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방사 헌병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80년 광주시민의 핏값 때문에 쥐박이는 군투입 못합니다.
혹시나, 지하벙커에서 군투입을 고민하고 있는 쥐새끼가 있다면 꼭 읽어보길 바랍니다...
군투입은 곧바로 '총알이 유턴할 것'이라는 경고의 의미로 작년 8월에 정리했던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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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박이가 군대 동원 못하는 이유는
80년 오월 광주시민의 피 값 때문
이번 촛불항쟁에서 청와대 저지선이 뚫리면 ‘군대를 투입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시는 분도 있지만, 또한 조갑제와 뉴라이트 등 일부 매국노들은 군대를 투입하라고 선동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80년 광주시민들이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맞을 총알들을 다 맞아버렸기 때문입니다.
87년 6월항쟁 때에도 전두환은 군대를 투입할 준비를 다 끝냈지만, 투입을 못했습니다. 왜? 80년의 악몽으로 군부에서 반대했기 때문이죠. 또한 88올림픽을 앞둔 87년 유혈사태를 막고자 했던 미국의 반대도 컸구요.
실제로 80년 광주민중항쟁에서 군부는 끔찍한 기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단, 시민들이 총을 들고 저항한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더 큰 충격은 시민들을 향해 쏘라고 명령한 총부리가 자신들을 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죠.
80년 5월 24일 광주 외곽에서 매복해 있던 전투교육사령부 부대원들이 이동 중이던 공수부대를 무반동포와 함께 집중사격 했습니다. 선두 장갑차와 뒤를 따르던 60 트럭 3대를 날려버렸죠. 공식적인 기록은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사격했다’고 합니다. (항쟁 기간 중 군대 사상자는 대부분 이날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광주에는 ‘일부 군부대가 시민군 편을 들어, 공수부대를 쏴 버렸다’는 소문이 파다했었습니다. 또한, 상식적으로 시민군은 군복으로 위장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매복 중 확인 없이 사격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는 공수부대를 쏜 부대의 성격입니다.
공수부대에게 사격한 부대는 당시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군인들이었습니다. 당시 광주 외곽에 있던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는 주로 전차병 교육 등 기계화부대 장병들 교육시키는 부대인데요. 이 곳 하사관급 이상은 직업군인으로 가족들이 대부분 광주시내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가족들을 통해 공수부대의 만행을 들었을 것이고, 공수부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겠죠.
그래서, 원리원칙대로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공수부대라는 심증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사격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것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공식적인 지휘관 증언이 없다면, 역사의 의문으로만 남겠지요)
또한, 당시 광주에 있던 향토사단 31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은 시민들에 대한 유혈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불명예 제대했습니다. 기무사에도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이 분은 그 후 88년 총선에서 광주지역 국회의원이 되셨죠..
정웅 소장은 개인적인 저항으로 그냥 유혈진압 명령을 거부하였지만, 만약 한단계 더 나가 부대원들에게 ‘총부리를 반란군에게 돌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사실 전세계 혁명사를 보면, 군대가 지배자의 명령을 거부한 경우가 많습니다. 419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군대가 출동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80년 5월 22일, 미국이 부산항에 항공모함을 들여놓은 것도, 북한에 대한 대비 보다 전두환에 반대하는 한국 내 군부를 제어하기 위해서 투입된 것입니다. 전두환으로도 통제하지 못할 상황이 오면, 미군이 직접 개입하겠다는 무력시위 였겠죠.
80년 오월 한 지역에서의 항쟁도 이렇게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는데, 87년 6월 전국적인 항쟁에 군대를 투입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리고, 전두환도 겁이 나서 투입하지 못한 군대를 쥐박이가 투입할 수 있을까요? 맘 속으로야 몇 번이고, ‘탱크로 깔아버려’ 외치고 싶었겠죠.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짝퉁 HID나 비정규직 로보캅 용역도 동원하잖아요.
80년 5월, 광주시민의 핏값으로 우리는 적어도 정권에 저항하다가 총 맞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항상 그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