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cient Culture & .../터키

[스크랩] 동양과 서양에 걸친 역사, 또다른 배달겨레의 후예 터키

monocrop 2009. 7. 17.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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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로그의 /정치,외교/면에 있는 [몽골지도부에서 한국-몽골 국가연합, 한국에 제시]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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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투어익스프레스

 

터어키에 대하여

 

터어키는 나라 이름이고 투르크는 종족을 지칭한다. 그러나 터어키 족과 투르크 족이라 할 때에는 종족의 기원 상 동일하나, 일반적으로 현재 터어키 공화국이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소 아시아)에 정착한 종족을 터어키 족, 중앙 아시아에 거주했던 종족을 투르크 족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중앙 아시아 터어키 족을 통칭하는 투르크 족들은 알타이 산맥의 동남부 지역을 근거로 B.C. 2000년 무렵부터 아시아 대륙의 동북부 초원 지대에서 활동해 왔다. 역사 시대 이래 투르크 족은 중국 문헌에 흉노, 돌궐, 위구르로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는 터어키 공화국 이외에 중국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의 주요 주민이다.

    한국인이 터어키란 나라를 알게 되는 것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경우를 통해서이다. 터어키가 한국전에 참전한 UN 16개 국의 하나라는 것, 중학교 때 국어 시간에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는데 여기에는 몽고어와 터어키어가 들어간다고 배워서, 세계사 수업 시간에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오스트리아, 터어키가 한편이 되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싸웠다는 사실 등을 통해서이다.
  현재 터어키 공화국은 유럽 발칸 반도의 극히 일부와 소아시아를 영토로 하고 있으며 면적은 약 78만 평방 킬로미터로 남한의 8배 크기이다. 한국은 아시아의 동쪽 끝에 터어키는 아시아의 서쪽 끝에 있다. 그러나 터어키는 의외로 한국과 인연이 있는 나라다.
  고대 중국의 한나라를 굴복시켰던 흉노가 투르크 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이다. 흉노의 동쪽에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었으며 한나라의 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한 이유 중의 하나가 고조선이 흉노와 동맹을 맺는 것을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6세기 중엽에 일어난 돌궐은 고구려와 수십년 간 상쟁하였으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우호 관계를 맺었다. 수 양제는 607년 돌궐을 방문했다가 고구려 사신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 침략을 결심하였다. 동돌궐이 630년 멸망하자 고구려는 단독으로 당과 상대해야 했다. 고구려 유민이 699년 무렵 발해 건국에 성공한 것도 683년 부활한 돌궐이 끊임없이 당을 침략하여 당이 만주 지배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큰 이유이다.
   840년 위구르 제국의 멸망 이후 투르크 족들의 일부는 중앙 아시아를 떠나 서진하였고 이들은 서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서 셀주크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로 대표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서양에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을 애써 무시하는 데 이러한 태도는 일본이 한국에게 받은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장에서는 역사상 16개 제국과 100개가 넘는 소국가를 건설한 투르크 족의 활동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흉노와 한나라

 

터어키 계통으로 역사에 처음으로 위세를 떨친 종족은 흉노족이었다. 지금의 몽고 초원 지대에서 세워진 이 유목국가는 중국을 다시 통일한 한나라를 압도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를 해하 전투에서 격파하여 통일을 이룬 것이 B.C. 202년의 일이다. 그 다음 해인 B.C. 201년 흉노와 한나라는 격돌했다.
  유방은 대군을 직접 이끌고 북진하다가 흉노에 대패하고 포위되었다. 유방은 흉노의 왕비에게 뇌물을 주어 포위를 풀게 하였다. 군사적 열세를 깨달은 유방은 굴욕적인 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흉노의 한나라에 대한 우위는 흉노의 왕 묵특 선우가 유방이 죽어 과부가 된 여후에게 보낸 서한에서 잘 드러난다. 한나라에서 망언의 편지라 규정한 이 서신의 내용은 이렇다.

  (나) 외로운 군주는 소택(沼澤) 가운데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컸으니 자주 변경에 이르러 중국에서 노닐고 싶었노라. 폐하도 홀로 되었고 독수공방 외로우니 두 군주가 모두 즐겁지 않은 것 같소. 스스로 즐거워할 방법이 없으니 (우리 서로) 갖고 있는 것으로 갖지 않은 것을 바꾸어 봄이 어떻겠소.

  청혼의 편지지만 내용이 너무 무례하였다. 한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번쾌가 10만 군사만 주면 당장에 흉노를 멸하겠다고 했으나 군사적 열세는 자명한 것이었다. 결국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선우께서 저희 나라를 잊지 않고 글을 내려 주시니 우리는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연로하고 기력도 쇠하였으며 머리와 이가 모두 빠졌고 걷기도 힘듭니다. 선우께서는 과히 허물치 마시고 제게 그같이 힘든 일을 요구하지 말아 주십시오.저희에게 죄가 없으니 마땅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신 수레 2대와 말 2짝을 보내 드리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화친조약에도 불구하고 흉노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한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그 다음에는 반드시 화친 조약이 맺어졌는데 결국 흉노의 침공은 조공 물자를 더 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 굴욕적인 상황은 한 무제가 즉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무제는 오랜 평화기간 쌓아 온 재부를 동원하여 10년에 걸친 흉노원정을 단행하였다. B.C. 129~119년에 걸친 원정에서 흉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나 승자와 패자가 분명히 갈린 것은 아니었다. 많은 수의 흉노인들이 사상당하고 포로로 잡혔으며 일부 투항하기도 하였으나 한나라가 공격한 만큼 흉노도 공격해왔다. 장기전이 됨에 따라 한나라의 재정도 파탄 지경에 이르러 원정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의 몰락은 예기치 못하게 내분에서 왔다. B.C. 58년 제 1차 분열이 발생했다. 선우 자리를 놓고 5명이 겨루었다. 끝까지 남은 경쟁자는 지지 선우와 호한야 선우였다. 지지 선우에게 패배한 호한야 선우가 B.C. 31년에 한에 투항하였다. 이때 흉노의 일부가 서방으로 이주하였고 유럽에서 훈족으로 나타난다. A.D. 375년 훈족이 동고트족을 치자 서고트족이 로마 영내로 이주했다. 이것이 게르만족 이동의 시작이었다. 훈족은 아틸라 시절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아틸라 사후 급속히 해체되었다.
  2차 분열은 A.D. 46년에 있었다. 계승분쟁과 부족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부족의 일부가 고비 사막 남쪽에서 자립하여 흉노는 남북으로 갈라졌다. 이에 1차 분열 이후부터 한에 열세를 면치 못하던 흉노는 더욱 한에 복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A.D. 87년 북흉노는 선비족의 침입에 와해되었고 남흉노는 216년 소멸되었다. 그러나 정치체제로서 소멸된 것이지 부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흉노를 비롯한 중국 북방의 다섯 유목 부족은 3세가 말에 중국으로 이주하였으니 이른바 5호의 이동이다. 흉노 계통의 유총은 사마염이 건국한 진을 멸망시켰다(316).
  5호 16국 중 흉노가 건설한 국가는 다수였으나 선비족의 세운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하였다. 이후 돌궐이 터어키 계통 국가의 맥을 잇게 된다.

 

돌궐의 건국설화

 

돌궐 민족의 기원은 대다수 북방 민족의 건국 설화와 같이 신비와 전설로 시작된다. 돌궐의 기원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한다.

  돌궐은 흉노의 별종이다. 성(姓)은 아쉬나(Ashina, 阿史那)였다. 독립된 부락을 이루고 살았으나, 이웃 나라의 공격을 받아 전 부족이 몰살당하였고 한 사내 아이가 살아 남았으니 열 살이었다. 적이 그가 어리므로 차마 죽이지 못하고 발을 잘라 근처 풀밭에 버렸다. 그 곳의 암이리가 고기를 먹여 그를 길렀다. 그가 자라서 암이리와 교합하여 이리가 수태하게 되었다.
  이 때 적의 왕이 소년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사람을 보내 그를 죽였다. 사자(使者)가 보니 그 옆에 이리 한 마리가 있어 같이 죽이려고 하니, 이리는 재빨리 도망하여 고창국(高昌國)의 베이샨(北山)으로 갔다. 산 속에 동굴이 하나 있어 그 곳에 기거하니, 굴 안은 평지에 풀이 무성하였다. 또 주위가 수백리이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리는 동굴에 숨어 아들 10명을 낳았다. 열 아들이 자라 밖으로 나가 아내를 얻고 자손을 낳으니, 제 각기 10성姓을 가졌다.
  아쉬나는 그 중의 한 성이다. 자손이 차츰 번성하여 수백 가구를 이루었다. 몇 세대가 지난 후 모두 함께 그 동굴을 나와 연연의 신하가 되었다. 알타이 산(金山) 양지바른 쪽에 자리잡고 연연의 철공(鐵工)으로 일했다. 알타이 산의 모양이 투구와 비슷하고 그 속어(俗語)에 투구를 '돌궐(突厥 Turk)'이라 하므로 이에 따라 돌궐이라 불려졌다.

  위의 기록처럼 돌궐은 흉노의 후예로서 종족 기원이 이리와 연관되어 있다(로마의 건국 설화에도 이리가 나온다). 이리가 나오는 설화는 오래 전 아시아 흉노족에도 발견되기 때문에 돌궐과 흉노간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이 설화는 희미하나마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아쉬나 부족이 한 소년을 제외하고 전멸당했다는 내용은 흉노가 세운 5호 16국의 하나인 북량(北凉, 397~439)이 북위에게 멸망당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돌궐은 북량의 영역이었던 감숙 지방에 있던 작은 부족이었다. 439년 북위가 북량을 멸하자 돌궐의 수령이 부족 500가를 이끌고 유연에 투항하여 알타이 산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유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였던 특수집단이었다. 돌궐의 건국설화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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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국의 흥기와 분열

 

현재의 몽고 초원에 거주했던 유목민은 옛부터 늘 중국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중국측이 남겨 놓았고 유목민 스스로 남긴 기록은 매우 적다.
  B. C. 221년 중국이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진秦에 의해 통일되었을 무렵, 흉노족이 유목국가를 건설했다. 시황제가 장군 몽염을 보내어 격퇴시켰으나 곧 세력을 회복하였고, 진을 이은 한나라는 무력의 열세를 어찌할 수 없어 조공으로 평화를 유지했다. 한 무제(武帝, 재위 B. C. 140~87)의 10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으로도 이들을 뿌리뽑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분으로 2차에 걸쳐 흉노가 분열하여 중국은 한동안 우월한 입장을 누렸다. A. D. 3세기에 들어와 크게 다섯 계통의 유목민 집단이 중국으로 이주, 이른바 5호 16국 시대가 열렸다. 이중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강북을 통일하였고(439) 강남 지역은 한족(漢族)이 세운 여러 왕조가 명맥을 이었다. 이러한 남북 분열 상황으로 후세에 이때를 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중국의 남복조 시대에는 몽고 계통의 유목국가인 유연(柔然, 또는 茹茹로도 표기)이 북조를 위협하였다. 6세기 중반 유연에 신속(臣屬)한 유목부족의 하나였던 투르크 계통의 돌궐(突厥)이 흥기, 유연을 격파하고(552) 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한자 표기인 돌궐의 정식 명칭은 돌궐 비문에 따르면 '�-튀르크(Kok Turk)' 로 하늘(Kok) 에 속한 신성한 투르크란 의미를 가진다. 이로부터 투르크가 정식 종족명으로, 또한 국명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지구상의 다양한 투르크 계 종족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돌궐 제국의 창건자는 부민(Bumin, 土門)으로 그가 돌궐 부족 연맹의 지도자로 부상하고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시기는 535년이다.545년 중국의 서위(西魏)와 동맹 관계를 맺은 그는 유연에 대해 유연의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이는 유연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의사였다. 유연이 거절하자 부민은 서위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552년초 서위와 연합하여 유연을 멸망시켰다. 이때 부민은 일 카간(Il- Qagan, 伊利可汗) 이란 호칭을 쓰면서 초원의 지배자임을 공언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사망하였다.
  일 카간의 사후 관습대로 형제와 자식들에게 제국이 분배되었다. 돌궐 제국의 서부 지역은 일 카간과 함께 정복전에 참가해 공이 큰 동생 이스테미(Istemi, 室點密)가 계속 통치하였다.동부 지역의 통치권은 일 카간의 아들 콜로(Kolo, 科羅)가 승계했다가 일찍 죽어 아우인 무한(Mukhan, 木杆,)이 553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했다.
  돌궐 서부 지역의 이스테미는 카간 대신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 칭호를 사용하여 동부 지역에 대한 하위 개념을 분명히 했다. 이스테미 야브구는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했으며 동로마와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와 교류하였다. 에프탈리테 부족이 실크 로드의 중개 무역을 장악하자 이스테미 야브구는 사산 왕조와 합동하여 에프탈리테를 멸하였다(557). 이 지역은 아무 강(지금의 Oxus 강)을 경계로 분할되었다.

돌궐 비문의 하나인 퀼 테긴 카간의 비문에는 돌궐의 초창기 정복 활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로 푸른 하늘과 아래로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 둘 사이에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들 위에는 나의 조상 부민 카간과 이스테미 카간이 보위에 앉았다. 보위에 앉아서 돌궐족의 국법을 잡아 주었고, 세워주었다.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하고 힘있는 자들을 무릅을 꿇게 하였다. 동쪽으로는 카디르칸(흥안령 산맥) 까지 서쪽으로는 철 문(鐵門 ; 트란스옥사니아) 까지 (부족민들을) 자리잡게 하였다. 두 (경계) 사이에서 아무런 조직도 없이 (살았던) � 투르크(Kok Turk) 인들을 수습하여 그렇게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한 군주들이었다. 용감한 군주들이었다. 지휘관들도 정녕 현명하였다. 정녕 용감하였다. 지배층도 부족민들과 분명 평화와 조화 속에 있었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그렇게 잘 다스리었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동부 지역의 무한 카간은 555년 유연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고 그 부근의 여러 유목 부족을 병합하였다. 더 나아가 동쪽의 거란을 복속시키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新城)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高紇)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陽原王 7年)

  『삼국사기』에 나오는 삼국의 대외관계는 대부분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과 중국의 관계는 모두 조공관계로 묘사되었다. 이에 비해 돌궐과의 충돌을 전하는 이 기록은 중국 사서에 나오지 않는 고유 기록이다. 이 해는 551년에 해당하며 고구려가 신라·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 유역을 상실한 해이다. 그러나 돌궐의 성장과정을 추적해 보면 551년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551년 이후에 있었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은 중국의 기록에 단편적으로 나온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는 말갈 부족과 더불어 돌궐을 격파했다. 돌궐의 고구려 침공은 처음에는 돌궐이 유연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듯 하다. 6세기 말~7세기 초 활동하였던 동로마 역사가 시모카테스(Simokattes)는 유연의 잔여 세력이 중국(북제)으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기어 동쪽의 Moukri(고구려)로 갔다고 기록했다. 그는 Moukri는 "중국에 인접해 있다. Moukri인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고 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돌궐과 비단을 매개로 교류하였던 관계로 돌궐을 통해 고구려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고, 이로 인해 동로마 문헌에 이러한 기록이 남았다 (568년 돌궐의 사신이 비잔티움에 도착한 것이 최초의 접촉이었다).
  '고구려인들은 … 매일매일의 신체단련으로 그들의 투지는 매우 높았다' 라는 동로마의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인『구당서舊唐書』에 나오는 기록과 일치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 堂이라 부른다.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구당서舊唐書』「동이 열전」고구려)

  고구려로 이주한 유연으로 말미암아 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전단(戰端)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과 말갈족을 복속시키려는 과정에서 충돌하여 오랬동안 적대국으로 지냈다. 중국 역사서에서 단편적으로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 왕년에 이계찰(利稽察)이 고구려·말갈에 크게 격파되고 … (隋書, 突厥傳)

  이 기록은 돌궐이 고보녕(高保寧 ; 북제 말기에 영주자사가 되었고, 북제가 멸망하자 북주와 그 뒤를 이은 수에 투항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세력으로 있었음)과 연합하여 581~582년에 수를 침입, 수군을 격파하자 이에 격분한 수 문제 양견이 582년에 내린 조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계찰(利稽察)에서의 '察'은 돌궐의 관직명 '샤드(Shad)'를 뜻하며 設, 殺, 煞로도 표기된다. 돌궐 제일 제국에는 28관등이 있었는데 Shad는 야브구(Yabgu, 葉護 ; 제 2왕)다음의 제 2관등이다. 이 자리는 돌궐 왕족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그 직능은 '別部領兵者' 로 부족을 거느리면서 부족민을 지배하였다. 고구려가 돌궐의 이계찰을 격파한 것은 돌궐의 동진을 성공적으로 막았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북위는 534년 동서로 분열되고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각각 북제(北齊, 550년 건국)와 북주(北周, 557년 건국)로 이어졌다. 이러한 중국 북조의 내분기에 건국한 돌궐은 유연과 달리 북조에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북위에 눌렸던 유연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잠시동안이나마 우위를 누렸다).
  돌궐은 건국 무렵부터 서위와 동맹관계였고 서위를 계승한 북주와도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돌궐은 늘 창구를 열어 놓았고 돌궐을 중립화 내지 자기편으로 만드려는 북제의 헌상을 받았다. 이에 따라 북주도 부지런히 헌상을 하였고 북주의 태조는 무한 카간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는 굴욕을 자청하였다(565). 당시의 외교 관례상 외국 공주를 후궁이 아닌 황후(皇后)로 영입하는 것은 하위 신분임을 공식 천명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연이 강성할 때 처음에는 서위가, 나중에는 동위가 유연의 공주를 각각 황후로 맞아들인 것은 유연의 세력을 이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북주와 북제는 서로 돌궐 공주를 맞아들이려 다투다가 북주가 승리를 거두었다. 분열로 열세에 놓인 중원 국가들이 스스로 굴욕을 자청한 셈이다.

  돌궐 제국의 위세를 떨친 무한 카간은 572년 사망했다. 그의 공적과 당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은 돌궐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사방에 군대를 보내어 모든 종족을 복속시키고, 머리를 가진 자는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릅을 가진 자는 무릅을 꿇게 하셨도다. 앞(동)으로는 킨칸 산맥에, 뒤(서)로는 철문(鐵門) 에 이르기까지 돌궐 민족이 지배하는 돌궐 국가가 되었다. 그는 현명한 군주였다. 용감한 군주였다. 신하들과 귀족, 백성들도 모두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 외투켄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사방의 국가와 종족이 모두 슬퍼하며 조문 사절을 보냈다. 중국, 티벳, 비잔틴, 아바르(유연), 거란 그리고 고구려 등등 ―

  무한 카간을 이어 그의 동생인 타파르(Tapar, 陀鉢, 재위 572~581)가 카간이 되었다. 그의 즉위후에도 한동안 돌궐의 중국의 북조에 대한 우위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주서周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당시 제나라와 교전할 때라 해마다 군대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매번 돌궐과 연결하여 외원으로 삼았다. …… 이래 그 나라는 부강하여 중국을 능멸하려는 뜻이 있었다. 조정은 화친을 맺고도 해마다 십만필을 주었으며 수도에 있는 돌궐인을 모두 후히 대접하니 비단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호화스럽게) 사는 자가 수천명이었다. 제나라는 그들의 침략이 두려워 역시 나라 살림을 기울여 증물贈物을 보냈다. 타파르(陀鉢)는 더욱 교만해져 그 부하들을 거느리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즉 "우리에게 남쪽의 효순孝順한 두 아이 놈(북주와 북제)만 있다면 무었 때문에 재물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577년 북주가 북제를 합병하여 북중국이 통일되었다. 돌궐은 즉각 북제 부흥을 내걸고 북주를 공격하였다. 아직도 돌궐의 군사적 우위는 여전했으나 곧 이어 유목 국가에서 일어나기 쉬운 국가 분열이 일어났다.일 카간의 동생으로 돌궐 서부를 다스리던 이스테미 야브구는 576년 사망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타르두(Tardu, 達頭, 재위 576~603)는 동부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한 아버지와 달리 완전 독립을 추구했다. 우선 야브구 위에 오른 직후 타파르 카간의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카간으로 행동했다.
  581년은 중국과 돌궐에 큰 전환점이 된다. 이 해에 동돌궐에서는 타파르 카간이 사망하고 계승분쟁이 일어났으며, 북주에서는 외척 양견이 제위를 찬탈하여 수를 건국하였다. 카간 자리를 놓고 타파르 카간의 아들 안로(Anro, 菴羅)와 조카인 탈로핀(Talopien, 大邏便)이 경쟁하였다.탈로핀은 처음에 타파르 카간에 의해 카간으로 추천되었으나 돌궐의 귀족 회의 (Toy)는 그의 모친이 돌궐계가 아니라는 이유로 카간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안로가 즉위했으나 이번에는 탈로핀 측이 강력히 반발, 결국 타협하여 콜로 카간의 아들인 이쉬바라(Ishbara, 始波羅, 재위 581~587)에게 양위하였다.
  이쉬바라는 안로에게 제 2 카간 칭호를, 다로빈에게는 아파 카간(Apa Qagan) 이란 칭호를 주어 단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다로빈은 서부 돌궐의 타르두에게 가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이쉬바라의 하툰(可敦 ; 황후)은 북주의 천금(千金) 공주였는데 가문의 복수를 주장하는 그녀의 영향력으로 돌궐은 수와 교전하게 되었다.
  돌궐과의 전쟁은 수의 창업주 수 문제 양견(재위 581~604)에게 큰 위협이었으므로 돌궐 의 분열시키려 즉시 돌궐 서부의 타르두에게 접근하여 돌궐 카간으로 인정하였다. 이쉬바라카간은 중국과 돌궐 서부를 적으로 상대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쉬바라는 우선 자신의 통치 영역에 있는 다로빈의 근거지를 초토화시키고 추종 세력을 소탕하였다. 결국 582년 타르두가 동부 돌궐의 카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여 돌궐은 공식적으로 동서로 양분되었다. 돌궐은 분열되고 북중국은 통일되니 돌궐, 특히 동돌궐의 열세는 분명해졌다.

  『주서(周書)』

  북주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당나라의 영호덕분(令狐德 ) 등이 636년 편찬하였다. 본기 8권, 열전 42권으로 모두 50권이다. 지志와 표表는 없다. 고구려의 관등 조직을 위시한 문화 사회면에서 특이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이쉬바라 카간이 서돌궐로 망명한 다로빈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왕족과 지휘관들의 심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들은 대거 수에 망명해 보호를 구했다. 584년 무렵 이쉬바라는 서돌궐의 공격을 피해 고비 사막을 넘어 수의 영내로 들어갔다. 이에 중국과 동돌궐의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수의 우위는 양견이 돌궐에 파견한 사신 우경칙(虞慶則)과 장손성(長孫晟)이 돌궐 조정에서 보여준 행동과 발언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이들은 돌궐 카간이 중국 황제와 부자 관계라 못박고 카간을 수의 신하라 규정하고 돌아갔다. 더 나아가 수 문제 양견은 한자의 사용과 중국식 의복 착용을 요구했다. 이쉬바라는 585년에 보낸 답신에서 이를 거절했으나 수에 복속된 동돌궐의 처지가 역력히 드러난다.

  "그대의 신하로 조공을 바치고 명마를 드리리다. 우리 언어를 버리고 중국식 의관을 차리고, 중국 관습을 취하기는 어렵습니다. 돌궐의 관습은 우리의 심장이기에 우리 백성이 매우 민감하기 때문임을 헤아리시오."

  587년 이쉬바라 카간이 사망하고 동생, 막하(莫何)가 카간으로 즉위했다. 막하는 다로빈을 생포하여 참수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고 이쉬바라의 아들 툴란(Tulan, 都藍, 재위 587~600)이 카간이 되었다. 이에 막하 카간의 아들인 계민이 반발하였다.
  수는 무력으로 돌궐을 제압한 것이 아니었다. 유목 국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내분에 개입, 양쪽을 번갈아 편들어 통일을 방해하고 결국은 쇠약해진 양쪽 모두를 복속시켰다. 599년 툴란 카간이 반기를 든 계민을 몰아냈으나 수 문제가 계민을 중국 변경인 오르도스 지방으로 맞아들이고 지원하였다. 결국 툴란이 사망하자 계민이 동돌궐의 카간이 되었고 수에 순종하였다.
  서돌궐의 타르두는 601년 수를 침공, 수도 장안을 위협했으나 중국 사신 장손성의 책략에 말려들어 대패하였다. 서돌궐은 603년 철륵 부족의 반란을 계기로 분열되었다. 타르두는 모든 기반을 잃고 청해(靑海) 지역으로 은신하였다가 사라졌다. 이후 서돌궐은 강력한 카간이 등장하지 못하였고 수에 신종하였다.
  강성한 북방 유목민족은 언제나 중국을 견제해 왔으므로 고구려의 안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돌궐이 수에 복속되자, 고구려는 단독으로 중국을 통일한 수제국을 상대해야 했다.
  돌궐이 중국에 우월한 지위를 상실하면서 고구려와 우호관계가 형성되었다.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대략 580년대 중반이후일 것이다. 고구려와 돌궐의 대규모 교역을 보여주는 중국측의 기록이 있다.

거란이 영주(營州)를 침구하니, 통사알자(通事謁者) 위운기(韋雲起)에게 조(詔)를 내려 돌궐병을 동원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계민 카간이 2만의 기병을 일으켜 (위)운기의 처분을 따랐다. … 거란이 본래 돌궐을 섬겼기 때문에 돌궐을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다. 운기가 거란의 경내에 들어간 뒤, 돌궐을 시켜 유성(柳城)에 가 고(구)려와 교역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선전하게 하고 감히 이 사실을 누설하는 자는 참하였다. 거란이 이를 믿고 방비를 하지 않았다. 거란의 영(營)에서 50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돌궐병이) 말을 달려 거란을 공격하여 그 남녀 4만 구를 모두 노획하였다.
  (資治通鑑 권 180)

  이것은 수가 복속하고 있던 계민 카간 휘하의 돌궐병사를 이용하여 거란을 속여, 격파하했다는 내용으로 605년의 일이다. 거란족은 600년 경에는 10부를 형성하는 등 세력이 커져 수 양제 대업 5년(605)에는 영주를 침입하기까지 하였다(고구려와 돌궐의 지배를 벗어나 중국에 귀부하였다는 중국 측의 기록은 다분히 수식적인 것으로 실제로 중국의 지배가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같은 거란의 강성을 도외시할 수 없었던 수의 양제는 복속 중인 동돌궐을 사주하여 공격하게 한 것이다.
  유성(柳城) 지역은 오늘날의 조양으로 582년 수가 고보녕을 격파한 이후에는 명목상으로 수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지역은 6세기 후반 이래 중국인과 동북아 여러 민족사이의 교역 중심지이며 교통의 요지였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때(영양왕 16년, 605)에는 고구려와 돌궐간의 대규모 교역이 거란족에게 자연스럽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2만 기에 달하는 대규모 병단의 이동에도 불구하고 거란이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돌궐의 교역은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고 양국 관계의 긴밀한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가 수와의 피할 수 없는 전쟁에서 돌궐과의 동맹을 모색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또한 이 때문에 수와의 전쟁이 촉발되었다.
  영양왕 18년(607)에 수의 양제는 친히 50만 군대와 군마 1만필을 거느리고 만리장성 이북지역을 순행하였다. 수나라의 위세를 과시하는 행사였다. 이때 수천명을 넉넉히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이동식 궁전인 관풍행전(觀風行殿)과 둘레가 4km나 되는 조립식 성인 육합성(六合城)을 만들었다.
  양제는 유림(楡林) 행궁에서 돌궐의 계민(Ke-Min, 啓民, 재위 600~609) 카간을 불러 들였다. 계민은 의성공주(義成公主)와 같이 행궁까지 나와 양제를 알현했다(585년 이후 수와 돌궐은 장인-사위 관계가 되었다). 양제는 관풍행전에서 계민 카간과 그 부하 일행을 맞이했다. 양제는 연회를 베풀면서 산악(散樂)까지 연주했다.
  양제는 다시 유림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가서 계민 카간의 장막까지 방문했다. 계민은 술잔을 올려 축수해 마지 않았다. 돌궐의 귀족 수백명도 양제 앞에 무릅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중국 황제의 위엄을 떨친 셈이다.

양제는 더없이 기뻐하며 시를 읊었다.

  호한야 선우가 머리를 숙여 오고 呼韓頓 至
  도기도 발굽을 잇대어 속속 귀순하도다. 屠耆接踵來
  중국 천자의 위엄이 어떠하냐 何如漢天子
  이제야 선우대에 올랐구나 空上單于臺

  진의 뒤를 이었던 한나라는 건국초부터 오래동안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에 무력의 열세를 면치 못하고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한 무제(재위 B. C. 140~87)가 이 치욕을 씻으려 10년간에 걸쳐 원정을 하였으나 흉노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는 흉노의 내분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호한야(呼韓邪) 선우는 B. C. 60년에 병사한 흉노의 허려권거(虛閭權渠) 선우의 아들이다. 이때 흉노는 내분이 일어나 각 군장들이 자립하여 제각기 선우라 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호한야 선우를 비롯 모두 5명이 선우가 되려 쟁패했다. 호한야 선우가 분열을 통일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였다. 형이 질지( 支) 선우로 독립하여 세력이 커졌다. 질지 선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호한야 선우는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宣帝, 재위 B. C. 73~49)에게 투항하여 신하가 되었다. 중국으로서는 오랜 굴욕을 씻는 순간이었다.
  흉노는 군주를 선우라 했고, 그 밑에는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 좌녹려왕·우녹려왕 등의 관직이 있었다. 도기(屠耆)는 흉노어로 현명하다는 뜻으로 흉노의 태자는 즉위하기 전에는 좌도기왕 즉, 좌현왕 직위에 있었다. 양제의 시에 나오는 도기는 좌현왕과 우현왕을 뜻한다.

  양제가 수의 위엄을 떨치려 온 이때에 고구려 사신도 와 있었다. 계민 카간이 숨기지 못하고 고구려의 사신도 있다고 하자 양제는 매우 못마땅 한 듯 옆에 있는 배구(裵矩)에게 물었다. 배구는 대답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옵니다. 주 시대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고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진이 그 뒤를 계승하여 요동을 다스렸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니 전대의 황제 때 정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왕 (양)량이 불초하여 출사하였어도 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당대에는 어찌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이제 고구려의 사신이 여기에 온 것을 보면 필경 돌궐과 연합할 듯 합니다. 그러하오니 고구려도 입조하도록 위협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양제는 배구의 말을 쫓아 즉시 우홍(牛弘)으로 하여금 고구려 사신에게 조서를 내리게 했다.

"짐은 계민가한이 성심으로 나라를 받들고 있으므로 친히 여기까지 왔노라. 내년에는 꼭 탁군(琢郡 : 현재의 북경)근처로 가겠노라. 너희가 돌아가는 날로 너희의 왕에게 전하여 일찍 내조하여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도록 하라. 그러면 너의 나라도 계민가한과 같이 대우하겠노라. 만일 듣지 않으면 계민가한과 더불어 너희 땅에 순행하겠노라."

  고구려와 돌궐의 동맹은 통일 중국의 기반을 흔들 가능성이 있었다. 양제는 계민 카간을 방문한 자리에서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였다. 전쟁 준비에 5년이 걸렸다. 대운하 건설도 전쟁준비의 일환이었다. 양제는 605~610년 사이에 통제거(通濟渠 ; 황하와 회수〈淮水〉를 연결), 한구( 溝 ; 회수와 양자강을 연결), 영제거(永濟渠 ; 황하와 탁군을 연결), 강남하(江南河 ; 양자강에서 항주〈杭州〉를 연결) 등 대운하를 연이어 완성하였다. 또한 통제거와 황하의 교차점에서 다시 수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낙양과 장안으로 교통로가 정비되었다. 이리하여 항주로부터 탁군에 이르는 운하가 이루어져 강남의 물자가 용이하게 탁군으로 수송되었으며, 양자강 하류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도인 장안과 낙양으로 직송할 수 있게 되었다.
  돌궐 사정을 보면 계민카간은 609년에 죽고 아들 시피(Shi-Pi, 始畢, 재위 609~619)가 카간이 되었다. 시피 카간은 처음 5~6년간 주변 군소 종족에 대한 공략을 시도하여 영토를 아무르 강에서 티베트까지 넓혔다(615).

  대업 11년(615) 8월 양제는 북쪽 변경을 순행하고 있었다. 시피카간은 대규모로 기병을 동원하여 기습했다. 양제는 안문(雁門)으로 피신했다. 제왕(齊王) 양간(楊 )이 후군을 거느리고 안문의 속현인 곽현을 지키고 있었다.안문 지역에는 41개의 성이 있었는데 이 중 39개의 성이 돌궐군에게 함락되고 오직 안문성과 곽현성(藿縣城)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양제가 안문성으로 들어가자 돌궐군이 포위 공격하였다. 당시 성안에는 군사와 민간인 합쳐 15만 명이 있었으며 식량은 겨우 20일 분이 있었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성안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했다. 돌궐군이 맹렬히 공격하여 화살이 양제가 앉아 있는 앞에까지 날아 왔다. 양제 자신도 크게 두려워하여 막내 아들인 9세의 양고(楊 )를 안고 울어서 눈이 온통 진무를 정도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한 것은 고구려 원정을 포기하겠다는 황제의 선언이었다.
  이 난국에 신하들의 건의가 잇달았다. 우선 좌위대장군 우문술이 양제에게 정예기병 수천 명을 선발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갈 것을 건의했다. 이에 소위蘇威가 반대하였다.
  『성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장기이며, 경무장한 기병으로 충돌하는 것은 저들의 장기입니다. 폐하께서는 만승천자의 존귀하신 몸이온데, 어찌 경솔히 움직이신단 말입니까』
  고구려와의 전쟁을 극히 두려워하는 민심을 꿰뚫고 있는 번자개樊子蓋가 건의한다.

 

『폐하께서는 이대로 견고한 성을 점거하여 저들의 예기(銳氣)를 소진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사방에 있는 군대를 징발하여 들어와 구원하게 하시고, 친히 장병들을 위로하며 다시는 요동 정벌을 않겠다고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스스로 분발할 것입니다.』
  소우(蕭瑀)도 양제에게 간한다.
  『지금 장병들의 뜻은 폐하께서 돌궐의 화를 면한 다음에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종사하게 할 것이라 생각하여 힘을 다해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분명한 명령을 내리시어 고구려의 죄를 용서하고 오로지 돌궐만을 토벌하겠다고 하시면, 인심이 모두 안정되어 각자 힘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양제는 이에 장병들에게 나아가 고구려 원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여 사기가 올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전하였다. 또한 양제를 구하려는 부대들이 몰려오자 시피카간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돌궐 제국의 와해

 

계민 카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시피(Shi-Pi, 始畢, 재위 609~619)가 카간이 되었다. 시피 카간은 돌궐적인 요소를 부활하고 수의 간섭을 적절히 거부하였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준비와 원정, 그리고 참패가 돌궐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였다. 그는 재위 5~6년간 주변 군소 종족을 공략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수에 반란이 일어나자 과거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하여 수를 공격하였다.
  수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동돌궐의 내분 조장을 위해 시피 카간의 동생인 치키(Chi-Ki)에게 카간 자리를 제의하는 등의 술책을 썼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617년 시피 카간은 돌궐로 피신한 수의 반란 세력 양사도(梁師都)를 중국 카간으로 책봉하고, 마읍馬邑에 자리잡은 장군 유무주(劉武周)를 정양定陽 카간으로 임명하여 수를 치게 했다. 수의 반란 세력 중 북방에 위치한 자들은 하나같이 돌궐에 칭신하였는데 당 고조 이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피 카간은 반란 세력을 지원하면서도 수 양제에게 사신을 계속 보내 만일의 사태 반전에도 대비하였다.
  당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은 628년이 되어서야 여타 세력을 모두 진압하고 중국을 완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동돌궐은 수에게 잃었던 땅을 거의 회복했다. 619년에는 당의 수도인 장안을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도중에 태원(太原)에서 시피 카간이 갑자기 사망하여 기수를 돌려 철군하였다. 그의 아우 출로(Chulo, 處羅, 재위 619~621)가 카간이 되었으나 그마저 곧 사망하였다. 뒤를 이어 출로 카간의 아우 실리( 利, 재위 621~630)가 동돌궐의 마지막 카간이 되었다.
  실리 카간이 통치하는 기간에 전체적인 주변정세는 당에게 매우 불리하였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당이 강력한 유목국가를 제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실리 카간은 이러한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한 군주였다.
  태종이 즉위한 626년에 동돌궐의 실리 카간은 다시 한번 장안으로 기마 원정대를 이끌고 왔다. 626년 9월 23일 장안의 북문에 있는 편교 앞에 10만의 동돌궐 기병이 나타났다. 실리 카간은 수도를 약탈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조공을 요구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중국이 유목국가를 제압할 수 있는 계기는 유목국가의 내분에서 비롯된다. 627년 돌궐 치하의 여러 종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설연타(薛延陀), 바이르쿠, 위구르 부족들의 반란이 잇달았고 특히 설연타(薛延陀) 족 지도자 이난(Inan, 夷男)의 반란은 돌궐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한때 돌궐에 투항했던 중국의 장수와 관리들은 당 태종의 사면 조치로 귀환하고, 거란을 비롯한 변방 족속들이 속속 당에 복속되었다.
  당 조정에서는 즉시 이 기회를 이용, 돌궐을 공략하자는 견해가 있었으나, 당 태종은 당의 군사적 우위가 분명해지는 시점까지 사태를 관망하고 비밀리에 반란 부족을 지원하였다. 629년 한 해 동안에는 초원에서 돌궐과 그 복속 부족들과의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630년 초 드디어 당 태종 이세민은 명장 이정(李靖)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동돌궐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정은 돌궐지역 깊숙이 진군하여 실리 카간을 생포하고 군을 주둔시켰다. 동돌궐의 멸망이었다.

  태종 이세민은 유목 세계에 중국의 위세를 떨친 인물이었다. 비록 그의 사후 아들이 완성하기는 했으나 서돌궐을 해체시키는 데 일익을 했고 타림 분지의 인도-유럽계 왕국들을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돌궐 제국의 부흥

 

630~680에 이르는 약 50년간은 돌궐족에게는 암흑 시대였다. 돌궐의 존재와 문화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어도 당의 기미주가 되어 지배를 받았다. 돌궐 비문은 국가를 잃은 비통함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라를 가진 민족이었는데, 우리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군주를 가진 민족이었는데 우리의 군주는 누구인가.
  돌궐 비문은 패망의 원인을 진단하여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이를 4가지로 요약하면, 첫째 지도자들의 게으름과 어리석음, 둘째 돌궐 백성의 무지와 동족 간의 분열, 셋째 돌궐 고유 문화의 포기와 중국화 지향, 넷째 중국의 돌궐 분열 책동 등이다.
  돌궐 독립은 680년 경에 이르러서야 일어나기 시작했다. 679~680년에 아쉬나 가의 쿠틀룩(Qutluk)이 당에 대해 독립 투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이 투쟁은 돌궐 독립 투쟁의 도화선이 되어 비슷한 시기에 오르도스 지방에서 아쉬나 가의 니슈프(Nishufu)가 투르크 부족을 연합하여 궐기하였다. 아쉬나 가의 푸넨(Funien)도 잇달아 기병했다. 모두 실패하여 포로가 된 니슈프와 푸넨은 낙양에서 참수당했으나 독립 투쟁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쿠틀륵은 비밀리에 조직을 결성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등 치밀하게 투쟁을 준비하였다. 짧은 기간에 5,000의 군사를 양성하였고 톤유쿡(Tonyukuk)이 지휘하였다. 681년 쿠틀룩은 중국 북부의 연주燕州를 습격하여 3만에 이르는 말, 양, 낙타 등을 노획하였다. 이 소식에 많은 투르크인들이 쿠틀륵에 합류하였다.
  쿠틀룩의 1차 목표는 돌궐 제국의 수도였던 외튀겐 지역의 확보였다. 바이칼 호수 남서쪽에 위치한 외튀겐 평원은 방어와 공격에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있고, 흉노 이래 투르크인들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쿠틀룩은 외튀겐을 위협하는 주변 유목민을 먼저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고, 682년 거란과 오구즈(Oghuz) 족을 패퇴시켰다.
  이 승리로 쿠틀룩은 카간으로 즉위하였고, 일 테리쉬(Il-terish)라는 칭호를 썼다. 돌궐 제국의 부활이었다. 쿠틀룩이 주도한 돌궐 독립 과정과 그후의 공적은 그의 아들이 세운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 (중국인들은) 이만큼 봉사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투르크 부족을 죽여야겠어. 그들의 씨를 말려야겠어' 라고 말했다. (투르크 인은) 전멸될 지경이었다. 위에 있는 투르크의 하늘과 투르크의 신성한 땅과 물이 분명 이렇게 말하였다. 투르크 부족민은 없어지지 말라고, 부족이 되라고, 나의 아버지 일 테리쉬 카간과 나의 어머니 일 빌게 하툰(Il Bilge Qatun)을 텡그리(Tengri ; 하늘)가 높은 곳으로 들어올렸다.

… 내 아버지 카간은 17명의 군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갔다" 는 것을 듣고, 도시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갔고 산에 있는 자들은 내려 왔다. 모여서 70명이 되었다. 하늘이 힘을 주셨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 카간의 군사들은 늑대 같았고(주 : 늑대는 초원의 유목민에게 용맹의 상징이다) 적은 양과 같았다. 동으로 서로 출정하여 (사람을) 모았다. 모두 700명이 되었다. 700명이 되어 나라 없이 카간 없이 남은 부족민을, 계집종이 되거나 사내종이 된 부족민을, 투르크의 풍속을 버린 부족민을 옛 조상의 법에 따라 교화하고 가르쳤다.
  … 남쪽으로는 중국인이 적이었고, 북쪽으로는 토쿠즈 오구즈(Toquz Oguz) 부족들이 적이었다. 키르기즈(Qirqiz)·쿠리칸(Quriqan)·오투즈 타타르(Otuz Tatar)·거란(Qitan)이 모두 적이었다. 내 아버지 카간은 이처럼 마흔 일곱 번 출정했고 스무 번 싸웠다. 하늘이 시켰기 때문에 나라가 있는 자들을 나라 없게 만들었고, 군주가 있는 자들을 군주 없게 만들었고, 적들을 복속시키고 힘있는 자를 무릅 꿇게 하고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했다.

  비문에 나오듯이 부활한 돌궐은 당을 계속 침공했다.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와 시급한 생활물자의 조달이라는 경제적 요구에서였다. 기습 지역은 북경에서 감숙 지방에 이르는 당의 변경 지대였다.
  주요 공격 내용을 살펴보면 682년 평주(平州)를 8차례, 683년 남주(嵐州)·정주(定州)·위주(魏州)·유주(幽州)·병주(幷州)를 10차례, 684년 삭주(朔州)를 6차례, 685년 삭주와 흔주(炘州)를 2 차례, 686년 삭주와 대주(代州)를 11차례, 687년 삭주와 창평(昌平)을 9차례 습격하였다. 이 중에서 685년 4월의 흔주 전투와 687년 10월의 삭주 전투에서 전과가 컸다.
  일 테리쉬 카간은 이외에도 거란족을 7차례, 오구즈 족을 5차례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국가의 기틀을 마련한 그는 8세의 빌게와 7세의 퀼 테긴 두 아들을 남기고 691년 사망했다. 쿠틀룩의 동생인 27세의 카파간(Qapaghan, 默 )이 카간위를 계승했다. 카파간 카간은 계속해서 중국 침공에 박차를 가했다. 돌궐 제국의 부흥으로 당은 돌궐 방면에 군사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 유민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발해 건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

  

초원의 고구려 유민

 

사방으로 이산하였던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몽고 방면으로 이주해 갔다. 고구려와 유목민과의 접촉은 기원 전후부터 있었으며 4세기에는 요등으로 둘러싸고 선비족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5세기 이후에는 상당한 규모의 유목민을 복속시킨바 있다. 대체로 흥안령 동쪽의 지역까지 세력권을 형성함에 따라 고구려는 지금의 내몽고에도 세력을 떨쳤다.
  유목 민족과의 이러한 오랜 역사적 관계로 인해 고구려인들은 유목 사회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적응력을 가지게 되었다. 고구려 서부 지방은 유목민·농경민·수렵민이 뒤섞여 사는 대평원으로 목축업이 성하였고 고구려인의 기마습속이 일반적이었다는 점으로 볼 때도 고구려인들은 유목 사회에 높은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는 처음에는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이어 교역을 하였고 수의 중국 통일로 두 나라의 관계의 친밀함이 더욱 요구되었다. 돌궐이 곧 이어 수에게 복속되었지만 고구려는 계속 북방에서 중국을 위협 견제할 수 있는 유목민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하였다.수 문제에 의한 1차 침공이 있은 후인 607년 계민 카간의 처소에서 수 양제와 고구려 사신이 마주쳤던 사실은 삼국 관계의 한 단면이었다. 당 태종의 침공 때에도 고구려는 그 무렵 막북을 제패하였던 설연타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모색하였다.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이후에도 당 제국의 지배에 대해 고구려 유민과 돌궐의 여러 부족이 끊임없이 간헐적인 저항을 하였다. 당에 대한 항쟁이란 측면에서 두 민족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졌으며 이러한 가운데 세가 불리해진 고구려 유민들이 몽고 방면으로 이주했다.683년 독립에 성공한 돌궐은 동으로 남실위南室韋와 흑수말갈에까지 세력을 뻗쳤고 이에 따라 당에 저항하던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도 많이 돌궐로 이주했다. 돌궐이 690년대 후반 영주로 세력을 확장하자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로 이주했으며 만리 장성 부근의 당 제국 변경 지대로 끌려왔던 유민의 일부도 북쪽의 돌궐로 갔다.
  고구려 유민의 이주는 집단적이었고 이를 인솔한 지도자도 있었다. 중국 사서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이들은 고문간高文簡,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다. 성씨로 보아 고구려의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다. 돌궐 카간 카파간(Qapaghan, 默 , 재위 691~716)의 사위가 되었던 고문간은『冊府元龜』에서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 라 하였다. 아마도 고구려에서 막리지 지위에 있었고 왕자였던 듯하다.『삼국사기』에는 보장왕의 둘째 아들로 막리지였던 고임무高任武라는 인물이 보인다. 고문간을 고임무와 동일인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보장왕의 또 다른 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더라도 보장왕과 가까운 혈연관계라 할 수 있다.
  돌궐 국가 내의 여러 종족은 그들의 고유한 생활양식과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들도 자치를 누리고 있었으니 '막리지莫離支' 라는 고유의 관직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한다.

『책부원구冊府元龜』

  송나라의 왕흠약王欽若 등이 편찬한 역사서로 上古로부터 五代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료를 부문별(31部, 1,104門)로 싣고 있다. 1,0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으로 다른 역사서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많다. 고구려에 관해서는 外臣部를 비롯한 각 부문에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돌궐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 중 상당수가 715년 당으로 이주하였다. 714년 당을 공격하다가 카파간 카간의 아들이 당군에 사로잡혀 죽었다. 이에 패전의 문책을 두려워한 장군들이 당에 내투하였다. 카파간의 통치는 전제적이어서 돌궐 내부에는 많은 불만 세력이 있었다. 711년부터 제국내에 여러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714년 가을에는 돌궐 건국의 주도 세력이었던 오구즈 부족마저 반기를 들었다. "토쿠즈 오구즈 부족은 바로 우리 부족인데, 하늘과 땅이 서로 섞이니 우리의 적이 되었구나." 라는 돌궐 비문의 구절이 보여주듯이 이들의 반란이 돌궐에 준 충격은 매우 컸다. 이들은 카파간 카간의 공세에 쫓기어 당의 영내로 잠입했다. 이외에도 돌궐 제국내의 여러 부족이 당으로 이탈했다. 이들 무리에 고문간과 고공의 집단도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오르도스 지방으로 이주하여 당의 변경 수비를 담당하였다.
  742년 돌궐 제2 제국이 위구르 족에 의해 소멸되고 그 이후 몽고 방면에 거주했던 고구려 유민의 행방은 전해지지 않는다. 추측하건데 일부는 돌궐을 따라 서천하였고 일부는 계속 머무른 것 같다. 현재 동몽고 지방에는 이들의 흔적이 보인다. 흥안령 산맥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유목민인Solon(索倫) 족의 명칭이 주목된다. 현재 몽고어에서 高麗를 지칭하여 Solonggos 라 하며, 원나라 때에도 고려를 지칭하여 沙良合·肅良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女眞語로 고려를 Sogo, Solho라 한다. 그래서 Solon 족의 칭호는 고려인을 지칭하는 Solonggos에서 기원한다는 견해가 러시아 학계에서 나왔다. 이렇게 보면 Solon 족의 구성은 고구려 유민이거나 유민의 일부 유입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분야에 대해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돌궐 비문

 

돌궐은 유라시아 초원 지대를 지배한 여러 종족 중에서 처음으로 자체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들은 돌궐문자로 불리는 고유의 문자를 개발했으며 이 문자로 쓰여진 몇몇 비문이 전해진다.돌궐은 582년에 동서로 분열되었으며 630년에는 동돌궐이, 658년에는 서돌궐이 각각 당에게 멸망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이 성공해 다시 국가를 건설하니 이를 돌궐 제 2제국 또는 후돌궐이라 한다.
  돌궐 비문은 725~735년 무렵 후돌궐의 마지막 전성기에 건립되었다. 후돌궐의 뛰어난 세 지도자인 퀼 테긴, 빌게 카간, 톤 유쿡의 송덕비이다. 이 비문들은 돌궐사 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 유목민의 역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비문의 내용은 돌궐 제국의 건국에서부터 역대 카간들의 치적, 중국을 중심으로 한 주변국가들과의 관계, 정복전, 교역, 사회조직, 법제도, 관습에 이르는 등 유목 사회의 특징과 생활 양식을 잘 전해주고 있다.
  돌궐 비문의 존재를 기록한 최초의 문헌은 12세기 이슬람 역사가 주와이니가 저술한 『세계정복자의 역사』이다.
  근대에 와서 처음으로 그 존재를 학계에 보고한 사람은 스웨덴 장교 스트라렌베르그(Johann von Strahrenberg)였다. 그는 스웨덴과 러시아 간의 북방전쟁(1700~1721) 중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시베리아에서 13년간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외몽고의 오르혼 강변에 있는 비문들을 발견하였다. 1722년 고국에 돌아온 그는 1730년 비문 연구 결과를 학계에 발표하였고 19세기 말에 본격적인 학술 탐사가 시작되었다.
  1887~1888년 핀란드 조사단을 시발로 1889년 러시아 학자 야드린체프(N. M. Yadrintsev), 그리고 1890년 핀란드 학자 하이켈(A. Heikel)을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에 의해 비문의 추가 발견과 정밀한 연구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드디어 1893년 12월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Vilhelm Thomsen)이 판독에 성공하여 중앙 아시아 투르크사 연구에 신기원을 이루었다.
  주요한 세 비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퀼 테긴 비문 : 빌게 카간이 후돌궐의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동생 퀼 테긴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732년 세웠다. 높이 3.75m, 너비 122~132cm 크기의 비문으로 동남북면은 돌궐어로 서면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2. 빌게 카간 비문 : 734년 빌게 카간의 사후 그의 아들에 의해 735년 세워졌다. 비문의 내용은 빌게 카간이 직접 국민들에게 훈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빌게 카간이후 사건들 이 나중에 첨가되기도 하였다. 구조나 형식은 퀼 테긴 비문과 유사하고 서쪽면은 한자로 표기되었다.
  3. 톤유쿡 비문 : 720년 경 노령기에 톤유쿡 자신이 건립하였다. 3대 카간에 걸쳐 행정수반과 군 사령관을 역임한 제국의 원로로서 재임 중 업적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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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2 제국의 멸망과 위구르 제국의 성립

 

중국의 역사에 '묵철(默 )' 로 기록된 카파간 카간은 위대한 정복자라 할 만했다. 그는 집권 내내 중국을 정벌하고 주변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중국 침공은 693년 영주(靈州) 정벌로 시작되었다. 이 해에 영주 지방만 8 차례 공략하여 거의 폐허로 만들었다. 697년에는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크게 세력을 뻗치던 거란족을 배후에서 공격, 대파하였다. 698년 당의 측천무후(측천무후는 655년 경부터 실권을 장악했으며 690년에는 스스로 제위에 올라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되었다. 나라 이름도 당에서 주〈周〉로 바꾸었다)는 그 대가로 4만 석의 곡물을 포함한 막대한 물자를 공급했고 이전에 중국 변경 지대로 이주시킨 투르크 족의 귀환도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카파간의 공주를 당 종실에 출가시키는 문제로 곧 불화가 생겨 돌궐은 다시 중국을 습격했다. 698년에만 위주(魏州)·정주(定州)·유주(幽州)·병주(幷州) 등지에 30회 이상의 기습을 단행하였고, 10만 명의 기병으로 당의 토벌군을 패퇴시켜 수많은 말과 물자, 포로를 획득했다. 톤유쿡과 빌게가 직접 지휘한 중국 정벌로 황하에서 산동 반도에 이르는 지역이 폐허가 될 정도였다.
  698년 말 황후의 장례로 분주한 카파간을 대신하여 이넬(Inel, 카파간의 아들)과 빌게가 지휘하는 서부의 돌궐군은 알타이 산맥을 넘어 준가리아로 진격하여 같은 투르크 계인 투르기스 족을 정벌했다. 이 원정의 성공으로 발하쉬, 일리, 이시크 호수, 탈라스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여러 투르크 계 종족들이 돌궐 제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제 돌궐 제국의 국세는 트란스옥사니아에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이 시기의 상황을 『신당서新唐書』는 '사방에 군대를 보내어 영토는 좌우 만리를 넘었고 모든 이족(夷族)이 카파간의 지배하에 놓였다.' 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카파간의 업적은 동서 돌궐을 통합시킨 것이다. 톤유쿡, 이넬, 빌게가 지휘하는 돌궐군은 실크 로드를 확보하기 위해 원정을 계속했다. 700~702년 사이에는 실크 로드 지역을 장악하고 중계 무역을 하면서 널리 분포된 소그드 족을 복속시켰다. 특히 오르도스 남부에 위치한 6개의 소그드 식민 도시 점령은 당 제국에 커다란 위협이었다. 중국과 돌궐 사이의 완충 세력이었던 소그드 식민 도시의 궤멸되자 당은 702년 가을 5만의 군사로 공격을 했으나 퀼 테긴이 이끄는 돌궐군에 패배하고 사령관 위원중은 생포되었다.
  카파간 카간의 당에 대한 공세는 702년 이후 계속되었다. 704년에는 사사충이 이끄는 8만 당군을 격파하여 당에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당의 중종(中宗, 재위 684, 705~710)은 돌궐의 침력에 고심하여 카파간을 제거하는 자를 왕으로 책봉하고, 2천 필의 비단을 상으로 지불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카파간 카간의 당에 대한 강경책은 신생 국가인 발해에게는 축복이었다. 당은 돌궐 문제 에 골몰하여 발해에 대해 화친 정책을 폈으며 발해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국력을 쌓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돌궐은 한창 뻗어나가던 이슬람 세력과 707년 처음으로 충돌하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쳐 무아이야가 창립한 우마이야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돌궐은 710년대에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대인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를 놓고 겨루었으나 끝내 패퇴하였다.
  돌궐 내부에서도 카파간 카간의 철권 통치에 반발이 일어나 복속된 부족들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투르기스 족의 일부가 711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퀼 테긴이 진압하였다.그러나 카를룩 족이 가세하였고 당나라도 지원하여 반란은 3년간 계속되었다. 당이 감숙성 지역에 출병한 터라 돌궐은 양대 전선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카프간을 정점으로 빌게와 퀼 테긴이 지휘하는 합동 작전으로 713년 무렵 타미르 강변에서 진압에 성공하였다. 일부 카를룩 부족을 비롯한 잔존 세력이 당에 보호를 요청하여 이주했다.
  714년 카파간 카간은 중국 변방의 당 기지를 공격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715년이 되자 다시 복속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카파간의 진압도 잔혹했다. 이중 돌궐 제국 재건에 중심 역할을 했던 오구즈 족의 반기는 돌궐 제국의 결속에 큰 타격을 주었다. 오구즈 족의 반란으로 트란스옥사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돌궐 제국의 서부 지대가 제국의 영역 밖으로 이탈되었다. 오구즈 부족의 상당수가 반란 진압을 피해 당의 영토로 들어갔다. 더불어 카파간 카간의 사위였던 고문간 등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도 당의 영역으로 이주하였다. 카파간 카간의 통치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결국 오구즈 부족의 반란으로 카파간 카간은 죽었다. 716년 카파간은 오구즈 족 토벌에서 돌아오던 중 오구즈 족의 일파인 바이르쿠(拔野古) 족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했다. 베어진 그의 머리는, 당의 사신이 장안으로 가지고 갔다.
  카파간에 이어 아들 이넬이 카간이 되었으나 계속되는 오구즈 족의 반란으로 제국이 흔들렸다. 일 테리쉬 카간의 두 아들인 빌게와 퀼 테긴이 반란 진압을 주도하였고 결국 빌게가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하였다. 이넬과 그의 형제, 친척 그리고 추종자들은 무자비하게 제거되었다. 돌궐 재건국의 원훈으로는 70세의 노장군 톤유쿡이 유일하게 남았다. 그는 빌게 카간의 장인이었다.
  빌게 카간(Bilge, 毗伽, 재위 716~734) 의 치하에서 동생인 퀼 테긴은 2인자인 좌현왕이었고 돌궐군의 새로운 편성과 강화를 주도했다. 내전으로 피폐한 돌궐을 중훙시키려는 빌게 카간의 노력은 돌궐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하늘이 투르크 민족의 번영을 위해 (나에게) 카간 직위를 맡겼다.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이 카간이 되었도다. 우리 조상들이 힘겹게 성취하신 민족의 이름을 소멸시켜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으로 내 형제와 뜻을 함께 했도다. 투르크 민족을 위해 밤에는 자지 않고, 낮에는 쉬지 않고 일했다. 퀼 테긴과 샤드들과 함께 그토록 열심히 일했다.

빌게 카간은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당을 침공하려 했으나 톤유쿡이 말렸다. 돌궐은 내전으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으며 말은 야위었고 가축은 흩어진 상태인데 반해 당은 현종이 즉위하여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톤유쿡은 빌게가 중국식 성곽도시를 건설하고 불교와 도교를 장려하여 사원과 도관을 건설하는 것도 반대했다. 톤유쿡을 기리는 비문에 이 노장군의 반대 견해가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돌궐은 그 수가 중국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물과 풀을 찾아 떠돌고 사냥을 한다. 우리들은 정해진 주거가 없고 늘 전투하는 연습을 한다. (전투에서) 우리들은 강하다고 느끼면 나타나고, 약하다고 생각하면 물러나 숨는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들보다 수가 많은 중국의 장점을 상쇄하고 그것을 쓸모없게 만들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돌궐을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게 하고 중국에게 공격을 받아 패배를 당한다면, 비록 그것이 단 한번의 패배일지라도 당신은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부처와 노자는 사람들을 유약하게 만드니 그런 가르침은 전사에게는 맞지 않는다.

  톤유쿡의 권유로 빌게 카간은 당과 평화 관계를 맺고자 했다(718). 그러나 당 현종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현종은 투르크계 부족인 바스밀과 요서와 열하 지방에 거주하는 거란을 지원하여 돌궐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빌게 카간은 불안해 했으나 톤유쿡은 바스밀·당·거란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효과적으로 연합작전을 할 수 없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바스밀을 먼저 격파한 돌궐은 720년 현재 감숙성의 감주(甘州)·원주(原州)·양주(凉州) 지역을 10여 차례 습격하였다. 722~733년 간의 전투에서는 거란과 타타르 족을 패퇴시켰고 카를룩 족도 돌구러 영내에서 축출하였다. 돌궐의 화평제의를 거절하고 군사 대응으로 나섰던 당 현종도 돌궐의 새로운 도약을 인정하여 사신을 보냈다(721).
  카파간 사후 돌궐의 분열을 극복하고 재건한 세 주역은 빌게 카간과 퀼 테긴, 톤유쿡이었다. 톤유쿡은 725년 경 사망했다. 일 테리쉬, 카파간, 빌게에 이르는 3대 카간의 재위기간에 46년을 봉직한 톤유쿡은 경륜과 지혜를 갖춘 정치 전략가이자, 노련한 장군으로서 돌궐 제 2제국의 재건과 번영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를 돌궐의 비스마르크로 칭송하는 서구 학자들도 있다. 그의 행적은 돌궐 비문 가운데 톤유쿡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731년에는 퀼 테긴마저 47세로 사망했다. 7세 때부터 돌궐의 전쟁에 참여하여 평생을 돌궐 재건에 보낸 그의 죽음은 빌게 카간에게 큰 충격이었다. 빌게 카간이 동생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내용은 돌궐 비문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내 아우 퀼 테긴이 죽었구나. 보이던 눈이 멀고, 샘솟는 지혜가 멈추었구나. 시간의 운명은 하늘의 뜻이거늘, 인간이란 애초에 죽기 위해 창조되었나 보다. 눈에는 눈물이, 가슴에는 슬픔이 복받쳐 통곡하고 슬퍼한다.

 

731년 11월 1일 거행된 퀼 테긴의 장례식에는 발해, 당, 거란, 타타르, 티벳, 소그드, 투르기스, 키르기즈 등에서 온 조문 사절이 참석하였다. 빌게 카간은 그의 업적을 기린 비문을 세웠는데, 이는 돌궐사 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빌게 카간은 734년 11월 25일 독살되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의 사후 돌궐 제국은 몰락해갔다. 빌게의 아들 이얀(Iyan, 伊然)이 즉위하였으나 곧 병사하고 그의 동생 텡그리(Tengri, 登里, 재위 734~741)가 어린 나이에 카간으로 즉위하였다. 텡그리 카간이 유아였으므로 그의 모친인 빌게 카간의 황후, 포부(톤유쿡의 딸이다)가 섭정하였다. 그러나 포부 황후는 내정의 정비에 실패하였고, 바스밀 부족이 카를룩, 위구르와 연합하여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떠올랐다. 거란족, 해족의 세력이 다시 강해지자 735년 경에는 발해에 사신을 보내 협공을 제의했으나 발해의 무왕은 오히려 돌궐 사신을 감금하고, 이를 당 현종에게 통보했다. 돌궐의 약화가 인접국에도 알려진 것이다.
  741년 샤드(Shad)인 오즈미쉬(Ozmish)가 텡그리 카간을 살해하고 카간으로 즉위하였다. 이는 돌궐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오즈미쉬가 카간 자리를 찬탈하자 돌궐의 지배층이 742년 당에 대규모로 망명을 하였다. 바스밀, 카를룩, 위구르는 오즈미쉬를 카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744년 오즈미쉬는 바스밀 부족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의 머리는 당으로 보내졌다. 이제 세 부족 중 어느 부족이 초원의 지배자가 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바스밀이 카를룩 부족의 도움을 얻은 위구르에 패배하였고 위구르 부족장인 일테베르가 카간이 되었다.

  돌궐 제2 제국의 붕괴와 위구르 제국의 성립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돌궐 제국이라는 체제 속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투르크족 연합은 와해되고 다시 이합집산이 시작되었다. 위구르 제국내에 머무른 부족도 있으나 많은 투르크계 부족들이 서아시아나 남 러시아 초원 지대로 이주하여 다수의 비교적 작은 규모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위구르 제국은 13세기에 몽고족이 칭기스한에 의해 통일되어 중앙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할 때까지, 중국 문화권과 대결한 마지막 투르크계 국가였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

 

유목민이 거주하는 곳은 초원지대이다. 몽고 고원이 초원 지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만주 북부에서 유럽의 헝가리 평원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이 초원 지대이다. 이 모든 곳에 유목민이 존재하였으며 인접한 농경 지역과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다.
  고대부터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산재하였으며 많은 역사 기록을 남긴 중국과의 관계가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다. 840년 위구르 제국이 같은 투르크 계통의 키르기즈 족에 멸망당하면서 점차 투르크 족은 서진하였다. 이들은 차츰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카라한 왕조(840~1212), 가즈니 왕조(997~1187) 등 다수의 국가를 건설하였다. 투르크 족이 이슬람의 본거지인 중동 지방으로 진출한 이후 이슬람 세계는 투르크 족이 지배하게 된다.

    투르크 계 국가 가운데 현재의 터어키 공화국과 연결되는 국가가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다. 셀주크(Seljuq)는 11~14세기에 중앙 아시아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가족이 모두 지분을 가지는 유목 부족의 전통으로 인해 중앙 집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각 지역이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렸다.
  셀주크란 명칭은 중앙 아시아의 오우즈 족에 속하는 한 투르크 족장의 이름이다. 셀주크 집단은 10세기 말에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에 거점을 마련하였다. 셀주크의 손자인 투그릴(Tughril)과 차그리(Chaghri)가 왕조의 창립자이다. 1040년 5월 이들 형제는 단단한(Dandanqan) 전투에서 가즈니 왕조의 술탄 마수드에게 대승을 거두어 카스피해 동남부인 호라산 지방을 획득했다. 가즈니 왕조는 이후 이란 지방을 상실하고 인도에서만 명맥을 이었다.
  투그릴과 차그리는 이라크와 중서부 이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부예 왕조(945~1055)에도 연거푸 승리를 거두어 중앙 및 서부 이란 지역을 점령하였고 1055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부예 왕조를 멸망시켰다. 시아파인 부예 왕조는 945년 압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형성된 왕조였다.

    압바스 왕조(750~1258)의 할리파(Caliph ; '신의 대리인'이라는 뜻)는 전 이슬람의 최고 지배자였으나(시아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점차 실권을 잃었고 지방의 영주들은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일이 많았다. 할리파는 부예 왕조가 바그다드를 함락한 후에는 허수아비로 전락하였다. 부예 왕조는 민심을 고려하여 할리파를 제거하지는 않았으나 할리파의 폐위와 즉위를 마음대로 하였다.
  셀주크가 부예 왕조를 멸망시켜 할리파는 시아파의 통제에서 벗어났으나 이번에는 셀주크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셀주크 왕조는 할리파의 상징성을 인정하여 압바스 왕조를 존속시키고 결혼으로 인척관계를 맺었다. 부족연합체적 성격을 띤 셀주크는 여러 왕족과 귀족들이 영토를 나누어 통치하여 분열의 가능성이 상존하였다.
  투그릴이 1063년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차그리의 아들 술레이만(Sulaiman)이 계승하였다. 이에 차그리의 다른 아들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과 투그릴의 사촌 쿠탈미쉬(Kutalmish)가 왕권에 도전하였다. 뛰어난 재상 니잠 알 물크(Nizam al-Mulk)의 중재로 알프 아르슬란과 술레이만의 격돌은 피할 수 있었으나 대세는 아르슬란에게 기울었다. 아르슬란은 1064년 쿠탈미쉬를 격파하고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술탄이 된 아르슬란은 적극적으로 정복 활동을 벌였다. 카프카스 지방과 시리아,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소 아시아)가 목표였다. 1065년 그루지아와 티플리스, 초룸 지역을 점령했다.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충돌은 이미 토그릴 시대에 시작되었다. 동로마 제국은 정치적 내분을 겪고 있었고 발칸 반도로 남하하는 유목민 페체네크 족, �차크 족의 방비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투르크 계 부족들이 아나톨리아로 이주하여 동로마 제국과 교전하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동로마 황제 로마누스(Romanus) 4세는 20만 군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에 왔다. 1071년 8월 26일 아나톨리아 동부의 반(Van) 호수의 북쪽에 있는 말라즈기르트(Malazgirt)에서 대회전이 벌어졌다. 셀주크 군은 5만 명에 불과했으나 매복과 기습 작전으로 일방적 승리를 거두었고 로마누스 4세와 많은 지휘관들이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로 동로마는 로마 제국이래 1천년이 넘게 지배해오던 아나톨리아의 중앙부와 동부를 셀주크에게 잃고 지중해변에 위치한 부분만 영유하게 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다음 해에 20만 대군을 이끌고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 계 왕조인 카라한을 공격하였다. 부하라(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 근처에까지 진격하였으나 알프 아르슬란은 부상을 입고 1072년 10월 사망했다.
  아르슬란의 뒤를 이은 말리크 샤는 셀주크 투르크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내부 반란과 외부의 침입을 물리치고 영토를 확장한 그는 1090년 경 알타이 산맥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셀주크 투르크를 영도한 말리크 샤와 재상 니잠 알 물크의 불화는 제국에 어두은 그림자를 던졌다. 1092년 니잠 알 물크가 이스마일 파에 암살당하고 곧 이어 같은 해 11월 말리크 샤마저 독살되었다. 말리크 샤의 왕비 테르킨(Terkin)은 황태자 베르크야룩(Berkyaruk)을 제치고 자신의 어린 아들 마흐무드(Mahmud)를 술탄으로 즉위시켰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술탄 자리를 놓고 내전이 벌어졌다.
  5년간의 내전 끝에 황태자였던 베르크야룩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으나 중앙집권체제는 무너지고 지방의 셀주크 왕족들은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유럽의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차 십자군 원정(1096~1097)에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유럽의 시각과는 달리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은 십자군 원정을 지방 영주나 총독이 격퇴할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여겼고 실제로 이슬람의 세계에서 볼때는 변방에서 일어나는 부차적 사건이었다. 십자군 원정은 7세기 이슬람의 발흥 이래 일방적으로 밀리고 정복당하고 수세에 몰리던 유럽의 반격이었다. 이미 1085년 기독교도들이 스페인의 톨레도(Toledo)를 함락시켜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 격퇴에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술탄은 명목상으로 전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자였으나 이미 베르크야룩이 사망한 1104년 경에는 이라크 셀주크, 시리아 셀주크, 터어키 셀주크 등으로 분열되었다. 1157년 분열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산자르가 사망하자 이미 분열 상태였던 셀주크 투르크의 구심점은 사라지고 이들 셀주크 국가들은 독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3세기 초인 1218~1222년 사이에 칭기스한의 중동 원정이 있었으나 이것은 정복전이 아닌 약탈전이었다. 칭기스한의 손자인 훌라구는 1253년 중동을 정복할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란 고원으로 진격하여 수년간의 포위전 끝에 이스마일 파의 분파인 암살자 단을 전멸시켰고 1257년에는 할리파의 근거지인 바그다드에 육박하였다.

 

훌라구의 고문인 독실한 시아파 회교도 나시룻딘 투시(Nasiruddin Tusi)는 할리파 제거를 주장하였다. 할리파의 종교적 위신이 아직도 강력하였으므로 훌라구는 몇 가지 요구를 하며 협상을 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할리파는 이를 거절하였다. 바그다드는 몇 주간의 포위 끝에 1258년 2월에 함락되었다. 네스토리우스 교도인 훌라구의 처 도쿠즈(Doquz)와 나시룻딘 투시의 의견에 따라 훌라구는 수니파에 대한 학살과 약탈을 단행하였다. 할리파도 처형되어 압바스 조는 사실상 소멸되었다(압바스 조의 일파가 이집트의 맘룩 왕조에 망명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셀주크 투르크의 군소 왕국도 모두 몽고의 간접통치하에 들어갔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투르크 족이 건설한 제국 가운데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국가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다. 1923년 터어키 공화국의 성립으로 소멸된 이 제국은 6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최전성기에는 현재의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 발칸 반도 전역과 루마니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 이집트, 알제리와 러시아, 아라비아 반도의 일부를 영토로 하였다.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2세기 이상 유럽의 안보를 위협하였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17세기 이후 수세에 몰렸다. 서유럽과 러시아의 발전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대결의 역사였으며 특히 러시아는 12차례나 전쟁을 벌여 팽창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국가의 성립은 오스만 베이(Osman Bey)가 오스만 공국을 세운 1299년으로 본다. 13세기 후반 중동 지역에 몽고의 지배가 확립되었고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터키 셀주크는 몽고에 신속하게 되었다. 터키 셀주크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졌고 독립적인 소왕국들이 등장했다. 오스만의 소왕국도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오스만은 아나톨리아 중부에 위치한 게르미안(Germian) 공국에 압박을 받자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르마라(Marmara, 현재 소아시아와 그리스 가운데 있는 바다) 해안으로 이주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갔다. 내정이 문란해진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 투르크의 공세를 막지 못했다. 1324년 콘스탄티노플을 마주보는 부르사(Bursa)를 점령하여 공국에서 국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354년에는 처음으로 발칸 반도에 진입하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면서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1361년 무라트(Murad) 1세는 동로마 제국 제 2의 도시인 하드리아노플(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건설한 도시)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다.
  위기를 느낀 발칸 반도의 여러 군주들이 연합하여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355년 세르비아의 황제 스테판 두샨이 사망하여 세르비아가 분열하여 십자군 결성은 실패하였다. 발칸 반도에서 팽창을 거듭하던 무라트 1세는 1389년 코소보(Kosovo) 전투에서 발칸 동맹군을 완파하여 발칸 반도에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중부가 오스만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졌고 대항할 여력이 있었던 나라는 헝가리 정도였다.
  무라트 1세는 직접 통치보다는 조공과 유사시 군대 지원을 조건으로 기존의 지배층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택했다. 기존 군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고 정복지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하는 무라트 1세의 통치 방식은 그 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무라트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바예지트(Bayezid) 1세는 집권 초기에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카라만(Karaman) 투르크멘 공국과 대결하였다. 카라만은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와 연합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협공하였다. 바예지트 1세는 1391년 카라만을 패퇴시키고 동부 아나톨리아까지 복속시켰다. 이어 발칸 반도로 출병하여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반기를 든 소국들을 다시 지배하에 두었다. 나아가 불가리아 전체를 점령하여 직접 통치하에 두었으며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이에 헝가리를 중심으로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바예지트 1세는 1396년 도나우 강변에 있는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이로서 도나우 강 이남 지역이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이에 이집트 카이로에 망명해 존속하던 압바스 왕조의 할리파가 바예지트 1세에게 술탄(Sultan) 칭호를 주었고 바예지트 1세는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유럽 십자군을 격파한 바예지트 1세는 다시 아나톨리아로 기수를 돌려 1397년 카라만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바예지트 1세의 동진은 티무르(Timur)를 크게 자극시켰다. 중앙 아시아와 이란, 아프가니스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차지하여 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진격하였다. 바예지트 1세와 티무르와의 결전은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평원에서 이루어졌다. 투르크 계 부족들은 바예지트를 버리고 티무르에게 기울었고 바예지트는 기독교도 부대만을 이끌고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은 참패하고 바예지트 1세는 포로가 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티무르는 바예지트 1세에 멸망당한 군소 왕국을 부활시키고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로 진격한 것은 정복이 목적이 아니라 배후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몽고 세계제국 부활을 목표로 활동한 티무르는 명나라와 인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티무르는 칭기스한의 10대 후손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티무르는 1405년 명나라를 치기 위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티무르의 죽음은 오스만 투르크에는 큰 행운이었다. 비록 바예지트 1세의 아들 4명이 술탄 자리를 놓고 골육상쟁을 벌였으나 두드러진 외부의 침략은 없었다.
  1413년 메흐메트 1세가 다른 3명의 형제를 제거하고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메흐메트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무라트 2세(재위 1421~1451)의 통치 기간에 오스만 투르크는 바예지트 1세 때의 영토를 회복하고 유럽과 아나톨리아에서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다. 메흐메트 1세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다시 복속시켰고 무라트 2세는 아나톨리아를 다시 지배하에 두었다.
  무라트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해군을 육성한 것과 술탄의 친위부대인 예니세리(Janissary)를 대폭 강화한 것이다.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평정에 이어 무라트 2세는 이탈리아의 왕성한 도시국가 베네치아(Venecia, Venice)와 무역로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베네치아는 그때까지 흑해와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의 무역로를 이용하며 오스만 투르크와 우호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살로니카를 얻고 오스만 투르크가 마케도니아를 지나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 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7년을 끌었는데 무라트 2세가 왈라키아(Walachia)를 점령한 헝가리와 동시에 전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1430년에 이르러 무라트 2세는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여 베네치아의 해군을 격파하여 아드리아 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투르크 계 왕조는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이 강하고 술탄의 권력이 그리 강하지 못해 내분이 자주 일어난다. 이 때문에 대외팽창이 중단되곤 하였는데 무라트 1세는 귀족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라트 1세 때에 만든 친위대 예니세리를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예니세리 부대원들은 기독교 노예들과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투르크 족들을 주측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어릴 때 징집되어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가족관계도 없고 오직 술탄에 대해 절대적 충성만 하도록 교육받았다. 귀족들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대외팽창에는 반대하였는데 이는 광범위한 정복전쟁을 통해 술탄의 권력이 귀족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커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예니세리의 강화로 정복전은 용이해졌다.

무라트 2세는 예니세리를 이끌고 유럽 원정을 본격화하였다. 1434년 헝가리와 전쟁을 시작하여 1439년에는 헝가리에 복속되어 있던 세르비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때 무라트 2세는 처음으로 간접통치 방식을 버리고 세르비아를 직접 통치로 전환했다. 1443년에는 헝가리 국왕 훈야디(Hunyadi)를 즐라티카(Zlatica) 전투에서 격파하여 모든 저항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이에 놀란 투르크 귀족들이 헝가리에 유리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444년 무라트 2세는 헝가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으로 헝가리는 왈라키아와 베오그라드를 획득하고 세르비아는 자치권을 얻었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는 도나우 강 이북에 대한 공략을 중지하기로 했다.
  오랜 대외 전쟁과 귀족과의 권력 투쟁에 지친 무라트 2세는 1444년 어린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양위하고 종교적인 명상에 탐닉했다. 어린 술탄이 등장하자 동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은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기획하였다. 동로마, 헝가리, 베니스가 주축이 된 이 십자군은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세르비아와 발칸 산맥을 통과하여 흑해의 요충지 바르나(Varna)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무라트 2세가 신속히 아나톨리아에서 귀환하여 군대를 이끌고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유럽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마지막 십자군 원정이었다.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 무라트 2세는 다시 술탄 자리에 올랐다. 그는 다시 발칸 원정을 하였고 1448년 2차 코소보 전투에서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인 스칸데르베르그(Skanderberg)의 저항을 분쇄하였다.
  1451년 2월 무라트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가 19세의 나이로 다시 즉위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무라트 2세가 여자 노예에게서 얻은 자식이다. 그의 지상 과제는 역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들의 소망이었던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동로마는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콘스탄티노플과 그 부근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이 가지는 중요성은 단순히 한 도시만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세계의 정치, 문화의 상징이었다. 전통적으로 오스만 투르크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결사반대했다. 명분은 동로마 멸망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술탄의 권력 강화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예니세리는 술탄의 동로마 공격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략 준비에 착수한 메흐메트 2세는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보스포루스 해협(소아사아와 발칸 반도 사이에 있는 길고 좁은 해협)의 유럽 쪽에 루멜리(Rumeli) 성채를 축조하였다.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사절을 보내 축성 중단을 요청하였으나 메흐메트 2세는 거절했다. 1452년 8월 루멜리 성채는 완공되었다.
  1452년 여름 헝가리의 엔지니어 우르바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찾아와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대포 제조를 건의하였다. 거절당하자 우르바누스는 메흐메트 2세를 찾아갔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견고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파괴할만한 대포를 제작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우르바누스가 기대하던 액수의 4배를 보수로 지급하기로 하였다. 석달 간의 작업으로 1453년 1월 완성된 대포는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길이가 거의 9m, 포문의 구경은 15cm로 600kg의 포탄을 1마일이나 날릴 수 있었다.

 

1453년 1월 말 메흐메트 2세는 모든 신하들을 불러놓고 전쟁을 결의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는 3월 갈리폴리(Gallipoli) 앞바다에 집결하여 3월말에는 마르마라 해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군도 3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나아갔고 메흐메트 2세는 4월 5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군은 정규군 8만, 비정규군 2만이었다. 이에 비해 동로마는 그리스 인 4983명, 외국인 2000명으로 7000명이 못되는 병력으로 방어해야 했다.
  도착 당일인 4월 5일 메흐메트 2세는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사절을 파견하여 항복을 요구하였다. 즉시 항복한다면 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으나 따르지 않으면 자비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응대하지 않았다. 4월 6일 오스만 투르크 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 1문당 하루 발사 횟수는 7발에 불과했으나 포탄 한발 한발은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무너뜨렸다.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은 해안을 따라 순시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해상봉쇄하여 외부의 원군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골든 혼(Golden Horn)으로 들어오면 육군의 성채 공격에 합세할 수 있었다. 4월 12일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골든 혼 진입을 시도했으나 동로마의 완강한 수비로 실패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골든 혼에 쇠사슬을 쳐 함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메흐메트 2세는 4월 22일 야음을 타서 67척의 전함을 육지로 이동하여 언덕을 넘어 골든 혼 내해에 진입시켰다.
  육군과 해군의 합동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동로마는 결사항전하여 1개월을 버티었다. 그러나 식량부족에다가 서유럽에서 구원군이 올 가능성이 없어지자 절망감에 빠졌다. 오스만 투르크에도 비관론이 대두되었다. 5월 26일 참모회의에서 오스만 투르크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재상 할릴 파샤(Halil Pasha)는 강화를 맺을 것을 주창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29일을 총공격 날짜로 정했다. 29일 새벽 1시 반 경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세의 시작은 비정규 부대인 바시바조우크가 맡았다. 새벽 4시가 되자 아나톨리아 투르크 군이 2차 공격을 시작했다. 동로마 측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진두지휘하여 잘 막아냈다. 3차 공세에는 술탄의 친위부대인 예니세리가 투입되었다. 이른 아침 오스만 투르크 군은 콘스탄티노플 성에 진입했다. 대규모 방화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공격 개시 전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으나 29일 저녁에는 중지시켰다. 29일 저녁 메흐메트 2세는 말을 타고 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온 이맘(Imam : 이슬람교에서 예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엄숙히 선언했다.

    알라 이외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무하마드는 신의 사도이다.

    이제 소피아 성당은 모스크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대대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복원과 정비에 착수하였다. 우선 이름을 이스탄불(Istanbul)로 고쳤다. 이스탄불은 단순히 새로운 정복자들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토착 동로마인과의 공존이 가능한 국제적 성격의 도시로 기능하도록 하였다. 조세 제도를 정비하여 무역상과 장인들의 이익을 보장하였고 비이슬람 교도의 종교 의식, 언어, 관습의 보존을 허용하였다. 이로서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서 이스탄불은 더욱 번영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도 유럽과 아시아 원정을 계속하여 1481년 사망할 때까지 그리스 지역의 트레비존드 제국, 세르비아, 보스니아, 아나톨리아 동부의 카라만을 정복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팽창은 계속되어 셀림 1세(재위 1512~1520) 때는 동부 아나톨리아로 세력을 뻗어오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를 격퇴하고(1514) 시리아,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룩 왕조를 멸했다(1517). 맘룩 왕조 정복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는 2배로 늘었고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제외한 전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맘룩 왕조와의 전쟁이 진행중이던 1516년 8월에는 압바스 조의 할리파 무타와키로(Mutawakki)부터 할리파 직마저 인수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최전성기는 슐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였다. 카누니(Kanuni ; 입법자)로 불린 슐레이만 1세는 유럽으로 팽창을 계속하여 헝가리와 합스부르크 제국과 대결하였다. 슐레이만 1세는 1521년 8월에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여 도나우 강 이북으로의 진출 거점을 마련하였다. 1526년 8월 29일 모하치(Mohacs) 전투에서 헝가리 군은 궤멸하고 국왕 루이 2세는 전사하였다. 9월 헝가리의 수도 부다(Buda ; 현재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는 두 도시 Buda와 Pest가 합쳐져 생긴 도시다)에 진입한 슐레이만 1세는 헝가리를 속국으로 하고 존 자폴리(John Zapolya)에게 통치를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일부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만 투르크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다. 합스부르크 황제 카알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Ferdinand) 는 일부 헝가리 귀족과 연대하여 헝가리 북부를 점령하고 이를 오스트리아에 병합시켰다. 슐레이만 1세는 즉각 출병하여 1529년에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헝가리 영토를 탈환하고 더 나아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도인 비인(Wien)마저 포위하였다.
  이스탄불에서 충분한 병력이 지원되지 않아 비인을 함락하지 못하고 철군하였으나 이 원정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헝가리 지배가 공고해졌다. 1532년의 2차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슐레이만은 10만 이상의 포로와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를 중심으로 한 유럽과의 대결은 지중해에서 계속되었다. 1538년 9월 28일 프레베자(Preveza)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해군은 합스부르크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한 유럽연합 함대를 대승을 거두어 동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1564년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합스부르크의 새로운 황제가 되어 헝가리를 침공하자 슐레이만은 생애 13번째이자 마지막 친정을 하였다. 1566년 8월 오스트리아의 지게트와르(Zigetwar) 성채에 도착한 술탄은 성의 함락을 눈 앞에 두고 9월 6일에 병사하였다. 오스만 투르크 군은 슐레이만 1세의 죽음을 숨긴 채 즉시 이스탄불로 철수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는 1683년의 2차 비인 포위전의 실패가 기점이 된다. 합스부르크 왕조를 위해 유럽연합군이 비인을 구원하러 왔는데 주로 폴란드 군의 활약으로 비인의 포위가 풀렸다. 이후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폴란드, 러시아 등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에 대한 동맹을 맺어 사방에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열세를 인정하여 1699년 카를로비츠(Karlowitz)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서 헝가리 전역과 트란실바니아 지역, 우크라이나와 달마티아를 상실하였다.
  카를로비츠 조약 이후 1923년 터어키 공화국 수립까지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 세력에 계속 패퇴하고 제국은 축소되었다. 이중 러시아와의 12차례 전쟁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와해시켰다. 러시아의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집요한 공격과 영토 잠식은 계속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도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여 제정 러시아와 교전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과 터어키 공화국의 성립

 

19세기에 들어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쇠퇴는 더욱 두드러졌다. 1821년에 그리스가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도왔다. 1827년 10월 나바리노(Navarino) 해전에서 연합 함대에 참패한 오스만 투르크는 1829년에는 그리스의 자치를, 1832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유럽 열강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해체할 능력이 있었으나 각자의 이해 관계에 따라 상반된 입장이었다.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해체를 노렸으나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투르크의 급격한 와해에 반대하였다. 크림 전쟁(1853~1856)에서 영국, 프랑스가 오스만 투르크와 연합하여 러시아의 흑해 지배를 저지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내정 개혁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가운데 19세기 후반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이 독립하여 유럽의 오스만 투르크 영토는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트라키아 지역만 남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약화와 재정 적자는 유럽 열강의 내정 간섭으로 이어졌다. 유럽 열강에게 빌린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게 되자 1881년에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의 재무 관계자들로 구성된 '투르크 채무 관리회'가 생겨 투르크의 재정을 장악하여 열강에의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청년 장교들이 비밀 결사 '청년 투르크 당'을 결성하였고 1908년에는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들은 이슬람교가 아닌 투르크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었다.
  한편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관리하여 왔다)를 병합하였으며 자치령이던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포하였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획득을 염원하였던 세르비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원한은 더욱 커져갔다. 1911년 7월 '2차 모로코 사건'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이 모로코에 집중한 기회를 노려 이탈리아는 8월, 트리폴리(현재 벵가지와 더불어 리비아 수도)를 노리고 오스만 투르크에 선전포고하였다.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이 한창이던 1912년 3월에서 8월에 걸쳐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4개국 사이에 개별적으로 방어 동맹이 맺어졌다. 이를 발칸 동맹이라 부른다. 동맹을 맺은 4개국은 투르크가 이탈리아에 고전하는 틈을 타서 1912년 10월 오스만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서둘러 이탈리아와 강화 조약을 맺어 이탈리아의 트리폴리를 지배를 인정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와 발칸 동맹국과의 전쟁을 1차 발칸 전쟁이라 하는데 영국의 중재로 1913년 5월 런던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 영토를 할양하였다.
  발칸 전쟁의 패배로 격앙된 오스만 투르크는 설욕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비밀 결사에 의해 암살되어 1차 셰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청년 투르크 당의 지도자였던 엔베르 파샤는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투르크 군은 케말 파샤의 지휘로 1915년 4월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려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이들은 12월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는데 육군 11만과 군함 수십 척을 잃었다. 이 전투가 오스만 투르크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불가리아는 1915년 가을 독일, 투르크 측에 가담하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개전 즉시 러시아의 카프카즈 지역에 공세를 폈으나 1915년 1월 퇴각하고 아르메니아를 두고 대치하였다. 이외에 팔레스타인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에서 투르크 군과 영국군의 공방전이 치열했다.

 1917년 11월(그레고리 력)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가 협상국에서 이탈하자 동맹국의 승리가 눈 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1918년 3월에 360만 병력을 동원하여 시작된 독일의 총공세는 200만에 이르는 미군이 도착하여 실패하였고(미국은 1917년 4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으나 신병 훈련 관계로 1년이 지나 유럽에 상륙하였다) 독일, 투르크, 오스트리아, 불가리아의 전쟁 수행 능력은 바닥이 났다. 1918년 9월 동맹국 측에서는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 1918년 10월 오스만 투르크에서는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 종전 협정에 서명하였다.
  영국, 프랑스 등 협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완전 해체하려 전쟁 중에 비밀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1919년 5월 15일 협상국을 등에 업은 그리스 군이 이즈미르에 상륙한 다음 날인 5월 16일 아나톨리아의 삼순에 전쟁 영웅인 케말 파샤가 제 9군 감찰관의 자격으로 상륙하였다.투르크 군이 와해된 상태에서 케말 파샤는 민병대를 조직, 무장 투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종전 협상으로 이스탄불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협상국은 1920년 3월에는 점령지를 확대하고 투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연합국의 괴뢰가 된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에 맞서 케말은 1920년 4월 앙카라(Ankara)에서 '대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 의회는 술탄이 이교도의 손에 있다고 단정하고 외세를 축출하는 것이 이슬람 교도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1920년 8월 10일 세브르(Sevre) 조약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에 강요하여 체결하였다. 내용은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히자즈는 독립시키고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하에,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하에 두고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르메니아는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며 에게 해의 섬들과 이즈미르(에게 해 연한 교역 도시) 지역마저 그리스에 양도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이 실행되면 오스만 투르크는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의 일부만 영토로 하게 되어 사실상 망국의 길을 걷을 판이었다.
  이 가혹한 조약의 체결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으며 투르크 국민의 술탄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대국민의회는 1921년 1월 기본법을 제정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다. 국명은 투르키예(Turkiye, 영어로는 Turkey)로 하고 국가 운영은 집행위원회가 하도록 하였다. 그리스 군이 이즈미르를 거점으로 앙카라까지 진격해 오자 1921년 8월 케말이 지휘하는 민병대는 사카리아(Sakarya)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1922년 9월에는 '바다로 쓸어넣기 작전'을 실시하여 그리스 군을 이즈미르에서 축출하고 문자 그대로 바다로 쓸어 넣었다. 그리스 군 포로는 6만이 넘었다.
  케말 정부는 그리스와의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1921년 3월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여 카르스(Kars)와 아르다한(Ardahan) 지역을 회복하였고 프랑스도 1921년 10월 앙카라 조약을 맺어 실리시아로부터 철수에 동의하였다. 마지막으로 무단야(Mudanya) 종전 협정을 맺어 협상국은 이스탄불과 트라키아 동부를 터어키에 이양하였다. 1923년 7월에는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과 포괄적인 로잔(Lausanne) 조약을 체결하여 현재의 터어키 영토가 확정되었다.

 

1922년 11월 1일 대국민회의는 술탄제 폐지를 결의하였고 마지막 술탄 메흐메트 6세는 망명했다. 1923년 10월 29일 케말 파샤는 터어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4월 20일 공포된 헌법은 이슬람에 국교 지위를 부여했으나 1928년 4월 이 조항을 삭제하여 터어키는 세속 공화국이 되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이제 한걸음을 떼기 시작한 한국역사

 

일부 고고학적 발굴로 '신화' 통설 반박… 청동기 문화 한반도 전래시기도 앞당겨

강원도 속초 조양동 유적
강원도 정선 청동기 유적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돼 온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됐다. 또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도 최대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학년도 역사 교과서를 이처럼 수정해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로 했다.
따라서 고조선 건국과 관련, 기존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고 기술한 대목은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됐다. ‘~한다’라는 말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엄청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장득진 실장은 "그동안 사서에는 나오지만 고고학적 증거가 불충분했던 고조선 건국 시기가 최근 연구 성과로 (근거가) 뚜렷해짐에 따라 서술 방식을 변경했다"고 설명했다.
또 기존 교과서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세기∼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 교과서는 ‘신석기시대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의 랴오닝(遼寧), 러시아의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가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기술해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겼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홍천, 경기도 가평, 인천시 계양구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 전래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올해 국사 교과서를 수정하게 한 가장 큰 동인은 고고학적 유물의 발굴과 과학적 연대 측정의 결과다. 그동안 한반도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0세기쯤이라는 한국 고고학계 통설은 이 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대 측정으로 흔들리게 됐다.
최몽룡 교수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출토된 청동기는 기원전 1510년쯤으로 추정됐다. (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발간, 2004)
진주 남강 수몰지구에서 확인된 각종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은 연대가 BC 10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BC 15세기 무렵으로 조사됐다.
남강 수몰지구 중 선문대 이형구 교수(역사학과) 조사팀이 발굴한 옥방 유적의 경우 집자리터에서 나온 목탄 2점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각각 BC 1590-1310년과 BC 1620-BC 1400년이라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당시 이 교수는 “남강지역의 유적 연대는 대략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기원전 14∼기원전 13세기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 박물관이 다른 남강 수몰지구에서 발굴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 출토 목탄 2점을 측정한 결과에서도 BC 1420-BC 1100년, BC 1400-BC 1100년으로 나타났고 경남대 박물관 역시 서울대와 캐나다 토론토대에 시료측정을 의뢰한 결과 기원전 10세기를 뛰어넘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원 지역의 경우 청동기 시대가 남강 유역보다 더욱 올라가고 있다.
강릉 교동 주거지 1호의 경우 그 연대가 무려 BC 1878- BC 1521년으로 나왔고 다른 두 곳의 주거지도 중심 연대가 BC 15세기 무렵인 것으로 나타났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청동 도끼가 출토된 속초 조양동 청동기 시대 유적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연대 측정 결과 BC 1206-BC 830으로 나왔다.
 
진주 옥방5지구 각목돌대문토기 / 진주 옥방5지구 장방형집자리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 /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왼쪽부터)
 
뿐만 아니라 조선대 박물관이 발굴한 전남 순천 죽내리 청동기 시대 주거지도 외국 연구소에 탄소 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C 16세기- BC 15세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춘천시 신매리 유적, 강릉 교동 주거지, 전남 순천 죽내리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전기의 유물인 공열토기와 이중구연토기, 단사선문토기 등이 공통적으로 출토되기도 했다.
이에 앞서 양평 양수리의 두물머리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되는 무덤방 안에서 발견된 숯의 연대측정은 3,900±200B.P(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B.P)라는 절대연대를 보였다.
고고학자인 조유전 한국토지박물관장은 "남강 선사 유적만 해도 탄소 연대 측정치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연대를 BC 400- BC 500년쯤이라고 추정했다"면서 " 청동기 시대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과학적인 탄소연대 측정치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교과서 수정에 따른 고조선에 대한 기술에 대해 이견도 적지 않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역사교육과)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이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며 종래의 통설을 고수했다.
이에 대해 이형구 교수는 “기존의 교과서에 있는 청동기 시대 역사는 중국, 일본 사람들이 쓴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며 "고조선 영역이었던 한반도 서북지역의 청동기 시대 개막은 여러 가지 과학적인 증거로 보아 기원전 15세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내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은 “청동기 유물이 극소수 장신구이기 때문에 시대를 수정할 근거가 못 된다는 주장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청동기의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과 만주와 한반도에 이르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무시하는 견해”라고 반박했다.
이강승 충남대 교수(문화재위원)가 ‘청동기 있는 청동기 시대’와 ‘청동기 없는 청동기 시대’를 구분해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를 BC 10세기 아래로 본 데 대해 윤내현 소장은 “청동기 시대를 말해주는 유적(유물)은 청동기 말고도 얼마든지 있으며 과학적 탄소동위원소 측정 결과나 중국의 청동기 시대와도 비교한 데이터 등을 종합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BC 15세기를 넘어선다”고 주장했다.
윤 소장은 특히 “중국 랴오녕성 북부와 내몽고 자치주 경계에 있는 훙산(紅山) 지역의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면서 “한반도의 고인돌, 청동기 유물을 만주지역의 그것들과 비교 분석할 때 한반도 청동기 시대를 BC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증거들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고조선은 수정된 교과서에 역사로 기술됐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신화’라는 통설에 갇혀 있다. 또한 고조선의 실체를 둘러싼 강단 사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이견도 여전하다. 고조선이 명실상부한 ‘역사’로 자리잡기에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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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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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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