 보면 오늘날의 난하를 옛날에는 요수(遼水)라 불렀고, 오늘날의 요하는 소요수라 불렀다. 따라서 사기의 요동은 난하의 동쪽을 의미했었을 것이다.


15 즉 연이 설치했다는 요동군과 요서군은 오늘날의 난하 좌우에 위치했고, 상곡, 어양, 우북평 군들은 하북성에 위치했을 것이다.  Karachin Banner로부터 Fu-xin에 이르기까지, 흙벽돌과 돌로 만든 방벽, 초소, 크고 작은 요새, 봉화대, 협곡을 가로막는 돌담, 웅덩이 등으로 구성된,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 같이 보이는 유적이 존재하는데, 이것을 보고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연 장성”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별로 남아있는 유적도 없는 동과 서로 “연 장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하며 장성의 위치를 그린다. 이제 Di Cosmo (2002: 148-50, 157)가 요약한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그 자신의 해석을 빼고) 소개한다.


소위 “연 장성”을 따라가며, 높은 지대에 돌로 지어진 몇 개의 요새와 원형 거주지 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이 하가점 상층문화 유물들을 발견했다. 이 요새화된 방어선 주변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은 모두 한족 문화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다. 고고학자들은 그곳 거주자가 동호족이었다고 믿는다.

적봉 부근에서 발굴된 것들도 모두 하가점 상층과 오르도스 청동문화에 속하는 유물이다.


16 주변 전 지역의 거주자들은 모두 한족이 아닌 유목민들 이었다고 생각된다 소위 그 장성이라는 존재는 유목민과 농민을 분리시키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 자체를 통제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킬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장벽들은 대부분 비 농경지역을 방위하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외계인들이 전통적으로 거주하던 지역 속에, 새삼스럽게 살게 된 한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 장벽들이 만들어 졌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아직도 그 장벽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실제로 보호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일련의 요새화된 방어선과 유사한 이 유적들을 보고 (기원전 299년 이전에 축조된) “연 장성”이라고 부르는 근거는 순전히 사기에 기록된 “장성”이란 두 글자뿐이다. 동이전의 예전(濊傳)을 보면, 진나라 말기에 전국이 반란에 의해 혼란에 빠졌을 때(209 BC), 중국 동북부의 제, 조, 연 나라 사람들 수 만 명이 조선 땅으로 피난을 했는데, “상투를 틀고 호복(胡服)을 입은” 위만이라는 연나라 사람(206-195 BC)도 왔다고 말한다. 위만은 서쪽 변경에서 피난민들을 관장하는 업무를 위임 받고 하다가 마침내는 조선의 왕위를 찬탈했다고 말한다. 동이전의 한전(韓傳)은, 위만에 의해 쫓겨난 조선왕이 남쪽으로 내려가 삼한 지역에 정착 해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17 중국에서는 두드려서 만든 저탄소 연철과, 주조된 고탄소 철이 모두 기원전 500년경부터 사용되었고, 중급의 탄소를 함유한 강철도 기원전 300년경 이후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의 철기문화는 철제 무기, 말 장식품, 말 재갈, 차축의 마개, 괭이, 보습, 낫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기원전 400년경에 옛 연나라를 통해 이들 철기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18 만주평원과 한반도에서 철제 도구와 함께 발견되는 유물들을 보면 (비파형 동검과 마찬가지로 칼날이 칼자루와 분리되어 주조된) 세형 동검과 스키토-시베리안 양식의 짐승 모양을 한 혁대고리가 있다.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고조선과 옛 연나라 사이의 충돌 기록은, 몽골 유목민적인 선비-동호족과 예맥-퉁구스족 간에 매우 친밀한 관계, 즉 사이가 좋다는 이웃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싸우는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Barnes(1993: 152)는, 연나라가 비록 주나라 말기 전국 7웅(雄)들 중에서 가장 약하였지만, 발굴된 여러 개의 철 제조 유적을 보고 알 수 있듯이, 당시 가장 강하였던 진(秦) 나라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철제품들을 생산했고, 동아시아 최초의 철 갑옷 또한 연나라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연나라가 기원전 400년경에 한반도의 철기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중국본토에 철기문화가 시작 된지 100년도 안되어 한반도에 철이 전파된 것이라고 말한다.


19기원전 2세기경, 고조선은 전한(前漢) 조정이 한강 이남에 위치한 진 나라(후의 삼한) 땅의 조그만 성읍국가들과 접촉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배영역과 세력이 커 있었다.


20 기원전 109년에 고조선의 왕은 (난하 동쪽의) 요동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관료를 살해하였다. 당시, 고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을 가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던 한 무제(漢武帝, BC 141-87)는 그 해 가을에 고조선을 공격하였다. 일년 가까운 전투 끝에 고조선의 왕은 108년에 살해되었고, 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하여 “흉노의 왼팔을 잘라버렸다.”


21 그로부터 30년이 못되어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지거나, 밀려나 위치를 이전했다. 313년경에 한족들은, 204-220년 기간 중에 공손씨가 설치한 대방군과 무제가 설치했던 낙랑군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기원전 108년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한족이 처음으로 요하 하류와 한반도의 서북부 연안에 진출한, 역사적인 시점이 된다. 316년에 서진(西晋)이 망한 후, 요하 유역에 고립되어 있던 한족들은 시세에 따라 선비족이나 퉁구스 족에 붙어 협력을 했다. 한족에 의한 요동의 지배는 668-755년 기간 중에 당나라에 의해 재현되었다.

(*21번 부분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원문 그대로 소개하기 위해 삭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요동 땅은 돌궐-몽골, 선비-거란과 예맥-여진 퉁구스족의 각축장 이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1 (2005. 3. 5.)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BIBLIOGRAPHY[각주]1.민족사학(民族史學)은 인류학의 한 분파로, 언어-문화적 집단으로서 각 민족의 기원, 분포, 특징, 등을 분석하는데, 특히 고고학적 유물의 분석을 통한 문화발전 연구에 치중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동아시아의 민족사학은 연구자 각 개인이 처한 정치환경 현실에 지배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특정 연구자의 민족사학을 추구하는 방법자체가 명백하고도 묘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민족사학”이 “민족주의 역사관”의 약자가 아니며, 동아시아 역사를 민족사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2 이 지역은 심양 주변과 그 북쪽 지역을 포함한다. Nelson (1993: 108)을 참조. 3 Nelson (1993: 113-6, 158, 161)을 참조. Xu Yu-lin(Nelson, 1995: 66, 79)은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가 요동의 음각 토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Nelson(1995: 10)은, 이와 유사한 토기들이 시베리아 연안과 한반도, 일본 등 동북아시아 전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제조-장식 기법이 만리장성 아래 중국 본토에서 발굴되는 토기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4 고인돌은 아시아에서 인도로부터 만주에 걸쳐 발견되는데, 만주유역-한반도 지역에서 10만개가 넘는 최고의 밀도를 보인다. Nelson(1993: 159, 163)은, 한국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숫자는 고인돌의 원산지가 한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케 하고 또, “영국 열도에서처럼, 예맥의 지배층들은 그들의 매장지로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 말기에 출현했다 거대한 돌기둥 위에 최고 300톤에 달하는 관석(冠石)을 올려놓아, 지상에 석관 모양의 방을 만들었다.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후반에 출현했는데, 마치 바둑판 모양 몇 개의 돌 위에 거대한 관석을 덮고, 지하에 석관이나 옹관을 묻었다 매장품으로는 옥관 목걸이와 곡옥(曲玉) 등이 발굴된다 Nelson(1995: 16)은, 만주평원과 요동반도의 고인돌들이 그 축조방법과 발굴물의 내용 면에서 한반도의 고인돌과 밀접한 연관을 보인다고 말한다. Xu Yu-lin(Nelson, 1995: 80)은 신석기시대의 요동반도, 산동반도, 한반도가 상호간에 영향을 주면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한다. 산동반도 지역에서 고인돌을 만들던 동이족들은 한족에 의해 흡수 동화되었거나, 만주유역으로 밀려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동성에 고인돌이 존재했다는 자료는 아닙니다. 다만 중국의 앙소문화와 대비되는 홍산문화라는 것이 요서에 아주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아주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이 문화는 은문화에도, 만주와 한반도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기록입니다. 이 문화에 대해서 선비-퉁구스 문화라고 주장되고 있는데 중국과 대비되는 "동이"라는 관념을 써도 무리는 없다 생각됩니다.  물론 아무리 "이"가 좋은 뜻이라고 하지만 현재 그렇게 사용되고 있나요? 또한 동쪽이란 개념은 또 무엇입니까? 중앙을 전제하고 주장되는 것이죠. 중립적인 선비-퉁구스 문화도 좋다고 생각되네요. 홍산문화의 주체는 누가 봐도 명백하고, 연나라 역시 과연 한족의 나라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게하는 자료입니다. 물론 홍원탁교수님의 견해를 소개하는 글로써 더 많은 자료로 보충되어야할 것입니다. 막상 정리해 놓고 보니 홍원탁 교수님의 주장을 소개하는 글입니다. 주의하여 보시길 바랍니다.

번호 : 4208   글쓴이 : 현봉
조회 : 213   스크랩 : 0   날짜 : 2006.05.16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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