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guage & ... Writing/아스카문화와 한국어

[스크랩]무령왕설화와 아스까시대의 개막

monocrop 2007. 10. 14. 01:40

무령왕설화와 아스까시대의 개막

                                                글 : 고대사산책 (송종성)  / http://www.coo2.net/  2003-05-22

 

 

○ 동성대왕은 무령왕이 암살

무령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동성대왕 시해를 주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는 진사왕 시호에서 보았듯이 휘에 '이[此] 斯'자가 들어있는 점이 그것을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진사왕의 '斯'자는 사기저자가 일본호칭 辰斯王, 陳思王 중에서 "용을 쪼갰다[辰斯]"는 뜻이 들어있는 지금의 이름을 골라서 기록했다고 보는데 사기에 동성대왕의 이칭으로 기·기에도 안 보이는 마모(摩牟)라는 이칭을 쓴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摩'자가 무령왕의 휘 사마의 '摩'이기 때문이다.  

斯摩

사마는 "摩를 쪼갰다[斯]"는 뜻이고 "摩牟를 쪼갰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또 같은 반도음의 "마[薯]를 쪼갰다"는 의미도 된다. '斯'자가 보통 '이[此]'의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짜개다/쪼개다[柝]'라는 뜻이 있다. 바로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쪼갰다는 말이 된다. 사기에는 백가( 加)가 보낸 자객에게 죽었다고 나왔으나 사기저자들이 기·기에도 보이지 않는 터무니없는 글자를 쓸 때는 곡절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령왕의 휘 斯摩와 동성대왕의 이칭 摩牟를 연결하여 시해범이 무령왕이라는 것을 지목하고 있다고 본다. 사기저자들이 실사는 절사하고 摩牟라는 암호만 남긴 것이다.

왕조의 신하다 보니 진사왕과 침류왕의 경우처럼 직필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사마왕이라는 휘도 무령왕의 탄생설화를 꾸미고 설화상의 도군(嶋君)을 다시 한자만 바꾼 것이고 이때 진사왕의 경우처럼 실사내용을 키워드 속에 압축하여 기·기 저자들이 붙인 것이다. 시마[嶋]의 음을 이두표기로 시마[斯摩]로 바꾸고 君은 王이므로 斯摩王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사기저자들은 역시 기·기를 보고서도 워낙 많이 절사하다 보니 연결고리가 없어져 摩牟라는 새로운 이칭을 연결고리로 지어 붙인 것이다. 원전인 서기에는 국인이 제거했다고 나오는데 백가라는 이름까지 지어 넣고 그 백가의 반란을 무령왕이 평정하는 것으로 꾸며서 실어 놓았다.            


○ 무령왕출생설화      

무령왕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왕통이 바뀌는 것을 은유한 설화"이지 실사가 아니다. 서기 웅략기 5년 4월조에 무령왕의 출생설화가 실려 있다.      

『백제의 가수리군(=개로왕)이 동생 군군(=昆支)에게 "너는 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기는 것이 좋겠다"하니 군군이 대답하기를 "상군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없으므로 원컨대 군의 부인을 주시면 명대로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시집보내면서 "내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월이 되었다. 만일 도중에 아이를 낳으면 어디 있든지 배에 태워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해라"라고 했다. 그리고 조정(=왜)에 파견했다』            

동 6월조 『임신한 부인이 과연 가수리군의 말처럼 축자의 각라도에서 아이를 낳았기로 이 아이의 이름을 도군이라 한다. 이에 군군은 즉시 배 한 척에 태워 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 백제인은 이 섬을 주도(主嶋)라 부른다』

동 7월조 『군군이 경(京)에 들어왔다. 이미 5인의 아들이 있었다[백제신찬에 이르기를 신축년 개로왕이 아우 곤지군을 보내 대왜로 가서 天王을 모시게 함으로써 兄王의 우호를 닦았다]』

아이는 무령왕을 지칭      

이 이야기에서 아이가 무령왕이라고 한다. 여기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한 섬은 열도를 축소비유한 것이다. 각라도라는 조그만 섬에서 났다는 것은 8세기초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말하자면 동성대왕과 꼭 같은 경우로 열도에 있다가 백제본국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설화에서의 이 아이의 출생은 사실은 무령왕에 의한 새로운 지배권력의 탄생을 은유한 것이다. 가야계 동성대왕에서 백제계 무령왕에게로 권력이 이전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령왕의 혈통      

무령왕은 비유왕의 쿠데타로 쫓겨난 구이신왕이 열도로 망명한 후에 구이신의 후손인 문주왕이 왕권을 잡았다가 삼근왕 때 동성대왕에게 쿠데타로 빼앗긴 후에 다시 동성대왕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문주왕도 열도로 망명했던 구이신왕의 후손으로 보인다. 웅략기 11년 7월조에 등장하는 구이신[貴信]이다. 왜냐하면 무령왕은 아신왕의 후손으로서 '아침', '아침을 꽃피웠다' 또는 '아침을 당긴다'는 의미를 가진 아신왕의 이칭들이 전부 무령왕부터 시작되는 '아침'이라는 뜻을 가진 아스까[飛鳥]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에 '귀할 貴'자를 붙인 것을 보면 이 인물의 후손 중에서 후대에 왕들이 배출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시조인 귀수대왕의 시호가 貴首, 貴須다.

문주왕의 신라원병기사      

사기 개로왕 말년조에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이 공격받을 때 문주왕이 신라에서 원병을 만 명 얻어왔다고 되어있으나 이것은 사기저자들이 위사를 쓴 것이고 열도에서 출병했다. 열도와의 연고를 끊기 위해 열도출병을 숨기고 경주신라에다 연결해둔 것이다. 서기 웅략기 18년 8월조에 물부목련이 축자의 기꾸[聞]에서 출병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물부목련이 문주왕이고 같은 기사에 등장하는 물부토대숙니가 개로왕이다.      

배 한 척도 허기  

배 한 척에 왕비와 왕자를 태워 보냈다는 것도 이 기사가 실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해적에게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식을 지나치게 넘는 이야기를 두고 실사를 설화로 꾸민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표면적인 문구를 실사로서 받아들이면 터무니없는 오석이 나오는 것이다. 일종의 설화구성기법일 뿐이다.

왕이 아우에게 왕비를 주다

또 백제의 왕이 아우가 달라한다고 자신의 임신한 왕비를 아우에게 시집보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백제왕실에 이런 전통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이것도 실사를 비유하여 설화로 꾸몄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니리무세마'라는 음도 허기

니리무세마[主嶋]의 '리'도 억지로 끼워 넣은 발음 같다. 정상적인 발음은 '니무시마' 또는 '니무.노.시마'가 되어야 맞을 것이다.  

왕통교체를 은유한 설화

이 설화 역시 문주왕과 삼근왕의 재위기간이 짧은데다 동성대왕과 대적했던 인물이 무내계인 개로왕과 같은 혈통이기 때문에 연대를 적당히 개로왕에게로 맞춰 가야계 대반씨(=김씨)에게서 왕통이 물부씨(=부여씨)로 넘어온다는 비유적인 설화다. 태어난 곳이 섬이라고 한 것은 열도출신이라는 것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백제·왜 통합왕인 동성대왕이 몰하고 나면 왕통이 물부씨로 넘어가고 대반씨는 열도의 귀족으로 전락한다는 얘기가 「곤지군을 보내 대왜로 가서 天王을 모시게 함으로써」라는 형식으로 꾸민 것이다.
                                  
백제신찬        

백제신찬이란 사서가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왜왕을 4월조에는 '天皇'이라 하고 7월조에는 '天王'이라고 기술했다는 것도 위사흔적을 의도적으로 남긴 것으로 본다. 왜가 백제의 상국이었다면 이렇게 호칭이 다를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형왕의 우호를 닦았다는 말에서도 주어는 백제왕이고 백제왕이 兄王으로 해석된다.    

신화·설화에서 여인은 영토를 은유      

설화, 신화에서 여인은 영토를 상징하고 여인을 주었다는 것은 지배권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곤지왕이 개로왕에게서 여인(=백제왕권 상징)을 받는 것은 개로왕에게서 동성대왕으로 왕권을 이전되었다는 뜻이고 그 받은 부인에게서 부여씨인 개로왕의 아이가 났다는 것은 김씨인 동성대왕으로부터 부여씨 무령왕에게로 왕권이 넘어간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문주왕과 삼근왕은 둘 합쳐도 재위기간이 짧아서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신화·설화는 자연발생이 아니다      

또 개로왕은 무내계고 무령왕은 침류계로 계보가 다르지만 같은 부여씨(=물부씨)라는 점은 변함 없다. 기·기상의 이러한 모든 신화, 설화들은 기·기를 짓고 백제사·가야사를 일본사로 개작하는 작업이 완료된 후에 일제히 일본전국에 심은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지 결코 자연발생이 아닌 것이다. 사기나 서기의 신화·설화도 사서저자들이 지은 것이 많고 민간에 떠도는 것을 채록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예를 들면 사기의 도미열전만 해도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의 삼대에 걸친 백제왕권쟁탈전이며, 물계자열전도 석우로의 내해왕대의 행적만 따서 지은 것이고, 수로부인설화는 내해왕대에 포상제국이 아라가야를 두 차례에 걸쳐 침범했을 때 석우로가 구원해 준 것을 설화로 꾸민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출생은 새로운 왕조출현 은유    

바로 이러한 점에서 아이의 탄생은 새로운 왕조의 출현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동성대왕의 등장을 예언한 서기 웅략기 9년 7월조의 적준설화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비조호군의 사람 전변사백손의 딸은 고시군의 사람 서수가룡의 처다. 딸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라고 하는데 '비조호'라는 지명은 아라사등의 장자집안 성씨와 같고 전변사도 일족의 성씨인데 '古市'라는 지명은 초고대왕의 능이 있는 곳이고 서수는 왕인(=귀수대왕)의 후손 성씨이고 가류[加龍]는 침류왕의 이칭 가루[輕]와 같은 것이다. 즉 가야왕족의 딸이 백제왕족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낳은 것이다. 결국 서수가룡의 처가 낳은 아이는 가야왕족 중에서 백제왕이 나온다는 뜻이다.            

무령왕설화는 백제왕이 부인을 가야왕족(=곤지)에게 주었는데 그 부인이 아이를 낳은 것이다. 부인이 낳은 아이는 백제왕족 중에서 백제왕이 나온다는 뜻이 된다. 즉 아이의 출생은 새로운 지배권력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알[卵]이나 박[瓠]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도 역시 새로운 지배권력의 탄생이나 왕조의 탄생을 은유한 것이다.

※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 참조

서기 무열기 4년 4월조에 아래와 같이 나온다.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했다. 국인이 결국 제거하고 도왕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 한다[백제신찬에 말하였다.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였다. 국인이 함께 제거하였다. 무령왕이 섰다. 휘는 사마왕이다. 이는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이다. 곤지가 왜로 가려고 축자도에 이르렀을 때  사마왕을 낳았다. 섬에서 도로 보내 경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도 각라의 바다 가운데 주도가 있다. 왕이 출생한 섬이다. 고로 백제인이 주도라 이름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도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은 곤지왕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이라 함은 미상이다』  

서기도 왕통교체 분식    

계보를 두고 말을 몇 번씩이나 빙빙 돌려서 홀리고 있다. 결국은 동성대왕은 가야출신 김씨 왕으로서 백제의 부여씨나 귀족들로부터 도전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를 돌려서 폄하한 내용이다. 혈통도 빙빙 돌려서 결론은 끝에 가서 미상이라고 흐리고 있는데 이게 혈통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사기에는 왕통교체를 감추기 위해 문주의 아우인 곤지왕의 아들이라고 기재했다. 사기기록이 맞는다면 서기의 개로왕이 사기의 문주왕이 되고 동성대왕과 무령왕은 사촌간이 된다.    

동성대왕은 가야계      

웅략기 5년 7월조에 도군을 낳을 때 이미 군군(=곤지)은 아들 5인이 있었다고 했고 웅략기 23년 4월조에 그 중에서 둘째 말다왕이 동성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기에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둘째아들이라고 했다. 왕통교체를 숨기고 위사를 쓴 것이다. 더욱 더 결정적인 근거는 서기 무열기 7년 4월조에 백제국이 사아군을 보내 조공했다고 되어있고 이 인물이 무령왕의 아들인데 따로 표를 올려 말하기를 「앞서 조공사신으로 간 마나는 백제국주의 골족(骨族)이 아닙니다. 고로 斯我를 파견하여 삼가 조정을 섬기게 합니다」라고 나온다.  

'斯我'란 무령왕의 휘 斯摩를 이용하여 반도어로 "사마의 아들"의 머릿글자 (사)(아)를 따서 지은 이두식 이름이고 마나는 동성대왕의 아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백제국주의 골족이 아니란 말은 부여씨가 아니란 뜻이다. 여기서 조공사신이라는 것도 분식한 결과다. 사실은 열도의 후왕이 동성대왕의 아들에서 무령왕의 아들로 교체되는 기사인 것이다.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이어지는 기사에 있다.  

「(사아는) 그 후 자식이 있어 법사군이라 했고 이가 곧 倭君의 조다」라고 했는데 성씨록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和朝臣; 出自百濟國都慕王十八世孫 武寧王也(좌경제번)    

야마또[倭]와 야마또[和]는 같다. 성씨록에는 다시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바꾸어 올린 것이다. 원순모음화현상을 적용하면 쯔모[都慕]>주모[都慕]로 고주몽을 백제시조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君은 王이므로 왜군이 곧 왜왕이니 열도의 후왕인 것이다.      

백제출신으로 실질적으로 후왕이 된 것은 무령왕의 아들이 처음이니 왜군의 조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 전에는 있었어도 대화왕조 성립 전에는 명목뿐이었고 그 후 동성대왕 아들은 부여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씨록조차도 기·기상에 나오는 이름을 그대로 올린 경우도 있지만 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바꾸거나 뜻을 풀어 전혀 다른 이름으로 올리기도 하여 무척이나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있다.  

곤지왕의 의미

곤(昆)은 '맏[伯]', '형/언니[兄]'라는 의미가 있어 역시 동성대왕의 증조부인 예진별명을 기준으로 아라사등의 장자집안 인물이라는 뜻을 담아 지은 것으로 보이고 '하늘몸[天形]'이라는 뜻도 있어 예사존칭이 아니다. 성씨록에 나오는 곤기왕의 곤(琨)은 '아름다운 옥'이란 뜻이고 옥은 곧 왕권을 상징하므로 동성대왕을 등재한 세 인물 중 심하게 폄하한 무열천황을 제외한 나머지 흠명, 서명 두 천황의 이미지를 담아서 그 부왕에게 붙인 것으로 보인다.
                      
또 군군이란 이름에서 군(軍)은 군대, 병사의 뜻도 있지만 '싸움[戰爭]'이라는 의미도 있어 동성대왕이 열도와 백제의 패권을 차지할 때 대적했던 귀수대왕의 장자집안 입장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기·기 저술시의 문무천황은 귀수대왕의 장자집안 인물로 추정되는데 그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부여씨 입장에서 본 동성대왕의 이미지는 서기상에서 아스까[飛鳥]시대의 문을 연다는 의미도 포함하여 정확히 '야누스적'으로 표현되어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제신찬이란 사서는 이름만 나오지 확인이 불가하다. 일종의 기술기법으로 있지도 않았던 책이름을 들먹이면서 핑계 대는 경우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기술하는 도중에 지금 생각하니 어떻다라는 것은 더욱 믿기 어려운 것이다. 사서를 기술하면서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시된다. 그럴 것 같으면 앞에 나오는 내용을 고치고 방금 생각난 것을 기록해야 정상이다. 이런 것이 모두 다 이 문장의 표면적인 내용은 위사이니 믿지 말라는 암시를 주는 것일 뿐이다.

각라도    

게다가 각라도란 섬은 구주의 서북단에 있다. 지도를 보면 후꾸오까[福岡]만에서 정서 방향이자 일기도의 동남쪽으로, 일기도에서 후꾸오까로 가는 항로에서는 약간 비켜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 섬에 가서 아이를 낳을 일은 없다. 각라도는 지금의 구주 서북단의 가가라시마[加唐島]인데 반도음 '각(各)'을 열도식으로 받침 없이 읽으면서 '아'를 붙여 '가가라[各羅]'로 읽고 다시 한자가 바뀐 것이다. 가가·라·시마[各羅嶋]인데 가·가라·시마[加唐島]로 바꾼 것이다.

섬[嶋]에서 출생    

「섬에서 도로 보내 경(京)에 이르기 전에 섬에서 낳았다」라는 말도 섬은 열도를 뜻하고 열도에서 군대를 끌고 출발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경(京)에 이르기 전에"란 말은 큰 전투 없이 왕권을 차지했다는 말이다. 전투로는 동성대왕에게 당할 수 없으니 암살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섬에서 낳았다"는 말은 역시 "열도출신이 왕권을 장악했고 그 인물이 무령왕이다"라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은유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도 사실은 기·기를 저술한 후에 그 섬에다 심은 설화인 것이다.  

이 설화의 표면적인 내용을 그대로 믿고서 그것을 바탕으로 역사소설까지 나온 바가 있다. 어디까지나 문학의 일부인 소설이므로 뭐라고 하긴 어려우나 史實로서 받아들이면 곤란한 것이다.    

결론      

백제의 구이신왕은 비유왕의 쿠데타로 쫓겨나 열도로 망명했다. 그리고 비유왕계인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패전하여 한성에서 전사했을 때 문주왕이 열도 구주에서 출병하여 왕권을 차지했으나 아들 삼근왕까지 불과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열도출신 동성대왕이 쿠데타로 백제를 장악하게 된 것이고 그 23년 후에 아신왕의 후손인 열도출신 무령왕이 쿠데타로 동성대왕을 암살한 후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무령왕은 삼근왕과 형제서열 정도로 보인다. 바로 이런 왕통교체를 직필하지는 못하고 설화로 꾸민 것이다.        

이리하여 열도는 동성대왕 시대부터 백제의 제후국으로 바뀌고 백제왕의 아들들이 후왕으로 파견되는 기사가 서기에 여러 번 나온다. 다만 후왕이 질(質)로 분식되어 아무도 몰라볼 뿐이다.    


○ 아스까시대의 개막            

이렇게 무령왕이 가야계 동성대왕을 암살하고 백제왕위에 올라 초고대왕, 귀수대왕 이래로 여씨왕실의 숙원이던 열도병합이 이루어져 백제왕의 아들들이 차례대로 열도의 후왕으로 파견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왕실의 시조인 초고대왕을 등재한 고사기 이중기에는 동성대왕의 증조부인 서치별황자가 석상신궁에 거하고 있는 태자(=이중)에게 「政이 평안해 졌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고 곧바로 천황이 「阿知直을 처음으로 藏官에 임명하고 그에게 糧地를 내렸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아지직이란 아신왕의 이칭인데 여기서는 아신왕의 후손인 무령왕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양지란 백제의 제후국이 된 열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구라[藏]는 구라[位/鞍]와 같아 왕위를 나타내는 말이며 (대장>제장>내장)=(대왕>왕>후왕)의 백제 왕서열을 뜻하고 여기서 장관이란 열도의 후왕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열기 7년 4월조에 무령왕이 왜에 후왕으로 보낸 아들 斯我君이 고사기 이중기의 阿知直인 것이다. 서기는 이런 사아의 아들 법사군이 倭君의 조가 되었다고 공공연히 알려주고 있다. 왜군이 곧 왜왕이기 때문이다.  

※ "삼장분립제는 백제의 왕서열제도" 참조

또 원래는 '나는 새[飛鳥]'라는 뜻을 가진 말이 '아스까[飛鳥]'라는 음에 '아침'이란 뜻을 가지게 된 것은 주로 백조, 우백웅취, 천일취, 봉황새 등으로 은유된 귀수대왕이 "열도 제후국의 아침이 밝아와 힘차게 비상한다"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말을 바꾸면 왕실의 시조인 귀수대왕의 숙원인 열도병합이 이루어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령왕 직전의 동성대왕을 분식한 무열천황의 화풍시호에 '와까사사끼[稚초료]'라는 키워드가 들어 있는 것이다. 무령왕은 아침>아스까[飛鳥]는 아침이 밝아와 비상하는 成鳥를 의미하고, 동성대왕은 새벽>와까사사끼[稚초료]>"아직 날지 못하는 어린 새X끼[稚鳥]"로 각각 비유된 것이며, 동시에 동성대왕을 분식한 천황시호 흠명·서명의 '明'자가 새벽이란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귀수대왕을 등재한 고사기 윤공기에서는 가야가 세운 대화왕조의 마지막왕인 武王을 金波鎭漢紀武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켜 천황의 병을 고쳐주었다고 은유했고 윤공천황의 화풍시호에 들어 있는 '朝津間'이라는 키워드는 음이 아사쯔마[鳥津間]인데 (열도어+반도어)로 조어된 말로서 아사[朝]는 '아침'이고 쯔[津]는 즈[豆/頭]와 같이 노[之]의 뜻이며 사이/새[間]는 같은 음의 반도어 새[鳥]>새[間]로 바꾼 것이다. 따라서 아사쯔마[朝津間]는 "아침의 새">'아침새'라는 뜻이 되어 아스까[飛鳥]의 원래 한자어 飛鳥와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쯔[津/豆/頭]'도 '지(之)'라는 반도어에서 '이'와 '으'가 교체되어 쓰이는 현상을 이용하여 뜻을 같이 놓고 쓴 것으로 보인다.      

아사쯔마[朝津間]는 응신세에 120현민을 이끌고 열도로 망명했다던 궁월군이 정착한 지명으로 성씨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궁월군도 서기 신대기 상5단 사신출생장에 등장하는 월신의 이칭 월궁존을 한자순서만 바꾼 것이다. 일신인 天照大神은, 天이 백제를 가리키고 神은 왕이므로 百濟大王이란 뜻이고 일본왕실의 시조인 초고대왕이며, 월신은 일본왕실의 2인자인 귀수대왕인 것이다.

그래서 초고대왕의 시호를 建/立의 뜻을 가지는 세우고[肖古]로 읽고 있고 귀수대왕의 시호를 "고귀하신[貴] 시조님[首]", "고귀하신[貴] 수님[須]"이라고 짓고 신공기에서는 이칭도 "영원한[久] 시조님[저]"이라고 지어 쓴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전지왕장자 전지왕훙 즉위. 八年 冬十二月 왕훙」이라고 간단히 기술된 구이신왕도 일본서기에서는 그 이름을 "고귀하신[貴] 신님[信]"이라고 부르고 있고 열도로 망명한 사실도 실어 놓고 있다. (근본 저=氏 밑에 一)  

열도는, 가야가 세운 대화왕조가 4대왕 무왕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서기 479년 열도출신 가야왕족 동성대왕이 백제왕위에 오르면서 백제의 제후국으로 편입되어 백제가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고, '東朝'라고 불렸다는 것이 서기 제명기 7년 4월조에 나온다. 이때의 東은 '야마또'로 읽어야 하며 야마또[倭/和]와 같다.  

동성대왕이나 무령왕 같은 백제의 최전성기의 왕들 기록이 삼국사기에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삼국사기라는 사서의 성격을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사를 형편없이 축소하고 가야사는 사실상 폐기처분한 위서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주신라나 백제가 왜와 우호만 맺으면 인질을 보냈다고 하여 백제의 제후국이었던 열도를 두고 거꾸로 뒤집어 백제의 상국으로 기술해 놓았다. 대륙국가에 대해서만 사대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위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물증까지 위작해 넣어 놓은 것이 무령왕능지석인 것이다. 斯摩라는 이름은 8세기초에 일본서기저자들이 지은 이름인데 어찌하여 6세기초의 무령왕능에서 그것이 새겨진 지석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