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조의 본고장
洪 元 卓 (서울대 교수)
몽골초원은, 돌궐(터키)족의 선조이며 아마도 몽골족의 선조일 가능성도 있는 흉노의 본고장이다. Fagan (2004: 201)은 “초원지대는 마치 펌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비가 충분히 올 때는 목초와 가축들이 잘 자라 유목민들을 흡수하지만, 가뭄이 계속될 때는 이 유목민들을 주변지역이나, 이웃나라로 내몰게 된다. 기원전 9세기경, 초원지대의 기후가 갑자기 춥고 건조해졌는데, 몽골고원의 목초지가 제일 먼저 이러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았다. 기원전 8세기경, 가뭄이 초원지역 유목민들을 중국대륙으로 내몰았다. 그들은 한족에게 격퇴되었고, 연쇄반응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나, 일부 기마(騎馬)유목민들은 당시 켈트족 세상이었던 유럽의 동부 변경인 다뉴브강 유역에까지 몰려가게 되었다.”1
몽골고원은, 만주의 서쪽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군데군데 높은 산들을 돌아가며 헝가리 평원에까지 도달하는, 대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반부를 구성한다. 언뜻 보면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이 서로 만나서 유라시아 대초원을 절단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타르바가타이의 이밀강(江) 주변에 커다란 틈새가 있어, 초원들이 계속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고원의 돌궐-몽골 기병들에게는 유라시아 초원이란, 바이칼호(湖)로 흘러 들어가는 오르콘 강둑에서 출발하여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초원을 거쳐 헝가리 평원까지 계속 달려갈 수 있는, 일기관통하는 고속도로를 의미했다. 자고 이래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리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밀고원을 넘어가는, 천산산맥 남쪽 실크로드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교통로 이었던 것이다.
발카쉬호(湖) 서쪽의 (터어키쉬)초원지대는 평균고도가 해수면에 가깝지만, 몽골초원은 평균 해발 1500미터로, 한 여름에는 기온이 섭씨 38도까지 올라가고 한 겨울에는 영하 42도까지 내려간다. 고비는 건조한 초원지대로, 내몽골과 외몽골을 가른다. 북쪽의 목초지는 바이칼호와 흑룡강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들의 유역과 알타이산맥의 동쪽 경사지로 구성되어있다. 알타이지역은 여름의 한낮에는 섭씨 40도를 상회하며, 일조량이 18시간에 달한다. 바이칼호 주변지역은 몽골 초원지대가 시베리아 삼림지역으로 바뀌는 접경지대에 해당된다. 황하(黃河)에 의해 말편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오르도스 평원에 접하면서, 남쪽의 대마군산(大馬群山), 서쪽의 만주 등을 경계로 하는 내몽골도 수많은 유목민들을 부양하였다.2 돌궐-몽골 족들은 양고기를 주식으로 했고, 염소, 낙타, 소, 말, 등을 길렀다.
만주는, 북으로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남으로는 칠노도(七老圖)-연산(燕山) 산맥 등을 경계로, 몽골초원과 분리된다. 샤라무렌강(西拉木倫)-노합하(老哈河) 유역으로부터 서요하(西遼河) 유역에 걸쳐 만주 서부의 목초지대가 펼쳐지는데, 이 지역은 대흥안령산맥의 동쪽 기슭과 눌루얼후(努魯兒虎) 산맥에 의해 둘러 쌓여 있다. 여기가 바로 선비족(東胡)의 본고장인데, 문화적으로 몽골의 영향이 강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송화강 유역의 평원지대는, 동쪽은 울창한 삼림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시베리아 끝자락에서 한반도의 압록강변까지 내려가는 도중, 남서쪽의 요하(遼河)유역 평원과 연결되어, 소위 동북평원을 형성한다. 만주의 중부 평야와 동부 산림지역에 살던 이른바 동이(東夷)족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돌궐말로 돼지를 “통구즈”라 부른다는 사실을 근거로 “퉁구스”의 어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Janhunen(1996: 221)에 의하면, 이는 언어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접근방법이다.
신석기 홍산(紅山)문화(4000-3000 BC)의 유적은 요서지역에 집중되어 있다.3 홍산문화는 황하(黃河)중류-위수(渭水) 유역의 앙소(仰韶)문화와, 황하하류 유역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킨 종족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이룩한 문화이다. 홍산문화의 유물로는 각종 의례용 도구를 포함하여, 점토로 빚은 인체조형물, 옥으로 만든 동물형상, 염료를 칠한 통형관(筒型管) 등이 발견되었고, 쟁기를 사용하는 농경전통과 양과 돼지를 포함해 가축들을 길렀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땅을 파고 지은 수혈식(竪穴式) 움집과 함께 저장고, 불 때는 화로 등도 발견되며, “Z”자 모양의 문양, 빗살 문양, 칼끝으로 판 문양으로 장식된 적색 혹은 회색의 사질성(沙質性) 토기와 채색토기 및 토기제조용 가마, 수수를 수확할 때 쓰는 조개로 만든 칼 등이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식과 제사를 행했던 공공건물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사회적 계층분화가 이루어진 복잡한 사회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다른 지역 문화유적의 조각품들을 보면 다분히 추상적으로 정형화 되었지만, 홍산문화의 조각품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 모양을 하고 있다.
Barnes(1993: 109)에 의하면, 사해(査海), 홍산, 신락(新樂)문화의 산물인 즐문(櫛紋)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 토기와 유사하며,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형태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홍산문화는 즐문토기를 계속 사용하면서도 동을 사용하는 하가점(夏家店) 하층(下層)문화(2000-1500 BC)로 이어진다. 4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곽대순(郭大順, Nelson, 1995: 178)은, 연(燕, 1027?-222 BC)나라 문화는 청동기를 사용하던 하가점 하층문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가점 하층의 채색토기에 그려진 동물 가면문양은, 그 출현시점이 매우 이르고, 상당히 발전된 형태였다. 상(商)나라 도철(饕餮-전설상의 흉악하고 탐식하는 야수) 문양의 근원이 된, 이 괴물문양의 전통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00년경까지, 연나라에 존속 되었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서주(西周, BC 1122-771)시대의 연나라는, 주나라와는 크게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신탁(神託) 갑골(甲骨)에 이미 연(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원시 연나라는 이미 상(商, BC. 1766-1122)나라 시대에 존재해 있었고, 그 문화적 전통이 서주 시대의 연나라에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곽대순은 옛 연나라 문화의 연원을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찾았으며, 궁극적으로는 홍산문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상나라 문화를 일으켰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 남아 연나라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Nelson, 1995: 148-9, 179 참조.) 그는 하가점 하층문화를 주나라 때 연(燕)문화의 전 단계로 이해한다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까워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Barnes(1993: 157-8)는, 하가점 상층유적지에서 발견된, 말을 탄 사람과 달리는 토끼를 그린 동제품이 (비록 기마전투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은 기원전 484년이지만) 동아시아에서의 기마전통 출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물증이라고 말한다. Barnes는 하가점 상층문화 발생시기를 전후로 유목문화가 등장했고, 이 새로 생긴 유목문화의 전파가 하가점 하층문화를 상층문화 형태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해를 한다. Barnes(1993: 153)는, 홍산문화 시대에 이미 그 흔적을 보인 청동기는, 하가점 상층문화 시기에 와서 아주 본격적으로 다양한 품목들을 보여주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의 스키타이 유물과 유사한 동물문양의 청동제품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하가점 상층문화는 유라시안 초원지대와의 접촉을 통해 유목민들과 문화적 전통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 상층문화가 한반도로 전승되면서 기원전 700년경부터 한반도에 본격적 청동기시대를 연 것으로 보았다. Barnes는 또, 고대 연나라가 남부만주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유목민적 사회, 정착-농경 사회, 국가 수준의 사회 등, 다양한 요소들을 문화적으로 융합했다고 주장한다.
하가점 상층 유적지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발굴되는데, 이들은 한족들이 만든 동검과 달리, 칼날과 손잡이가 따로 주조되었다. 한반도의 비파형 동검은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유래하며, 후에 세형동검으로 바뀌어 철기시대 초까지 사용된다. 하가점 상층에서는 하층과 달리 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 한바도를 비롯한 만주의 여타 지역에서는 민무늬 토기가 대략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용이 되었는데, 하가점 상층문화는 (곽대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요하 유역방향으로부터 이들 민무늬 토기 사용자들의 영향을 받게 된 것 같다. 5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주의 무왕(武王)은 자신의 친족인 소공에게 “북연(北燕)”이라고 부르는 지역을 봉해주었고 (c.1027-1025 BC), 그가 연 나라의 시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각주(註)에는, 이 봉토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연나라, 즉, “남연(南燕)”이 존재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기에는, 당시 무제가 멸망한 상나라 왕실의 기자(箕子)에게 조선을 봉해주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기원전 311-279년 기간 중, 연은 진개(秦開)를 시켜 동호(東胡)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혀, 오늘날의 난하(灤河) 유역에 (요동과 요서를 포함하는) 5개의 군을 설치하였다. 한 고조(r.206-195 BC)는 자신의 오랜 친구인 노관을 연왕으로 봉했는데, 노관은 후에 흉노한테 도피를 했고, 흉노는 그를 동호왕으로 임명했다. 연나라에 관한 기록에 “동호”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후세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 한족들한테는 모반을 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이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Nelson(1995: 252, 14)은 동북지역에서 청동 제품이 상당히 일찍 발견되는데, 특히 요서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 제품들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상나라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차도 동북지역의 문화를 중원문화의 어설프고 야만적인 표절로 간주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Nelson은 홍산문화는 중원의 문화와 분명히 다르며, 단지 그들이 문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서는 중원문화에 결코 뒤질 것이 없다고 말한다.
Janhunen(1996: 224)은 고대의 연나라는 애당초 중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원시 투르코-몽골족이 바로 초창기의 연나라를 구성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구사하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는 모두가 홍산문화와 연결이 되어있다. 따라서, 한족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말 한다면, 선비-퉁구스족은 홍산문화의 후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대륙의 앙소-용산 문화와 전혀 다른, 요서의 신석기 홍산문화 유산의 상속-전승자는 만주대륙-한반도-일본열도 전체를 포괄하는 범“선비-퉁구스” 계통의 (빗살무늬-민무늬 토기, 고인돌, 비파형 동검 등의 옛 전통을 공유하는) 문화-역사 공동체이다. 중국대륙 정복왕조 5개 중 4개가 바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선비-퉁구스”족 출신이었던 것이다.
[각주]
1.Lamb(1995: 150)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대략 기원전 1,100-800년 기간 중, 빙하기 이후 가장 온화했던 기후가 끝나고, 가뭄이 왔다. Huntington의 기후-맥박율동 이론(1907)에 따르면, 기후의 변화가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활동을 야기하는데, 건조 주기가 진행되어 목초지가 말라버리면 유목민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다니다가 다른 유목민과 싸우게 되고, 결국은 이웃한 정착 농경민족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Lattimore(1961: 331) 참조. Toynbee(1947: Vol. I-VI, 170)에 의하면, 주기적으로 건기와 습기가 반복되는데, 유목민들이 기르는 가축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으로 건조하게 되면, 유목민들은 주변의 문명사회를 공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바이칼호 주변지역으로부터 퍼져나간 종족들의 강인한 유전적 특성은, 혹한의 긴 겨울과 혹서의 짧은 여름, 강풍이 불어대는 최악의 기후조건에서 목축과, 수렵, 그리고 원시적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해 오는 과정에서 형성된, 진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뿐 아니라 몽골고원 토종 말들 또한, 자연도태-적자생존 원칙의 결과, 짧고 굵은 다리와 조밀한 털로 덥힌 몸집에, 인내력과 생존능력이 강한 유전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3.홍산문화의 영역은, 북으로는 샤랴무렌강을 넘어 몽골고원에 이르며, 동쪽으로는 요하의 하류, 그리고 남으로는 발해만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연산산맥을 넘어간다. 홍산문화의 전형적인 유적지는 주로 노합하 주변, 적봉(赤峯)시 교외의 영금강 계곡, 샤라무렌강 유역 등에 위치한다. 앙소문화 유적지에서는 홍산문화의 특징인 여자의 입상과 전신(全身)조각상, 제사의식을 행하던 공동신전(共同神殿) 등이 발견되지 않는다. Nelson (1995: 14, 25) 참조.
4.Nelson(1995: 148-9)은 하가점 하층문화는 바로 그 지역의 홍산문화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하가점 상층문화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5.원시 알타이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범 “선비-퉁구스” 역사-문화 공동체를 연결시키는 또 하나의 특이한 유물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요동지방에서 많이 발견되고, 길림성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밀집 형태로 가장 많이 발견되는 지역은 한반도이다. 북방형 고인돌은 빗살무늬 토기시대 말기쯤 나타난 것으로 보이고, 남방형 고인돌은 청동기 말기쯤 나타난 것 같으나, 이 두 형태의 고인돌은 그 분포지역이 상당히 중복된다. 고인돌의 축조는 기원전 300년경에 중단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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