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문화경제

[스크랩]난징대학살 밝힌 '마녀'는 왜 자살했을까

monocrop 2007. 12. 18. 12:39
난징대학살 밝힌 '마녀'는 왜 자살했을까
[[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양쯔강변 샤관(下關)에서 집단 학살된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의 시체. 일본군은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뒤, 시체를 양쯔강에 버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2004년 11월 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라라 카운티의 인적 드문 고속도로변. 한 중국계 여성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차 안에서 권총으로 자살,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이름은 아이리스 장(Iris Shun-Ru Chang, 중국명 장춘루).

당시 37살이었던 아이리스 장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의 저서 <난징의 강간, 제2차 세계대전의 잊힌 홀로코스트(The Rape of Nanking :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아래 '난징의 강간')>는 한국에도 번역 출판되어 다수의 열혈 독자를 확보한 상태였다.

아이리스 장은 1967년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중국계 2세로 태어났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그는 <시카코트리뷴>에서 잠시 기자생활을 하다가 전업작가로 나섰다. <난징의 강간>은 1997년 아이리스 장이 두 번째로 낸 저서였다.

중국도 입다물던 난징, 세계인의 관심사로

1937년 12월 13일 중국 난징을 점령한 이래 한 달여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폭로한 <난징의 강간>은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만 해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일으킨 유대인 대학살은 서적·영화·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매체에 의해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아시아에서 일으킨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피해국인 중국조차 침묵하고 있던 난징대학살은 그렇게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됐다. <난징의 강간>은 출간된 첫 해부터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60만부가 팔려나갔다. 책과 더불어 출간 당시 30살의 아이리스 장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계 언론인으로 손꼽히면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작가와 역사 연구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난징의 강간>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선구적인 추적 작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참상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1995년 한 달여 동안 난징을 방문,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만나고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벌였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리스 장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를 비롯해 서구세계에 남아있는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철저히 조사했다.

난징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과 피해자들이 겪은 참상을 생생히 복원한 <난징의 강간>은 영어로 쓰인 난징대학살의 첫 번째 기록이었다. 미국 내에서 난징대학살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일어나자, 1998년 12월 미국 공영방송 PBS는 아이리스 장과 쿠니히코 사이토 주미 일본대사의 토론을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아이리스 장은 용의주도한 논리와 주장으로 일본대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아이리스 장은 궤변을 늘어놓는 일본대사를 몰아붙이면서,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피해국과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전혀 없다"면서 "당신은 들어본 적이 있나요?"라며 되묻기도 했다.

작가로서 아이리스 장을 소개한 홈페이지. <난징의 강간>을 통해 아이리스 장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작가와 역사 연구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 아이리스 장 홈페이지
1300여명의 희생자 유골이 집단 발굴된 만인갱에서 함께 발굴된 일본군의 물품들.
ⓒ 모종혁

난징대학살을 폭로한 아이리스 장, 일본 우익의 압력에 자살

<난징의 강간>이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렸지만, 정작 그 진상을 알아야 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못했다. 1999년 일본 카시와쇼보출판사는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일본 우익세력은 출판사에 몰려와 압력을 넣었다.

선전차를 이용한 고성방가에다 잇따른 협박 전화·편지·팩스까지 우익의 집요한 압력이 지속되자, 출판사는 책의 적지 않은 내용과 표현을 수정하여 출판하려 했다. 이에 아이리스 장 측은 반대했고, 결국 책은 일본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일본 우익세력의 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난징의 강간>을 반일위서(反日僞書)라 규정지으며 대규모 규탄집회를 개최했다. 일본 우익은 난징대학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아이리스 장을 '역사를 조작하는 마녀'로 비난하면서 난징대학살을 부정·왜곡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출판조차 되지 못한 책의 비판서가 범람한 점이다. 일본에서는 <난징의 강간>의 일부 오류를 확대 과장하고 역사 자체를 날조한 서적이 줄이어 출판됐다. 일부 비판서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보수화 바람에 힘입어 베스트셀러까지 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 우익세력의 마각은 일본 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아이리스 장의 자살에는 일본 우익의 압력이 작용했다. <난징의 강간> 출간 이후 아이리스 장은 줄곧 공포와 협박 속에서 지냈고,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아이리스 장은 가까운 친구들과조차 전화 대신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고 친척들에게도 남편과 아들의 근황을 말하지 않았다.

아이리스 장이 사망한 해 11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크리스틴 추이 뉴욕대학 영화과 교수는 "아이리스 장은 <난징의 강간> 출간 후 줄곧 일본 우익세력의 끊임없는 협박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아이리스 장을 여러 번 인터뷰했던 추이는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의 계속된 협박으로 우울증에 빠졌고 이에 정신과 진료를 받다가 자살까지 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난징대학살과 <난징의 강간>을 부정하는 선두에는 일본난징학회가 있었다. 일본난징학회의 회장인 하가시나카노 슈도 일본 아세아대학 교수는 난징대학살의 존재 자체마저 부정하고 있다.

하가시나카노 교수는 난징에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1998년에 낸 <난징학살의 철저검증>에서는 일가족 9명 중 7명이 살해당한 피해자 샤수친(夏淑琴·78)의 사례가 날조됐다고 주장했다. 지난 11월 2일 일본 도쿄지방재판소는 샤수친이 제기한 소송에 대해 하가시나카노 교수와 <난징학살의 철저검증> 출판사가 원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400만엔 배상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하가시나카노 교수의 궤변은 변함이 없다.

두 일본군 병사의 중국인 100인 목 베기 시합을 보도한 당시 일본 신문(왼쪽 아래). 일본 우익은 이러한 언론 보도조차 오보 또는 과장 보도로 치부하며 부정하고 있다.
ⓒ 난징대학살기념관
만인갱에서 발굴된 난징대학살 희생자의 유골을 살펴보는 관람객들.
ⓒ 모종혁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배후는 정치가들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는 일본 문화예술인도 한몫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 우익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미즈시마 사토루는 <난징의 진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미즈시마 감독은 1월 24일 연 기자회견에서 "난징대학살의 증거로 나온 자료는 모두 중국 측의 선전 자료"라며 난징에서 부당하게 죽음을 당한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주장했다. 미즈시마 감독은 "우리가 침묵하면 반일 선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라며 "영화를 통해 잘못 알려진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이렇듯 일본 사회 각계에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세력이 준동하게 된 것은 일본 정치가들이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2월 9일 일본 자민당 내 의원연맹인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은 난징대학살 사실검증 소위원회를 만들어 역사 왜곡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6월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제대로 된 증거가 없다"면서 "당시 난징에서는 어떠한 학살도 없었음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한국의 이른바 '위안부' 문제와 마찬가지로 외국의 역사 날조로 일본이 억울하게 매도당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일본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이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도 "난징대학살은 중국이 날조한 사건"이라는 망언을 일삼고 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도 애매모호하다. 4월 일본 정부는 의회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1937년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한 뒤 민간인에 대한 살해와 약탈행위 등을 했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수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어 단정키 어렵다"고 답변했다.

'구체적인' 증거를 앞세워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행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학살을 지시한 명령서와 증언들이 잇따라 나오는데도 공식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정부와 군부가 불리한 문서와 증거를 모두 폐기했는데도 말이다.

일본의 대다수 역사학자들마저 난징대학살의 희생자 수를 걸고넘어지면서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학살자와 관련해서, 중국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그 수를 3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2차 대전 후 도쿄에서 열린 전범재판에서조차 학살자수는 최소 20만여 명으로 제시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역사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양심 있는 일본 학자들 역시 난징대학살을 인정하면서도 피해 규모와 학살자수 등에 대해서는 중국 학자들과 첨예한 견해차를 보이고 있다.

난징대학살기념관 내에 보관된 학살 희생자 명부. <난징대학살 사료집> 발간팀은 앞으로 전 80권 발간을 목표로 자료 수집과 희생자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모종혁
난징대학살기념관 안에 설치된 평화대종을 치는 중국 젊은이들. 적지 않은 중국 젊은이들은 제대로 알아야 할 역사에는 관심 없고 눈요깃거리에만 눈독을 들인다.
ⓒ 모종혁

중·일관계 발전 미명 아래 진실 추구에 눈감은 중국정부

징셩홍(經盛鴻) 난징사범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기자에게 "1948년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분명히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뒤 20만 명 이상의 인명을 학살했다고 논증했다"고 말했다. 징 교수는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도쿄재판 기록에 당시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후 양쯔강에 버려진 시체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주석으로 단 점"이라며 "패전 후 붙들린 일본 전범들의 증언을 통해서 그 수가 10만 명 이상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주청산(朱成山) 난징대학살기념관장도 중국 관영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학살 희생자수 30만 명은 2차 대전 후 도쿄재판과 난징재판을 통해서 밝혀진 것을 추산한 것"이라며 "이는 일본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는 난징대학살의 확고부동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역사 부정과 왜곡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중국 정부의 대처 방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38년부터 난징대학살의 존재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지만, 2차 대전 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장악한 공산당 정부도 다를 바 없었다.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때 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의 죄악을 추궁하지 않았다. 치열한 냉전 상황에서 서구세계와의 교류와 화해를 원했던 중국 정부는 일본에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면죄부를 주었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이 개관되고 <난징의 강간>이 발간된 뒤에도, 일본과의 경제협력과 일본기업의 투자가 중국 측에 더욱 소중했다.

중·일관계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에서도 가려진 역사의 진실과 아픔을 보듬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은 지속되고 있다. 지난 3일 난징에서는 학자와 전문가 70여 명이 함께한 <난징대학살 사료집> 27권이 발간됐다. 이 사료집에는 학살 희생자 1만3000명의 인적사항과 피해상황을 담은 명부도 포함됐다. 희생자 명부에는 성명, 성별, 연령, 주소, 직업, 피살 시간·장소, 피살 방식, 조사자와 진술자 등 구체적인 증거가 게재돼 있다.

난징대학살을 조명한 영화도 잇따라 개봉되고 있다. 올해 초 서구세계에서는 최초로 난징대학살을 다룬 기록 영화 <난징>(Nanking)이 개봉되었다. 미국의 빌 구텐타그 감독이 제작한 <난징>은 내년 아카데미영화제의 최우수 다큐멘터리 후보작으로 선정된 상태다.

중국의 루촨(陸川) 감독이 제작 중인 <난징! 난징!>도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 내년 초 상영을 앞두고 있다. 홍콩의 옌하오(嚴浩) 감독은 <난징 크리스마스 1937>을, 탕지리(唐季禮) 감독은 <일기>를 촬영 중에 있으며, 중국과 할리우드가 합작한 <퍼플 마운틴>과 <고해>도 한창 제작중이다.

역설적인 것은 난징대학살 영화 붐을 연 기록 영화 <난징>이 정작 난징에서는 한동안 개봉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7월 3일 중국 전역의 대형극장에서 개봉됐던 <난징>은 방학시즌을 맞아 관객이 적을 것을 우려한 난징 극장주의 외면으로 한 달 가까이 개봉관을 찾지 못했다. 뒤늦게 몇몇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아야 했다.

당시를 회고한 천다숑(31)은 "영화 <난징>의 개봉사건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관심 없는 젊은이들의 현실과 무감각한 역사의식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며 "난징에는 진출한 일본기업도 없지만 난징대학살을 제대로 알고 있는 시민들도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아이리스 장이 좋아했다는 이 격언은 우리가 난징대학살을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하는 이유다.

한 일본인 노인이 난징대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면서 세운 위령비. 진실한 사과와 배상만이 진정한 미래의 화합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 모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