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닷컴 | 박정환기자] No More Nomo. 더 이상의 노모 히데오는(40)는 없는 걸까. 캔자스시티 로열스 스프링 트레이닝 초청 선수로 메이저리그 재입성에 성공한 노모. 그러나 3년 만의 복귀는 3경기 만에 끝났다. 4⅔이닝 10피안타(3홈런) 방어율 18.69. 노모는 초라한 성적을 남기고 방출 대기 선수가 됐다.
"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던지기 위해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단 1시합이라도 상관이 없다. 메이저리그 마운드 위에서 좋은 투구를 보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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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의 소박한 꿈은 결국 바람으로 그쳤다. 3경기 노모의 빠른 공은 평균 85마일에서 최고 88마일(142 km/h)을 형성했다. 노모가 마지막 불꽃을 태운 2002년과 2003년 LA 다저스 시절에도 속구 평균 구속은 88마일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8년 노모의 패스트볼은 힘이 없었다. 포크볼은 느린 체인지업이 돼 버렸다.
323경기 318선발 등판. 1976⅓이닝 1918탈삼진 123승 109패 방어율 4.24. 이제는 변동 확률이 없을 노모의 빅리그 통산 성적이다. 9이닝당 8.73개의 탈삼진은 선발 투수 기준 역대 9위에 해당한다. 일본 프로야구 기록을 더할 경우 노모의 프로 통산 성적은 3027⅔이닝 3122탈삼진 201승 155패 방어율 3.86이다. (17시즌)
" 나에게는 처음부터 던지기가 전부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타격이나 수비는 서툴렀다. 공부도 잘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모든 것은 야구. 투수였다. "
학생 노모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그러나 투구 자세는 유별났다. '몸을 틀든 어떻게 하든. 최대한 짜내면 속구의 위력이 배가 될 것'이란 단순 명료한 발상에서 탄생된 '토네이도' 폼이었다. 하지만 야구 명문 고등학교 코치들은 그런 노모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 절대 성공할 수 없는 희귀 폼 " 이라며 입단을 거부한 것이다.
노모는 야구 명문과는 거리가 먼 세이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뒤 노모는 가장 먼저 등교해 수업 시작 전에 학교 운동장을 8바퀴 이상씩 뛰었다. 달리기 훈련 후에는 2단으로 된 도시락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노모는 앉은 자리에서 초밥 100개도 먹는 대식가다. 점심에도 메뉴는 2단 도시락이었다. 그리고 또 달렸다.
" 항상 기본적인 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 있다. 누구나 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다. "
노모는 성장했다. 특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 시기에는 프로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2학년 때는 퍼펙트 게임도 달성했다. 그러나 프로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겼다. 고민 끝에 노모는 사회인 야구 입단을 선택했다. 신인철계경식야구부. 평소 회색 작업복을 입고 업무 후 야구를 했다.
노모를 상징하는 두 가지를 꼽는다면 단연 독특한 투구 자세와 포크볼이다. 포크볼을 습득한 시점이 바로 사회인 야구 시절. 감독으로부터 기본적인 그립만 배운 노모는 포크볼 연습에 매달렸다. 물론 처음에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포크볼을 계속 던졌다. 그리고 1년이 지났을 때. 노모는 포크볼 마법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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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을 해야 성공과 실패가 있다. 그러나 시도 조차 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없다.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시작 역시 없다. 프로는 내 첫 도전이다. "
사회인 야구를 평정한 노모는 드래프트에 나와 전체 12구단 중 8개 구단의 지명을 받았다. 노모를 잡은 행운의 구단은 오사카 긴데쓰 버팔로즈(현 오릭스 버팔로즈). 신인 노모는 전설이 됐다. 루키 시즌인 1990년. 노모는 최다 승(18) 최고 승률(0.692) 최다 탈삼진(287) 최고 방어율(2.91) 타이틀을 따냈다. 투수 4관왕.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신인왕·MVP·사와무라상을 동시 석권한 선수는 1990년의 노모가 유일하다. 노모는 어깨 부상을 당한 1994년 전까지 4년 연속으로 최다 승과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유지했다. 그리고 노모에게는 또 다른 도전 과제가 주어졌다. " 이제 더 이상은 기다리기 어렵다. " 꿈의 무대. 메이저리그 진출이었다.
노모와 긴데쓰 구단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입단 때 노모는 '투구 자세에 관한 어떤 참견도 금한다'는 전제를 단 바 있다. 전임 감독인 故 오기 아키라는 노모의 옵션을 흔쾌히 수용했다. 그러나 신임 감독 스즈키 게이시는 그런 노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즈키는 일본 프로야구 마지막 300승 투수로 자부심이 상당했다.
스즈키는 노모 위에 군림하려 했고 현역 20년 전부를 긴데쓰에 바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에게 구단 또한 전권을 부여했다. 이미 예전부터 메이저리그 진출을 염두했던 노모는 탈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당시 일본 프로야구가 인정하지 않았던 에이전트 제도 도입과 다년 계약 요구였다.
노모와 긴데쓰 구단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고 종국에는 임의 탈퇴 처리로 일단락이 됐다. (노모가 에이전트로 내세운 인물은 댄 노무라였다. 노무라는 현재도 노모의 에이전트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노모는 다저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은 뒤 곧바로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연봉은 980만엔. 고작 10.9만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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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리그란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었다.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강한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기필코 이룰 수 있는 꿈이라 생각했다. "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노모가 메이저리그에 관심을 보인 계기가 됐다. 전성기 기량의 오레스테스 킨델란이 버틴 아마 야구 최강 전력의 장타자 군단 쿠바는 노모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보다 수준이 높은 메이저리그는 과연 어떤 선수들이 있다는 것일까.' '반드시 힘 대 힘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과 겨루겠다.'
프로 입문 후 치른 미일 올스타 시리즈도 자극이 됐다. " 미국에 와라.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 " 로저 클레멘스가 노모에게 건넨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이 된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 노모는 일본에서처럼 1995년 미국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다. 13승 236탈삼진 방어율 2.54. 노모는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 슬럼프는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상태가 좋지 않아도 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르는 이상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선을 다할 뿐. 변명은 없다. "
하지만 다저스와의 동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98년 다저스는 메이저리그 4년차 노모의 성적이 부진하자 뉴욕 메츠로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다저스. 메츠. 시카고 컵스. 밀워키 브루어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보스턴 레드삭스. 다시 다저스. 탬파베이 레이스. 뉴욕 양키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그리고 캔자스시티.
10개 구단. 트레이드 1회. 방출 6회. 미국에서의 14년 동안 노모를 통해 일어난 이동 경로들이다. 부상도 많았다. 1998년 어깨 부상 재발 뒤 2001년 보스턴에서 탈삼진왕. 2002년과 2003년 다저스에서 2년 간 32승을 올려 제 2의 전성기를 잠시 구가했으나 다시 어깨 부상이 도졌다. 이후에는 팔꿈치 상태도 안 좋아졌다.
" 아직도 도전을 하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야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냥 야구를 하는 게 좋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야구였다. "
2008년 캔자스시티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에 열린 기자 회견. 한 기자가 야구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묻자 노모는 위와 같이 말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지만. 곧 만 40세의 나이지만 노모의 야구 사랑은 공을 처음 잡았을 무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작별을 고해야 할 때. 그 열정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junghwan@med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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