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도 쿠시다(櫛田)신사에서 느낀 섬뜩한 전율
2009년 명성황후 전시관에서 되살아 났다
<여주 명성황후 전시실에 전시되어있는 명성황후 시해도 >
<쿠시다 신사, 큐슈 후쿠오카시 소재, 1992년 필자가 촬영한 필카사진>
<일본서기,神代記에 등장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제신으로 모신 쿠시타(櫛田)신사,일본 후쿠오카시
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의 낭인 "토우카스아키" 가 사용했던 칼이 봉안 되어 있다. 이 사진은 필자가 1992년 임나신론을 쓰기 위해 칠지도를 제작한 谷那 지명을 찾던 중, 큐슈 구마모토 현 [谷의 철산지]아래 아직도 사철로서 칼을 제작하고 있던 일본도 匠人 마쓰나가(松永源六郞)를 만나서 명성황후 시해도에 관해서 알게되었다.
<옆사진 구마모토縣 荒尾市(아라오시) 小垈山 기슭 북방에서 바다로 흐르고 있는 關川에서 사철을 모아서
칼을 직접 제작하고 있는 오른쪽 일본도 장인 마쓰나가씨-필자가 찍은 사진1992년>
시해사건에 참가한 낭인들 중에 구마모토 낭인이 80%였다고 했다. 현재 낭인의 후손도 구마모토에 살고 있고 그들이 2차에 걸쳐서 명성황후 생가에 와서 사죄하였다. 난 마쓰나가씨를 설득하여 후쿠오카시 쿠시다신사에 가서 어렵사리 시해칼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사진촬영은 못한다는 조건으로 , 그 때의 심정은 놀라움과 두려움, 등골에 전율이 느껴졌다. 촬영을 허락하지 않아서 못내 아쉬웠다.
위 사진은 필카로 찍은 사진이었다. 임나신론 출간(1995년)시 위 사진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칼이 쿠시다신사에 봉안 되고 있음을 알렸다.
몇년 후에KBS "역스"에서 방송되고 이슈화 되었다. 토우카스아키가 1908년에 쿠시다 신사에 칼을 봉헌하였다. 지금 부터 꼭 100년 전의 일이다.
사진 촬영 못했던 칼을 이 곳 전시실에서 마주하던 순간, 16년 전의 전율이 되살아 났었다.
시해자 '토우카츠아키'가 [민비를 베었을 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두번 다시 세상에 나와서는 안된다.]라며 시해 13년 뒤인 1908년에 일본 쿠시다 신사에 맡겨 현재까지 신사의 금고 속에 보관되고 있다. 1895년 양력 10월 8일 새벽에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여우사냥이란 작전 명으로 말이다.
<그림:조선왕비 살해 (리옹프와이어1895>
낭인들이 사용했던 칼집을 살펴보면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귀가 있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한 작전 암호명이 ‘여우사냥’이라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의 위대한 국모 명성황후를 여우에 비교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는 영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Pax Britannica의 시대였으므로 모방의 천재 일제가 같은 섬나라 영국의 ‘푸들(개)’을 자처한 영향력으로 보여진다. 영국에서는 여우사냥을 할 때 사냥개를 이용하던 시대였다. 사냥개(낭인) 꼴이된다.
실내 시해설 과 실외 시해설
이제까지 실내 시해설에 무게를 더 두고 있었다. 이곳 여주 명성황후 관련 전시실에서도 [옥호루]에서 시해 되었다고 실내 시해설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영사 였던 '우찌다 사다쓰지(內田定木+追)" 보고서인 '한국왕비 살해일건 제 2권'이 드러나면서 실외 시해설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
보고서에 의하면 경복궁 건청궁(乾淸宮)터 맨 흙바닥에서 살해 되었다고 한다. 더 자세한 것은 왕이 기거하던 '장안당' 뒷 마당에서 새벽에 살해 당했다고 한다. 일제가 실내 시해 쪽 이유도 조선 궁궐 유린 만행을 축소 은폐를 노린 속셈이었다.
<왼쪽 사진은 "명성황후관음상"이다. 일본 후쿠오카 고후무마치 소재 '셋신원'에 관음상이 세워졌다. 시해자 '토우 카츠야키'는 1908년 시해 일본도를 쿠시다신사에 맡기고 그 뒤 관음상을 절에 기부 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초에는 동상이었다가
1940년에 태평양전쟁당시 징발되어없어지고 현재것은 독지가의 도움으로 석상으로 만들었다고 함, 우측 칼 손잡이에 제작자 이름과 (一瞬電光刺老狐)라는 글구가 보인다 >
약 100년 후에 명성황후 시해한 선조 때문에 죄인이 된 후손들이 사죄차 한국을 방문한 기사를 살펴보자.
연합뉴스 최영수씨 기사와 사진이다.(2005년 5월9일자)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후손들이 8일 입국,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한국인 학자 등을 만나고 있다. 왼쪽부터 구니도모 시게야키의 손자 "가와노 다쯔미"와 이에이리 가가치의 손자 며느리 "이에이리 게이꼬" 이다.
일본의 천황은 절대 신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조선의 국모를 시해한 것은 대역죄인인 동시에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인간이다. 그 후손들은 대대 손손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야 할 짐이다. 한국에 겁이 나서 감히 올 엄두조차 생각 못했다고 소감을 피력하고 있었다. 한국기자들의 인터뷰조차 거절하던 영상을 보면서 죄값의 대물림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느꼈다. <우측사진 토우카츠아키 낭인이 쿠시다신사에 시해도를 봉납했다는 기록 대장>
백지영 - 총 맞은 것처럼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