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목 칼럼>정조는 ‘독살’ 깜도 못된 불안의 화신
데일리안 | 기사입력 2009.02.1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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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박재목 칼럼니스트]세상만물이 군주 1인의 소유라는, 왕토사상이 지배한 시대에 임금이 정책과 시대의 문제점을 가지고 사사로이 신하에게 편지를 쓰면서 불만을 토로했다는 자체가 이미 카리스마나 통치권능을 상실한 것이다.
얼마 전 우유부단한 영조의 권력아집과 극심한 당쟁으로 비운의 희생자가 된 사도세자가 그의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어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번에도 진본이라는 가정 하에 공개된 그의 아들 정조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이 공개되면서 또 다른 역사논쟁이 야기되고 있다.
그동안 정조는 통치권능과 정체성이 모자란 집권자나 역사해석이 부족한 역사가들에 의해 '미완의 개혁군주 독살'이라는 안타까운 이미지로 포장되어 성군(聖君)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래서 이를 가지고 위정자들은 현실 정치의 반대파들을 정조의 독살에 빗대어 반개혁 세력, 수구집단으로 몰았고, 역사가는 관심 확장과 허장 스토리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동안 순조 이후 부패하고 무능한 세도정치 집단들도 자신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조에 대한 정보를 개혁군주이자 학구적이고 점잖은 선비 스타일의 진보 군주로 치장했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임금을 독살하는 양상으로, 결국은 조선 역사 전반을 개판으로 만드는 꼴을 연출했다. 일제와 어용 친일학자들은 정조의 죽음을 독살로 기술하여, 조선 후반기 한민족 역사 자체가 일제에 의해 무너진 것을 당연시 했던 것이다.
임금 말 한마디로 금방 목숨이 날아가는 절대왕정 시절에 어찰로 국정장악을 도모했다는 주장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리고 독대조차 엄정히 차단되던 상황에서 임금의 비밀편지가 하루아침에만 세 차례나 전해졌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그동안 정조에 덧씌운 성군(聖君), 호학(好學), 막후정치 달인, 개혁, 노회한 정치가, 정적 아우른 소통 등의 어설픈 이미지는 이제 말끔히 종식되어야 한다. 이는 조금의 양식과 약간의 역사적 판단만 있어도 주장할 수 있는 관점이다.
정조의 어설픈 본색을 역사적 사실로 조명해야
소위 개혁군주라 일컬어지는 아둔한 정조 이산(李祘)은 몸과 마음을 널리 가진다는 의미인 '홍재(弘齋)'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인 개혁과는 먼 권력 집착과 보복, 단견적 통찰력, 국제적 정치외교 역량 결핍, '남의 탓-주변 탓-과거 탓' 등에 집착하는 의존적 군주에 안주했다.
그러다가 결국 18세기 말의 급변하는 세계적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깨우치지 못하고 조선 500년 망국의 길을 스스로 개창하고 만 것이다.
그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상심했다. 아마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심한 내적장애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래서 조급성과 불안, 의심과 권력집착 증상을 보이는 전형적인 지성장애자였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을 때, 조선을 말아 먹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원조(元祖) 김조순에게 맡긴 그의 아들 순조의 나이도 11살이었다.
이런 전차로 정조는 화병으로 죽을 때까지 앞날을 통찰하지 못하고, 눈앞의 적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정치에 매몰되었다. 그 첫 번째 해답은 집권 초 홍국영에게 의탁해 4년간의 세도정치에 몰두했다.
그 다음 외척간의 경쟁에서 국정주도권을 잡은 노회한 김조순에게 조선의 미래를 맡겼다는 것이다. 김조순이 누구던가? 정조가 죽을 당시 김조순은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시파이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동조했다. 김조순은 2년 후 자신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만들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정권을 장악하고 정순왕후가 세상을 뜨자 김조순은 벽파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조정을 독차지했다.
결국 노론 벽파 영수였던 심환지조차도 김조순을 감당하지 못했다. 1806년 기어이 김조순은 죽은 심환지의 관작까지 추탈했다. 이처럼 정조는 홍국영, 심환지, 김조순 등의 야심조차도 판별할 수 없었던 정치적 무능 상태였다.
정조의 총신이자 사돈,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은 바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시도해 70년 안동 장김의 권력 전횡, 매관매직, 민생약탈, 국정파탄, 조선망국을 자행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부왕이 정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장인 김조순을 상대로 잠시 의욕적으로 정치개편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아들 효명세자까지 희생시키며, 죽을 때까지 행동과 권한이 위축된 반쪽짜리 임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개혁의 마지막 열쇠였던 정조의 안타까움
정조가 집권한 시기(1776~1800)에 유럽은 산업혁명 기틀과 사상적 시민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근대화 물결이 새로운 인간정신을 압도해 나갔고, 신대륙은 미국독립전쟁 등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가 구축되고 있었다.
중국 청나라는 130여년의 강건성세康乾盛世)가 서서히 몰락의 기운을 맞으며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있었고, 일본은 임진왜란 후광으로 도자기 등 세라믹 산업을 주도하여 네덜란드 무역루트를 활용한 난학(蘭學)과 상업무역으로 등으로 급격한 산업자본을 축적하면서, 일본 근대화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싹틔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런 막중한 역사적 변혁의 시기를 망각하고, 정조는 오직 주적(主敵)도 없는 전쟁놀이와, 명분과 경쟁력도 없는 수도이전(천도)을 획책하며,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국부(國富)를 아무쓸모 없는 수원 화성 짓는 것에 모조리 탕진하면서, 아무 듣는 이 없는 무적방시의 개혁만 만발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정조는 왜 그 돈을 국제무역이나 국내 상업, 또는 해상무역을 위한 선박 건조, 유럽과 미국 등 아메리카 신생국들과의 교역에 활용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일본 막부는 그렇게 했다.
그러니 일본 막부 정권은 이미 망해가는 조선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정조 시대에 조선통신사는 이미 에도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그의 아들 순조 1811년에 쓰시마를 끝으로 막부는 더 이상 조선통신사를 받지 않았다.
한편 정조 시대 청나라는 이미 조선을 관리할 수도, 지켜줄 수도 없는 무능 제국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조는 남은 약간의 국부(國富)로 규장각을 지어 '그들만의 잔치'에 몰두하다가 정적(政敵)들만 양산했다. 노론과 소론, 노론과 남인, 시파와 벽파의 극렬한 분열과 갈등만 조장한 것이다.
이런 관계로 정조의 조급성과 좁은 식견으로 정권을 잡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세력들은 결국 초근목피의 조선경제와 민초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그러면 조선 개혁의 마지막 기회였던 정조는 왜 자신의 행동이 사회몰락과 정치혼란을 초래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조급성과 불안, 그리고 파벌 조성으로 실학적 이상향과 도덕적 실용정치의 지침을 파탄내고 말았을까?
정조 집권 초기에 이미 퍼진 권력아집의 기운
이번 299편의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와 정조 시대를 더불어 살펴 볼 때, 외형적으로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1752~1800년, 집권 24년 3개월)가 과연 본질적으로 "조선을 민생과 함께 개혁하려고 했을까?"하는 의문이 진하게 전해온다.
그러나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노론 벽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시파조차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 자신의 안위, 왕권 강화에 대한 조급성과 분노, 불안과 불신으로 매몰되어 있다가 결국 울화병으로 삶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도의 길을 닦았지만, 궁중 내외의 이해관계에 휘말려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의 대리청정을 거쳐 이듬해 25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홍국영 일파의 야심가 그룹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탱하면서 철저히 자신의 내면을 숨겼다. 그러다가 왕위에 오르자 편지에서 보듯이 그의 태도는 성급한 다혈질과 조급성으로 돌변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 하는 한편, 파당에 의존하고 자신의 입맛에만 맞는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 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와 재물로 아부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홍국영은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이에 홍국영은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고, 이를 빌미로 정조는 집권4년 만에 홍국영을 숙청했다.
이로 인하여 정조 시대에는 임금 스스로가 권력 독점의 맛을 정치 전반에 본격적으로 퍼지게 만들었다. 세도정치의 씨가 잉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18세기 후반 긴박했던 세계적인 산업과 문화발전에 대한 관심을 국가발전 전략으로 연계시키지 못했고, 오직 자신의 안위와 왕실보호에만 몰두한 아집과 불안의 집권자였다.
국가발전보다 왕권 보호와 명분에만 집착해
또한 정조는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한 편협한 국수주의적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조선 민족주의를 독자적인 국가 에너지로 결집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체계를 민생의 편익과 실용으로 가치화시키지 못했다.
그는 망하고 없는 명나라를 제사지내고, 당시 세계 주류를 장악한 청나라를 오랑캐로 배척한 아둔하고 무식한 집단을 용기 있는 지식인이라 칭송했다. 정조는 '존주휘편(尊周彙編)'에서 척화를 주창하다 스러져간 그들의 충절을 "해와 별처럼 빛나고 하늘과 땅에 견줄 만하다(炳日星軒天地)"고 했으나, 그들의 아둔함을 비판할 국제적․시대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유럽과 미국은 근대를 향해 요동치고, 청나라와 일본은 역사가 놀랄 정도로 변혁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명분에 찌든 척화 인사를 기리는 책 한권 변변치 못함을 부끄럽다고까지 한탄했다. 자신과 왕권에 대한 충절만 중요했지 국가발전이나 시대정신은 결핍된 군주였다.
자유로운 문체까지 핍박한 권력 독선가
이처럼 정조는 정주 성리학의 도그마에 매몰되어 개혁적 지식인들이 갈망했던 사회 체계의 변혁을 외면하면서, 겉으로만 실사구시와 실용지식을 외쳤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모순과 문제점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시대정신을 '무늬만의 개혁'으로 치부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개혁적 사고와 역량을 지녔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등 대표적 실학자들을 언제나 권력의 변두리에 두면서 노론과 주자성리학의 벽으로 그들을 경계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왕권의 침탈이 우려되면 그들을 내쳤다. 특히 당대의 석학이었던 홍대용과 정약용을 적극 활용하는 것에도 주저했다.
또한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자유로운 문체가 사상의 자유와 혁신적 사고를 확산시킨다는 이유로 이를 잡문이라고 하면서 고정된 성리학 문체로 복원시킨다는 미명 아래 이를 탄압했다.
정조는 18세기 말 자유로운 사상의 영역을 단순히 청의 문화에 경도된 것으로 몰아붙이면서 그것을 이전에 오랑캐 이미지와 결부시키며, 패관소품류의 잡문으로 경시했다.
《연암일기》의 박지원은 이에 탄식했고, 이를 두고 정조는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이러한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개인적 목적을 달성해 나갔다.
즉, 정조는 당시 남인들이 서학을 학문으로 익히는 것에 대해 노론 세력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문체반정이란 묘수로 사회 혁신적 분위기를 탄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군주, 조선의 부흥기로 알고 있는 정조의 시대는 사실 알고 보면 무수한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세손이었던 시절부터 혼란스러운 정치권력의 중심에 놓여있었던 한계를 포용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외형적 개혁에만 집착…현실 파악할 창조적 역량 부족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자신의 정당성 문제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정적들의 공격을 연착륙시킬 방책 보다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파가 자신을 반대하는 벽파에게 수적으로, 또한 영향력 면에서도 뒤떨어진다는 환경만 직시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당파를 기웃거린 결과를 연출하고 말았다. 오직 반대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친위세력 구축에만 국가의 개혁 역량 모두를 소비하고 만 것이다.
이번 심환지 편지에서도 나타났듯이, 무리한 친위세력의 양성과 왕권 강화의 집착으로 정조는 자신의 개혁정책이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집권기간 동안 내내 수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규장각(奎章閣), 장용영(壯勇營), 초계문신제(정3품 이하인 당하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재교육시킨 제도로 왕권강화책으로 활용) 등은 국정의 효율성과 백성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결국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려는 개인적 목적에만 활용되었다. 당연히 국가 전체의 지식 확장과 조정의 능력 향상에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조는 자신의 정적들이 노론 벽파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하여 그들이 더 단단하게 뭉치게 만드는 부작용만 계속 연출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탁월성과 도덕적 우월성만 강조하여 그것을 기치로 세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고수하고자 했으나, 설득과 소통, 그리고 합의의 정치영역을 축소시키는 악영향을 초래하고 말았다.
정조는 지방개혁에 있어서도 아전이라는 중간관리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정조는 지방의 문제들은 수령의 능력으로 충분히 고쳐질 수 있는 간단한 문제로 치부했다. 아전의 횡포 역시도 수령의 교화와 선정으로 고쳐질 단순한 문제로 보았다. "만약 수령이 그칠 줄 안다면 하찮은 간사한 아전이야 그 낄 것이 있겠는가?"라고 정조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당시 이전부터 지방 아전들은 그리 만만한 집단이 아니었으며, 지방 토호로서 중앙정계와 연계된 큰 권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지방 권력현실을 모른 채, 정조는 탕평책이라는 명분 아래 수시로 자신의 친위 세력을 지방에 내려 보냈다.
이는 결국 잦은 인사이동에 따라 수령의 자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다시 아전에게는 점점 더 큰 권한을 주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상황이 고착화되자 언제 바뀔지 모를 형국에서 수령은 수령대로 자신의 욕심을 빨리 채우고 더 나은 관직을 위해 백성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조는 당시 지방의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 중 하나인 탕평책이라는 외형의 명분만 고집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는 그 다음 순조 시대에 조선 500년 최고의 아사(餓死)와 농민봉기, 도적의 반란을 확산시켰다. 순조시대의 고통은 순전히 정조의 개혁실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균형과 소통의 진정한 가치 인식했어야
또한 청요직(당대에 가장 깨어있는 관료들이 공평무사하고 평등하게 일처리를 하는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살아있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관료집단 > 의 혁파와 대신권의 강화도 결국 실추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추동력을 얻으려는 정조의 개인적 야심에서 나왔다.
이러한 정조의 편협한 허구적 개혁구상은 조선의 정치적 특성인 공론정치를 붕괴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조정내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붕당이 사당화(私黨化)․집단화․세도화 되는 치명적인 모순을 야기했다.
그리고 견제와 균형의 상실은 정조의 사후 '세도정치'라는 망국적인 승자독식의 정치형태를 초래했다. 청요직의 혁파와 대신권의 강화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 백년대계의 큰 그림에서 출발해야 했으며, 이로 인한 여러 시사점에서 배울 가치는 정치집단간 '균형-소통-상생'의 추구여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미래 지향적 발전의 영역을 간파하지 못했고, 설득과 합의를 통한 정치, 현실과 이상의 차이 인정, 정치집단간 균형과 소통 필요 등을 알지 못한 '그들만의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개혁실패는 순조 때의 극심한 빈곤과 사회혼란, 세도정치, 관료의 권력집착과 민초 약탈 등의 악영향을 양산하는 사회 모순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
정조는 개혁이라는 미명 대신에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인정하고 개인이 아니라 국가, 왕실이 아니라 백성, 자신의 코드가 아니라 미래 비전의 정치를 추구했어야 했다.
따라서 자신의 정책이 틀리다면 그것을 빨리 포기할 줄 아는 포용과 겸손, 그리고 독단의 정치가 아니라 다른 정치적 이상을 가진 집단과의 합의와 참여를 통한 정치, 그리고 그러한 집단들이 균형과 분권의 가치에 정치개혁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성을 먼저 깨달아야 했다.
세계적 변혁의 물결 외면한 정조의 좁은 식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조의 시대 18세기 말기는 지구촌 전체가 개벽하던 시기였다. 서양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모든 가치가 제국의 무역과 영토침탈로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와 같이 세상의 소통에 어두워 장엄하던 청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축적한 도자기 자본으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난학'이 꽃을 피우면서 유신의 기틀, 제국의 초석을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막중한 시기에, 정적들의 재물로 나라의 상업과 산업자본을 이루기에도 벅찬 시기에 그 아까운 국부(國富)를 아버지 사도세자를 애도한다는 개인적 복수심에서 수원 화성을 지었다. 결국 막대한 국부를 허비한 것이다.
또한 18세기 움텄던 실사구시 신기술의 움직임을 민생에 활용하지 못하고 실험적인 차원에서 그치고 말았다. 결국 왕권 강화만 생각하다가 청나라를 통해 들어 온 막강한 신기술의 가치를 놓치고 말았다.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등 소위 실학파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그들을 유배 또는 방치로 일관했다. 우수한 개혁인재를 활용할 줄도 몰랐던 것이다.
정조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
이번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발굴을 계기로 우리는 역사의 치장이나 역사의 시나리오를 야심과 욕심으로, 팩트(Fact)가 아닌 팩션(Faction)으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두려운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정조는 독살이 아니라 조급성과 권력불안으로 스스로 무너져 갔고, 그로 인하여 조선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조 시대 최후 승리자는 김조순 등 안동김씨 일파였고, 심환지 등 노론 벽파조차도 불안과 불신에 찌든 정조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그냥 기다렸다.
그들에게 정조는 한마디로 독살할 가치조차도 없었던 임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으로 접근해 볼 때, ´이명박 정부'는 소통(疏通)과 하심(下心)의 부재라는 일부 비판 관점에서 자허원군(紫虛元君)이 지었다는 성유심문(誠諭心文)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는 꼭 불경과 성경에 나오는 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이 말은 유교의 명심보감 정기편에도 나온다. 원군(元君)은 도가(道家)에서 받드는 여자의 선인(仙人)이며, 성유심문(誠諭心文)은 도가의 경전으로 '정성껏 마음을 깨우치는 글"이란 뜻이다.
자허원군은 이렇게 말했다. "총명한 사람에게도 어두운 점이 많아서 잘 도모하려는 일이 생각대로 안 되는 수가 있다. 남에게 손해를 주면 마침내는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되고, 권력에 의지하면 화가 따른다."
또한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절제하지 않음으로 인해 집안이 망하고, 청렴하지 않음으로 인해 지위를 잃어버린다. 항상 잘못을 한탄하고 두렵게 여겨, 위로는 하늘이 내려다보고 아래에서는 땅이 알고 있으므로, 오직 바른 길만 지킬 것이며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것이다."고 했다.
정조는 왜 이 역사적 교훈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이 때문인가? 어느덧 필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한 줄기로만 남아 있던 정조의 본질을 이번 편지 공개를 통하여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우유부단한 영조의 권력아집과 극심한 당쟁으로 비운의 희생자가 된 사도세자가 그의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가 공개되어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번에도 진본이라는 가정 하에 공개된 그의 아들 정조가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이 공개되면서 또 다른 역사논쟁이 야기되고 있다.
그동안 정조는 통치권능과 정체성이 모자란 집권자나 역사해석이 부족한 역사가들에 의해 '미완의 개혁군주 독살'이라는 안타까운 이미지로 포장되어 성군(聖君)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래서 이를 가지고 위정자들은 현실 정치의 반대파들을 정조의 독살에 빗대어 반개혁 세력, 수구집단으로 몰았고, 역사가는 관심 확장과 허장 스토리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동안 순조 이후 부패하고 무능한 세도정치 집단들도 자신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조에 대한 정보를 개혁군주이자 학구적이고 점잖은 선비 스타일의 진보 군주로 치장했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임금을 독살하는 양상으로, 결국은 조선 역사 전반을 개판으로 만드는 꼴을 연출했다. 일제와 어용 친일학자들은 정조의 죽음을 독살로 기술하여, 조선 후반기 한민족 역사 자체가 일제에 의해 무너진 것을 당연시 했던 것이다.
임금 말 한마디로 금방 목숨이 날아가는 절대왕정 시절에 어찰로 국정장악을 도모했다는 주장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리고 독대조차 엄정히 차단되던 상황에서 임금의 비밀편지가 하루아침에만 세 차례나 전해졌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그동안 정조에 덧씌운 성군(聖君), 호학(好學), 막후정치 달인, 개혁, 노회한 정치가, 정적 아우른 소통 등의 어설픈 이미지는 이제 말끔히 종식되어야 한다. 이는 조금의 양식과 약간의 역사적 판단만 있어도 주장할 수 있는 관점이다.
정조의 어설픈 본색을 역사적 사실로 조명해야
소위 개혁군주라 일컬어지는 아둔한 정조 이산(李祘)은 몸과 마음을 널리 가진다는 의미인 '홍재(弘齋)'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인 개혁과는 먼 권력 집착과 보복, 단견적 통찰력, 국제적 정치외교 역량 결핍, '남의 탓-주변 탓-과거 탓' 등에 집착하는 의존적 군주에 안주했다.
그러다가 결국 18세기 말의 급변하는 세계적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깨우치지 못하고 조선 500년 망국의 길을 스스로 개창하고 만 것이다.
그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크게 상심했다. 아마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심한 내적장애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래서 조급성과 불안, 의심과 권력집착 증상을 보이는 전형적인 지성장애자였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그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을 때, 조선을 말아 먹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원조(元祖) 김조순에게 맡긴 그의 아들 순조의 나이도 11살이었다.
이런 전차로 정조는 화병으로 죽을 때까지 앞날을 통찰하지 못하고, 눈앞의 적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정치에 매몰되었다. 그 첫 번째 해답은 집권 초 홍국영에게 의탁해 4년간의 세도정치에 몰두했다.
그 다음 외척간의 경쟁에서 국정주도권을 잡은 노회한 김조순에게 조선의 미래를 맡겼다는 것이다. 김조순이 누구던가? 정조가 죽을 당시 김조순은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시파이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동조했다. 김조순은 2년 후 자신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만들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정권을 장악하고 정순왕후가 세상을 뜨자 김조순은 벽파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조정을 독차지했다.
결국 노론 벽파 영수였던 심환지조차도 김조순을 감당하지 못했다. 1806년 기어이 김조순은 죽은 심환지의 관작까지 추탈했다. 이처럼 정조는 홍국영, 심환지, 김조순 등의 야심조차도 판별할 수 없었던 정치적 무능 상태였다.
정조의 총신이자 사돈,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은 바로 세도정치(勢道政治)를 시도해 70년 안동 장김의 권력 전횡, 매관매직, 민생약탈, 국정파탄, 조선망국을 자행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는 부왕이 정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장인 김조순을 상대로 잠시 의욕적으로 정치개편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아들 효명세자까지 희생시키며, 죽을 때까지 행동과 권한이 위축된 반쪽짜리 임금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 개혁의 마지막 열쇠였던 정조의 안타까움
정조가 집권한 시기(1776~1800)에 유럽은 산업혁명 기틀과 사상적 시민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근대화 물결이 새로운 인간정신을 압도해 나갔고, 신대륙은 미국독립전쟁 등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가 구축되고 있었다.
중국 청나라는 130여년의 강건성세康乾盛世)가 서서히 몰락의 기운을 맞으며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있었고, 일본은 임진왜란 후광으로 도자기 등 세라믹 산업을 주도하여 네덜란드 무역루트를 활용한 난학(蘭學)과 상업무역으로 등으로 급격한 산업자본을 축적하면서, 일본 근대화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싹틔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런 막중한 역사적 변혁의 시기를 망각하고, 정조는 오직 주적(主敵)도 없는 전쟁놀이와, 명분과 경쟁력도 없는 수도이전(천도)을 획책하며,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국부(國富)를 아무쓸모 없는 수원 화성 짓는 것에 모조리 탕진하면서, 아무 듣는 이 없는 무적방시의 개혁만 만발했다.
지금의 관점으로 정조는 왜 그 돈을 국제무역이나 국내 상업, 또는 해상무역을 위한 선박 건조, 유럽과 미국 등 아메리카 신생국들과의 교역에 활용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일본 막부는 그렇게 했다.
그러니 일본 막부 정권은 이미 망해가는 조선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정조 시대에 조선통신사는 이미 에도에 들어가지 못했으며, 그의 아들 순조 1811년에 쓰시마를 끝으로 막부는 더 이상 조선통신사를 받지 않았다.
한편 정조 시대 청나라는 이미 조선을 관리할 수도, 지켜줄 수도 없는 무능 제국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조는 남은 약간의 국부(國富)로 규장각을 지어 '그들만의 잔치'에 몰두하다가 정적(政敵)들만 양산했다. 노론과 소론, 노론과 남인, 시파와 벽파의 극렬한 분열과 갈등만 조장한 것이다.
이런 관계로 정조의 조급성과 좁은 식견으로 정권을 잡은 안동김씨 세도정치 세력들은 결국 초근목피의 조선경제와 민초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그러면 조선 개혁의 마지막 기회였던 정조는 왜 자신의 행동이 사회몰락과 정치혼란을 초래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조급성과 불안, 그리고 파벌 조성으로 실학적 이상향과 도덕적 실용정치의 지침을 파탄내고 말았을까?
정조 집권 초기에 이미 퍼진 권력아집의 기운
이번 299편의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와 정조 시대를 더불어 살펴 볼 때, 외형적으로 개혁군주로 알려진 정조(1752~1800년, 집권 24년 3개월)가 과연 본질적으로 "조선을 민생과 함께 개혁하려고 했을까?"하는 의문이 진하게 전해온다.
그러나 그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노론 벽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지 기반인 시파조차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 자신의 안위, 왕권 강화에 대한 조급성과 분노, 불안과 불신으로 매몰되어 있다가 결국 울화병으로 삶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도의 길을 닦았지만, 궁중 내외의 이해관계에 휘말려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침내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의 대리청정을 거쳐 이듬해 25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며 홍국영 일파의 야심가 그룹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탱하면서 철저히 자신의 내면을 숨겼다. 그러다가 왕위에 오르자 편지에서 보듯이 그의 태도는 성급한 다혈질과 조급성으로 돌변했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 하는 한편, 파당에 의존하고 자신의 입맛에만 맞는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구축해 나갔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 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와 재물로 아부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홍국영은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이에 홍국영은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고, 이를 빌미로 정조는 집권4년 만에 홍국영을 숙청했다.
이로 인하여 정조 시대에는 임금 스스로가 권력 독점의 맛을 정치 전반에 본격적으로 퍼지게 만들었다. 세도정치의 씨가 잉태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 18세기 후반 긴박했던 세계적인 산업과 문화발전에 대한 관심을 국가발전 전략으로 연계시키지 못했고, 오직 자신의 안위와 왕실보호에만 몰두한 아집과 불안의 집권자였다.
국가발전보다 왕권 보호와 명분에만 집착해
또한 정조는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한 편협한 국수주의적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조선 민족주의를 독자적인 국가 에너지로 결집하는데 실패했다. 결국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체계를 민생의 편익과 실용으로 가치화시키지 못했다.
그는 망하고 없는 명나라를 제사지내고, 당시 세계 주류를 장악한 청나라를 오랑캐로 배척한 아둔하고 무식한 집단을 용기 있는 지식인이라 칭송했다. 정조는 '존주휘편(尊周彙編)'에서 척화를 주창하다 스러져간 그들의 충절을 "해와 별처럼 빛나고 하늘과 땅에 견줄 만하다(炳日星軒天地)"고 했으나, 그들의 아둔함을 비판할 국제적․시대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유럽과 미국은 근대를 향해 요동치고, 청나라와 일본은 역사가 놀랄 정도로 변혁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명분에 찌든 척화 인사를 기리는 책 한권 변변치 못함을 부끄럽다고까지 한탄했다. 자신과 왕권에 대한 충절만 중요했지 국가발전이나 시대정신은 결핍된 군주였다.
자유로운 문체까지 핍박한 권력 독선가
이처럼 정조는 정주 성리학의 도그마에 매몰되어 개혁적 지식인들이 갈망했던 사회 체계의 변혁을 외면하면서, 겉으로만 실사구시와 실용지식을 외쳤다. 다시 말하면, 현실의 모순과 문제점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시대정신을 '무늬만의 개혁'으로 치부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개혁적 사고와 역량을 지녔던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등 대표적 실학자들을 언제나 권력의 변두리에 두면서 노론과 주자성리학의 벽으로 그들을 경계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왕권의 침탈이 우려되면 그들을 내쳤다. 특히 당대의 석학이었던 홍대용과 정약용을 적극 활용하는 것에도 주저했다.
또한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자유로운 문체가 사상의 자유와 혁신적 사고를 확산시킨다는 이유로 이를 잡문이라고 하면서 고정된 성리학 문체로 복원시킨다는 미명 아래 이를 탄압했다.
정조는 18세기 말 자유로운 사상의 영역을 단순히 청의 문화에 경도된 것으로 몰아붙이면서 그것을 이전에 오랑캐 이미지와 결부시키며, 패관소품류의 잡문으로 경시했다.
《연암일기》의 박지원은 이에 탄식했고, 이를 두고 정조는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이러한 문체반정을 통해 정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는 개인적 목적을 달성해 나갔다.
즉, 정조는 당시 남인들이 서학을 학문으로 익히는 것에 대해 노론 세력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문체반정이란 묘수로 사회 혁신적 분위기를 탄압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화군주, 조선의 부흥기로 알고 있는 정조의 시대는 사실 알고 보면 무수한 모순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세손이었던 시절부터 혼란스러운 정치권력의 중심에 놓여있었던 한계를 포용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외형적 개혁에만 집착…현실 파악할 창조적 역량 부족해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시작된 자신의 정당성 문제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정적들의 공격을 연착륙시킬 방책 보다는, 자신을 지지하는 시파가 자신을 반대하는 벽파에게 수적으로, 또한 영향력 면에서도 뒤떨어진다는 환경만 직시했다.
그래서 여기 저기 당파를 기웃거린 결과를 연출하고 말았다. 오직 반대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친위세력 구축에만 국가의 개혁 역량 모두를 소비하고 만 것이다.
이번 심환지 편지에서도 나타났듯이, 무리한 친위세력의 양성과 왕권 강화의 집착으로 정조는 자신의 개혁정책이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집권기간 동안 내내 수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규장각(奎章閣), 장용영(壯勇營), 초계문신제(정3품 이하인 당하관 중에서 문학에 재질이 있는 자를 뽑아 국왕이 직접 재교육시킨 제도로 왕권강화책으로 활용) 등은 국정의 효율성과 백성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결국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려는 개인적 목적에만 활용되었다. 당연히 국가 전체의 지식 확장과 조정의 능력 향상에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조는 자신의 정적들이 노론 벽파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하여 그들이 더 단단하게 뭉치게 만드는 부작용만 계속 연출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학문적 탁월성과 도덕적 우월성만 강조하여 그것을 기치로 세워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고수하고자 했으나, 설득과 소통, 그리고 합의의 정치영역을 축소시키는 악영향을 초래하고 말았다.
정조는 지방개혁에 있어서도 아전이라는 중간관리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정조는 지방의 문제들은 수령의 능력으로 충분히 고쳐질 수 있는 간단한 문제로 치부했다. 아전의 횡포 역시도 수령의 교화와 선정으로 고쳐질 단순한 문제로 보았다. "만약 수령이 그칠 줄 안다면 하찮은 간사한 아전이야 그 낄 것이 있겠는가?"라고 정조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당시 이전부터 지방 아전들은 그리 만만한 집단이 아니었으며, 지방 토호로서 중앙정계와 연계된 큰 권력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지방 권력현실을 모른 채, 정조는 탕평책이라는 명분 아래 수시로 자신의 친위 세력을 지방에 내려 보냈다.
이는 결국 잦은 인사이동에 따라 수령의 자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를 일으켰고, 이는 다시 아전에게는 점점 더 큰 권한을 주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또한 상황이 고착화되자 언제 바뀔지 모를 형국에서 수령은 수령대로 자신의 욕심을 빨리 채우고 더 나은 관직을 위해 백성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조는 당시 지방의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 중 하나인 탕평책이라는 외형의 명분만 고집함으로써 상황을 더욱 더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러한 결과는 그 다음 순조 시대에 조선 500년 최고의 아사(餓死)와 농민봉기, 도적의 반란을 확산시켰다. 순조시대의 고통은 순전히 정조의 개혁실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균형과 소통의 진정한 가치 인식했어야
또한 청요직(당대에 가장 깨어있는 관료들이 공평무사하고 평등하게 일처리를 하는 지성과 행동을 겸비한 살아있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관료집단 > 의 혁파와 대신권의 강화도 결국 실추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추동력을 얻으려는 정조의 개인적 야심에서 나왔다.
이러한 정조의 편협한 허구적 개혁구상은 조선의 정치적 특성인 공론정치를 붕괴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조정내의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붕당이 사당화(私黨化)․집단화․세도화 되는 치명적인 모순을 야기했다.
그리고 견제와 균형의 상실은 정조의 사후 '세도정치'라는 망국적인 승자독식의 정치형태를 초래했다. 청요직의 혁파와 대신권의 강화는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 백년대계의 큰 그림에서 출발해야 했으며, 이로 인한 여러 시사점에서 배울 가치는 정치집단간 '균형-소통-상생'의 추구여야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미래 지향적 발전의 영역을 간파하지 못했고, 설득과 합의를 통한 정치, 현실과 이상의 차이 인정, 정치집단간 균형과 소통 필요 등을 알지 못한 '그들만의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개혁실패는 순조 때의 극심한 빈곤과 사회혼란, 세도정치, 관료의 권력집착과 민초 약탈 등의 악영향을 양산하는 사회 모순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했다.
정조는 개혁이라는 미명 대신에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인정하고 개인이 아니라 국가, 왕실이 아니라 백성, 자신의 코드가 아니라 미래 비전의 정치를 추구했어야 했다.
따라서 자신의 정책이 틀리다면 그것을 빨리 포기할 줄 아는 포용과 겸손, 그리고 독단의 정치가 아니라 다른 정치적 이상을 가진 집단과의 합의와 참여를 통한 정치, 그리고 그러한 집단들이 균형과 분권의 가치에 정치개혁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성을 먼저 깨달아야 했다.
세계적 변혁의 물결 외면한 정조의 좁은 식견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조의 시대 18세기 말기는 지구촌 전체가 개벽하던 시기였다. 서양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모든 가치가 제국의 무역과 영토침탈로 장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와 같이 세상의 소통에 어두워 장엄하던 청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축적한 도자기 자본으로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난학'이 꽃을 피우면서 유신의 기틀, 제국의 초석을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막중한 시기에, 정적들의 재물로 나라의 상업과 산업자본을 이루기에도 벅찬 시기에 그 아까운 국부(國富)를 아버지 사도세자를 애도한다는 개인적 복수심에서 수원 화성을 지었다. 결국 막대한 국부를 허비한 것이다.
또한 18세기 움텄던 실사구시 신기술의 움직임을 민생에 활용하지 못하고 실험적인 차원에서 그치고 말았다. 결국 왕권 강화만 생각하다가 청나라를 통해 들어 온 막강한 신기술의 가치를 놓치고 말았다. 정약용, 박제가, 박지원, 홍대용 등 소위 실학파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그들을 유배 또는 방치로 일관했다. 우수한 개혁인재를 활용할 줄도 몰랐던 것이다.
정조의 몰락이 남긴 역사적 교훈
이번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 발굴을 계기로 우리는 역사의 치장이나 역사의 시나리오를 야심과 욕심으로, 팩트(Fact)가 아닌 팩션(Faction)으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두려운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정조는 독살이 아니라 조급성과 권력불안으로 스스로 무너져 갔고, 그로 인하여 조선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조 시대 최후 승리자는 김조순 등 안동김씨 일파였고, 심환지 등 노론 벽파조차도 불안과 불신에 찌든 정조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그냥 기다렸다.
그들에게 정조는 한마디로 독살할 가치조차도 없었던 임금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차원으로 접근해 볼 때, ´이명박 정부'는 소통(疏通)과 하심(下心)의 부재라는 일부 비판 관점에서 자허원군(紫虛元君)이 지었다는 성유심문(誠諭心文)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는 꼭 불경과 성경에 나오는 말과 너무나 흡사하다. 하지만 이 말은 유교의 명심보감 정기편에도 나온다. 원군(元君)은 도가(道家)에서 받드는 여자의 선인(仙人)이며, 성유심문(誠諭心文)은 도가의 경전으로 '정성껏 마음을 깨우치는 글"이란 뜻이다.
자허원군은 이렇게 말했다. "총명한 사람에게도 어두운 점이 많아서 잘 도모하려는 일이 생각대로 안 되는 수가 있다. 남에게 손해를 주면 마침내는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되고, 권력에 의지하면 화가 따른다."
또한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절제하지 않음으로 인해 집안이 망하고, 청렴하지 않음으로 인해 지위를 잃어버린다. 항상 잘못을 한탄하고 두렵게 여겨, 위로는 하늘이 내려다보고 아래에서는 땅이 알고 있으므로, 오직 바른 길만 지킬 것이며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것이다."고 했다.
정조는 왜 이 역사적 교훈을 실천하지 못했을까? 이 때문인가? 어느덧 필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한 줄기로만 남아 있던 정조의 본질을 이번 편지 공개를 통하여 곧이곧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