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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석기시대 유적,을축년 대홍수가 부른 암사동유적

monocrop 2008. 8. 27. 01:14

을축년 대홍수가 부른 암사동유적

 



발굴 30여년 만에 보고서 완간 
1925년은 간지로는 을축년(乙丑年). 이 해 여름 한강 유역에는 태풍으로 두 차례 대홍수가 났다. 1차는 7월9-12일에 있었고, 그 물이 채 빠지기도 전에 같은 달 15-19일에 다시 장대비가 쏟아졌다.

7월7일 필리핀 부근 해상에서 발달한 태풍이 북상 나흘만인 11일 서해안까지 진출했다.
비가 가장 많이 내린 7월9일 하루 강수량을 보면 서울이 196.6㎜나 됐다.

이로 인해 한강은 범람했다. 서울을 쑥대밭을 만든 이 대홍수는 한편으로는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그것이 지난 자리에 훗날 한국고고학사를 흔들 두 가지 유적이 출현했다. 하나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에 자리한 풍납토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약간 상류로 올라간 지금의 강동구에 위치한 암사동 선사유적지였다.

이렇게 해서 홍수가 '발굴'한 암사동 유적지가 제대로 발굴되기는 1970년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1971년 이후 1975년에 걸쳐 국립박물관이 총 4차례에 걸친 암사동 발굴조사를 벌인 것이다. 물론 국립박물관 외에도 여러 기관에서 합동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이곳은 신석기시대 대규모 취락유적으로 밝혀졌다.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논할 때면 각종 책자에서 그 표지적 유물로 빠지지 않는 빗살무늬토기는 거의 예외 없이 암사동 유적 출토품이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 유적이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이 유적은 1980년대 이후 암사동 유적의 문화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중서부 지역 신석기시대 편년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위상과는 달리 쉽사리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 정식 발굴보고서는 90년대 이전까지도 제출되지 않았다. '긴급 발굴조사' 같은 형태의 간이 보고만 이뤄졌을 뿐이다. 특히 그 발굴조사 주축을 이룬 국립박물관이 정식 보고서 제출을 미룬 것은 의아스런 대목이었다.

그런 국립박물관이 마침내 1970년대 암사동 유적 발굴조사 성과를 전 5권의 보고서로 완간했다.

박물관의 암사동 유적 정리는 1994년 출간한 '암사동'에서 출발한다. 이후 5년 뒤인 99년 '암사동Ⅱ'를 보태더니 최근에는 그 5편(Ⅴ)을 완성함으로써 암사동 유적 정리의 대미를 보았다.

이번 '암사동Ⅴ' 보고서에는 1974년에 실시한 3차 조사를 담았다. 이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수혈 주거지(움집) 5기와 원형 수혈 3기가 발견됐으며 다량의 빗살무늬토기와 어망추ㆍ석촉ㆍ석부ㆍ석착ㆍ갈돌ㆍ갈판 등의 석기류가 출토됐다.

대규모 공사와 그에 따른 대규모 발굴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요즘 기준에 비춰 보면, 이 정도 규모는 대수롭게 보이지는 않지만, 당시만 해도 이런 성과는 한국고고학상 일대 사건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8.22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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