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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금칼의 나라, 제 7 가야 다라국

monocrop 2008. 2. 9. 03:06

출처 http://blog.naver.com/k092000

 

역사스페셜 127회 황금칼의 나라, 제 7 가야 다라국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 길게 흐르는 경남 합천. 지난 1985년, 합천군 쌍책면의 작은 야산
에서 고분군이 발견되었다. 고고학계를 뒤흔든 옥전 고분군이 그것이다.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다.토기와 금동제 유물, 그리고 구슬과 옥등 모두 2000여점의 유물이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수습되었다. 그 중에 특히 눈길을 끈 유물 하나-그것은 칼이었다.
완연한 용과 봉황 문양을 가진 용봉문 환두대도,이 황금칼의 나라를 찾는다.

 

 

옥전 고분군의 위치와 유물의 의의

 

네, 고분과 유물, 이들은 그 자체로 기록이요 역사입니다. 더구나 문헌기록이 부족한 시대,
고분과 유물의 가치는 더욱 커집니다.그동안 우리 고분에 대한 숱한 발굴이 있었고 그만큼
의 흥분도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죠.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발굴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적지 훼손과 도굴로 영영 역사를 잃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옥전 유적지,2000여 점의 유물이 그야말로 쏟아
지듯 나왔습니다.거의 완벽한 상태의 유물들이 역사의 빛을 본 것입니다.그것은 고고학계
의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쪽을 보시죠. 합천군 쌍책면의 옥전 유적지입니다. 인근에는
합천읍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이 흐릅니다. 옥전고분군은 그야말로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작은 야산에 지나지 않습니다.고분이 발굴될 당시의 옥전과 그 주변 사진
입니다.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들판이요 야산입니다.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우리의 고대사가 묻혀 있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수습된 2000여 점의 유물,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여백을 메워줄 증거물이었습니다.발굴된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국내외 학계를 흥분시키고 있는 옥전 고분군, 먼저 그 현장으로 갑니다.

 

 

지난 1988년 완공된 합천댐,이 댐은 황강 상류 협곡을 막아 거대한 합천호를 만들었다. 댐
건설로 황강 상류지역에는 대규모 수몰 지역이 발생했고 그리고 수많은 유적지가 잠겼다.
댐건설 전, 합천 거창 지역의 수몰예정지에 대한 유적지 지표조사와 발굴이 있었다. 당시
발굴조사팀의 일원이었던 경상대 박물관팀은 1985년 여름,합천 댐 하류 지역에 대한 자체
조사를 벌였다.황강을 따라 내려가며 강 유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벌였고 그 조사 과정에서
이곳의 옥전 고분군을 발견했던 것이다. 발굴은 1985년부터 91년까지 6년 동안 다섯 차례
에 걸쳐 이루어졌다. 모두 111기의 고분에 대한 발굴에서 토기와 비늘갑옷, 옥과 금동제
유물등 2000여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인터뷰) "굉장히 화려한 물건이 나와서..그런 상황이죠"
발굴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량발굴이었던 옥전 고분군, 당시 언론은 이 발굴을 연일
대서 특필했고 고고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당시 수습된 유물들은 4세기에서 6세기의 것
으로 판명되었다.이 시기는 가야시대였고 옥전은 당시 가야 권역에 포함되어 있었다.옥전
고분의 출토품들은 가야의 유물인 것이다.토기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옥전
고분의 토기들은 가야 시대 다른 지역 토기의 특징을 골고루 보여주고 있다.함께 수습된 말
투구 역시 가야시대의 것이며 철제 갑옷과 투구 역시 가야 시대의 유물로 판명되었는데 놀
랍게도 대부분의 유물들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그렇다면, 1500여년 전의 유물
이 거의 완벽한 형태로 대량 발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뷰) "무덤의 형태가...구조가 달랐다..포기를 해버렸죠"
가야시대 대부분의 무덤이 돌 뚜껑인데 비해 옥전의 고분은 목재로 뚜겅을 덮었다.그것이
무너져 고분의 형태가 왜곡되는 바람에 도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지금은 말끔히 복원
된 고분군들, 그들의 정중앙에 있는 것이 M3호분이다. 이 무덤이 특히 주목받는 까닭,그것
은 이 무덤에서 수습된 특별한 칼 때문이다. 용과 봉황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큰 칼. 그
칼이 한 무덤에서 넉자루나 발견된 것이다.그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인터뷰) "도대체 한무덤에....복수로 발견된 것...없잖습니까?"
옥전고분군에서 출토된 용봉문 환두 대도, 그 중 한자루가 지금 국립중앙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칼 자루 양쪽에는 용이 새겨진 금판이 붙어 있으며 손잡이는 가는 은실로 촘촘히
감겨있다. 그리고 손잡이 끝의 둥근 고리안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뚜렷하다.합천 옥전고분
군의 용봉문 환두대도,이 황금칼은 옥전 유전지가 예사로운 땅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용봉문 환두대도란?

 

네, 옥전 고분군에서 발굴된 칼입니다.수많은 유물 중에서도 학계에 큰 충격을 던진 유물
이라고 합니다. 칼의 이름은 용봉문환두대도,용봉문 환두대도라,이름이 약간 어렵군요.자,
어째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요? 자세히 보시죠. 칼의 손잡이 끝에는 고리가 있습니다. 그
둥근 고리안에는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바로 용과 봉황입니다.그래서 용봉문이라는 이름
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환두, 이것은 둥근 머리, 즉 둥근 고리모양의 머리를 가졌다는 뜻입
니다.그 다음 대도는 글자 그대로 큰 칼, 통상 60cm 이상이면 큰 칼,즉 대도로 분류한다고
합니다.용봉문 환두대도,어떻습니까? 이제 칼 이름이 입에 좀 익습니까? 그럼 이칼에 대해
좀 더 알아볼까요 ? 용봉문환두대도는 용이나 봉황만 장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용 한마리
가 고리안에 장식된 것은 단룡식이라 하고 봉황 한 마리가 새겨진 것은 단봉식이라 명명합
니다.또 용두마리가 좌우대칭으로 그려져 있으면 쌍룡식 용,봉황,쌍룡,용과봉 장식의 모든
칼을 통틀어 용봉문환두대도라고 합니다. 용봉문 환두대도, 굳이 풀이하자면 '용봉문양
둥근고리자루 큰칼' 정도가 될까요? 자,그렇다면 이 칼은 어디에 사용했을까요? 칼이라면
당연히 무기입니다.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칼로 전투를 했을까
요? 화려한 장식과 금 도금을 한 이 칼로 전투를 했을까요? 그리고 이 칼의 주인은 누구였
을까요? 일반 병사들 누구나 이 칼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요? 볼수록 궁금증이 더합니다.
화려한 용봉문환두대도,합천군 옥전의 작은 야산에서 나온 이 칼에 얽힌 비밀,그것을 풀기
위해 먼저 백제의 무녕왕릉으로 갑니다.

 

 

 

 

지난 71년,백제의 무령왕릉이 극적으로 발견되었다.기록으로만 존재하던 무령왕의 실체를
확인하는 획기적 발견이었다. 무령왕릉은 발굴 당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어 백제 유물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다.무령왕릉에서도 용봉문환두대도 한 자루가 발견되었다. 칼은 무령
왕의 허리 옆에 놓여 있었다.용봉문 환두대도는 왕의 칼이었던 것이다.신라에도 같은 모양
의 칼이 있다.천마총,호우총,식리총에서 각각 한 자루씩,모두 석자루의 용봉문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호우총에서 수습된 칼은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그러나 고리를 장식
했던 용 문양은 뚜렷하게 남아있다.천마총에서 출토된 용봉문환두대도,이 칼의 고리 장식
은 봉황 문양이다. 그렇다면 이들 용봉문 환두대도는 어떤 역사를 갖고 있을까? 삼국시대
사용되던 다양한 칼들이다. 아무 문양없이 둥근고리만 가진 칼은 소환두대도라 한다.고리
안에 인동초 문양이 장식된 것은 삽엽환두대도, 고리 세 개가 합쳐져 하나의 고리를 이룬
것은 삼루환두대도이다. 이들은 시기에 따라 나뉘는데 제일 먼저 소환두대도로부터 삼엽
환두대도, 그리고 삼루 환두대도로 발달해왔다. 가장 늦은 시기, 용봉문 환두대도가 나타
난다.


인터뷰) " 5세기대 초기에는 3루 환두대도가 최고...나타나게 됩니다"
최고지배자의 칼이었던 용봉문환두대도는 모두 40여점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제
시대,도굴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고 현재 학계에 보고된 것은 16자루에 불과하다.
그중 옥전 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이 일곱자루이다. 그렇다면 옥전고분군의 칼은 다른 지역
의 칼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경북 과학대 구자봉 교수의 도움으로 제작 기법상의 차이를
살펴 보기로 했다.


설명) " 칼 코가 있어야 됩니다..요 부분이...
칼 몸체와 손잡이가 만나는 곳의 처리를 비교해 보았다. 옥전 칼은 손잡이가 칼집에 들어
가지 않도록 칼코둥이가 있는 반면 무령왕릉 칼은 그것이 없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다음은
고리와 문양의 결합 방법 비교, 무령왕릉 칼은 고리와 문양을 한 주물로 만들어낸 이른바
일체형이다.반면 옥전 칼은 고리와 문양을 따로 만들어 끼운 것인데,고리에 문양을 끼우는
방식도 다양하다. L자형은 고리에 L 자로 홈을 파고 문양을 끼운 것이며,이른바 11자형은
고리에 11자의 홈을 파고 문양을 접합시켰다. 반면 신라의 호우총 칼은 고리에 홈을 파지
않고 끼우는 이른바 무형상좌형이다. 신라와 백제의 칼과는 다른 제작기법을 가진 옥전
고분군의 용봉문 환두대도,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
인터뷰) "옥전 고분군...자체 제작했을 가능성.."
신라와 백제의 영향을 벗어난 옥전 고분군의 독자적인 용봉문환두대도,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담겨 있다.
인터뷰) "아주 최고급 무기가...정치적 독립...군사외교를 했다"
독자적으로 왕의 칼을 가졌던 옥전 고분군,이곳에는 독립적인 정치 집단이 있었다. 즉 또
하나의 가야 왕국이 있었던 것이다.

 

 

 

 

 

옥전에 가야 왕국이 존재했다?

 

합천의 옥전 고분군,그 주인은 왕을 상징하는 칼을 가졌다! 그것도 독창적으로 제작한 왕의
칼을 가졌다! 그렇다면 이곳에는 왕국이 존재했을 것이다! 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이 화려
한 용봉문환두대도에서 만들어 낸 가설입니다.과연 이 가설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합천군
옥전의 용봉문환두대도는 5C 말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이 시기라면 합천은 가야의 영향
아래있던 땅입니다.자,가야,가야라...네,여러분은 가야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혹시
신라의 속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삼국시대에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다가
토기 몇 개만 유물로 남기고 사라진 별 볼일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좀 더
멋있게,아직은 우리 역사에서 베일에 싸인 신비의 왕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역사책에서
가야를 찾아보았습니다.서기를 전후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생겨나 562년 대가야 연맹체가
신라에 복속될 때까지 이 지역에 존재하던 다양한 정치집단이다 라고 되어 있더군요.'다양
한 정치집단'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보통 사람들에게 가야를
물으면 이른바 6가야 중의 몇 개만 들먹이다가 맙니다. 이쪽을 보시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6가야입니다. 금관가야는 김해, 아라가야는 함안, 소가야는 고성, 고령가야는 진주,
대가야는 고령, 성산가야는 성주..이런 식으로 알고 있고, 이렇게 배웠습니다..자,그렇다면
심각해집니다.우리는 용봉문환두대도에서 합천의 옥전에는 왕국이 있었다는 가설을 세웠
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라면 합천주변은 이웃 고령의 대가야나 함안의 아라 가야등
의 영향력 아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옥전에 왕국이 있었다? 자,과연 옥전에는 가야의 또
다른 왕국이 존재했을까요? 만약 존재했다면 그 왕국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성장했을
까요? 우리가 세운 가설에 대해 옥전의 고분들한테 물어봅니다.

 

 

옥전고분군에는 현재 18기의 봉분이 복원되어 있다.발굴 대상이던 111기의 무덤은 다양한
고분 형식을 보여주었다.즉 가야시대의 묘제가 총 망라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터뷰) "대체적으로 보면...있는데"
가야의 묘제는 시기에 따라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가장 이른 시기 목곽분이 조성되는데
이는 규모가 작고 목재로 뚜겅을 덮는 원시적인 묘제이다. 다음으로는 수혈식 석곽묘인데
4개의 벽을 쌓고 덮개돌을 덮는다.다음 횡구식 석실묘는 세 벽을 쌓아 석실을 만들고 입구
는 밖에서 돌로 막는 형식이다. 마찬가지로 덮개 돌을 사용한다. 횡혈식 석실묘 역시 돌로
방을 만들고 한쪽 벽에 길다란 길을 낸다. 필요에 의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옥전의
고분은 시기에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성되 왔는데 대형 고분이 나타나기 이전 시기,
아주 특별한 무덤이 하나 발견되었다.옥전 23호분이 바로 그것인데,옥전 23호분은 목곽묘
가 조성되어 있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설명) "여기 이런 나무들이..자리입니다 요렇게"
23호분은 발굴후 다시 덮어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그러나 23호분은 평면면적
이 33.1 평방M로 보통 8평방미터이던 다른 목곽분에 비해 4배 이상 큰 규모였다.바닥에는
관을 받치는 바닥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으며 관을 놓았던 주변에 흙과 돌이 엉켜 있는데
이들은 목곽 시설을 보강한 흙과 돌이다.옥전 고분에서는 처음 보이는 구조이다.


인터뷰) "새로운 문화가 나타나는...들어오게 되는데"
그리고 23호분에서는 그 이전 시기에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토기들이 출토되었다.모양
과 크기가 다른 신기종들이 23호분에서 대량 수습된 것이다.다양한 금동제 유물들도 이 시
기에 처음 나타났다.말띠 드리개와,금동제 화살통.그리고 금동장 관모까지.이들은 돌발적
인 유물이었다.그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이는 23호분의 유물들,그렇다면 이들
은 어디서 왔을까? 김해 부산 지역의 유물들이 전시되 있는 곳에서 옥전 23호분과 닮은 유
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토기는 모양뿐 아니라 받침대에 낸 창까지 같은 모양이다.
접시 역시 섞어 놓으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고, 말 투구 역시 닮은꼴이다. 철판 갑옷과
철제 투구는 한 사람이 사용한 것처럼 똑같은 모양이다.옥전 23호분의 묘제는 동래 복천동
고분과 같은 형식인데, 이들은 옥전고분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인터뷰) "23호분과 같은 지배자...선진집단...했다"
김해 부산지역의 선진 문화집단이 옮겨와 형성되었다는 옥전고분군,이런 이동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인터뷰)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에 아닌가?"
학자들은 그것을 서기 400년,광개토대왕에 의한 남정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 남부
지방에 대한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공격으로 김해의 금관가야는 심각하게 교란되었다.
그때 김해 부산 지역의 일부 세력들이 낙동강을 거쳐 황강을 거슬러 올라와 옥전에 정착
했다는 것이다. 서기 400년 이후,김해지역의 선진 문물을 가졌던 세력들이 이주해오면서
이제 옥전에는 체계를 갖춘 정치집단이 들어서게 되었다.

 

 

 

 

 

옥전 왕국은 과연 제대로 된 국가였나?

 

네, 익숙한 장면이죠? 드라마 태조왕건의 전투 장면들인데요, 여기에는 대야성을 둘러싼
신라 백제의 치열한 각축전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대야성이 어딥니까? 바로 옥전고분이
있는 합천아닙니까? 그렇다면 신라와 백제는 왜 합천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까요?
여길 보시죠. 옥전이 있는 합천입니다. 바로 여기,낙동강으로 연결되는 황강이 흐릅니다.
동에서 서로, 혹은 서에서 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할 물길의 중심에
바로 합천이 있었던 것입니다.더구나 옥전은 대야성으로 이어지는 물길의 길목에 있었습
니다.그렇다면 의문이 더 생깁니다.주변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차지하기를 노리는 요충지,
그 요충지 좁은 지역에 왕국이 존재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용봉문환두대도와 출자
형 왕관,그리고 금동제투구등,비록 왕을 상징하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이들
이 과연 제대로 된 나라였을까요? 국가가 국가로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 그것은 경제력,군
사력, 외교력입니다.이것이 있어야 비로소 완전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옥전
왕국은 강대국들의 각축 속에서도 독자성을 유지한 왕국이었을까요? 그야말로 작고도 강
한 가야의 강소국이었을까요? 옥전왕국의 경제 군사 외교력을 평가해 봅니다.

 

 

 

길게 흐르는 황강을 따라 강 양쪽에는 비옥한 농경지가 분포하고 있다.이런 농경지가 옥전
왕국을 가능하게 한 하나의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업 이외에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없었던 것일까?


설명) "..여 돛단배 큰기 있어갖고...옛날에는...이곳입니다 가장 큰 나루터였습니까?"
옥전 고분군 앞에는 70년 대까지만 해도 나룻배가 다니던 흔적이 있다. 수로의 기능을 가
졌던 황강, 이 강이 옥전 왕국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인터뷰) "...쌍책면이죠? 적포라고... 요지였습니다"
옥전 왕국과 낙동강 최대의 포구는 황강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즉 옥전 지역은 좋은 교역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옥전 왕국은 무엇으로 교역을 했을까? 옥전 고분에서
는 옥과 구슬제품이 유난히 많이 나왔다. M2호분과 M4호분에서는 천 여점이 넘는 구슬제
품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그리고 이들은 지금 그대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세련된 가공품
들이었다. 이렇게 쏟아져 나온 옥과 구슬은 이 유적지의 상징이 되고 이름이 되었다.
주민) " 예 지금 요서..구슬이 많이 튀어 나왔어..그래서 옥전이라고"
1500여년 전,옥의 가치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귀중한 재물로 여기던 옥은 당시 경제력의 척
도가 되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인터뷰) " 그렇기 때문에...귀중한 것을...풍족한 사회"
옥전 고분군에서는 이러한 옥을 직접 생산한 흔적이 나왔다. 구슬을 가열하여 제품을 만들
고 남은 찌거기와 옥을 가열한 찌꺼기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숫돌에는 옥을 갈아
제품을 만든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인터뷰) "이것은 무엇을 얘기하느냐? ...하겠습니다"
옥의 대량 생산과 좋은 교역 조건,옥전왕국은 이를 바탕으로 그들의 경제력을 유지했던 것
이다.당시 옥전 왕국의 경제력을 말해주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M3호분에서 발견된 121개
의 도끼 모양 쇳덩이, 이들은 완제품 도끼가 아니다. 다른 철제품을 만들기 위한 중간 소재
인 것이다.이들을 묶어서 화폐처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M3호분에서 이런 주조철이
무더기로 발견된 것이다. 도끼 모양 주조철에서 샘플을 채취하여 분석에 들어갔다.전자 현
미경으로 들여다 보자 철의 단면입자가 매우 고르게 분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장음) " 요 심도...상당히 고운 것으로..."
인터뷰) "주조가 상당히 잘됐다...주조 제철 기술 발달...있습니다"


실제로 제철에 사용했던 단야구들도 발굴되었다. 집게와 망치, 그리고 숫돌까지 나와 옥전
왕국의 활발한 철 제품 생산을 말해주고 있다.그렇다면 옥전의 철은 어디서 왔을까? 합천
군 야로면, 옥전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곳은 조선 시대 3대 철광산의 하나였다.오래 전부터
철광석이 생산되던 야로는 1500년전 당시에는 고령의 대가야 세력권에 있었다. 옥전왕국
은 이곳의 철광석을 수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장음) "이거는 무엇입니까?"
두 지역의 철성분비교는 경상대학교 공동 실험실습관 허보영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야로
에서 제철 찌거기를 수거하여 옥전 주조철과의 성분 비교를 시도했다. 특수 X선 촬영을
실시하여 그 반응으로 철의 성분을 비교분석하기로 했다.
설명) " 네 옥전에서...시료를.. "
모니터설명) "옥전에서.."
분석 결과, 옥전 철성분과 야로 철성분의 가장 큰 차이는 티타늄의 유무에 있었다.
인터뷰) "고 시료 두 개를 분석해본 결과는...볼 수가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옥전은 독자적인 철 생산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옥과 철을 바탕으로 한
옥전의 경제력은 그들의 왕국을 유지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더구나 옥전은 대가야와 인접
해 있었다. 그리고 주변 국가들의 끊임없는 각축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인터뷰) " 고때..대가야..한반도 남부의 군사적 요충지... 겁니다"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던 시대,작은 왕국 옥전이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군사력이
있어야 했다.고대 전사와 무기 특별전이 열리는 부산의 복천 박물관,가야 기마병의 복식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가야 시대, 철제 갑옷과 철제 마구를 갖춘 기마병은 당시 가장 강력
한 정예부대였다. 옥전에서 출토된 말투구,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유물이다. 말투구는
현재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모두 14개, 중국에는 단 한개, 일본 열도에는 단 두 개 밖에
없는 유물이다.그런데 옥전에서 무려 6개가 출토되었다. 옥전왕국에도 기마병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터뷰) "가야 집단 속에서는... 소국에 비해서 무장력... 않는다"
옥전왕국의 국제감각을 말해주는 유물들이 있다.신라 이외의 지역에서는 옥전에서만 유일
하게 발견된 로만그라스,이는 신라와의 밀접한 교류를 말해준다.금제 관못과 연판장식은
백제계 유물이다. 백제와의 교류 흔적인 것이다. 투구는 고구려의 그것과 닮아있어 고구려
와의 교류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있다.
인터뷰) "역시 낙동강에 접하고...됩니다"
황강 유역의 옥전 왕국,이들은 경제력과 군사력, 그리고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왕국을 지켜나갔다.

 

 

 

옥전왕국의 국명은 무엇인가?

 

네,탄탄한 경제력과 군사력,그리고 주변국의 세력을 이용한 적절한 외교, 합천의 옥전에는
분명히 가야왕국이 존재했습니다. 가야가 낙동강 유역에서 500 년이상 존재했던 다양한
정치집단이라면 합천의 옥전에도 분명히 가야의 정치집단이,그것도 국가적 조건을 제대로
갖춘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화려한 용봉문 환두대도,최고 권력자가 사용하는 출자형 관모,
그리고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말투구와 경제력을 상징하는 수많은 옥과 구슬 유물, 옥전
왕국은 찬란한 문명을 갖고 있었습니다.그런데 뭔가 허전하지 않습니까? 나라가 있었다고
하고,강력한 왕국,그것도 좁은 지역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한 왕국이 있었다 하는데도
우리는 허전합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명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설이 정설이 되기
위한 마지막 조건, 바로 나라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옥전의 모 가야왕국이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나라 이름, 그것을 찾기 위해선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
게도 삼국사기,삼국유사 그 어디에도 옥전왕국의 나라 이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그래
서 우리는 양직공도라는 중국측 기록에서 그 단초를 찾으려고 합니다.이 양직공도는 6C에
만들어진 중국 양나라의 사신도인데요 여기에는 당시, 양나라와 교류하던 백제와 그 주변
국가들의 나라 이름이 몇 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 옥전왕국의 나라 이름은 과연 무엇일
까요? 보시죠!

 

 

 

 

이 문서를 주목한 까닭은 다라라는 나라 이름 때문이었다. 옥전 고분에서 약 1 Km 떨어진
곳에는 같은 이름의 다리가 있다. 그 다리 건너에는 다라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다라리는
옥전 유적지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다.
인터뷰) "우리가 나고 나서 장 다라...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양직공도에 나오는 다라국이 옥전 지역일까? 또 다른 실마리를 찾아 나섰다.
합천읍은 옥전에서 황강 상류쪽에 있다.자동차로 20여분 거리,합천은 삼국시대의 대야성
이다. 대야와 다라 사이의 음운학적인 연관을 따져 보았다.


인터뷰) "삼국사기 대량주...있죠"
나라 이름과 그 위치가 정확했던 다른 가야에 비해 다라는 중국과 일본의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결국, 옥전 왕국이 기록에 보이는 그 다라국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라국의 중심은
어디였을까? 옥전 유적지 근처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설명) "지금 이 부분...성들이 있었던...단애부가"
그것은 토성의 흔적이었다.발굴 직전의 사진에서는 토성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다
인터뷰) " 이 자리가 다라국의 생활 유적...있습니다"
토성은 옥전 고분군의 바로 아래에 있다.다라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인터뷰) "최소한 200년...자기 이름을 ...있습니다"
용과 봉황 문양이 선명한 용봉문 환두대도,이 황금칼을 가졌던 나라,그것은 다라국이었다.
제7 가야, 다라국이었다!

 

 

 

엔딩


네, 경남 합천의 황강가 나즈막한 야산, 그곳에는 작지만 강한 가야 왕국이 있었습니다.그
나라의 이름은 다라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덩그런 무덤 몇 개만 복원되어 있을
뿐 그야말로 썰렁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곳에서 잃어버린 왕국 다라국의 숨결을 느끼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라국의 무덤만 일부 열어 보았을 뿐
입니다. 그 주변의 생활유적은 아직 손도 못대고 있습니다. 다라국의 도성이 나오고, 기록
이 나오고, 용봉문환두대도를 만들던 공방이 나오고, 교역하던 배가 나오고, 사람살이의
흔적이 나올 때 비로소 1500년 전의 가야왕국 다라국은 부활할 것입니다.그리고 그 왕국
은 우리 고대사와 가야사를 한층 구체화시켜 일본의 고대 한반도 지배설 따위를 간단히 극
복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용봉문환두대도로부터 출발하여 옥전 유물이 가
진 비밀을 풀면서 다라국이라는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6가야 외에
분명한 실체를 가진 제7의 가야왕국 다라국이었습니다. 이제 그 다라국의 완전한 부활이
우리 앞에 숙제로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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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문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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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문환두대도는 삼국시대에 가야국과 신라국에서 왕들이 소장했던 칼이라고 합니다

환두대도 끝부분에 용문양과 봉황문양이 같이 있어서 용봉문환두대도구요

용문환두대도는 문양이 있구요 봉황문환두대도는 봉황이 있죠

용봉문환두대도는 어디까지나 왕들을 위한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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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브리핑 | 기사입력 2005-08-16 09:18

<중국과 다른 철 생산 기술>

개마무사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면 중국은 왜 고구려와 같이 개마무사를 도입하지 않았는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역학구조상 상대방이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다면 그 장비를 재빨리 모방하거나 보다 개선하여 다음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중국도 엄밀한 의미에서 기병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중국이 도입한 기병제도는 중국인들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중국에 복속한 이민족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은 용병이어서 고구려 군과 같은 결집력이 부족하여 전투력이 떨어졌다.

한편 중국이 고구려와 같은 개마무사를 본격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이유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중국의 제철 능력의 한계 때문으로 인식하는 학자들이 많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고구려는 개마무사로 무장할 수 있는 철 생산 능력이 있었는데 반하여 다른 국가에서는 철 생산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강원도 철령에서 발굴된 3세기경의 철마군단(고구려연구회 제공).


세계적으로 볼 때 기원전 25세기경 수메르에서 철기를 만들었으며 이란, 팔레스티나 등지에서는 기원전 1200~1000년경에 연철을 열처리하여 강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고대 유럽에서 생산된 철기는 전부 연철이고 주철은 그보다 늦어 14세기경 독일의 라인 지방에서 처음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철의 종류를 구분할 때는 탄소 함유량을 기준으로 한다. 탄소 함량에 따라 주철(선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1.7~4.5%), 강철(탄소 함량 0.035~1.7%), 함유량이 적은 연철(시우쇠, 단철이라고도 하며 탄소 함량은 0.035% 이하)로 나누어지는데 용도에 따라 적절한 것을 택한다. 이 중에서 강철이 가장 늦게 발견되었다.

산화철은 700~800도의 낮은 온도에서 환원되므로 철은 액체 상태로 되지 않고 절반 녹다 만 상태에서 굳는다. 이렇게 얻은 연철을 단조하면 철기를 만들 수 있다. 제련로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이 간단한 것은 아니므로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는 이러한 공정을 거쳐 철기를 제작했다.

백색주철 주조성좋고 강도높아

반면에 선철(주철)은 보통 백색주철과 회색주철로 나뉘는데, 백색주철은 탄소가 탄화물 형태로 결합되어 흰색을 띠므로 백색주철(철탄소합금계 가운데서 용융점이 가장 낮은데도(1,130도) 주조성이 좋으며 강도가 높고 내마모성이 좋다)이라고 부르며 회색주철은 탄소가 흑연형태로 포함되면서 겉면에 퍼져 회색빛을 띠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한편 강철 제련은 선철의 경우 보다 높은 온도 즉 보통 1,500도 이상에서 가열하여 탄소와 그 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강철을 만드는 비법은 철의 용융점이 1,539도이므로 제련로 안의 온도를 1,500도 이상 올려야 한다.

진천 석장리 제철용 송풍관, 한민족이 질 좋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사에 의하면 강철은 아르메니아 지역의 히타이트족이 기원전 2천 년경에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철을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것이 아니라 연철의 표면을 침탄법으로 열처리하여 강철로 변화시킨, 질이 낮은 것이다. 이 기술도 히타이트족이 계속 주조법을 독점하다가 그들이 멸망하자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다. 철이 생산된 지 거의 10세기가 지난 기원전 12~10세기가 되어서야 이란, 팔레스티나, 메소포타미아 및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강철이 제련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중국에서의 철기 사용은 기원전 1100년경으로 올라가며 기원전 7세기인 춘추전국시대에 비로소 주철의 주조가 가능했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진정한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의 문화가 진전되었다는 학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철기는 중국보다 당연히 늦어야 했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철기시대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설로 나뉜다. 그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명도전(明刀錢)’과 함께 유민들이 한반도로 유입되면서 철기문화가 들어왔다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한나라의 금속문화가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중국 전국시대의 유적지 가운데 철기가 출토된 지방은 20여 군데에 이르고 있는데 대부분의 지방들이 고조선 영역이다. 이것은 이들 유물이 중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고조선인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론이다. 즉, 중국과 완전히 다른 청동기술을 발전시킨 고조선에서 철기도 독자적으로 발전됐다는 뜻이다. 특히 고조선은 그 당시에 세계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첨단 기술인 강철을 주조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었다.

평양의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 무덤에서 나온 직경 15센티미터, 두께 0.5센티미터 되는 쇠로 된 둥근 거울은 앞면이 매끈하고 뒷면에 1개의 꼭지가 붙어 있는데 절대 연도가 무려 3104±17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탄소 함량이 낮은 강철은 용광로에서 선철과 산화제를 작용시켜 얻는데 이  쇠거울의 화학 조성은 탄소가 0.06%, 규소 0.18%, 유황이 0.01%인 저탄소강이었다.

더구나 탄소가 적은 저탄소강임에도 불구하고 굳기가 연철보다 강하고 유황도 매우 적은 양이다. 일반적으로 탄소 함유량이 1.0% 미만인 저탄소강은 온도가 적어도 1,500도 이상 되는 용광로에서 직접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쇠거울은 연철이나 선철을 두드려 만든 것이 아니고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쇳물로 주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시 강동군 항목리에서 출토된 쇠 줄칼은 연대가 다소 내려가는 기원전 7세기경의 탄소 공구강인데 겉면에 격자 문양이 나 있어 줄칼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재질은 탄소가 약 1.0%, 규소 0.15%, 유황이 0.0007%였으며 줄칼에 단접부가 없고 높은 온도에서만 형성되는 조직을 갖고 있는데 이 쇠줄칼도 쇠를 완전히 용융한 상태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동시대 최고의 철 생산 능력>

철은 온도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되는데 기본 방식은 유사하다. 당시 철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는 두 가지이다. 바로 철광석과 숯이다.

선철생산 공정은 철광석을 일정한 덩어리로 만들어 숯을 여러 층으로 엇바꾸어 넣고(용재로 석회석을 소량 삽입) 밑에서 불을 지핀 다음 송풍관을 통해 바람을 불어 넣는다.

이때의 연로로도 질이 좋은 숯을 사용하는데 제련로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 CO 가스가 형성된다. 로 안의 온도가 700~800도에 이르면 CO 가스에 의해 철산화물이 Fe2O3 → Fe3O4 → FeO → Fe 순으로 환원되며 환원된 철은 탄소와 접촉하여 Fe3C로 된다.

개마무사와 방패, 고구려는 질 좋은 철제무기를 사용하여 적들과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한편 제철로 안의 온도가 1,050~1,100도에 이르면 광석 중에 포함되어 있던 맥석 성분이 석회와 작용하여 광제로 되며 1,20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액체 상태의 선철과 갈라진다. 따라서 제철로 안에서는 쇳물과 용융된 광재가 생기는데 광제는 쇳물보다 비중이 작으므로 쇳물 위로 뜰 때 이를 분리하여 쇳물을 뽑아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철을 다시 녹여 1,500도 정도로 온도를 높여 강철을 만드는데 과거의 제철 능력으로 볼 때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온도인 1,500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강철을 만드는데도 비밀이 있다. 숯(탄소)을 적절하게 배합시키면 제련로 안의 온도가 1,200도가 되어도 철의 용융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철 속에 탄소가 4.3퍼센트 정도 들어가면 철탄소합금의 용융점이 1,130도로 낮아지며 1,200도 정도에서도 탄소를 적절히 융합하면 철이 용융한다.

제련과정을 거쳐 뽑아낸 철을 괴련철(잡쇠덩이)이라 하는데 아직 불순물이 많이 남아있으므로 괴련철을 다시 불에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단단한 철만 남는다.

학자들은 고조선 지역에서 발견되는 강철의 비율을 볼 때 고조선 장인들이 제련로 안의 온도를 적어도 1,400도 정도 유지한 상태에서 철을 14~16시간 정도 녹여냄으로써 질 좋은 강철을 생산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고조선의 장인들이 이와 같은 철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련로의 완벽한 설계, 연료와 탄소 공급원으로서 숯의 사용, 효율적인 송풍관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조선 영역에서 철 생산지는 매우 광범위하다. 대표적인 것은 은률 일대 노천 철광상으로 철제 망치와 징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고광록』에 의하면 요하 하류 지역(요동)인 안산과 철령(쌍성), 개주(개평), 요양, 승덕, 심양 등지에서 주로 자철광과 적철광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했다고 적혀있다.

'고조선 강철' 최강국가 발돋움 원동력

고조선 지역에서 생산된 강철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는 서아시아에서도 강철이 생산되기는 했지만 저급품이었다. 그런데 고조선에서 생산된 강철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확보하지 못한 고온의 용광로에서 직접 얻은 질 좋은 것으로 그 연대도 무려 기원전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고조선이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다.

한민족이 건설한 2번째 국가로 추정하는 부여의 경우도 철기 생산에 있어서는 선진국이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의 군사들이 투구ㆍ활ㆍ화살ㆍ칼ㆍ창을 병기로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휴대 가능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거의 다 철로 만든 것이다.

부여 영역에는 철 생산지가 많다. 오늘의 무산일대와 길림성, 흑룡강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일대가 철산지로 무산군 범의구석 유적에서 연철제품이 발굴되었고 이들은 기원전 7~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곧바로 다음 단계인 선철 생산 단계로 이어진다.

기원전 2~1세기에는 강철을 제작했는데 무산군에서 발견된 강철 도끼는 탄소가 1.55퍼센트, 규소가 0.10퍼센트, 망간이 0.12퍼센트, 연이 0.07퍼센트, 유황이 0.08퍼센트였다. 이 도끼는 탄소의 함유량이 1퍼센트 이상인 매우 단단한 극경강으로 부여 사람들이 제품의 용도에 맞게 철을 자유자재로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신성(고이산성) 입구, 고구려는 중요한 철광지를 지키기 위하여 요하 동쪽 평야지대와 산간지대의 경계선인 무순에 신성을 쌓았다.


고조선과 부여의 제철 기술이 고구려로 전승되어 각종 장비를 질 좋은 철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구려 동천왕이 철기병 즉 개마무사 5,000명을 동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들을 무장시키기 위한 철의 양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개마무사 1인 당  말 갑옷 최소한 40킬로그램, 장병의 갑옷 무게 20킬로그램, 기타 장비를 포함하여 10킬로그램을 휴대한다고 해도 최소한 70킬로그램의 철이 소요된다. 이를 5,000명에 적용한다고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며 예비량을 가정한다면 최소한 500여 톤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500여 톤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약 1800년 전에 이 정도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수ㆍ당은 현재의 무순 지역의 신성(고이산성)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고구려가 이곳을 수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은 무순 지역이 철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신성은 동천왕 18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한 이래 봉상왕 2년(293)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격퇴시킨 역사적인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영양왕 24년(613) 수양제의 침입이나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의 침략 때에도 신성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신성은 중국의 동진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으로 신성의 중요성은 보장왕 26년(667) 고구려를 침입한 이적(李勣)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신성은 고구려 서변의 요새이니 먼저 이곳을 빼앗지 못하면 나머지 성도 쉽게 취하지 못할 것이다.’

고이산성은 70~140미터 전후의 3개 야산을 하나로 묶은 환성(環城)으로 최고봉인 장군 봉으로부터 세 줄기의 산등성이가 남으로 뻗어 있으며 산꼭대기에 넓은 평지가 있어 마을을 연상케 한다. 신성은 남으로는 혼하와 동쪽으로는 그 지류인 무서하를 천연의 해자로 하고 있으므로 천혜의 방어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성곽은 서성의 서쪽 외곽인 서성지 일대와 남위성의 서남단과 동성의 동남쪽 산등성이 부분에 주로 남아 있으며, 그 외 많은 부분이 토성이다.

이 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총 길이 4킬로미터에 이르며 성 안에 채소를 심을 수 있는 넓은 분지가 있어 고로봉식 산성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중안분지 안의 큰 초석을 중심으로 주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쓰러져 있는 신성(고이산성) 표지석, 중국은 신성을 점령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했으나 고구려에게 번번히 격퇴되었다.


현재는 고이산공원으로 개발되어 있으며 요나라 전탑이 정상에 보인다. 필자가 신성을 찾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지만 과거에 혈투가 벌어졌던 흔적은 거의 잦아볼 수 없고 입구를 비롯하여 희미한 증거만 발견할 수 있었다. 더구나 고이산성을 가리키는 석비도 풀 속 흙구덩이에 쓰러진 채로 방치되어 있어 아쉬움을 더해주었다.

 

 

출처 : mars의 진실 찾아 떠나는 세상
글쓴이 : 화성인 ma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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