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서인 위서 동이전은 '고구려 언어가 부여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양서(梁書)는 '백제 언어가 고구려 언어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양서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말이 같고 신라는 백제를 통하여 말이 통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삼국서기 어디를 봐도 삼한간에 통역이 필요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구당서 열전 동이편 백제조에 보면 "百濟國은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자리하고, 東北으로 신라에 이르고, 西로 바다를 건너 越州(중국의 산동성 복건성일대등의 중국 동해안)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 倭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 高麗(고구려)에 이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舊唐書 列傳 東夷 百濟조 원문]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부연]越州 지역에는 백제가 진출하여 세운 晉平郡이 있었고, 고구려 지역 근처에는 遼西郡이, 신라는 백제의 附傭國이었고, 倭는 백제의 담로였다.
중국의 元史는 '백제는 22담로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가장 큰 곳은 倭담로이며 그곳은 백제의 왕족과 왕자들이 다스린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언어학계나 대다수의 세계 언어학자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모두 알타이 계통 언어들이며,부여-고구려-백제-가야 언어와 일본어 사이에는 명백한 계통 관계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자 이제부터 일본측 기록과 세계 언어학자들의 저술을 중심으로 일본어의 對 한국어에의 종속성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일본서기에는 倭의 지배자들이 백제, 심지어는 신라나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을 대면했을 때에도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단 한군데도 없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인교오(允恭)일왕이 죽었을 때 (5세기 중엽), 신라왕이 조문단을 보냈는데, 그들이 "왜의 풍속언어에 익숙하지 않아(未習風俗之言語) 오해가 발생하여 문제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기록은, 당시 “풍속 언어(사투리, 당시의 유행어등)에 익숙하기만 하면” 신라와 倭人들이 편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반면, 중국 조정에 사신을 보낼 때에는 통역(譯語)이 수행한 사실을 모든 경우 일본서기가 분명하게 기록을 합니다.
일본서기 속일본기나 일본후기등에 보면 7세기 신라가 한국의 남반부를 통합한 후 거의 150여년이 지난 9세기 초까지도 풍속어(유행어나 사투리)를 제외하고는 신라와 왜국간에 말을 소통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했습니다.
Janhunen라는 언어학자는 “일본어의 궁극적인 고향은 한국, 보다 정확하게는 한반도의 남부(가야), 서부(백제), 중부(고구려)다”라고 말합니다. Horai and Omoto(1998: 40-42)와 Hudson (1999: 59-81)역시 Janhunen과 같이 일본어는 한국어가 그 기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Miller (일본어의 기원-1979)와 Levin (1981) Unger (2001)등은 도쿠가와막부 시대의 일본 학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일본어를 한국어의 지류로 봤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모리 히로미치(森博達· 교토산대) 교수는 “고대 일본어는 본래 ‘구다라어’(百濟語)였다. 그 후 중국 ‘오어’(吳語)의 영향으로 일본 고대어인 백제어에 차츰 탁음(濁音)이 붙게 되었다” (일본서기의 수수께끼를 푼-‘日本書紀の謎を解く’ 中央公論社, 1999)고 말합니다.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1919∼ ) 오사카시립대 사학과 교수는 “후나야마고분 출토 유물을 살필 때 일본 야마토 정권(4C∼7C 중엽)은 신라인지 백제인지 확정할 수 없으나 남한에 종속돼 있었다고 본다”(‘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3)고 야마토 정권이 고대 한국의 식민지였음을 들추어냅니다.
Janhunen(1996저서: 231P)은 “일본어의 궁극적인 고향은 한국, 보다 정확하게는 한반도의 남부(가야), 서부(백제), 중부(고구려)다 원 일본어(原日本語)를 사용하는 원 일본인(原日本人)은 죠몽시대가 아니라 야요이 600년(BC300 -AD300)기간 중에 형성되었다. 비록 원 일본어가 어휘나 음운적으로 죠몽계인 아이누와 말라요-폴리네시안 언어의 영향을 일부 받기는 했지만, 한국어의 가야 방언이 원 일본어의 근간이 된 것은 공리이다."라고 명백히 밝힙니다.
이어서 언어의 핵심인 어법이나 형태론 구조론등에서는 압도적 다수가 쓰던 고대 한국어의 가야계방언(즉 경상도사투리)이 중핵을 이루고 어휘나 음운(모음의 수가 적고, 이중모음등이 없는 것등의 예)은 죠몽의 유전적 비율만큼(대개 일본학자들도 죠몽계가 현대일본인에 기여한 유전적 비율을 20프로정도 내지는 30프로 미만으로 본다)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이를테면 귀-ear-를 나타내는 'みみ(mimi)'등은 죠몽계 어휘의 영향이다 , 대신 한국어 '귀'는 きく(kiku=듣다=일본어에서 이중모음 표기가 없기 때문에 한국어 귀는 단모음으로 일본에 건너 가게 되면 ki로 표기 되거나 발음된다)라는 동사로 활용된다.]
이미 고고학적으로 거듭 증명되어 이제는 공리같은 사실이지만 왜 야요이인이 한국인이며 한국인인 야요이인이 일본열도에 선주하던 아이누-말라요-폴리네시안계의 총칭인 죠몽계를 압도하고 현대일본인의 원형이 되었는 가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일본의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못미쳐서 '도이가하마'유적지가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아주 가까운 지역이지요. 제주도식 뗏목인 테우를 탄다면 해류로도 하루정도면 도착할 수 잇는 이곳에서 1953년부터 1988년사이 약 300여구의 인골이 발굴되었는데 야요이시대의 인골이라는 것이 방사성동위원소 판독결과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서향을 향해 20도각도로 매장되었는데 그 각도가 지향하는 종착점은 경상도서부지방과 전라도 동부지방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 온 고대 한국인이라는 것이지요 더구나 그곳에서 출토된 인골의 DNA가 현대한국인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인골의 구성비율이 야요이인 9대 죠몽인 1의 비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고학적 발굴은 이곳 뿐만이 아니라 규슈의 유명한 '요시노가리유적'에서도 이러한 비율로 야요이 대 죠몽의 인구구성비를 논증할만한 결과들이 발견됩니다.
이러한 고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일본의 고고학자 '고야마 슈조(小山 修三)는 BC3세기 이전에 일본에 선주하던 죠몽인인의 수를 죠몽말기 즉 야요이시대가 시작되려던 BC3세기경에 약 7만명정도로 추산했습니다. 그 넓은 일본열도에 7만이라는 것은 거의 사람이 살지 않앗다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즉 홋카이도나 홋카이도와 면한 일본동북부등에 살던 북방계 구몽골리안인 아이누 죠몽계나 규슈 남단 가고시마등지에 살던 남방계 말로요-폴리네시안 등의 죠몽계는 큐슈 북부나 혼슈중부나 기내(쿄토 나라 오사카등의 지역)지방엔 거의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죠몽말기 7만정도에 불과하던 인구가 야요이-고분-나라시대에 이르면 무려 800만으로 증가합니다. 당시의 농업생산력이나 유아사망률 이병률 및 사망률등을 감안할 때 도저히 자연적인 인구증가율로는 도달할 수 없는 수치라고 합니다. 즉 외부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유입되지 않고는 달성 불가능한 수치라는 것이지요.
코야마 슈조는 이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2300년 前 한반도에서 한계에 달한 농업생산량등으로(당시의 농업기술적 여건상 이모작등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철제 농기구등의 미완의 보급, 우경의 비보편화등에 의해 농지확보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최대의 방편은 새로운 농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경쟁에서 도태된 사람들이 터닝포인트라 할 수 있는 BC3세기 무렵의 기상이변등을 기점으로 일본열도로 밀려들기 시작했다고 분석합니다. 이는 서울대 홍원탁 교수도 같은 견해입니다.
이렇게 해서 BC3세기 부터 AD7세기까지의 1000년동안의 기간을 설정한 후, 당시의 평균적 인구증가율을 감안하여 계산해보니 이러한 폭발적인 인구증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300만명의 도래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됐고 이러한 바탕위에서 야요이인 대 죠몽인의 비율은 25대 1이라는 엄청난 수치가 나왔습니다. 즉 일본인은 한국인이다라는 언명이지요.
보수적으로 인구증가율을 최대한 높이 잡아도 150만명의 도래인이 필요했고 이 때의 야요이인대 죠몽인의 비율은 8.6대 1이었습니다.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 7세기 초까지 약 1000년간 도래한 인구는 150만명에 달했다. 7세기 초 당시 선주민과 도래인의 인구 비율은 1 대 8.6이나 된다”(‘日本人の成り立ち’ 1995)는 것이 도쿄대학 인류학과 하니와라 가즈로 교수 등의 ‘시뮬레이션’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충격적인 수치에 한동안 일본에서는 이 결과를 비밀에 붙이기도 했지요. 즉 일본인의 기원 자체가 인종적으로 한국이라는 사실이며 이 한국인인 야요이인이 쓰던 언어도 또한 고대 한국어 학술적으로는 알타이어 中 ,남부 퉁구스어인 가야어 즉 경상도사투리내지는 전남동부사투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야요이 600년간(BC3세기-AD3세기) 이렇게 한국남부인인 야요이인이 쓰던 고대한국어는 언어의 핵심인 구조론과 형태론에서 그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당시 선주하던 죠몽계(유전적으로 0.25프로에서 잘 봐줘야 20프로정도)의 유전적 스펙트럼만큼의 어휘적 음운적 보조를 받아 원일본어가 탄생하게 됩니다. 즉 한국어로부터 일본어가 분화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크 허드슨 박사는 농사가 퍼져나간 길이 바로 언어의 길이라고 말합니다(훗카이도대학 북방문화과 강사, 『정체성의 몰락 일본열도인의 기원』의 저자) "일본어의 기원은 기본적으로 야요이 문화의 기원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원일본어는 야요이인이 가져온 문화와 함께 한반도에서 동시에 도착한 것입니다. 일본어는 바로 그 시기에 한반도에서 도착한 농경집단에서 유래되어 북부, 남부, 오키나와의 순서로 확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원일본어는 고분시대 후기에 들어 다시 한번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언어학자 Unger(2001)에 의하면, "정복에 의했건, 폭 넓은 접촉에 의했건 간에, 야요이 시대로부터 고분시대로의 전환은 일본 말의 중요한 언어학적 변화를 초래했다.
즉, 원일본어인 남부퉁구스어는 북부퉁구스어[고구려-백제를 의미]와의 유사성이 커지는 것이다" 또한 Unger에 의하면, “소수의 흔히 쓰이지 않는, 혹은 어의적으로 좁은 뜻의 일본말 어휘들은 남부퉁구스어[가야를 의미] 어근(語根)들을 갖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광범한 의미로 쓰이는 유의어(類義語)들은 흔히 고구려, 백제어 즉 북부퉁구스어 어근을 가지고 있다”고 밝힙니다.
즉 가야계 세력으로부터 백제계로 정치적 실권이 넘어가는 (서울대 홍원탁 교수의 논문에는 이를 근초고왕의 외척인 진정系의 열도 정벌이라고 표현하고 이는 일본문헌상에 은유식으로 모호하게 숨겨 놓았지만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고분시대 후기에 이르러 북부퉁구스어가 남부퉁구스어인 가야계 방언 즉 경상도 사투리위에 덮어 썼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같은 알타이계 언어가 혼합되는 것이니까 본질적인 변화는 아니고 어휘의 다량유입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이를 테면 지금도 일본어에 남아 있는 접속조사 けど는(~kedo-했다캐도)는 경상도 사투리인 남부 퉁구스어의 잔영이지만 계조사こそ는(~koso-나야말로고져) 북한말 즉 북부퉁구스어의 잔영입니다. 즉 구조론적 형태론적 문법적으로는 동일한 언어인 가야어 위에 부여계 어휘 즉 사투리적 어휘들이 뒤 섞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어는 이제 야요이시대의 원 일본어에서 고분시대의 고대일본어시대를 거쳐 백제 멸망후 중세일본어를 거쳐 현대 일본어에 이른 것이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일본어의 원형질 자체가 한국어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본질에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후쿠오카대 언어학교수 시미즈 키요시교수가 밝히듯이 비교 언어학적으로 양국의 언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휘적 음운적으로 다소 변하긴 했지만 언어적 핵심인 어근에서는 전혀 변한 것이 없으며 '일본어는 한국어의 1 분파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7000개이상의 토착어근이 같다고 시미즈 키요시 교수는 밝힙니다.
그리고 양국의 언어가 달라 보이는 것은 양국이 채택하고 있는 문자체계상의 이유 즉 일본은 아직도 고대 한국인들이 전해 준 이두식 표기방식인( 일본 문자인 ‘가나’의 ‘아이우에오’(あいうえお/アイウエオ)는 고대 백제인들이 만들었다.
백제인들은 서기 6세기경부터 일본말에 맞는 글자를 하나 둘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힌 사람은 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 고대사학자 오노 스즈무(大野晉) 교수다.
우리나라 ‘이두’와 마찬가지로 한자어를 일본어에 맞춰 써 온 ‘만요가나’가 “이두의 영향을 받았다”(鄕歌及び‘吏讀の硏究’ 1929)고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일제 하 서울의 경성제대 조선어학과 오구라 신페이(1882∼1944) 교수였다.) 가나를 씁니다.
반면에 우리는 세종께서 발명하신 한글을 쓰기때문에 달라 보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 국제 공통의 발음기호나 알파벳 표기로 대조해 보면 두 말의 근사성은 금방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도 이 시리즈 연재에서 두 언어의 근사성을 비교하기 쉽게 하기 위해 알파벳 표기로 두 언어의 어근을 대조하는 방식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야요이이래 백제멸망전까지 양국의 언어가 소통했다는 것은 극히도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러다가 일본後記에 의하면 9세기초 즈음 "비로소 신라에서 왜인과 말이 통하지 않아 신라사람이 왜어를 배우러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한반도 남부 장악이후 150년간 교류가 없어지면서 이제 말이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현대사회의 빠른 정보망하에서도 하물며 북한과 한국이 언어소통에 상당한 이질감이 보이는데 과거에 150여년이면 언어는 같은 곳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서로 다르게 진화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주도 방언이 알아 들을 수가 없다고 해서 제주도말이 우리나라 언어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것처럼 일본어가 백제멸망후 1500년이상 음운이나 어휘에서 독자적 진화과정을 밟았다고 해서 일본어 자체가 한국어와 다른 언어라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1500년간 독특하게 형성된 일본어 고유의 형식과 어휘적 음운적 특성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비교언어학적 견지에서 일본어는 여전히 한국어의 아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는 만주어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만주어가 지금 사멸의 길로 접어 들어 간 소수 언어라 해서 만주어에 기반한 만주족들이 우리와 다른 인종적 문화적 정신적 고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전혀 별개의 족속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미즈교수는 만주어를 대륙한어 일본어를 열도 한어라고 명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념적 노스탤지어는 여전히 만주와 일본열도를 지향합니다.
출처 : 슈뢰딩거의 고양이
글쓴이 : 레이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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