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루트를 찾아서](6) 싱룽와 신석기 유적-동이의 발상 | |||||||||||
입력: 2007년 11월 09일 14:47:50 | |||||||||||
도시처럼 계획된 ‘8000년전 東夷마을’
차하이(사해·査海)에서 서쪽으로 200㎞ 떨어진 싱룽와(흥륭와·興隆窪)로 향하는 길이다. 싱룽와는 ‘중화시조취락(中華始祖聚落)’이라는 별명이 붙은 곳이다. 기자가 물었다. 서로 자기네 동네에서 나온 유적을 최고로 치는 것이죠.”
아닌게 아니라 서로 자기네 마을이 8000년 전의 것이고, 다른 마을은 7500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세계 최고(最古)니, 최대니 하는 것에 민감한 것은 우리나 그들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각설하고 우리 같으면 200㎞라면 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 하지만 도로망이 열악한 중국의 촌구석을 달리는 것인 만큼 4시간도 장담할 수 없다. 단순히 도로사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모습이다. 자욱한 먼지를 내뿜으며 달리는 버스는 곧 막다른 길에 닿아 낭패를 겪기 일쑤. 버스기사와 가이드는 억센 중국말로 수시로 대책을 논의하는데, 잔뜩 찌푸린 얼굴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시로 내려 마주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하지만 호떡집에 불난 듯 다투어 나서긴 하지만 뾰족한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듯했다. 물어물어 간신히 이어진 길을 따라 가니 어느 깡촌에 닿았다. 다 왔나 싶어 안도한 것은 찰나. 웬걸 길이 막힌 것이다.
준다. 그러나 마을사람이 “저기!”라고 가르쳐준 길로 갔지만 무신통이다. 역시 가도가도 싱룽와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100m 정도 앞에 허름한 입석버스가 가고 있으니 무작정 그 시골버스를 따라갈 수밖에…. 갑자기 절망감이 엄습한다. 저녁 6시가 넘는데….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여기서 포기해야 하나. 어두워지면 한줄기 불빛도 찾을 수 없는 허허벌판에서 길도 찾지 못할텐데…. 신기루처럼 다가온다. 드디어 마을이다. 지나치던 촌로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야트막한 저편의 구릉지대, 꿈처럼 펼쳐진 지평선을 가리킨다. 바로 그곳 차하이와 싱룽와를 잇달아 찾은 것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경향신문 탐사단은 바로 이곳, 성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자리잡고 있다. 82년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중국 고고학 역사상 100대 발굴 중 하나로 기록됐을 정도로 중요한 유적이다. 96년에는 우리로 치면 사적(전국중점보호단위)으로 지정됐다. 우한치 박물관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이곳을 역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해마다 많은 국내외 학자들이 오고간다고 소개해 놓았다. 하지만 탐사단이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찾아왔고, 인근 주민들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를 정도이니 어떻게 들 찾아온다는 것인지 원! 다소간 실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링허(대릉하·大凌河) 지류인 왕뉴허(牛河)와 맞닿은 싱룽와 유적이 갖는 의미는 같은 다링허 지류에 속한 차하이 못지 않다. 설명하면서 ‘용’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옥과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쓰지 않았다. 빗살무늬 토기에 대해서는 차하이와 같은 시대인 싱룽와 유적, 옥에 대해서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를 잇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면서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싱룽와는 왜 ‘중화시조취락’이라는 명성을 얻었을까. 83~94년 사이 7차례나 발굴한 조사단은 깜짝깜짝 놀랐다. 무려 175기의 집자리가 마치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주택단지의 형태로 고스란히 확인된 것이다. (차하이에서도 55기의 주거지가 발견됐지만, 싱룽와보다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4만㎡에 달하는 마을은 환호(環壕·적의 침입을 막으려 도랑으로 두른 것)로 보호돼 있었다. 집자리의 규모는 보통 60㎡(약 18평)인데, 가장 큰 두 곳은 140㎡(약 42평)를 훌쩍 넘었다. 중국학자들은 바로 이 대목을 주목한다. 추측하고 있다. 8000년 전의 마을에 벌써 2개의 씨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학계는 이 원시마을에 약 300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는 가정마다 경제적인 독립성을 지녔다는 얘기다. 또한 마을은 10개 정도의 열(列)을 지어 일정하게 구획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같은 배열에 살았던 가정끼리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함께 살았던 먼 친척까지 하나의 씨족마을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옛날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고 믿었나봐요.”(이형구 교수) 이것을 순장(殉葬)이라 한다면 훗날 동이족의 나라인 상(은)도 순장의 풍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제사용 구덩이에서도 돼지뼈가 다수 발견됐는데, (지금의 돼지머리처럼) 돼지는 8000년 전에도 제수용품으로 사랑받은 게 분명하다. 돼지 외에도 사슴뼈와 물고기뼈가 대량으로 나왔다. “돼지사육과 돼지숭배는 원시농업의 시작을 보여주는 단서이므로 차하이-싱룽와인들은 어렵과 수렵을 주요 생산활동으로 하면서 농업을 막 시작한 단계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차하이-싱룽와 문화라는 용어로 묶는다. 차하이, 싱룽와에서 동시에 출토된 옥과 정교한 빗살무늬 토기 덕분이다.
또한 확인된 175기의 주거지 가운데 5기가 동이의 문화인 홍산문화 주거지라는 점이다. 이것은 홍산문화(BC 4500~BC 2000년)가 싱룽와 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었음을 웅변해준다. 다만 차하이·싱룽와에서 발견된 옥결(玉결·옥귀고리)과 똑같은 것이 최근 한반도 중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7000년전 유적에서 나왔다는 사실만 우선 언급해두고 싶다. 중국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차하이와 싱룽와에서 발견된 빗살무늬 토기를 두고 “(발해문명을 꽃피운) 홍산문화의 근원이 중국중원에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중원(황허)과 동북(싱룽와)의 신석기문화는 서로의 특색을 지닌 채 발전했으며, 두 곳의 공통점은 중화민족의 발상지 중 하나라는 점이며 모두 영도자가 살았다는 것”이라고 견강부회했다. 그리고 발해연안에 있는 차하이-싱룽와는 중국인들도 인정하듯 동이의 영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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