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History/01 동이문명관련·동북공정

[스크랩]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monocrop 2009. 2. 20. 18:18

 

    1974 2월 몇 명의 농민들이 진시황릉 동쪽 1.5km 지점에서 우물을 파던 중에 우연히 실제 사람·말과 같

    은 크기의 흙으로 빚은 병마용을 발견한다.이 우연한 발견으로 인해 2천년 넘게 지하에 묻혀 있던 유물들

    이 발견되기 시작했고,지금까지 병마용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 8,000,전차 100 여대 그리고 수 만

    개에 이르는 실물 병기(兵器)가 출토되었다.이 가운데 1호갱으로 불리우는 우군(右軍)”에서 사람과 말의

    실제크기로 빚은 인형들이 6천 여 점 발견되었고, 2호갱으로 불리우는  좌군(左軍)”에서  병마용 1,300

    와 전차 89 대가 출토되었다.또한 3호갱에서는 전차 1대와 4필의 말 그리고 68개의 토기인형이  발견되었

    는데,그 구조로 보았을 때 전체 지하군단을 지휘하는  총사령부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후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이 엄청난 지하군단의 주인이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일 것으로 결론을 내리게 된

    다.2000년 전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은 현재까지도 중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만리장성을 축조하였

    고,중국에서 잔혹한 전제통치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불로장생의 약을 찾기도 했던 진시황은 자신

    의 철권통치에 대한 천제(天帝)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생전에 자신을 위한  거대한 릉을 지으면

    서 사후에도 자신을 호위해줄 8000여 명의 채색토기 병사들을 함께 매장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병마용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학설이다.하지만  최근 학계 일부에서  병마용의 실제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만약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그 실제 주인이란 말인가? 

[서안에 있는 병마용박물관 전경]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이라는 학계의 정설에 최초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남경(南京)의 건축학자인

    진경원(陳景元)이란 분이다.그는 일찍이 1961년에 진시황릉의 보호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는데,1984년 이

    미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니라는 글을 발표하였지만,당시에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 다신 중국  학술잡지에 병마용의 주인은 결코 진시황이 아니다라는 글을 게재한다.이 글

    에서 그는 먼저 진시황이 려산() 밑에 매장되어 있다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사기(史記)>상의 “9,진시황을 려산에 매장하였다. 진시황은  즉위 초기부터 려산에  황릉을 축조하였

    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진시황이 려산부근에 매장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진원경은 이러한 <사기>상의 기록이 반드시 사실이란 법은 없다고 주장한다.진시황은 알려진 대

    로 지방 훈시중에 하북성 지역에서 병사했는데,당시 수도였던 함양(咸陽:진나라의 당시 수도는 서안에서

    조금 떨어진 함양이란 곳이었다)으로 돌아오기 위한 지름길은  낙양방면으로 황하를 건넌 후에 서안으로

    오거나, 아니면 낭자관(娘子關)을 지나 태원(太原)에 이른후,다시 북쪽 포두(包頭)으로 향하다가 서쪽으

    로 방향을 돌려 서안에 도착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어느 길을 택하든지 빠른 시간내에 함양으로 돌아온다

    는 일은 불가능했다. 특히 진시황이  생전에 자신의 뒤를  이을 태자를 정해놓지 않은 상황이어서,환관인

    조고(趙高)와 책사 이사(李斯)는  진시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가져 올 예기치 않은 사태를 우려하여 황

    제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함양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한 당시가  무더운 한 여름이었기에 시신의 부패

    를 막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황제의 시신은 하북성을 벗어나지 못했고,설사

    려산에 묻었다고 해도 그것은 죽은 황제의 의관(衣冠)만을 묻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960년대 초반

    에 진행되었던 현지 조사 후 작성된 보고서를 살펴봐도 현재 진시황릉 북쪽에  위치해 있는  다량의 토지

    지반위에는 건축물의 흔적이 없으며, 이로 미루어볼 때  궁전건축물의 주요부분으로서의 진시황릉 북쪽

    토지에는 진시황 당시에 전혀 건축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성과 외성 및 봉토 등의

    공정은 모두 진시황 사후에 이루어진 것들이다.또한 려산에는  항상 홍수문제가 심각하여  평균 3년마다

    한번씩 홍수피해를 입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다량의 흙을 파내야 하는 황릉공사가 이런 자연적 조

    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졌다고 할 수 도 없을 것이다. 

 

[서안에 있는 려산] 

 

    학계의 일반적인 주장과 배치되는 의견을 발표한 진원경은 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 실제 주인이 진시황의 고조모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진시황의 고조모가 되는 선태후(宣太后)는 원래 초나라의  왕족이었으나, 진나라 통일이전 혼란스러웠던

    6국시대에 국가간의 정략결혼에 의해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시집을 온 인물이다.그녀는 혜문왕과의

    사이에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혜문왕이 젊은 나이에 죽자 권좌에  오른  아들 무왕(武王)을 대신해 40

    년간 진나라를 통치했다.중국역사서에서는 선태후를 중국 최초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여성군주로  묘사하

    고 있으며,청나라 말기 중국대륙을 실제로 지배했던  서태후(자희태후)와 견주어 2000년전의 자희태후

    라고 칭할 정도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국최초로 권력을 장악했던 선태후를 병마용의 실제주인으로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

    가?이에 대해 진원경은 진시황이 생전에 황릉을 300() 확대하라고 지시했다는 역사기록에 초점을 두

    고 이야기한다.진나라 시기의 300()은  현재의 도량형으로  계산할 때 690m가 된다.이런 계산에 비추

    어볼 때,현재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병마용은 당연히 300()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

    고,그렇다면 병마용의 주인을 진시황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그 근거를  얻게 된다. 또한  사기(史記)

    비롯한 몇 몇 역사서에는 려산은 옹주(雍州) 신풍현(新豊縣)에서 남쪽으로 16리 떨어져 있고,진시활릉은

    신풍현에서 남쪽으로 10리 그리고 선태후의 릉은 신풍현에서 남쪽으로  14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

    다.이와 같은 기록에 근거하면 선태후의 릉이 진시황릉의 동쪽,려산에서 2km 떨어져  있는  서양촌(西楊

    村)과 하화촌(下和村) 일대에 위치하게 되는데,이곳이 바로 병마용이 발견된 부근이다. 

 

 

 

[병마용 내부모습] 

 

    이외에도 현재 발굴된 병마용의 몸체에서도 병마용의 주인이 선태후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몇몇

    병마용 군사의 머리부분을 살펴보면 당시 초나라 사람들만의 독특한 상투장식을 발견할 수 있으며, 검은

    색이 주를 이루던 당시 진나라의 의복과는 달리 병마용이 착용한 의복이 매우 선명하고 밝은 색상이라는

    점이다.또한 병마용 몸체에서 ()”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선태후의 성인 ()”와 일치하고 있

    다.

 

    만약 병마용이 선태후를 위한 부장품이라면 실제  선태후의 릉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하지만  아직까지

    선태후의 릉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병마용의 주인이 진시황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뒤집은 진원경의 이러

    한 주장은 몇 가지 예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실제 중국내 학계에서는 크게 주목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만 모두가 그렇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해 나름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과정만큼은 주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나만의 China Travelog
글쓴이 : Shangri-L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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