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임나국과 미마나의 어원

임나와 미마나의 어원 해석

monocrop 2007. 10. 15. 21:01

임나국과 미마나의 어원

                                                                 글 : 고대사산책 / 2003-06-28 20:04:29 / www.coo2.net

 

任那國      

일본서기 숭신기 65 7월조에 임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기사가 최초로 실려 있다
.    

『任那國遣蘇那曷叱智 令朝貢也 任那者去築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을 해왔다. 임나는 축자국으로부터 2천여 리 떨어져 있고 북은 바다로 막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
          

임나국이 사신 소나갈질지를 보내 일본에 조공을 했다는 것인데 물론 사실이 아니다. 숭신은 일본서기의 표면적인 연대로는 서기 1세기 중후반으로 되어 있으나 소나갈질지라는 인물은 서기 4세기 중후반의 가라왕 아라사등이기 때문이다. 위의 기사에 이어지는 내용이 서기 수인기 2년 시세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是歲 任那人蘇那曷叱智請之 欲歸于國 蓋先皇之世來朝未還歟 故敦賞蘇那曷叱智 仍齎赤絹一百匹 賜任那王 然新羅人遮之於道而奪焉 其二國之怨 始起於是時也』 > 『이해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청했다. 아마도 선황세에 와서 아직 돌아가지 않은 것인가 한다. 고로 소나갈질지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 더하여 붉은 비단 백 필을 임나왕에게 주었다. 그런데 신라인이 길을 막고 빼앗았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이어서 이설1에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실려 있다
.        

『어간성천황대에 액유각인이 있어 배를 타고 월국의 사반포에 머물렀다. 그래서 그곳을 각록이라 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니 "의부가라국의 왕자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 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라 한다. 일본국에 성황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귀화했다. 혈문에 당도했을 때 이도도비고란 사람이 있었는데 신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두 왕이 없다. 다른 데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을 보고서 왕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 길을 모르고 섬을 거쳐 북해를 돌아 출운국을 거쳐 이곳에 도착했다"라고 했다. 이때 천황이 붕하여 이곳에 머무르며 수인천황을 섬긴 지 3년이 되었다. 천황이 아라사등에게 "그대는 본국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아라사등이 "무척 가고 싶습니다"고 했다. 천황은 아라사등에게 조하여 "그대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더라면 선황도 뵙고 섬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의 본국명을 고치되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서 그대의 나라이름으로 하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붉은 비단[赤絹]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로 돌아가도록 했다. 고로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이라 함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에 아라사등은 받은 적견을 자기나라의 군부에 간수했다. 신라인이 듣고 군사를 일으켜 와서 그 적견을 모두 빼앗았다. 두 나라가 서로 미워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임나=대가라=()가야=아라가야


여기서 보면 동일인물의 이름이 여러 번 달리 표기되어 등장하는데 임나인 소나갈질지, 의부가라국의 왕자 도노아아라사등 또는 우사기아리질지간기 등이다. 따라서 任那人과 意富加羅國王子, 干岐가 대응되고 蘇那曷叱智, 都怒我阿羅斯等, 于斯岐阿利叱智가 전부 동일인물의 이칭이다. 그렇다면 임나라는 나라가 오호가라[意富加羅]>오호가라[大加羅]라는 뜻이다. 任那라는 나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었다던 대가라 즉 금관가야인 것이다. 성씨록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大市首; 出自任那國人 都怒賀阿羅斯止也(좌경제번
)
淸水首; 出自任那國人 都怒何阿羅志止也(좌경제번
)  
벽田首; 出自任那國主 都奴加阿羅지등也(대화국제번
)  
三間名公; 彌麻奈國主 牟留知王之後也 初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諡崇神)御世 額有角人 乘船泊于越國사飯浦 遣人問曰何國人也 對曰 意富加羅國王子名都努我阿羅斯等 亦阿利叱智干岐...(중략)...(우경미정잡성
)        

이름들이 쯔누가[都怒賀/都怒賀/都奴加/都努我/都怒我], 아라시또[阿羅斯止/阿羅志止/阿羅지등/阿羅斯等], 미마나[彌麻奈/彌摩那/三間名]로 한자는 전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같은 이름들이고 '미마나..기미[三間名公]'조의 설명은 수인기 2년 시세조의 내용과 같다. (*1)성씨록 주에 '삼간명공'조의 미마나국주모류지왕(彌麻奈國主牟留知王)에서 이름 '모류지' '모지'로 표기된 저본도 있다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가야왕족 수직돌림자 '마다'계열 이칭으로서 신대기에 등장하는 大己貴神의 무지[]와 같은 무지[牟知]인 것이다. ''자가 없는 저본이 정확한 것이다
.    

(*1) <
신찬성씨록/佐伯有淸/吉川弘文館/昭和566
/337p>  

위에 등장한 이칭들을 분해하여 요소별로 대응시켜 보면 "蘇那曷叱智=蘇那++叱智", "都怒我阿羅斯等=都怒我+阿羅+斯等", "于斯岐阿利叱智=于斯岐+阿利+叱智"가 되고 간기는 진한어로 왕을 뜻하므로 왕자와 대응된다. 소나[蘇那]는 반도어 소[]>[]로 만들고 나라[]이므로 "[]+나라[]"로서 마치 웅습국>..구니[襲國]>"[]+나라[]">"[]+나라[]"와 같은 방법으로 조어한 이름이다. 반도어 소[]의 훈을 열도어로 이두표기한 것이 소[[]. 쯔누가[都怒我]는 쯔누가[角鹿]를 한자만 달리 표기한 것으로 대가라왕자 아라시또[阿羅斯等]가 일본의 북쪽 해안지방 월국을 개척한 인물임을 알려주기 위해 그 중심지 지명을 이름 앞에 붙여둔 것이다
.              

于斯岐=蘇那=熊襲國=襲國


우시기[于斯岐]는 앞의 소나[蘇那]와 같은 뜻인데 이번에는 열도어 훈을 이두표기하여 우시[]>우시[于斯]로 하고 기[]>[]로 바꾸어 조어한 것이다. 즉 소나라[牛國]>우시기[牛城]>우시기[于斯岐]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구마소..구니[熊襲國], ..구니[襲國], 소나[蘇那], 우시기[于斯岐] 등이 전부 하나의 나라를 한자와 음을 달리하여 부르는 이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소시모리[曾尸茂梨]>쇠머리[牛頭/牛首]와도 사실상 같은 것이다.        

=阿羅=阿利
    

'
()'은 두 음절로 된 가라(加羅)를 받침을 붙여 반도식으로 한 음절로 읽고 표기한 것이다. 또 아라(阿羅)와 아리(阿利)는 아라가야의 준말이다. 시또[斯等]는 현대어 히또[]와 같은 말인데 시지[叱智]도 같은 뜻으로 판단된다. 말하자면 아라사등과 아리질지란 말은 '아라가야인'이란 뜻이고 이것은 '임나인'과도 같은 뜻이다. 따라서 이 세 개의 이름을 분석해보면 "임나=대가라(금관가야)=아라가야"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구주에 있었던 고대소국인 웅습국(=襲國/蘇那/于斯岐)과 본주 북해의 월국도 이 인물이 개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본문에서 출운국을 거쳐 각록에 왔다고 하고 있는데 바로 이 인물이 신대기8단 이설4의 소잔명존과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阿羅斯等이라는 이름이 민달기에는 阿利斯登이라고도 나온다
.    

단순히 임나인 또는 대가라국왕자라고 했으나 성씨록 '벽전수'조에는 임나국주로도 나오며 성씨가 김씨로 나온다
.    

벽田首; 出自任那國主 都奴加阿羅지등也(대화국제번
)
大伴造; 出自任那國主 龍主王孫 佐利王也(대화국제번
)
豊津造; 出自任那國人 左李金(亦名 佐利己牟)(섭진국제번
)
韓人; 豊津造同祖 左李金(亦名 佐利己牟)之後也(섭진국제번
)
  
그런데 '대반조'조에서는 임나왕이 '사이[佐利]'이라 하고 '풍진조'조와 '한인'조에서도 '사이[左李]'이라면서 한편으로는 '사이[佐利]고무/기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성씨를 분석해보면 여기서 '(/)'는 반도어 ''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사이왕', '사이고무/기무'인 것이다. '己牟'는 열도어로 '기무' 또는 '고무'로 읽을 수 있는데 '기무'로 읽으면 '()'이고 '고무'로 읽을 때는 '()'이다. 어느 쪽으로 읽으나 달라질 것이 없다
.          

역시 아래아가 열쇠다. 이것은 최초에 ''로 분화되면 (+아래아)>'사이'>'[]'가 되고 ''로 분화되면 (+아래아)>'소이'>'[]'가 되는데 新羅=金城이므로 결국은 新=, =城이 되어 동일한 결과다. 따라서 '사이[佐利]>금왕'이고 '사이[左李]>쇠 金'이 된다. 이들은 가야왕족으로서 성씨가 金氏인 것이다. 같은 임나국주이므로 '벽전수'조의 阿羅지등이나 '대반조'조의 용주왕의 손자 사이[佐利]왕이나 성씨가 동일한 金氏인 것이다. 성씨록에는 金氏로 바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  

宇努連; 新羅皇子 金庭興之後也(하내국미정잡성
)          

우노[宇努]=우노[노野/토野]이며 신라는 경주신라가 아니고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다. 신찬성씨록에는 신무천황의 친형인 도반명이 신라왕족으로 나오므로 신무도 신라왕족으로서 신라왕자 천일창, 응신천황과 동일인물이다
.      

新良貴; 彦波염武노자草葺不合尊男 稻飯命之後也 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 稻飯命出於新羅國王者祖合(우경황별
)      

'
언파염무노자초즙불합존'이란 기다란 이름은 통상 줄여서 언파불합존이라고 부른다. '시라기[新良貴]'라는 성씨는 언파불합존의 아들[] 도반명(稻飯命)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도반명은 「신라국출신이며 신라국주도 했다[是出於新良國 卽爲國主]」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시라기[新良貴], 시라기[新良], 시라기[新羅]는 전부 같은 이름이다. 형이 신라인이므로 당연히 신무도 신라인이라는 말이 된다. 언파불합존이 아라사등인 것이다
.    

신무의 부왕의 이름 속에 들어 있는 우노[노자]라는 키워드를 따서 한자를 바꾸어 우노[宇努]라는 성씨를 하나 창씨를 한 것이다. 아라사등의 차녀를 분식하여 등재한 지통천황의 어릴 때 이름 우노사라라[노野讚良]에도 들어 있다. 가야계라는 것을, 이런 키워드를 넣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더플새 노(+), 더플새 자(+), (玆 밑에 鳥
)
                                          
임나는 가라의 이칭이며 임나, 대가라, ()가야, 아라가야, 신라 등은 각각 별개의 나라가 아니고 전부 동체임을 알 수 있다. 가라히또[韓人]>가라히또[加羅人]이며 가나히또[任那人]와도 같은 말이다
.    


가야계 이름
          

원래 열도는 최초에 가야인이 개척하다 보니 가야에 대한 이칭이 무척 많다. 가야(加耶), 가라(加羅), 각라(各羅) 등과 음이 '가라'인 韓, , 漢 등의 말도 갖다 붙여썼다. 아라(阿羅)를 안야(安耶), 안라(安羅) 등으로 쓰기도 했던 것처럼 임나도 그 중 하나다. 심지어는 가야[科野], 가야[蚊屋], 가야[鹿野], 가야[香屋] 등의 지명이 있고 가야[鹿文], '壹伎史韓國' 등의 인명도 있고 신찬성씨록에는 蚊屋忌寸, 蚊屋宿니, 加羅氏, 賀良姓, 韓國忌寸, 韓國連, 韓人 등의 성씨도 있는데 역시 가라꾸니[韓國]는 구라구니[加羅國]를 가리키는 말이다
.
                
반도에서는 이 말을 옛날엔 안 썼지만 기·기에는 韓國이라고 나온다. ·기나 성씨록에 나오는 ''은 중국의 漢나라가 아니다. ''도 唐나라가 생긴 후에 정식으로 사신이 오가는 것 외에는 가라[]>가라[]로 쓰인 말이다. 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이칭일 뿐이다. '' '아야'라고도 읽었고 '아야' '아라가야' 준말이기도 하다. 흔히 기·기상에서 반도의 제국을 열거할 때 고구려·백제·신라·임나라고 병기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물론 허위기사이긴 하지만, 네 나라를 나란히 병기하는 것을 보더라도 임나가 '가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 '
任那'의 올바른 音
    

위의 숭신기를 다시 보면 「그대의 본국명을 고치되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서 그대의 나라이름으로 하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붉은 비단[赤絹]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본토로 돌아가도록 했다. 고로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이라 함은 이런 연유에서다」라고 되어 있다
.      

임나국을 미마나국으로 고쳐 불러라 했다 하는데 이것은 任那라는 한자로 된 국명의 음을 '미마나'로 고쳐 부르라는 것이며 원래의 음은 '미마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원래음을 어법에 맞게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임나를 열도어로 분해하면 "마까[]+[]"가 되고 那는 國, 羅와 같은 뜻으로 서로 대치해 쓸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의 음은 어간 '마까'에서 ''가 탈락하여 '[]'가 되고 "[]+[]=가나[任那]"가 된다. 또 임나가 대가라라고 했고 이것은 금관가야이므로 열도어 '가나[]'와 연결된다. '쇠 金'의 음은 사국시대에는 '(+아래아+)[]'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는 일어에서 '' '가나', '가네', '' 등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일어 '마까[]'의 어원도 한어 '맡기다[]'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마끼다[]'이며 동사의 어미가 열도식으로 바뀐 것이다
.          
      
임나라는 이름은 (*1)사국시대나 후기신라시대, 고려시대 기록에도 나오므로 사국시대에는 가나[任那]로 쓴 것으로 판단되는데 원래는 가나[]였던 것을 이두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볼 경우 흔히 알고 있는 금관가야라는 이름 자체가 이상해진다. '金官'이란 한자에서 '가나'라는 음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官은 후세에 고려인들이 가야역사를 폐기하면서 가야의 실체를 가리기 위해 쓴 이름으로 보인다. (*2)金官이란 이름은 서기 임나기사에 잠간 나오는데 이 이름을 옮겨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 金이란 말은 가야의 제철과 연관성이 많지 않나 생각된다
.        

그런데 서기에서 위와 같이 고쳐 부르도록 하라고 하고 있는 것은 가야사·백제사를 개작하여 일본사로 꾸미면서 원래음 '가나[任那]'를 숨기기 위해 '미마나[任那]'라는 음을 하나 적당히 지어 표면적으로 내세운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분식을 하면서 사실대로 기술하면 쉽게 실체가 드러나므로 위작을 한 것이다. 따라서 任那라는 국명은 '미마나'로 읽으면 안 되는 것이다
.                    

(*1) 5
세기초 好太王碑文에 任那加羅, 후기신라 경명왕 7(서기 923)의 眞鏡大師塔碑에도 「선조가 任那의 왕족이다」라고 했고 사기 강수열전에도 任那加良이라고 나온다
.  

(*2)
서기 계체기 23 4월 시월조에 마을이름으로 나온다. 「金官, 背伐, 安多, 委陀. 一本云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
                  


任那의 어원
    

그런데 서기저자들이 '미마나'라는 음을 지어낸 과정을 추적해보면 숭신천황의 화풍시호 '御間城入彦五十瓊殖'에 들어있는 '미마기[御間城]'에서 '[]'는 존칭이니 떼고 '마기[間城]'를 반도어로 생각해보면 '' '사이/새 間'이다. ''은 金城=新羅의 예에서 보듯이 羅, , 國과 대치해 쓸 수 있다. 여기서 '사이/새 間'의 훈 ''의 음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뜻이 다른 '새 新'으로 한자를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으로 '>'로 치환하면 新羅가 되고 이것은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군조의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의 한자표기 新羅와 같아진다. 결국은 임나, 대가라, ()가야, 아라가야, 신라가 전부 동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물론 이 신라는 경주신라와는 전혀 다른 加羅의 古名인 것이다
.

'
아시(阿尸)' '아침'의 사국시대 고어형태 '', '', '' 셋 중에서 ''에 명사형어미 ''를 붙여 받침 없이 읽어 이두표기한 것이다. 한자로는 아침의 한자표기 朝, , 新 중 '새 新'인 것이다. ''은 고어에서 그냥 '[]'로 읽고 ''와 같이 쓰였다. 바로 아시라[阿尸良]는 新羅인 것이다. 가야도 새로운 나라를 개척하면 신라라고 이름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주 서남부에도 신라가 있었고 나라[奈良]에도 신라가 있었던 것이다. 阿羅나 阿那도 아시라[阿尸良]와 같은 이름으로서 사이시옷에 해당하는 '()'가 탈락한 형태로서 '아침나라/아침땅[新羅]'의 다른 표기인 것이다
.        
  
서기 신대기8단 이설4에서 소잔명존이 신라국에 내려가 소시모리에도 있다가 출운을 개척하고, 수인기에서 임나왕 아라사등이 신라왕자 천일창과 혈족인 이도국왕을 만나고 출운을 거쳐 각록을 개척하고 수인천황으로부터 받은 비단을 신라인에게 빼앗기고 있는데 신무천황도 신라인이고, 한편으로는 임나라는 말이 최초에는 아라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로부터 조어된 이름이라는 등 일련의 내용들이 전부 임나=대가라=()가야=아라가야=신라라는 관계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신무와 소잔명존 등의 인물은 4세기 중반의 백제 초고대왕과 동시대인물로 나타나고 신공과 응신도 역시 초고대왕과 동시대인물로 서기에 기술되어 있다
.  


○ '
미마나' 8세기초에 지은 이름


다시 '미마나'라는 음을 서기저자들이 지어낸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최초에 아라가야의 이두식 고명 아시라[阿尸良]를 한역한 新羅를 놓고, 이 新羅를 반도어 훈 '새 나라'로 바꾸고, 여기서 新의 훈인 ''를 이용하여 반도어로 같은 음의 훈을 가지는 '사이/새 間'으로 글자를 치환한 것이고, 羅는 같은 뜻의 城으로 바꾸면 間城이 된다. 이 말에 존칭을 뜻하는 御를 붙여 일단 숭신의 화풍시호를 御間城으로 만들면 열도음으로 미마기[御間城]가 되고 여기서 다시 城을 같은 뜻의 那로 치환하면 음이 미마나[御間那]가 된다. 이 御間那에서 음은 같으면서 한자는 다른 여러 가지 이칭들을 혼용하고 있는데 그것들이 彌摩那, 彌麻奈, 三間名, 御間名, 美麻那 등이다.    

이 과정에서 서기저자들은 '가나[任那]'라는 음과 '미마나'의 최초 원형 '미마나[御間那]'라는 한자이름을 은폐한 것이다. '가나'라는 음과 '御間那'라는 단어가 은폐됨으로써 "임나가라=()가라=아라가야"라는 관계의 연결고리가 증발해버린 것이다. 이것을 보면 숭신도 가라인인데 그 출신을 알려주려고 화풍시호를 지은 것이고 최초국명 新羅를 間城으로 치환하여 존칭 御를 붙여 조어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서기저자 자신들이 임의로 조어한 미마나[御間那]라는 음을 任那라는 단어에 붙여버린 것이다
".                         
       
결국은 8세기초 서기를 지을 당시 저자들은 이 원래의 '가나[任那]'라는 음을 가리기 위해 아라가야의 국명을 이용하여 숭신의 화풍시호 御間城을 짓고 나서 다시 城을 같은 뜻의 那로 바꾸어 '미마나[御間那]'라고 인위적으로 고안하여 만든 이름을 소나갈질지(=아라사등) 일화를 하나 꾸며서 그 속에 「그대의 나라이름을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서 나라이름으로 삼아라」라고 했고 「고로 그 국호를 미마나..구니[彌摩那國]라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라는 내용을 수인기에 넣어 놓고 '미마나[任那]'로 읽도록 유도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왜가 임나일본부니 안라일본부니 뭐니 하면서 반도남부를 수세기나 경영했다는 남선경영설은 이 임나라는 단어의 어원을 밝힘으로써 완벽한 허구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8세기초에 지은 미마나[任那]라는 이름이 어찌하여 숭신기부터 등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부라는 이름도 8세기초에 조어한 이름이지 그 전에 실제 있었던 이름이 아니다. 일본이란 국호부터가 7세기말에 지어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가라의 이칭을 이용한 역사위조


문제는 서기에서 가라의 이칭인 신라를 들먹이며 임나라는 가라의 또 하나의 이칭을 대응시켜 마치 무수히 다툰 것처럼 설정한 것은 8세기초에 가야인·백제인들이 그들 선대의 다툰 역사를 일본사로 개작하면서 실사대로 직필할 수 없다보니 여러 가지 가라의 이칭과 가라지역의 지명들을 이용하여 마치 적대적인 관계에서 다투고, 밀고 밀리고 한 것처럼 소설 쓰듯이 쓴 것일 뿐이다. 이런 것을 겉보기기사만 보고서 마치 임나라는 나라 따로 있고, 왜라는 나라 따로 있었던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앞에서 보았다시피 가라 다르고, 신라 다르고, 임나 다르고, 대가야 다르고, 아라가야 다르고, 금관가야 다르고, 왜가 다르고 한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전부 동체였을 뿐이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말까지의 왜도 다름 아닌 가야왕족 金讚(=응신)이 세운 대화왕조만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무수히 다툰 것처럼 기술하는데 있어 그 발단도 수인천황이 임나왕 아라사등에게 내린 붉은 비단 백 필을 신라인이 탈취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일 뿐이지 실사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실사상 다투었다면 오로지 백제와 가라가 가라본토와 가라가 개척한 열도를 사이에 두고 다툰 역사가 있을 뿐이다
.                


#
성씨록 '벽전수'조의 이름 '阿羅지등'에서 지등=(+)인데 이 프로그램의 한자지원에 문제가 있는 듯....붙여서 '지등'으로 올려도 ''이라는 한 글자로 나타남

 

.........................................................................................

 

 

(임나와 관련된 기사 한가지 ...2006-08-06 13:31:26)

 

일본이 한반도의 속국임을 입증하는 문서 발견....

 

교토대 고고학과 야나기사와 교수팀이 발견한 고지키(고서기) 초본의 해석이 일본학계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애초에 실체가 불분명한 일본 고대사를 정립해줄 사료로서 각광받았던 고지키 초본 (고지키 히미노리혼반)의 최종해석의 상당 수가 일본인이 한반도의 지배를 받았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

고지키 초본은 가라키 (가락국=가야)에서 갑회년 (10) 1번씩 총축을 파견하여 왜땅을 평정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임나일본부 문제이다.


고지키 초본에는 임나부의 상관에 여러 왜 부족 수장들이 모여 부족별 교역, 공물량을 협의했고 가라키왕이 이를 승인해주었다고 기술하고있다.
이는 임나 일본부가 일본사학계가 주장해온 것과 같이 일본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가야왕의 주제하에 왜땅의 여러 추장들이 모여 무역문제를 상의하는 통상회의 부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초본 36장의 이 구절 때문이다.
야무용과 이중의 장이 세력이 커 서로 다투니 가라키왕이 이를 말리며

구다라에 공물을 보내어 중재를 요청했다
...

즉 왜 땅의 유력 추장들이 교역량을 놓고 서로 싸우자
,
백제의 영향권 하에 있던 가야왕이 백제에 중재를 신청한 것이다
.

한 마디로 일본은 가야에 기생한 하청식민부족들이 난립하던 땅이었고

그 가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Mimesis

 

...'한 마디로 일본은 가야에 기생한 하청식민부족들이 난립하던 땅이었고 그 가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라는 표현은 맞지 않아 보인다. 

고구려와의 항쟁에도 강력함을 보였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란 두명의 백제의 왕이 열도의 가야와 전쟁을 하다 전사했다는 사실은 가야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 역시 백제의 지속적인 지배 의욕을 꺾을 만큼 상대적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였기에 종국엔 타협을 하고 백제에게 구주의 지배권을 넘기게 되는 것같고 구주의 지배권을 용인받는 대신 백제의 부여계가 반도의 가야계 왕인 동성대왕을 시해하는 것을 용인했던 것 같다.

 

광개토대왕비문에도 나오는 백잔이라 표현은 '백제'가 아니었으며 구주의 백제 분국들을 일컫는 말이 합당해 보인다.

그리고 구주를 쳐들어가 거둬들인 전공을 광개토대왕비에 새겨 놓은 것이 이제껏 위치 비정을 잘못해서 밝히지 못했던 사실이라고 보아진다.

 

사실상 열도의 원초 개척 세력은 일본인들 기록엔 시라기, 혹은 신라라고 나오는 가야세력임이 여러 기록을 부석함으로써 확연해지고 있음을 볼 때 고구려, 백제 보단 한 수 아래였을지언정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음을 가야의 문물과 유물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열도의 원주민들에게는 천청의 벽력같은 충격으로 와닿았기에 가북을 타고 왔다느니 거북머리를 하고 있다느니하는 구전설화가 생겼겠지만 그 지배층의 전투력은 대륙을 영위했던 백제가 열도에서 국력이 소진될만큼 소모전이 일어난 까닭은 가야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싸잡아 일본인들은 부정하면서 전혀 다른 '왜'가 옛부터 존재해왔다고 믿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른 희망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