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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초의 한류 구다라 열풍!

monocrop 2008. 3. 12. 02:25
 

 

1. 일본은 왜 백제(百濟)를 <햐쿠사이>가 아닌 <구다라>라고 하는가? 

백제는 ‘구다라’다. 그런데 백제라는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햐쿠사이’다. 일본은 왜 백제를 ‘구다라’라고 하는가? 일본국사사전에는 ‘구다라’가 고대한일관계를 암시한다는 설명이 실려있다. 과연 '구다라'라는 말 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다는 것일까? 우에다 마사하키 교수는 구다라는 ‘큰 나라’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인도를 아우르는 세계적 교역망을 갖췄던 백제!

고대 일본에 있어서 백제는 각종 선진문물의 창구이자 선망의 나라요, ‘ 나라’ 였던 것인데...

2. 사야마이케(협산지)!! 그 곳에 오사카 도시개발의 비밀이 숨겨져있다!

문헌상으로도 확인되지 않는 고대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밝혀주는 고고학 유적인 사야마이케! 사야마이케는 616년에 당시의 고대 일본이 국가형성의 인프라정비를 위해 만든 저수지다. 당시의 일본은 고대국가형성의 태동기로서 사야마이케라는 관개시설을 축조하여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마련하여 국가건설을 추진중이었다. 이 국가적 사업인 제방축조에 백제의 첨단 토목기술인 부엽공법이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사야마이케 유적은 고대 일본이 백제를 모델로 삼아 사회간접자본 정비를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사야마이케를 통해 당시 불모지였던 오사카를 고대국가의 핵심지역으로 개척했던 백제의 기술력을 살펴본다. 

3. 백제식 대벽건물! 고대 일본의 주거혁명을 예고하다! 

일본의 긴키지방 일대에 집중 발굴되는 독특한 형태의 백제식 대벽건물! 대벽건물은 ‘도랑을 파서 그 안에 기둥을 세우고 흙벽을 주변에 바르는 건물’로 백제에서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건물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일본의 백제식 대벽건물에서는 온돌도 함께 발견된다. 온돌은 습기가 많은 일본풍토에 맞지않아 곧 사라졌으나 온돌과 함께 들어온 부뚜막과 시루는 일본전역에 급속히 전파된다. 부뚜막과 시루의 보급은 고대 일본인의 조리방법과 식문화, 나아가 일상문화자체를 크게 변화시키는데...

4.  최초로 소개되는 옷의 신사인  ‘구레쯔히코신사’ !!

일본 아스카에는 백제에서 건너와 백제식 옷을 만들었던 ‘쿠레쯔히코’를 기념한 ‘옷의 신’이 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방직 기술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방직의 거점을 만들었던 백제인을 기념한 신사다. <부상략기>에는 ‘아스카땅에 법흥사를 세우면서 찰주를 건립하던 날 소아대신을 비롯하여 백여명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으며 보는 이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백제풍의 옷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데... ‘쿠레쯔히코신사’로 대표되는 고대 일본의 백제옷 열풍을 추적한다.

5. 천황이 머무는 곳을 왜 ‘백제대궁’이라고 했을까?

일본인들이 백제것을 얼마나 선호했는지를 보여주는 것들이 일본도처에 남아있다. 나라 중심에 흐르는 하천은 백제천, 639년 죠메이천황 11년에 지은 절은 백제대사...그뿐 아니라 죠메이 천황은 자신이 거주한 궁의 이름을 ‘백제대궁’이라 하였다. 천황이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이름을 백제대궁이라 붙일만큼 고대 일본인에게 백제는 선망의 대상이요 동경의 나라였던 것인데...백제를 동경하고, 백제것을 최고로 여겼던 고대 일본에서의 구다라열풍의 실체를 만나본다.

출처 : - 느티나무 -
글쓴이 : 아침햇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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