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NEWS/백제·남부여·왜·신라·가야·발해

[스크랩] 황룡사 9층 탑으로 본 대륙신라

monocrop 2006. 11. 29. 00:18

황룡사 9층탑으로 본 대륙신라

황룡사와 황룡사 9층탑은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건립되었으며,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입니다만, 왜 護國佛敎의 상징인가?

 

아마 왜 그런지는 배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이 배운 사실에 맞춰서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순점을 드러내면 지금의 역사가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게 될 것입니다.

 

 

첨부이미지

▲소위 이병도 사학으로 대표되는 식민 사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경주의 황룡사터

 

皇龍寺는 新羅의 王城인 月城의 동쪽에 있었으며[龍宮(皇宮)의 남쪽],

皇龍寺는 眞興王 때 완성된 것이고 9층탑은 善德王 14 년에 완공,

皇龍寺가 완성되고, 76 년 뒤에 완성한 것이 皇龍寺 9層塔입니다.

 


분명한 것은

 

 황룡사 9층탑의 창건목적이 인접국의 침략을 막고 침략국을 진압할 목적으로

탑을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는 것입니다.

 

국사책에는 여기까지만 나옵니다. 황룡사9층탑에는,

탑의 층마다 부처님의 힘을 빌어서 혼을 내줄 나라의 이름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즉, 자신(新羅)의 힘으로 막기에는 너무 힘들어서(아니 막을 능력이 없어서?),

부처님의 힘을 빌고자 하는 마음에서 세운 것입니다.

 

지금도 무슨 국가적인 어려움이 닥치면, 護國祈禱會다 하면서 기원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세운 목적에 맞게 이 塔에는 層別로 진압하고자 하는 국가가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은  지금의 역사적 시각대로라면 너무도 황당합니다.

 

명시된 진압 대상국가를 보면,

"또 해동(海東)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지은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는 이런 말이 있다.

 

 "신라 제 27 대에는 여자가 임금이 되니 비록 올바른 도리는 있어도 위엄이

없어서 구한(九韓)이 침범하는 것이다.

 

만일 대궐 남쪽 황룡사(皇龍寺)에 九層塔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침범하는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1 층은 日本(倭), 2 층은 중화(中華), 3 층은 오월(吳越), 4 층은 탁라(托

羅), 5 층은 응유(鷹遊), 6 층은 말갈(靺鞨), 7 층은 丹國(契丹),8 층은

여적(女狄), 9 층은 예맥(穢貊).."입니다.


又海東名賢安弘撰東都成立記云 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

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三國遺史)



정벌하고 진압하고자 하는 층별에 명시된 9 개 국가중에서 신라를 침략하였거나

수교를 하였거나 얼씬거리기라도 한 나라는(우리가 배우기에) 倭, 中華(唐나라라

고 사학계에서는 설명함), 靺鞨, 穢貊뿐입니다.

 

왜(倭)는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하였으므로 1 층에 제일 먼저 기록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껏해야 이정도나 가르칩니다.

 

이것은 설명이 되니까요.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다음의 中華이기 때문에 국사시간에는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2층 중화(中華)는 무엇인가?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어서,

 

중화(隋,唐)에 도움을 청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皇宮 바로 남쪽에 탑을 세우고 부처님의 힘을 빌어 손봐줄 나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唐나라와 같은 中華의 사신이 新羅를 방문했을 때, 王宮 바로 남쪽에

있는 皇龍寺 9 층탑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마 新羅는 자주의식이 강하였다?

 

왜냐하면, 中國人 자신들이 도와주지만, 이민족(異民族)인 자신들을 저주하고

있으므로. 그러니 唐나라는 新羅를 도와야 한다..? 自主的이라서?


또한, 수 많은 침략을 한 高句麗와 百濟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일까요?

 

같은 민족은 아무리 침략을 당해도 밉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新羅는 唐나라에 구원을 청한 것일까요?

 

 


우선, 中華의 의미는 무엇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中國이라는 나라는 현대에 와서 생깁니다.

 

1911 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탄생한 中華民國이 그나마,

 

中國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최초의 국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이전의 중국(中國)이라 함은 대륙의 中原을 차지한 나라를 지칭합니다.

 

 

여러 민족과 국가가 세력을 견주고 있는데,

 

그 중원을 차지할 정도로 강성한 나라를 中國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에 中國이라고 나오지만,

國名이 中國인 나라는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中原을 차지한 나라는 그 세력이 강대하므로(당시의 경제의 중심지를 장악했다는

 것은 그만큼 국력이 강하다는 증거) 주위의 나라는 中華로 떠 받드는 것입니다.

 

中原의 광활한 평원지대(당시는 농경이 주요 산업이므로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웠다)를 차지하면 어느 나라라도 中國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中國과는 그 개념이 다릅니다.

 

지금의 中國이라면 中華人民共和國을 지칭하지만, 역사상 등장하는 中國은 中原

地方의 국가와 그 일대를 지배하는 나라를 지칭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中原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만일, 唐나라나 隋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中國 즉 中華라면 탑에 그러한 문구를

넣을 수가 있을 까요?

 

아니면, 中國의 하나일 수 있는 것은 高句麗와 百濟가 아니었을까요?

 

첨부이미지

 

 

또한, 오월(吳越)이라는 나라는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나 소홍(紹紅)

에 있던 나라로 수천리 뱃길로 떨어진 국가끼리 침략이 가능한가요?

 (越나라 남쪽을 越南이라고 하여 지금의 베트남지방입니다)

 

아니면 新羅가 역시 양자강(揚子江) 주변으로 형성된 국가가 아닐까요?

 

또한, 그 밖의 다른 나라들은 다 무엇인가요?

 

그 많은 나라와 국경선을 맞닿을 만큼 신라는 넓은 나라였던가요? 半島에서

 

과연 해석이 가능한가요?

 

 


대륙의 揚子江유역에는 명승지인 신비의 숲 계림(桂林)이 있습니다.

 

수많은 전설을 가진 신비의 숲, 하지만 이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은 이름이

아닙니다.

아마, 신문에 중국여행지를 소개한 곳에 빠짐없이 나와 있습니다.

 

지금의 慶州에 있는 나무 몇 그루밖에 없는 곳이 과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신화를 품은 鷄林인가요?

 

아니면 천문학적 현상과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신비의 숲 대륙의 桂林(鷄

林)이 朴赫居世의 신화를 품은 곳인가요?

 

 왜 대륙에는 우리의 역사를 뒷받침할 만한 유적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요?

 

예전에는 이와 같은 사실을 서로 떠들었으나, 지금은 천문과학적 증거와 기타

자연과학적인 증거는 모두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와 경희대학교의 라 대일 교수는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일식의 기록을 통해 3국의 천문현상을

관측한 위치(수도로 비정)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기록된 일식의 관측 위치는 놀랍게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안이었다.

출처 :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글쓴이 : sadko 원글보기
메모 : 황룡사9층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