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사관의 백제>와 <대륙사관의 백제> 통합은 고대사학계의 과제 !!
韓半島의 百濟, 中原大陸의 百濟
(中原大陸)의 백제에 대해서 상론(詳論)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의 조국 백제(祖國百濟)의
인식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이며 자학적이었던 가를 알게 한다.
그런데 이런 대륙사관(大陸史觀) 내지는 확대사관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륙의 백제와 한반도의 백제가 어떻게 연결
되어야 하는가? 심지어 이 두 개의 백제를 하나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각각 독립된 두 개의 제국(帝國)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것이냐? 또는 대륙의 백제가 한반도로 유이(流移)한 것이냐? 그리고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한다.
중국25사(宋書•梁書•晉書•魏書•北齊書)중 하나인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과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중 동성왕30년(東城王三十年) 조(條)에서 말하는 데로 백제는「시립국어대방고지(時立國於帶方故地)[처음 立國한 곳이 帶方
의 故地이다]」요, 「본여구려구재요동지동(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백제가 위치했었다]」
하였으니 백제와 고구려(高句麗)의 발상지는 중원대륙임이 분명하다.
최근(알려진 얘기지만) 대륙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보다도 더 오래 강역(疆域)을 유지했으며 반도의 백제는 나당연합군(羅唐
聯合軍)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대륙의 백제는 그 훨씬 뒤에 발해제국(渤海帝國)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史實)이
최근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백제의 개념은 지역적으로는 대륙과 반도의 두 백제로 보는 것이 옳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상(三國遺事上)의 백제(곧 半島百濟)와 중국25사 내지 중국측 사료에 기록된 백제(곧 大陸百濟)로 대별
(大別)해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사서(國內史書)에 대륙의 백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기술의 주류(主流)가 반도백제(半島百濟)로 되어 있고 중국사서도 마찬가지로 반도백제의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륙의 백제기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고대사학은 이 반도사관(半島史觀)의 백제와 대륙사관(大陸
史觀)의 백제를 연접종합(連接綜合)하는데 당면한 학문적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三國史記와 資治通鑑의 일치점에 관해
삼국사기•백제본기 동성왕10년조(東城王十年條)의 다음 기록은 틀에 박힌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본다면 해석할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대륙의 백제에 관한 기록이다.
十年魏遣兵來伐爲我所敗(三國史記•百濟本紀 東城王十年條)
「十年(AD488년) 위(魏)나라[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 산서성(山西省)에 도읍했던 탁발씨(拓拔氏)의 위(魏)]가 병사를 보내
우리(百濟)를 쳤으나 우리(百濟)때문에 패한바 되었다.」
이 삼국사기의 기록과 꼭 같은 것이 중국측사료인 자치통감[司馬光, 1019~1086의 著, 북송(北宋)의 학자]에도 있다.
永明六年 魏兵擊百濟 爲百濟所敗(資治通鑑, 136, 帝記二)
위(魏)는 선비족(鮮卑族)인 탁발부(拓拔部)가 화북(華北)에 세운 나라로서 북위(北緯), 후위(後魏) 또는 원위(元魏)라 불리
우는 남북조시대의 북조를 대표하는 나라이며 그 수도(首都)를 산서성평성(山西省平城 : 지금의 산서성大同)에 둔 나라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가 중원만주의 고구려영토와 한반도의 고구려영토를 지나서 한반도 서남단에 있는 백제를 치러왔다가
패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북방에는 당시 동방최대의 강국인 고구려의 강역이 도사리고 있다. 항차 동성왕10년(AD488년)은 고구려의 장수왕76년
(長壽王七十六年)에 해당하며 고구려전성기이다. 그러므로 해로(海路)나 현대전처럼 공로(空路 : 비행기)가 아니면 고구려의
땅을 뛰어넘어 한반도남단의 백제로 병력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런데 북위는 양자강(揚子江)의 물을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중원대륙을 통일하지 못하고 남조제국(南朝諸國)과 예리하게 대결하고 있었다. 그만큼 물에 약하고 미숙한 나라가 위(魏)나라
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魏)가 발해나 황해바다를 건너 한반도남단에 상륙했을 가능성은 전무(全無)한 것이다. 종래의 학계에
선 이 사료를 김부식(金富軾)의 오기(誤記)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위에서 본대로 자치통감에도 꼭 같은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 이 무렵의 백제의 대(對) 북위(北魏)의 전쟁기록은 중국
정사인 남제서 백제전에 소상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바 이때 이 전쟁의 터전(戰場)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대륙의 산동반도
(山東半島)였다. 그렇기 때문에 산동반도~요서일대(遼西一帶)에 입국(立國)하고 있던 백제국과 북위(北魏)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방(隣邦)이다. 상술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동성왕10년조(條)의 기록(上述)도 대륙사관의 사안(史眼)으로 보면 조금도
이상한 기록이 될 수 없다. 남제서•백제전에 실린 동성왕연대(東城王年代)의 대북위전(對北魏戰)에 관한 기록을 훑어보면
또 하나의 새로운 조국을 발견하는 느낌이 든다.
是歲(AD488年)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東城王)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 率衆襲擊 虜軍 大破之.
建武二年(AD495년)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披朝榮 忝荷節鉞 克攘列辟. 往姐瑾等並蒙光除臣庶鹹泰. 去庚午年(AD490년)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 乘奔追斬 殭屍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兇.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褒顯. 宜在褒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 邁羅王 贊首流為行安國將軍 辟中王 解禮昆為
行武威將軍 弗中侯 木幹那前有軍功 又拔台舫 為行廣威將軍 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위의 문장 첫머리의「시세(是歲)」를 四八八年 곧 永明六年(동성왕10년)으로 보는 이유는 그 뒤에 나오는「거경오년(去庚午
年 : AD490 영명8년)」과 견주어 추정한 연대인 것이다.「시세」이전의 문장에「시세」의 추정연대를 확인할 만한 글이 있었을
것인데 남제서 백제전 앞부분(서두부분)이 탈문(脫文)되어 이른바「차하궐문(此下闕文)」혹은「원궐(原㵐)」이라는 글자 다음
에「공란(空欄)」이 있고 이 공란에 있었던 탈문된 글은 지금으로 알길 없으며「시세」는 위의「거경오년(去庚午年)」으로써
추정하는 길 밖에 없다. 이에의하면 삼국사기나 자치통감의 기록이 말하는 488년(四八八年 : 동성왕9년, 영명6년)의「위군출병
규모(魏軍出兵規模)」는「발기수십만공백제(發騎數十萬攻百濟)」라 하였으니 대대적인 출병이다.
이 반격전에 참가했던 백제장군들의 이름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국내
사서에선 볼 수 없는 이름들이다. 그러므로 김부식, 김일연 등의 역사기술이 한반도서남단(韓半島西南端)의 백제역사에만
치중하고 대륙의 백제사는 전연 외면하고 있다. 더욱이 상기문(上記文)에서 주목할 것은 백제장군들의 이름 앞뒤에 기록된
작위(爵位)나 관직명(官職名)들이다. 종래 국내사료에선 찾아볼 수 없는 작위직명(爵位職名)들이 쓰여진 것으로 보아 당시
백제국의 행정제도를 짐작할 수 있고 이 중원대륙의 백제는 제왕후(諸王侯)를 거느린 봉건제의 천자국(天子國 : 황제국)인
국통대국(國統大國)이었음이 분명하다.
① 사법명(沙法名) -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매라왕(邁羅王)
② 찬수류(贊首流) -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벽중왕(辟中王)
③ 해례곤(解禮昆) -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불중후(弗中侯)
④ 목간나(木幹那) -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면중후(面中侯)
여기서 매라왕, 벽중왕, 불중후, 면중후 등 왕•후(王•侯)의 이름은 백제가 여러 봉건왕후를 거느린 국통대국(天子國)임을 입증
하는 이름들이다. 혹 이러한 왕후장군(王侯將軍)의 이름은 동성왕(東城王)이 남제의 숙원왕(肅願王)에게 제수(除授)해 줄 것을
청한 글이므로 백제의 봉건군주제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언급할런지 모른다.
실제로 상기(上記)한 백제전의 글은 동성왕이 숙원왕(482~493)에게 보낸 글인데 동성왕 자신을「신(臣)」칭하고 백제장군들을
임명하는 글앞에「금가(今假)[이제 임시로 임명하여]」라는 말이 있고 글 끝에는「복원천은 특민청제(伏願天恩 特愍聽除)」
라는 결어가 붙어있다. 즉「천은(天恩)을 엎드려 비오니 특히 측은히 여기사 청허제수(聽許除授)하여 주시옵기를!」이라고
했다. 이러한 중국사필(中國史筆)의 가필(加筆)•윤문(潤文)은 중국측사료의 공통적인 경향이기도 하다. 이러한「가필윤문」
을 액면대로 해석할 수 없는 상반되는 기록을 중국정사(中國正史) 속에서 허다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를 들어
보면 사기(史記卷110) 흉노전(匈奴傳)에 보면 「한역기상곡지십벽현 조양지이예호(漢亦棄上谷之什辟縣造陽地以予胡)」라는
글이 있다. 즉「진(秦)나라 때도 그랬지만 한(漢)나라 역시 상곡의 십벽현(什辟縣)을 버렸고 조양의 땅을 호(胡)에게 주었다」
고 했다. 아마도 이런 해석문을 액면대로「땅이 남아돌아서 버렸고 인심이 좋아서 주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의 중국측사료(말하자면 最近世 사료)에는 영국과 미국 혹은 구라파제국과 교역하고 통상한 사실을 적으면서
「영국−미국이 입조(入朝)하여 조공(朝貢)을 바쳤다」고 했다.
이러한 기술을 보는 현대의 중국인들 스스로 고소를 금치 못하는 기록들이다. 그런데 지난날 김부식류의 사대사관은 조공
운운(朝貢云云)을 그 어떤 자랑처럼 삼국사기에 대서특필 하였다. 한 예를 든다면 동성왕(479~501)과 동연대(同年代)인 고구려
장수왕(413~491)年代엔 견사입위조공(遣使入魏朝貢)의 기록을 45회 견사입송조공(遣使入宋朝貢)을 3회, 견사입남제조공
(遣使入南齊朝貢)을 2회, 견사입진조공(遣使入晉朝貢)을 1회, 도합(都合)51회의 조공사실을 적고 있다. 김부식의 사대정신은
후대(後代)들에게 무서운 해독을주었고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쇠퇴를 자초하게 하였다.
62년봄3월(六十二年春三月) 견사입위조공(遣使入魏朝貢), 가을7월(秋七月) 견사입송조공(遣使入宋朝貢), 63년봄3월(유십삼년
춘삼월) 견사입위조공(遣使入魏朝貢), 가을8월(秋八月) 견사입위조공(遣使入魏朝貢)」해마다 2~3회의 조공사실을 적는 것으
로 역사기록을 대신했으니 이와 같은 사대주의 발상이 풍미(風靡)하던 전근대(前近代)의 역사기록과 중화사필(中華史筆)의
기술(記述)을 지금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백제라는 나라는 적어도 700년 사직(社稷)을 이어온 대국(大國)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남제(479~502)라는 나라는 백제동성왕(479~501) 1대(一代)의 형년(亨年)과 꼭 일치한다. 그런데 그 동성왕이
남제의 숙원왕에게「臣自昔受封 世披朝榮…(신은 옛적에 봉을 받은 이래 세세토록 조정의 번영을 힘입어…)」이라는 국서
(國書)를 올렸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동성왕원년(東城王元年)에 건국한 남제로부터「옛적에 수봉(受封)하야 세세(世世)토록 남제국의 번영을 힘입었다 운운
(云云)」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항차 동성왕의 신하를 임명하는데 남제왕의 재가(裁可)를 받는다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위의 글에서「금가(今假)…특민청제(特愍聽除)」따위 글은 무시되어야 한다. 700년사직(七百年社稷)의
대국(大國)이오 그 당시 중원대륙의 북반(北半)을 석권한 백제의 동성왕이 겨우 23년간 형국(亨國)[그 23년사이에 7명의 임금
이 등락(登落)함]한 남제에게 신칭(臣稱)하였다는 얼토당토 않은 기록은 중화사필의 곡필(曲筆)이 분명하다.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의 약해(略解)>
이해에(서기488년) 북위(北魏)가 또다시 기병수십만(騎兵數十萬)을 발하여 백제(百濟)를 공격하여 백제국경선 안으로 들어
오니 동성왕(東城王)이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幹那) 등으로 하여금 무리를 이끌고
북위군을 습격하고 이를 크게 파(破)하였다」 건무2년(495년)에 동성왕은 사신을 보내 전달한 국서의 내용은「짐(朕)은 전에
봉(封)함을 받은 이래로 세세토록 조정의 번영을 힘입어 황송하게도 부절(符節)과 부월(斧鉞)[대장군에게 수여한다]을 지니게
되어」 열후(列侯)를 물리칠 수 있었다. 왕년에 저근(姐瑾)[백제장군명]등이 영예롭게 임관(任官)을 받아 짐과 국민은 모두
평안태평 하더니 지난 경오년(490년)에는 염윤[獫狁(험윤) : 여기서는 북위에 대한 원칭(原稱)]이 개전(改悛)치 않고 거병
(擧兵)하여 깊숙이 쳐들어 왔다. 짐(臣)은 사법명등을 파견하여 軍을 이끌고 역습하여 미명(未明)에 드리치기를 우뢰치는 소리
같이 하며 흉리(凶梨)[흉노(匈奴)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나, 여기서는 북위군(北魏軍)이다]가 장황(張惶)하여 붕괴함이 바닷물
이 밀리는 것과 같았다. 도망치는 것을 틈타 추격하여 사살하니 쓰러진 시체가 붉게 들판을 물들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기
(銳氣)를 꺾어 고래 같은 횡포(橫暴)는 그 흉아(兇牙)를 감추었다. 이에 지금 국가는 안정을 얻었으나 실로 사법명 등의 위략
(偉略)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공훈을 추심(追尋)하여 마땅히 표창(表彰)하여야 하겠기에 지금 사법명으로 하여금 행정로장군(行征虜將軍)•
매라왕(邁羅王)을 삼으며 찬수류로 하여금 행안국장군(行安國將軍)•벽중왕(辟中王)을 삼으며 해례곤을 행무위장군(行武威將軍)•
불중후(弗中侯)로 삼으며 목간나는 전에 군공(軍功)이 있었는 바 또 대방[臺舫 : 지명(地名)인 듯, 「대방(帶方)」과 동일’하지
않을까? ‘대누선(大樓船)을 뜻한다고도 하지만 拔(?)은 지명이나 국명을 뜻한다]을 함락시켰으므로 행광위장군(行廣威將軍)•
면중후(面中侯)로 삼는다. 이에 차 인사내용(此 人事內容)을 통고(通告)한다(伏願天恩特愍聽除).
임승국,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