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회문화

[스크랩] 100년 전에 `한민족`은 없었다-앙드레 슈미드

monocrop 2007. 10. 22. 13:43


     100년 전에 '한민족'은 없었다



▲ 1905년 황성신문이 광개토대왕비 발견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광개토대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한 조선인이 광개토대왕비 옆에 서 있다. /정성길 화성평화공원박물관장 소장
*참고:위 광개토왕비와 현재의 비 모양이 달라 일부에선 지금의 비는 모조품이란 설도 제기(글돋 주)

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지음|정여울 옮김|
휴머니스트|756쪽|2만8000원


1905년 10월 31일
황성신문은 중국 지안(集安)에서 높이 6.4m에 달하는 1500년 전 비석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비석은 4면에 걸쳐 1750자가 넘는 글자로 고구려 광개토대왕(375~415)의 업적을 빼곡히 기록하고 있었다. 신문은 이 엄청난 고고학적 발견에 흥분하며 신문 편집에서 가장 잘 눈에 띄는 1면 사설란에 비문의 내용을 공개했고, 이후 엿새 동안 후속 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 비석이 발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23년 전인 1882년 중국 당국은 비석을 발굴한 뒤 그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이라고 고증했다. 일본은 2년 후 비석의 탁본을 떠서 박물관에 전시했다. 황성신문은 이런 과정이 한국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개탄했지만, 사실 한국인들은 그제서야 이 비석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었을 뿐이었다. 한국의 국권이 일본 손에 떨어진
을사조약이 맺어지기 며칠 전이었다.

중국의 본토까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됐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들은 ‘민족’에 대한 담론과 저술을 봇물처럼 쏟아냈다. 그 이전까지 ‘민족’이란 말은 문헌이나 일상용어에서 쓰이지 않던 말이었다. 민족이란 단어는 이 시기 “새롭게 떠오른 신조어”였다.


저자 앙드레 슈미드(Andre Schmid)는 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학부 교수다. 그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간행된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한국 신문에 나타난 담론을 토대로 ‘민족’의 탄생과정을 추적한다. 그는 “한국에서는 병합 이후 민족의 개념이 더욱 광범위하게 유포된다”고 진단한다. 이유는 이렇다. “(한국에서) 민족은 숭고한 개념으로만이 아니라 객관적인 총체로 이해되었다. 국가는 빼앗겼지만, 민족은 그 존재와 자율성이 대안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 제목(원제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에서 ‘사이(between)’는 중국과 일본 두 제국의 사이를 말한다. 하나는 저물어가는 제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떠오르는 제국이었다. 책 제목은 두 제국 사이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고 구체화되었음을 암시한다.

‘독립신문’은 저물어가는 제국인 중국과의 단절을 강력히 주장했다. 500년간 조선은 중화 질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이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민족”(‘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으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장군
을지문덕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적은 군대로 수양제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을지문덕은 “한국의 4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사람”이었다. 신채호는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이렇게 강하고 용감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본성이다!”고 했다.

단군이 민족의 시조로 받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단군은 13세기 문헌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등장하지만 조선후기까지 기자(箕子)에 밀려 주목을 받지 못했다. 중국의 유민을 이끌고 조선에 온 기자는 중화 문명의 담지자로 추앙됐다. 저자는 “단군의 지위가 격상되는 과정은 민족이라는 신조어의 사용이 늘어나는 현상과 나란히 진행됐다”고 말한다.

단군과 민족을 결합시켜 민족사를 확장시키는 작업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신채호였다. 그는 “민족을 부정한다면 역사도 없다”고 말했다. “역사는 민족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민족은 역사 없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이었다. 황성신문 1910년 8월 9일자 논설은 “우리 형제자매들은 4000년 전 백두산 신단수 아래에서 태어난 민족의 시조 단군의 자손들이다”고 선언했다.

떠오르는 제국 일본은 ‘민족’의 개념을 더욱 구체화하는데 기여했다. 황성신문이 처음 ‘민족’이란 말을 썼을 때인 1900년만 해도 ‘민족’이란 말은 ‘인종’ 개념에 더 가까웠다. 황성신문은 동양에 사는 황인종의 단결이야말로 민족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황성신문은 “만일 러시아가 승리하고 일본이 패한다면 동양은 조각조각 나뉘어 점령당하게 될 것이고 결국 황인종은 끝장날 것이다”고 썼다.

반대 의견도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의 ‘동양주의’를 비판했다. “동양주의를 호국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다. 몇몇 외국인들이 국혼을 빼앗기 위한 방편으로 동양주의를 들먹일 뿐이다. 우리는 이 점을 직시해야 하고 주의해야 한다.” 황성신문도 ‘동양의 선도자’로 여겼던 일본이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자 유명한 논설 ‘
시일야방성대곡’을 쓰고 ‘동양주의’를 떠났다. 이후 황성신문은 의식적으로 민족이라는 단어를 한반도 영토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한정했다. 1907년 6월 20일자 황성신문은 ‘민족주의’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민족은 나라의 기초이며 모든 백성은 민족의 이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이란 개념이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민족을 ‘
상상의 공동체’로 규정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인쇄 자본주의(Print Capitalism)의 발흥과 자국어로 된 대중신문의 등장을 통해 한 민족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신문을 통해 민족의 탄생을 탐구하는 저자 역시 앤더슨 연구의 연장선 위에 있다.

저자가 말하듯 민족 개념은 “한국을 중화주의적 관념에서 분리해내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나타나고 더욱 강화됐다. “민족사와 식민사는 여전히 서로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바로 이러한 규정 때문에 둘은 서로 의존적인 것이다”는 저자의 통찰 또한 곱씹어 볼만하다.



◆더 읽을 만한 책

‘민족주의의 기원과 성찰’이란 부제를 단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es·나남출판)는 민족을 고대로부터 실재한 실체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문화적 조형물로 본다. 이 책은 민족 문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고전에 속한다. 독일 역사학자 한스 울리히벨러의 ‘허구의 민족주의’(푸른역사)는 서구에서 민족이라는 발명품의 탄생 과정을 서술하고 민족주의라는 허구의 개념을 걷어낼 것을 주장한다.

최근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민족 또는 민족주의에 대한 주목할 만한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다. 박찬승 교수의 ‘민족주의의 시대’(경인문화사)는 한국의 근대민족주의가 3·1운동을 계기로 형성됐으며 1920년대에 민족주의 좌·우파로 분화했다가, 해방 이후에도 서로 대립관계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발전해왔다고 본다. 임지현 교수는 민족주의는 반역이다’(소나무)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시민적 공공성이 결여된 채 민중의 원초적 감성에 호소하는 신화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이한수 기자조선일보]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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