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밥'이다 [33]
- nuijbnnm
소통의 의지가 있다면,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지나친 경멸을 보내지 말라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어떠한, 그 모든 글쓰기는 온전히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사람의 내심의 정신작용을 외부로 향해 공표하는 정신 활동의 자유를 말한다. 정신적 자유권의 전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영역에 놓여 있다. 가령 작위적으로 작성된 공개 게시글이 상호 적대적 비방, 모욕, 명예훼손, 허위사실 등의 정도가 뚜렷하다고 할 지라도, 법적인 경계를 벗어나 도덕적 책임의식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원리에 기반하며, 그러한 틈바구니에서 건전한 생산적 '비판'이라는 것이 성장할 수 있었다. 토론의 마당은 자생적 자정능력에 대한 무한한 포용과 신뢰가 보장되어야 한다. 참여와 의사표현에 있어서 법의 잣대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면, 이것은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진솔한 의견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 토론마당 아고라 논객 미네르바의 게시글은 인간의 광의적 사고와 표현의 영역에서 보았을 때 위법적인 문제의 소지가 없다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힘없는 남녀노소 민초들이 모여드는 인터넷 담론의 마당에서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드러낼 수 있는 표현이 경우에 따라서 투박하고, 까칠하게 권력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잡아 가두는 것으로 노여움을 풀 것인가. 설령 담론의 마당에서 거짓 표현을 했다고 해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하위개념의 법이 상위개념인 도덕에 대해서 불순한 경멸을 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소 불명확한 추상적 의미의 법률 조항인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법적 효력이 사사건건 구체화 된다면, 법의 정의와 형평성이 송두리째 허물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권력집단이 그러한 법적 수단에 의존하는 것은 국민주권에 대한 겸손의 미덕을 버리고 '억압'을 선택하는 것임과 동시에, 여기에 공조하며 권력에 기생하려는 본능이 강한 일부 집단이 존재한다면 '시류에 편승했다'고 비난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는 권력기반을 스스로 취약하게 만들 뿐이며, 정체성을 잃고 불안해진 권력집단이 선택할 수 있는 반민주적 통치의 실체를 역사 앞에 반증해 줄 뿐이다.
미네르바의 구속은 암담한 한국 정치·경제의 현주소가 되었다
한치앞도 내다보기 힘든 한국경제의 현실, 그리고 이를 우울하게 걱정했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은 암담한 한국 경제와 정치의 현주소가 되었다. 자율적인 시장 기능에 역행하는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정책 요인들은 금방 시장에서 반대급부의 요인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파급효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잘못된 금융정책에 따른 시장의 실패를 감추려는 정부의 미봉책들은 포장이 화려해서 밤거리에 네온싸인처럼 아릅답게 보일 수 있다. 예를들면 금융당국의 환율조작 등의 인위적 시장 개입은 그런면에서 상당히 메이크업(make-up) 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체는 금명간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장 평가에 대한 자율적인 정보 유통이 통제된 상황에서, 어쩌면 미네르바 등장은 필연적이고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구속된 미네르바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미네르바가 '긴급체포'되었다는 사실만큼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사안은 아니다. 아무튼 인터넷 경제대통령의 대명사가 된, 소위 '미네르바'는 구속 되었다. 미네르바가 쓴 한 두편의 특정 게시글에서 '허위사실'의 형식적 표현이 발견되었다고 할지라도, 한편으로 미네르바가 선택한 표현상의 '문체'는 그가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안성맞춤 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네티즌은 미네르바가 당시 게시글을 통해 전달한 특유의 경제분석 정보가 새롭다거나 의미있는 것이고 타당성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해석이 가능했고, 상당한 신뢰 수준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전달하는 내용들은 다수의 네티즌들에게 경제분석의 틀을 넓혀주는 고급정보가 될 수 있었다. 정부는 미네르바의 구속사유를 정당화하려는 과정에서, 미네르바 때문에 20억 달러 정도가 추가적으로 소요되었다는 등 부적절하게 외환시장에 개입했음을 구체적이고 공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지경까지 갔다. 한국 금융시장에 대한 신뢰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부적절한 금융정책을 펼쳐놓고 이를 크게 자랑한 셈이니, 한마디로 과유불급(過猶不及),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된 꼴이다. 시장의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외환시장에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푸는 방식으로 개입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어서, 이는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엄격히 금지하는 국제 관행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은 외환시장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국가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 경제·무역상 불이익을 주고 있다. 현 정부의 환율정책을 비롯한 어설픈 시장정책은 한국 금융시장의 신뢰성에 큰 불신을 가중시켰고, 한달 앞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 속에 휩싸인 한국 경제의 속절없는 추락을 부추겨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벙커는 어쩌면 금융정책 관리 집단의 안락한 도피처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미네르바에게 전가하려는 모습이 너무 가소롭고 추하다
정부가 금융시장 관리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면해 보려는 시점은, 넌센스하게도 미네르바가 탄압받기 시작하는 시점과 비슷하다. 네티즌 논객이 게시글에 아무리 비관적인 분석과 극단적인 표현방법을 동원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나 창작물에 불과하며, 법적의 처벌을 해야할 만큼 크게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당국이 문제 삼고 있는 미네르바의 게시글은 큰 테두리에서 보았을 때 '문체상의 측면'에서 접근해서 판단할 필요가 있고, 이것은 명백하게 '표현의 자유'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즉 네티즌이 어떤 정보를 전달함에 있어서 표현상의 방법이나 문체의 선택은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미네르바의 게시글에 대한 정부의 대응 태도 자체가 못마땅하다 함은 이 사건에 관한 본질적 지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미네르바의 날카로운 눈이 지하벙커의 정적을 깨뜨리기라도 했기 때문인가. 자유로운 소통을 거부한 '지하벙커'에서, 그리고 그 문지기들이 정부 비판적 네티즌에 대한 마우스 스토커 짓으로 소일을 삼고, IP를 추적하고, 신원추적 등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진데, 결국 미네르바를 긴급체포해서 수갑을 채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게 해야만 지하벙커는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는지 반문하고 싶다. 위태롭게 무너지는 한국경제의 현실 만큼이나, 조급성을 드러낸 이명박 정부의 네티즌에 대한 이러한 대응 태도는 이미 '신기한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가십(gossip)거리가 되어 연일 외신을 타고 있다. 어쨌든 '만수 위에 백수'라는 최근 유행어는, 이 사건이 불거진 원인과 무관하지 않은 민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경제 감각이 둔해진 정부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메세지로 미네르바가 '허위사실'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금융시장의 위험성을 분석하고 전달하는 동안, 이명박 정부도 미네르바에게 경고성 언론플레이나 적대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함께 토론하며 여론을 수렴하려는 세련된 노력을 먼저 보였어야 했다.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금융시장 동향에 관한 투명한 정보들을 국민에게 전달하고 소통함으로써, 신뢰성이 담보될 수 있는 정책 추진 의지들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다. 내심 그물에 걸려들기를 바랬다는 듯이 특정 게시글을 이유삼아 긴급체포해서 구속의 사유 만들기에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은, 국가권력이 한 개인 네티즌을 상대로 할 일거리가 되지 못함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사유 만들기도 억척스러울뿐더러,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 또한 구차하기 짝이 없다. 미네르바의 특정 게시글 때문에 정부가 외환시장에서 20억달러를 추가적으로 더 소요하게 되었다고 항변하는 모습은 참으로 메이크업(make-up) 하다. 이명박 정부의 그러한 행위가 네티즌들로 하여금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 심각한 공포심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를리가 없을 것이다.
시민단체와 네티즌의 극심한 반발과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지하벙커의 속내를 보여주는 의지에 따라 미네르바에 대한 편향적 왜곡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미네르바가 인터넷 논객으로서 게시글에서 전하고자 했던 경제 분석 내용이나 표현방식과는 무관하게, 그가 전문대졸의 실업자라는 등의 신분이 부각되어졌던 것은 물론이고 사생활 영역까지 까발려지며 구속되어야만 했던 것은 불행이다. 미네르바에 대한 그 초라한 비난의 근저에 이명박 정부가 나서서 북치고 조중동이 장구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자화상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현 정부가 금융시장 대응 과정에 판단 미숙으로 초래한 정책적 과실마저 한 유명 네티즌 논객 미네르바에게 전가하려는 모습이 너무 가소롭고 추하다는 말이다. 지하벙커가 보여준 첫 작품으로서 소통정책은 다름아닌 네티즌 재갈물리기 정책이었던 셈이다.
권력 기생 본능이 강한 일부 집단이 공안정치 '시류(時流)'에 편승하다
미네르바가 소신을 가지고 전달하고자 했던 유의미한 경제 분석과 예측들은 수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충분한 평가와 인정을 받았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언론사는 그 중심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 미네르바 긴급체포 사건은 이미 국제적으로 '신기한 나라의 신기한 뉴스'거리가 되었다. 적어도 외신들은 미네르바의 게시글 내용들이 상당한 근거와 설득력이 있음을 인정하고,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네티즌에 대한 과잉대응을 비난하는 일색의 보도들이 잇따라 내보내고 있다. 오히려 미네르바 구속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하는 몇몇 언론이 국내에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국내 일부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해석과 여론을 애써 무시하며 반민주적인 성격의 논조로 연일 미네르바 잡기에 그 특유의 편향된 광기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미네르바의 게시글 일부를 문제 삼아 백수건달의 어설픈 사기행각 쯤으로 특정지우려고 몰두하는 듯한 뉴앙스의 한심스러운 보도 기사를 쏟아냈다. 굳이 조.중.동이라고 밝히면서 그 너절하고도 잡스러운, 정제되지 않은 선정적인 기사들을 조목조목 들추어 내고 싶지는 않다. 아예 아고라를 담아다가 돗자리에 늘어놓고, 남는 장사는 조중동이 다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사건에 대해서 왜 대부분의 외신기자들은 조중동과는 전혀 다른 논조의 기사을 쓰는지, 조중동 기자들은 스스로 자신들만의 그 편집증에 관하여 깊이 자성해보길 바란다.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파이넨셜타임즈(Financial Times), 블룸버그(bloomberg), 월스트리트저널(WSJ),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2009년 1월 8일 기사 / 一方、政府は経済危機が続く中で神経をとがら... 한편, 한국 정부는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신경이 날카로워 진 나머지...) 등이 보도한 미네르바 사건 관련 기사를 보면, 그 냉철하고 객관적인 사건분석과 보도 수준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조중동의 한계와 왜곡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관한 명료한 해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네르바 긴급체포 사건을 바라보는 국제사회 여론의 핵심은 한 네티즌의 '허위사실 유포'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데 한결같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근시안적인 금융시장 정책과 인위적인 금융시장 개입과정에서 초래된 시장실패의 책임론에 다급해진 이명박 정부가, 지나친 민간인 통제를 통해 일종의 책임회피성 마녀사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네티즌과 금융 애널리스트의 다양한 경제동향 분석 행위을 심리적으로 위축시킬 수 있는 통제 수준을 넘어, 한 네티즌을 긴급체포 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판례도 거의 없을뿐더러, 사실상 사문화 되다시피했던 '허위사실 유포'에 관한 법률 조항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판사·검사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의 입지가 이러한 구시대적 법 조항에까지 의존해야 할 만큼 취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민초들의 담론에 귀를 기울이고 신뢰와 소통의 노력보다는 통제의 방법을 먼저 강구하거나, 다수당의 권력기반을 통해 사안마다 힘으로 밀어 붙이려는 반민주적 의지가 너무 강한 나머지, 이제는 국민과의 상시적인 마찰과 저항에도 둔감해져 있어 보인다.
'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신성한 '밥'이다
삶의 힘겨움 속에서 가식과 허위사실이 가감없이 포용되는 민초들의 재래시장 바닥이 여론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새삼스럽게 굳이 따져볼 이유도 없다. 어린 아이가 아름다운건 솔직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솔직하다는 것은, 설령 그것이 누추하다고 할지라도 시장 바닥에서 만난 사람처럼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 때문이고, 그래서 아름답게 보인다. 토론의 광장에서 솔직하게 하고싶은 말을 한다는 것이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위축될 때 우리는 문득 민주주의를 염원하게 된다. 올 겨울은 참으로 마음이 춥다. 옹알이를 시작할 무렵부터 스스로 터득한 '표현의 자유'마저 굳게 얼어붙은 겨울이다. 얼음을 깨뜨리면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분노의 강에 서서 2009년을 맞는 심정이다. '표현의 자유'는 허위사실과 거짓마저 포용하며 책임지는 포괄적이고 풍요로운 사고의 근원을 이루는 '자유' 개념이다. 단지 미네르바의 울음소리가 민초들의 심금을 울렸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그를 긴급히 감금했을까. 한편으로 돈을 넉넉하게 처 바르지 못한 그만 그만한 학력과, 권력과 화폐의 노예들이 판치는 시장에서 백수라는 존재가 과연 남의 나라 이야기라도 되는지 몹시 의문스럽다.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참과 거짓의 경계를 따질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허위사실'이 전문대졸과 백수의 밥풀데기나 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지하벙커의 신파극을 보는 것은 참으로 역겹다. 독재국가가 그러하고, 제국주의가 그러하고, 역사 이래 많은 '허위사실'이 권력의 존립과 큰 밥줄이 되어 왔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초의 분노마저 '허위사실'을 들먹이며 단죄하려는 자들은, 제국주의 초상집을 기웃거리던 무탄트의 후손들이라도 되는가 싶다. '표현의 자유'를 자신의 입맛을 가르는 조미료 쯤으로 여기는 자들은 오늘도 지하벙커에서 제2의 미네르바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고나면 더 많아지는 수많은 미네르바를 어찌할 것인가. 지하벙커에서 즐기는 그들의 미네르바 사냥은 가소롭다 못해 슬픔이 밀려온다. 마침내는 노란토끼라도 나타나면 미네르바가 낳았다고 할 것인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허위사실'이란 법 조항은 여러 나라의 법학자들이 논증하고 있는 해석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더라도 지극히 편의적이거나,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범위의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태생적 그리고 정신적 자유권인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를 위축시키거나 인신을 구속시킬 만큼 큰 의미을 갖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역사에서 오랜 세월동안 '지구가 돈다(지동설)'고 표현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생명을 가르는 지극히 위험한 보편적 '허위사실' 이었지만, 극소수의 그들에게는 '표현의 자유'가 그 자체로서 자신의 존재(도덕)와도 바꿀 수 있는 '밥(life)'이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서 창조적이고 고귀한 생명이고 인간의 밥이 된다. 민초는 스스로 생산한 그 밥을 먹으며 진보와 민주주의 역사를 보듬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겨울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유'를 그리던 수 많은 미네르바가 눈을 크게 뜨고 봄날을 응시하며 힘찬 비상을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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