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사 -coo2/신라초기

석탈해 세력 해석/다파라국/용성국

monocrop 2007. 10. 12. 16:00

● 석탈해설화의 실사적인 해석  

    글 : 고대사산책 / www.coo2.net/네티즌 칼럼/고대산책2/43번

○ 사기 신라본기 탈해전기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에서 났다.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천 리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여국의 왕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버려야 한다"라고 했으나 왕비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과 보물을 싸서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맡겼다. 처음에 금관국의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그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건지지 않았다. 다시 진한의 아진포 어귀에 이르렀는데 이때가 혁거세 39년이다. 이때 해변에 있던 할머니가 밧줄로 당겨 해안에 대고 궤를 당겨 열어보니 아이 하나가 있어 거두어 길렀더니 장성하자 신장이 9척에 달하고 풍모가 빼어나게 맑고 지식이 뛰어났다. 누군가가 "성씨를 알 수 없어 처음 궤가 떠내려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 작(鵲)자를 줄여서 昔氏라 하고 또 궤를 풀고 나왔으므로 탈해라 이름지어라"라고 했다 한다. 처음에 탈해는 고기낚시를 업으로 노모를 봉양했는데 한시도 게으른 빛이 없었다. 노모가 이르기를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골상이 특이하니 마땅히 학문에 종사해 공명을 세우라"라고 하였다. 이에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아울러 지리도 배웠다. 그는 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길한 땅으로 보고 속임수로 빼앗아 살았다. 그 땅이 훗날의 월성이다. 남해왕 5년에 왕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딸을 주었다. 남해왕 7년에는 그를 등용해 대보로 삼고 정사를 맡겼다. 유리가 죽으려할 때 "선왕의 명을 돌아보면 '내가 죽은 뒤에는 아들 사위를 가리지 말고 나이 많고 어진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라'라고 하였고 이로써 내가 먼저 왕이 되었으니 이제는 마땅히 왕위를 (탈해에게) 전해야겠다"라고 했다』

○ 유사 기이1 탈해왕조  

『가락국 바다 가운데에 배 한 척이 와서 닿았다. 이것을 보고 그 나라 수로왕이 백성들과 함께 북을 치고 그들을 맞아 머물게 했으나 그 배는 나는 듯이 계림의 서남 하서지촌의 아진포로 달아났다. 때마침 포구에 아진의선이라는 혁거세왕의 고기를 잡는 할머니가 있었다. "이 바다 가운데에 본래 바위가 없는데 어인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하고 배를 당겨 찾아보니 까치들이 배 위로 모였다. 그때 안에는 길이 20척, 넓이 13척의 궤가 하나 있었다. 그 배를 끌어다가 나무숲에 두고 길한지 흉한지 몰라 하늘에 고한 후에 궤를 열어보니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고 칠보와 노비가 가득하였다. 7일 동안 대접했더니 그제서야 아이가 "나는 본래 용성국(혹은 정명국/완하국/화하국이라 하고 용성은 왜국 동북 천 리에 있다) 사람이오. 우리나라에는 원래 28용왕이 있고 그들은 모두 사람의 태에서 나고 나이 5, 6세부터 왕위에 올라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바르게 했소. 8품의 성골이 있는데 그들은 가림 없이 왕위에 올랐소.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비로 맞아 오랫동안 아이가 없자 아들 낳기를 기도해 7년 만에 커다란 알 하나를 낳았소. 부왕이 "사람으로서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 좋은 일이 아니라면서 궤를 만들어 그 속에 넣고 칠보와 노비를 싣고 '아무쪼록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일가를 이루도록 해주시오'하고 빌자 갑자기 붉은 용이 나타나더니 배를 호위해서 여기 도착한 것이오". 말을 마치자 그 아이는 지팡이를 끌고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 위로 올라가더니 돌집을 짓고 7일을 머무르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폈다. 봉우리가 초사흘달처럼 생긴, 지세가 오래 살 만한 땅이 있어 내려가 찾아보니 표공집이었다. 속임수를 꾀하여 숯돌과 숯을 그 집 옆에 묻어두고 다음날 아침에 문에 가서 조상대부터 살던 집이라고 달라고 하자 표공은 아니라고 하여 관청에까지 갔으나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원이 무엇으로 증명하느냐고 하자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하고는 이웃마을에 잠시 간 사이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땅을 파보자고 하여 묻었던 숯돌과 숯을 파서 보여주고 집을 빼앗았다. 남해왕이 탈해가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고 큰딸을 주니 이가 아니부인이다. 어느 날 토해가 동악에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떠 오라 했다. 그런데 백의가 물을 떠서 오던 도중에 먼저 마시고 드리려고 하다가 입에 그릇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고, 다시 안 그러마고 다짐하고서야 입이 떨어졌다. 이후 백의는 속이지 않고 복종했다. 동악 속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이를 요내정이라 한다. 유리왕이 죽자 왕이 되었다(서기 57년). 옛날에 남의 집을 빼앗아 내 집으로 했다 해서 석씨라 한다. 또는 까치로 해서 궤를 열었다 해서 '까치 작(鵲)'에서 '새 조(鳥)'를 떼고 昔이라 한다.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고 탈해라 한다. 재위 23년 만에 죽어 소천구에 장사 지냈다. 그런데 뒤에 신이 "조심해서 내 뼈를 묻어라"고 했다. 그 두골의 길이는 석 자 두 치 신골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 된다. 치아는 서로 엉기어 하나가 된 듯 하고 뼈마디는 연결되어 있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역사의 골격이었다. 이것을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대궐 안에 모셔두었다. 그랬더니 또 신이 말하기를 "내 뼈를 동악에 안치해 두라"해서 거기에 봉안했다. 일설에 문무왕 때 꿈에 몹시 사나운 노인이 나타나 "내가 탈해다. 내뼈를 소천구에서 파내다가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라"해서 왕이 그 말을 따르니 이가 곧 동악신이다』

○ 유사 기이2 가락국기조

『완하국 함달왕의 부인이 아기를 가져 달이 차서 알을 낳으니 그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라 했는데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 머리둘레가 1척이나 되었다. 그는 기꺼이 대궐로 나아가 왕에게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하니 왕이 "하늘이 나를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우리나라와 우리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 없다"고 답하자 탈해가 "술법으로 다투어보자"하니 왕이 좋다 했다. 잠간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니 왕은 수리가 되고 탈해가 다시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변하는데 시간이 조금도 걸리지 않았다. 본래대로 돌아와서 탈해는 항복하고 "내가 매가 되고 참새가 되었을 때 독수리와 새매가 나를 잡아먹지 않은 것은 성인께서 살생을 싫어하는 어진 마음 때문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직인사를 하고 가까운 교외의 중국에서 오는 배를 대는 수로로 해서 갔다. 왕은 그가 머물러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수군 500척을 보내 쫓아가서 탈해가 계림땅으로 가는 것을 보고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 실사적인 해석

출생의 특징

위의 석탈해설화 세 가지를 보면 가락국기에 나오는 설화의 전반부가 실사에 가장 가까운데 출생의 특징을 보면 태생이 아니고 난생(卵生)으로서 비정상적이라고 하여 본국에서 버림받는데 실사상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고대에 선주지에 있지 못하고 집단으로 이주를 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서 고구려의 고주몽, 백제의 비류나 십제의 온조 등을 들 수 있다.      

난생의 의미

또 고대신화·설화에서 난생은 "새로운 지배계층의 등장"이나 "새로운 왕조의 성립"을 은유·상징하는 것이고 그러한 새로운 지배체제를 확립한 인물을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꾸며 대개 시조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구성한다. 고대 동북아의 신화·설화를 보면 난생한 아이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왕조를 이룬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신사상과도 관련하여 시조는 천신의 아들이라는 관념까지 더해져 출생 자체를 신비화한 것이다. 탈해가 난생이었다는 것은 설화에서 석씨왕조의 시조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건국신화

고대 신화나 설화의 경우 외지에서 이주해 와서 성공적으로 정착했을 경우 그 과정을 신화나 설화로 꾸미게 되는데 새롭게 정착한 곳을 기준으로 함으로써, 선주지의 신분을 대개 서자로 설정하여 선주지에서는 불리한 입장이었지만 신천지에서는 성공했다는 식으로 꾸미는 경향이 있다. 또 실제로 선주지에서 권력쟁탈전에서 패했다 하더라도 낙후된 곳으로 집단이주하면 쉽게 소국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건국신화는 이주집단의 성공스토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석탈해의 선주지

선주지는 사기의 다파나국, 유사의 용성국, 완하국, 화하국, 정명국 등 여럿 있지만 유사의 용성국이 맞다고 보며 이곳은 후대에 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조, 고국양왕 2년조, 장수왕 24년, 장수왕 26년조에 나오는 연나라의 용성에 있던 龍城國이다. 선주지를 용성국이라고 보는 근거로는 '후한서'나 '삼국지'에 나오듯이 진한인은 진역(秦役)을 피해 온 이주민들[박씨집단]이고 그 선주지가 만리장성 동부 정도이며 후대에 연나라가 선 곳이다. 진한인은 말도 진나라말에 가까웠다[有似秦語]고 했고 그래서 秦韓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진한인은 燕人과 동족이라고 유사 기이1 진한조에 "진한의 노인과 최치원의 증언"에 나온다. 그리고 용성이란 지명이 딱 맞아떨어진다. 정명국은 이름이 너무나 생소하고 다파나국은 사기저자들이 대륙과의 연고를 단절하기 위해 지어낸 지명이고 완화국, 화하국은 유사저자가 사기의 다파나국을 다시 바꾼 지명으로 판단된다.      

연나라는 진한고지의 서북에서 일어난 나라다. 고대 진한고지는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지금의 하북, 하남, 산서, 산동, 안휘, 강소성 정도(상고시대 동이족의 주강역)로 추정된다. 석탈해는 진한인의 후손으로서 대륙에서 비교적 늦게 반도로 이주한 집단이다.
                                            
가야도 진한의 일부인데 말이 통하는 진한인들이 사는 가락국에 정착을 시도하다가 여의치 않자 역시 말이 통하는 신라로 간 것으로 보인다. 석탈해는 바로 이러한 인연을 배경으로 먼저 이주하여 정착한 진한인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사에 고조선말기의 위만이 燕人이라고 하였으므로 위만도 진한인인 것이고 이들 전부가 본래는 동족이었던 것이다(최치원의 증언에 따르면 위만조선은 진한인이 세운 나라다). 또 설사 동족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선주지가 전부 인접한 곳에 있던 집단들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출신배경 추정

실사상으로는 설화 이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용성국의 왕위계승 서열에서 뒤지는 왕자 또는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아니면 그곳의 부족장이었거나 했을 것이다. 고대 신화·설화에서는 주인공이 대체로 귀인의 자손으로 나온다. 또 실사상으로도 그랬을 가능성이 많다. 한 집단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고대엔 출신성분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물론 성공한 이후에 출신이 귀인의 자손이라고 꾸몄을 가능성도 있다.                      
  
이주목적

이주목적은 타의로 이주한 듯이 되어 있는데 본국에서 보내면서 「나라를 세우고 일가를 이루라」고 기원하는 것을 볼 때 본국에 있을 수는 없고 부득이 신천지를 찾아 계획적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고주몽, 비류, 온조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주규모

탈해는 노비를 둘 데리고 있었는데 휘하의 군사를 줄여서 비유했을 것이다. 유사 가락국기조에 가락국에 도착했을 때 수로왕과의 두 번의 술법겨루기는 상당한 규모의 군사적인 충돌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왕을 하겠다는 야심도 바로 드러내 보이고 있을 정도면 군사도 있었던 것이다. 수로왕이 수군을 500척이나 동원하여 추격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보다는 규모가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 정도로만 추정을 하더라도 150척에서 200척 가까이 되는 선단을 이끈 대규모 이주였다고 본다. 500척에는 못 미쳐도 수백 척은 되었을 듯하다.                                    
              
아이의 성장과정

신화·설화에서 어린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이나 그 사람 됨됨이가 바로 그가 이끌고 온 씨족 또는 부족이 정착지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성장하는 것은 비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에 「아이가 장성하면서 키가 9척이나 되고 풍모가 수려하고 지식이 뛰어났다」라고 하는데 정착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후에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동경로  

이동경로를 보면 가락국을 거쳐 신라의 아진포에 도착하는데 실사상 연나라 용성국을 출발하여 발해만에서 서해안을 따라 내려와 남해안을 돌아 가락국을 거쳐 신라에 정착한 것으로 판단된다. 원양항해가 가능한 대형선으로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선단으로 이동한 것이다.  

聖數

칠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고 나온다. 성수가 7로 나온다. 7년 만에 낳고 7보를 지참하고 산에 올라가서 7일을 머무르는 등이다. 이것은 초기 가야와 비슷하다. 가야에는 칠성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何 自一成三 自三成七 七聖住地/유사 기이2 가락국기조]. 연나라 용성국출신이고 가락국의 전신은 弁辰으로 불렸고 변진은 弁頭辰韓의 준말이므로 다 같은 진한의 일파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야와 성수를 공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까치의 의미              

이 까치는 신라왕관에 보이는 曲玉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玉은 王權의 상징물인데 그 생김새를 볼 때 "천신의 사자인 새의 몸통을 상형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옥은 고대인의 王權神受思想의 상징물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王은 天神의 子]. 새는 천신사상에서 하늘[天]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체로 보이고 새로 인하여 발견되었다는 것은 새가 천신의 사자로서 이 인물이 귀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이 태어날 때(특히 건국신화 등에서 시조) 천신의 아들을 지상에 강림시키고, 왕이 죽었을 때 그 靈을 본향인 하늘로 데려다 주는 매체로 여긴 것으로 판단된다.        

난생신화에서 사람이 알을 낳는 경우도 있으나(고주몽, 석탈해) 하늘에서 바로 알이 매체를 통하여 내려온 경우도 있다. 이 두 가지 경우의 차이는 고주몽, 박혁거세, 김수로, 석탈해 등 네 가지 경우에만 한정해 보면 구분이 된다. 1) 고주몽과 석탈해는 사람이 알을 낳은 경우인데 건국/왕조성립이 원래 있던 나라를 인수한 경우이고 2) 김수로와 박혁거세는 창업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박혁거세의 경우는 매체가 天馬인데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설정하였으므로 육상이동매체인 말도 날개 달린 천마로 표현한 것인데 실사상으로는 육상이동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중앙아시아 유목민적 특성). 김수로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금합에 담겨있었다고 했지만 구지가를 보면 바다의 영물인 거북에서 나온 것으로 표현했다고 보여진다. 해양세력이었기 때문에 대선단을 상징하는 거북을 내세운 것이다. 가야신화·설화에서 거북은 선단을 상징한다. 김수로는 해로이동이었다. 고대신화·설화에서 하늘[天]의 의미는 실사상으로는 이주전의 선주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신보

신보(神寶)가 있는 것으로 보이고 토함산에 올라갈 때 지팡이를 끌고 올라갔다 했는데 이 지팡이가 마치 일본서기 신대기 상8단 팔기대사설화에 나오는 소잔명존의 '아라사이'나, 일본무존의 초치검과 같은 신보로 보인다. 아라사이[추正]>아라사이[阿羅金]>"아라가야의 쇠[金]">"아라가야에서 만든 칼"이라는 뜻으로 가라 본국에서 만든 가라왕실의 신보인 칼을 말하고, 일본무존의 초치검은 열도에서 제일 질 좋은 사철이 나는 시마네의 이즈모[出雲]에서 만든 칼로서 나중에 소잔명존이 백제에 헌상하여 백제왕실의 신보가 된 것이다. (추=사슴 鹿 석 자)  

※ "아라가야의 출운제철단지 개척사" 참조                  
    
석씨집단의 성격

1) 제철집단    

△ 거짓이라고는 했지만 호공(=표공)의 집을 빼앗을 때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둘러대면서 숯돌과 숯을 사용한 점.    

△ 토함산에 올라가 돌집을 짓고 머물렀다는 점. 돌집은 두 가지를 은유할 수 있는데 야철공장이나 석씨왕조를 은유한 것으로 본다.

△ 신라에 그렇게 짧은 기간 내에 자리잡은 데는 제철기술이 뒤진 당시의 신라보다는 뛰어난 제철기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에서 축출된 것도 이와 관련될 개연성이 높아 보이는데 가야는 동북아 제일가는 제철왕국이었으므로 외부의 제철기술이 필요 없고 강력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연오랑·세오녀설화에서 연오랑의 선주지가 月城으로 추정되는데 탈해보다 1세기 정도 늦은 2세기 중반의 제철집단으로 추정되어 월성에 정착했다는 탈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오랑세력은 석탈해가 데리고 온 제철집단의 후예일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 "연오랑·세오녀설화" 참조

2) 해양세력        

올 때 「붉은 용 두 마리의 호위를 받았다[便有赤龍 護舡而至]」고 했는데 용은 바다의 신으로서 석씨집단 자체가 해양세력이었든가 해양세력과 연합하여 이주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그냥 「휘하에 용들을 거느리고 이주했다」라고 표현한 것과 약간의 뉘앙스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호위를 받았다는 것은 수동적이고 거느렸다면 능동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차이를 보면 수동적이므로서 아마도 연합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석씨집단의 두 가지 특징을 보면 가야건국세력과 비슷하다. 제철집단에 해양세력이라는 점이다.    

아진의선 할머니    

유사 기이1 탈해왕조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할멈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고도의 상징이 들어 있다. 혁거세왕의 반찬을 공양하던 할머니가 탈해를 양육했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기·기의 신화·설화에서 혼인한 여성은 영토통치권을 의인화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할머니는 혼인을 한 적이 있는 여성이지만 늙어서 기력이 쇠했으므로 통치권을 상징하기는 하지만 허약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박씨왕실이 허약할 때 석씨집단이 신라에 도착하여 아주 쉽게 받아들여져 정착을 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 참조
      
남해왕의 부마                

왕의 부마가 되었다는 점도 허기로 보이고 남해왕의 제일 큰딸을 얻었다는 것은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으로 보면 여성은 영토를 의인화한 경우가 많고 혼인한 여성은 그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의인화한 것으로서 신라의 영역 가운데 가장 큰 군현의 책임자로 자의든 타의든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권확보  

아주 순조로운 양위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 부분도 사기저술팀이 꾸민 것이고 설화와는 내용이 전혀 달라 보이며 석탈해는 쿠데타로 집권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기를 저술한 시점을 전후해서 고려왕실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왕권승계, 왕권쟁탈전 같은 것은 단 하나도 직필하지 않았다. 백제왕들 중에는 쿠데타로 집권한 왕이 최소 다섯이나 된다(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동성왕, 무령왕). 고구려의 경우도 쿠데타로 집권한 왕을 정상양위로 기술한 사례가 있고 또 왕자의 난에서 이겨 집권한 경우도 직필하지 않았다(고구려 안원왕과 양원왕).      

※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22)/ 침류왕과 진사왕의 상쟁" 참조  
※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28)/ 아신왕의 역쿠데타" 참조      
※ "무령왕설화와 아스까시대의 개막" 참조        

석씨집단은 쿠데타로 집권

△ 경주신라의 상징적인 산인 토함산에 올라갔다는 것이 왕권에 도전한 것을 은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거기서 석총을 지었다는 것은 왕조성립에 성공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 두 종을 데리고 올랐다는 것은 상당한 군사를 이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달리 보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2개 부족의 지지를 받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라는 원래 6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 중 1/3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남해왕의 부마가 되었다는 내용과 결부시키면 더욱 선명해진다. 붉은 용 두 마리와도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 호공에 대해서 사기에 왜인이라고 기술되어 있어 가까운 열도를 상정하여 하나같이 왜인이라고 보고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호공은 가공의 인물로 본다. 호(瓠)는 훈이 '박'인데 당시의 열도음(=가야어/진한어)으로 받침 없이 읽으면 '바구'가 되고 탈해의 이칭에 토해(吐解)가 있는데 '吐'의 열도음이 '하구[吐]'로 나며 고대에 비읍이 히읏으로 발음될 때가 있으므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호공의 이름으로 박씨집단과 탈해를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보인다. (ㅌ+아래아+ㄹ)해>탈해, 토해(리을 탈락)로 들리는 음운현상을 이용하여 연결고리를 만들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박씨집단의 성씨 '朴'의 음을 취하여 이것을 훈으로 하는 '瓠(또는 瓢)'자를 이용하여 설화를 만들고 '호공'이란 가공의 인물을 지어내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집단을 대표시킨 것이다. 혁거세는 신화에서 자주빛 알[紫卵](一云 靑大卵)에서 나왔다고 했는데 "一云 靑大卵"이란 것이 박[瓠]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주색은 천자를 상징하는 색깔이므로 시조신화다운 표현으로 볼 수 있고 박은 원래 흰색이지만 엷은 푸른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성씨 '朴'도 '瓠'의 훈을 한자를 바꾸어 표현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것은 석씨집단을 탈해로 대표시키고 박씨집단은 호공으로 대표시켜 석씨집단의 박씨왕조에 대한 쿠데타로 왕권을 탈취한 것을 은유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호공이란 인물은 출신도 애매하면서 혁거세왕 재위시 마한에 사신으로도 가는데 탈해왕 9년 시림에서 김알지가 탄생할 때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만다. 사기 탈해전기에 보면 혁거세기 39년에 왔다고 했는데 호공은 바로 그 전해인 혁거세기 38년에 등장했다가 탈해왕세에 마지막으로 등장하여 김씨왕통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그런 점을 시사하고 있다. 혁거세왕 재위시 등장하여 박씨집단을 상징하고 탈해왕 재위시 사라지면서 석탈해가 박씨집단을 제거한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유사 기이1 김알지·탈해왕대조에도 사기기록을 옮긴 듯이 김알지의 등장과 탈해왕·호공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석씨집단도 후대에 김씨집단에게 꼭 같은 패턴으로 왕실을 물려주게 될 것이라는 암시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사기에 호공을 왜인이라고 한 것은 초점을 흐리기 위해 기술한 것으로 보이고 또 탈해출신지를 다파나국(유사에는 완하국/화하국)이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 탈해가 호공의 집을 위계(僞計)로 빼앗았다는 것도 왕권이전이 정상양위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백제 도미열전에서 개루왕이 도미와의 내기에서 위계를 쓴 것은 진사왕의 침류왕에 대한 쿠데타를 은유한 것이고 후에 도미부인이 개루왕에게 위계를 써서 도망가는 것은 아신왕의 진사왕에 대한 역쿠데타를 의미하는 것이다(실사상 개루왕은 진사왕이고 도미는 침류왕이며 도미부인은 백제왕권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탈해의 경우도 僞計는 비정상적인 왕권승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역성승계이므로 상식적으로 정상양위로 보기는 애초부터 무리한 것이다.                            
    
※ "도미설화" 참조

△ 성명에 대해 특기하고 있는 점도 주목을 요하는 것이다. 「옛날에 남의 집을 내 집이라 하여 빼앗았다 해서 석씨라 했다」든가 「궤를 열고 알을 벗기고 나왔다해서 탈해라 했다」든가 하는 점이다. 통상 난생신화라 하더라도 "알에서 나왔다"는 식의 기술은 있으나 "스스로 알을 벗기고 나왔다"는 식의 기술은 탈해의 경우가 조금은 특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의 집"이란 박씨왕조를 축소비유한 것이고 탈해가 벗기고 나왔다는 알이란 자신의 알이 아니고 "박혁거세의 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혁거세의 알은 박씨왕조를 상징하는 것이다. 궤는 始林이니 鷄林이니 하는 나무와 연관성이 많은 경주신라를 상징하고 알을 박씨왕조로 보면 "신라에 입성하여[궤를 열고]" 세력을 키워 나중에 "왕조까지 인수[알을 벗기고]"하게 된 셈이다.
          
△ 보다 더 생생한 쿠데타의 근거는 혁거세왕 사후에 나타나 있다. 유사 기이1 박혁거세왕조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유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나라사람들은 이들을 합하여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있어 쫓아다니며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오체를 각각 장사지내 오능을 만들고 이를 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 북능이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이 위를 이었다』

이 역시 하나의 설화인데 경주신라 "박씨왕조의 종말을 은유한 설화"로 판단된다. 내용을 실사적으로 해석을 해보면 아래와 같다.  

- 7일은 7왕

여기서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대로 해석하면 1일이란 1) 1년 또는 2) 왕의 1대를 은유할 때가 있는데 지금 이 경우는 왕의 1대를 말한다고 본다. 7일은 7왕을 말한 것이다. 즉 초기 박씨왕통은 정확히 7대로 끝났다. 후대 통일신라에서 세 왕이 더 나왔으나 지금 이 설화는 초기신라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신라초기 박씨왕은 혁거세, 남해, 유리, 파사, 지마, 일성, 아달라 등 7왕이다.      

1년을 1일로 축소비유한 경우는 수로부인 설화에도 보이고[이틀길을 더 가다가[便行二日程]/날수로 사흘인데 실사상 3년을 의미함/석우로전과 물계자전에서 포상제국의 두 차례 침공 시차 3년에 해당], 일본서기 신대기 하9단 본문에서 천치언이 죽었을 때 八日八夜를 울었다는 기록이 있고[천치언=침류왕이 전사한 후 8년 간을 의미함], 윤공기에서 사인 중신오적진사주가 제희(=열도를 의인화한 인물)를 부르러 갔으나 7일 동안을 데려오지 못했다[中臣氏의 조인 침류왕이 본주를 7년 간이나 정복하지 못한 것을 의미함]는 사례가 있다.    

※ "수로부인설화" 참조        
※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15)/ 침류의 본주평정 실패" 참조        

日이 王을 은유하는 경우는 고대에 왕권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흔히 「하늘에 해[日]가 둘 있을 수 없다」라는 명분을 걸고 다투는데 이때의 해[日]>王과 같은 의미다. 고대인의 발상은 동일한 것이다.    

서기 경행기에 나오는 일본무존의 구야십일(九夜十日)은 백제의 九代十王을 은유한 것이다. 귀수대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대왕>무령왕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귀수대왕과 무령왕 사이에 정확히 열 명의 왕이 있다. 열도정복을 위한 원정 중에 귀수대왕이 오오미[近江]전투에서 전사한 후 열도가 백제령으로 편입되기까지의 백제왕들인 것이다. 즉 구야십일이 지나고 나면 칠지도상의 초대왜왕이었던 귀수대왕의 숙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구야십일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온다고 비유한 것인데 이 아침이 바로 아스까시대를 가리키며 그 아침이 밝아오면 서기 경행기에서 백조, 신공기에서 흰깃큰수리[羽白熊鷲], 신찬성씨록에서 봉황새[鸞], 천일취(天日鷲) 등 새[鳥]로 은유된 귀수대왕이 힘차게 비상한다는 뜻에서 아침이란 뜻을 가지는 '아스까'의 한자를 '飛鳥'라고 쓰게 된 것이다. 이것은 또 열도에 백제의 제후국의 아침이 밝아왔다는 뜻이기도 하고 제후국의 흥망을 하루에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무존은 귀수대왕을 모델로 서기저자들이 창작한 인물이다.                        
                                
※ "가야와 백제의 30년전쟁(16)/ 귀수대왕의 본주친정" 참조    

- 장례 방해

왕의 사후에 장례를 못 치르게 큰 뱀이 따라다니며 방해했다는 것도 쿠데타군이 계속 박씨집단의 주력을 제거하는 작전으로 보인다. 이러한 예는 백제 동성대왕 사후에도 보인다. 무령왕이 동성대왕을 암살한 후에 9일이나 지나서야 빈궁을 설치한 것이 서기 서명기에 나온다. 서명천황은 백제 동성대왕을 등재한 인물이다.    

※ "삼국사기에서 사라진 동성대왕 익산천도" 참조      

- 왕후의 몰

왕비가 같이 죽었다는 것도 왕통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성은 풍요와 출산의 상징인데 "박씨왕통의 출산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혼인한 여성은 영토통치권(=왕권)을 의인화한 것이므로 혁거세 왕후가 죽었다는 것은 박씨왕실이 왕권을 상실했다는 뜻으로 정확히 이해된다. 도미열전의 경우 도미부인은 백제왕권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 쿠데타군의 활동

혁거세왕 몰 1년 전인 혁거세기 60년조에 「9월에 두 마리의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나더니 심하게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졌으며, 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고 나오는데 이 기사가 쿠데타군의 활동을 암시하고 있다. 고대사서에는 대부분 왕이 죽을 때쯤 되면 이런 이상천문현상이나 怪·異變 등의 기사들을 써넣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좀 특이하다. 탈해가 용성국 출신이고 탈해가 올 때 붉은 용의 호위를 받았다고 하여 용과 유달리 관련이 있으며 장례를 방해한 큰 뱀이란 용의 부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龍과 蛇는 같은 계통이다. 특히 해양강국이었던 가라의 상징으로 기·기나 기타기록에 용, 뱀, 거북 등이 자주 등장하는데 탈해는 해로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용과 뱀이 등장하는 것 같다. 용은 바다의 신이기 때문이다.      

- 우물

여기 우물이란 것도 유사 기이1에 나오는 기록을 볼 때 탈해와 관련된 요내정이란 우물과 의 연결을 암시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박혁거세는 양산 밑의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나정이란 우물도 박씨왕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시조가 태어난 우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금성의 우물 위에서 용 두 마리가 나타나고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졌다는 것은 박씨왕조에 커다란 변고가 닥쳤다는 뜻이다. 곧 석씨집단의 박씨집단에 대한 공격을 은유한 것이다. 또 용 두 마리라는 것은 탈해를 호위해온 용으로 보이고 탈해가 데리고 온 군사를 은유한 종자 둘과도 연관될 것이다. 요내정과 나정은 같은 우물인데 마치 다른 우물인 양 이름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역시 탈해기 본기에서도 우물이 등장한다. 사기 탈해기 24년 8월조에 왕이 죽었을 때 성의 북쪽 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나온다.          

자중지란 암시

그런데 유사 기이1 탈해왕조의 백의라는 인물은 탈해의 종자로 보이는데 탈해의 지시로 요내정에서 물을 떠오는 도중에 먼저 마시려고 시도하다가 그릇에 입이 붙어 난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탈해가 데리고 온 세력 중에 일부가 왕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시도를 했든지 박씨집단에 협력하다가 탈해에게 좌절되어 재차 복속하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종자란 휘하군사를 축소 비유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경주신라 도착시기

혁거세기 39년 도착기사는 박씨집단을 상징하는 호공이란 인물과 연결하기 위해 1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써넣은 의도적인 허기로 판단된다. 호공은 혁거세기 38년에 처음 등장한다. 석씨집단의 신라도착시기는 가락국기가 맞을 것 같다. 서기 44년 정도다. 대략 1세기 중반 정도다.              
                                    
석씨도 7왕 배출

석탈해도 자신을 제외하고 후손 중에 석씨 왕을 정확히 7대를 배출하고 있는데 토함산에 돌집을 짓고 7일을 머물렀다고 한 것이 역시 일치한다. 七日=七王인 것이다. 탈해를 제외한 석씨왕통은 벌휴, 내해, 조분, 첨해, 유례, 기림, 흘해왕 등이다. 석총(石塚)은 석씨왕조 자체를 상징하기도 하고 왕능을 상징한다고 보면 역시 일곱 왕을 비유한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石은 昔과 음이 같고 塚은 陵과 뜻이 같다.  

석탈해의 실존여부

그런데 석탈해는 실존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석씨집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화상에서 설정된 가공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돌집을 짓고 7일을 머물렀다 했는데 석씨왕 일곱을 의미한다고 보면 석탈해 포함시 8왕이 되므로 맞지 않다. 그렇다면 석씨왕실의 초대왕은 벌휴왕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곳에서 둘러본 집이 호공의 집이라는 점도 박씨왕실을 겨냥했다는 말이 된다. 석씨집단이 경주신라에 정착한 후 왕권을 호시탐탐 노렸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가락국에 도착했을 때 왕을 하겠다는 야심을 솔직히 말하기도 했으므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호공과 석탈해의 연령  

호공과 석탈해의 나이를 계산해 봐도 둘 다 비정상적이다. 호공은 혁거세왕 38년에 마한에 사신으로 갈 정도이니 적어도 20세라고 가정하면 이때가 기원전 20년이고 마지막 기록이 탈해왕 9년 김알지 탄생시에 보이고 이후는 없다. 이때가 서기 65년이다. 그러면 죽을 때 105세가 된다. 탈해도 사기기록에 따르면 혁거세 39년에 등장하는데 이때 5세라고 가정해도 서기 57년에 즉위할 때는 81세 정도 된다. 그리고 23년 간 재위면 역시 104세로 부자연스럽다. 호공은 박씨집단과 석씨집단의 중간에 쿠데타를 감추기 위한 연결고리역할을 하는 가공의 인물로 설정된 것이다.    

유사 가락국기록이 실사에 가까우므로 탈해가 가락국에 나타났을 때 20세라고 가정하면 이때가 서기 44년이고 13년 후인 서기 57년에 왕이 되어 23년 간 재위 후 죽을 때 56세로 조금은 일러 보인다. 그러면 가락국에 나타났을 때가 대체로 30대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이 경우에는 40대 중후반 정도에 왕이 되고 60대 후반, 70대 초반 정도에 죽는다. 이래야 정상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탈해가 석씨집단을 대표하는 가공인물로 보이므로 의미는 없지 않나 생각된다.            

석씨집단 왕권계승 시기    

석탈해가 석씨집단을 대표하는 가공의 인물로 내세워졌다 할 경우 실제로 석씨왕이 배출된 시기를 추정해보면 박씨왕이 7명 배출된 후인 아달라왕 다음의 벌휴왕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으로는 위에 든 유사 기이1 박혁거세왕조의 七日=七王과, 유사 기이1 탈해왕조에 역시 아진의선 할머니가, 탈해가 도착한 후 「그들을 7일 동안 잘 대접했더니 사내아이가 그제야 말을 했다」라고 하는데 여기 七日도 역시 박씨 七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정확히 일치한다. 할머니는 허약한 박씨왕권을 은유하므로 신라가 뭔가 약점이 있어(제철기술 같은) 석씨집단을 상당히 후하게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아이가 말을 했다"는 것은 경주신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발언권이란 어떤 세력의 실세적인 힘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박씨왕통 중간에 탈해왕이 있었던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중간에 석씨왕이 끼어든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석탈해 재위기간은 석씨집단이 신라에 처음 이주하여 정착하는 기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석탈해의 재위기간만 빼고 각 왕들의 즉위시기를 그만큼 앞당겼을 때의 벌휴왕의 즉위시기를 석씨왕조의 출발시기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다른 왕들의 왕력 등을 더 정밀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나 대체로 부합할 것 같다. 석탈해가 가공인물일 경우 석씨왕조의 시조는 벌휴왕으로 봄이 타당할 것 같다. 마찬가지로 김씨 미추왕의 경우도 탈해왕의 경우와 같을 것으로 보인다.    
  
선주지명 분석  

석탈해의 선주지가 연나라 용성국인데도 웬일인지 사기에는 후대에 저술된 유사에도 나오는 용성국은 없고 왜국 동북 천 리 다파나국이라 하면서 엉뚱한 지명을 기술해놓았다.

탈해가 예계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고 하는데 예맥도 진한고지에 인접한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한어 '아침'이라는 단어의 사국시대 고어형태를 추적해보니 예(濊)도 新羅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음이 밝혀졌고 결국은 경주신라와 같은 진한의 일파였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을 이용하여 신화·설화를 실사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런 이상한 기록은 쉽게 가려낼 수 있다.        

※ "고대인의 신화·설화 구성기법" 참조
※ "한일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최대의 키워드 '아침'" 참조

서기 숭신기 65년 7월조에 「任那國遣蘇那曷叱知, 令朝貢也. 任那者去築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이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문장을 두고 「임나국이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을 해왔다. 임나는 축자국에서 이천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다. 북은 바다를 격하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라고 해석한다. 그렇다면 임나는 가라의 이칭이고 축자는 지금의 구주이므로 그 사이 거리는 이천 리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반도 남해안 가라에서 구주까지의 항로를 대략 이천 리 정도로 본 것 같다.      

'삼국지' 위지에도 반도남단에서 천 리 가면 대마도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一大島까지 천 리라고 나온다. 일대도가 壹岐島인지 구주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기도가 구주 북단에서 근거리이므로 큰 차이는 없다.

그러면 서기의 임나기사와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조합해 보면 반도남단에서 천 리를 가면 대마도가 있고 거기서 다시 천 리를 가면 축자가 있다는 논리가 된다. 그렇다면 사기의 "왜국 동북 천 리"가 문제가 된다      

※ "임나국과 미마나[任那]의 어원" 참조

사기에는 다파나국이 "왜국 동북 천 리"에 있다 했는데 유사 기이1 탈해왕조에는 선주지를 용성국이라고 직필을 하고서도 그 위치가 "왜국 동북 천 리"라고 사기기록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고려인들이 왜국이라고 한 것은 고대 구주에 있었던 '야마다[邪馬臺]'라는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되고 이 나라는 여왕이 통치한 시대가 있었다.

<춤추는 신녀/이종기/동아일보사/1997년>에 가라출신 묘견공주가 야마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고 연오랑·세오녀설화 및 대륙기록을 종합해보면 영일출신 비미호가 후대에 묘견공주의 야마다를 계승한 것으로 분석되고 둘 다 여성지도자다.                    
                                      
탈해의 부왕 함달파왕의 왕비가 女國(=積女國)출신이라 했는데 이 여국이란 말은 이들 두 여성지도자가 다스리던 야마다라는 나라의 특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비미호는 세오녀로 본다.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도 반도를 기준으로 시계방향[clockwise]으로 차례대로 對馬國>日本國>女人國>南蠻國>琉球國>小琉球 등의 순으로 그려져 있어 한 때 구주가 분명히 女人國이란 별칭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남만국은 구주 남부의 大隅諸島를 가리키고 류구국은 지금의 오끼나와, 소류구는 대만과 오끼나와 사이의 先島諸島를 가리키는 것이다.      

※ "천하고금대총편람도" 참조
※ "연오랑·세오녀설화" 참조

왜국이란 말은 열도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인데 2·3세기의 구주의 고대국가인 야마다국의 이름을 시대를 소급해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야마다[邪馬臺]는 후대에 열도를 가리키는 야마또[大倭/倭/大和/和/大日本/日本]라는 말로 바뀌는데 한어 아래아의 음운특성에 따라 야마(ㄷ+아래아)>(야마다, 야마도)로 갈라진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열도를 야마다[山田]라고 은유적으로 쓰기도 했다.  

따라서 사기나 유사의 왜국의 위치가 구주이므로 위에서 나온 대로 거리를 가지고 추정해보면 사기의 석탈해설화에 선주지를 "왜국의 동북 천리"라고 했으니 간단히 찾아진다. 가라와 구주의 중간이니까 대마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방향이 대마도가 대략 구주의 서북인데 동북이라고 한 것은 허기임이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게 되므로 초점을 흐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름의 음도 연관성이 있다. 다파나국은 대마도를 달리 표기한 지명으로 판단된다.

多波가 바로 對馬와 대응되기 때문이다. 나라나 땅을 뜻하는 '那國'과 '島'를 제외하고 볼 때 多波는 열도음으로 여러 가지 조합을 구성해보면 '다와', '다하', '다바'가 된다. 대마의 '對'는 열도어에 복모음이 없으므로 '애'가 '아'로 발음되어 '다[對]'가 되고 '馬'는 음독하면 음이 '바[馬]'다. 따라서 '다바[對馬]'가 되고 음이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설화를 분석해 보니 탈해는 진한의 고지인 연나라의 용성국출신으로 나오므로 사기 신라본기 탈해전기에 나오는 탈해의 선주지는 대륙과의 연고를 끊기 위해 적당히 꾸며 기술한 것으로 보이는데 130년 뒤의 일연선사도 용성국이라고 알던 사실을 사기저자들이 11명이나 되면서도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對馬島란 지명이 생긴 이후에 원래음 '쯔시마'와는 전혀 관계없이 한자를 그냥 적당히 읽어서 이두표기를 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두는 널리 쓰였고 사기저자들은 이두표기를 완벽히 통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탈해의 선주지는 유사에 나오는 용성국으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사에 나오는 나머지 두 개의 지명은 사기의 다파나국이란 지명을 의식하여 달리 꾸민 것으로 보인다. 선주지를 정확히 기술해 놓고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섞어 놓은 것 같다. 정명국은 불명이다.

간단히 분석해 보면 완하국(琓夏國)이나 화하국(花廈國)이나 전부 다파나국과 음이 비슷하다. 다파나에서 '다(多)'를 떼고 보면 음이 '바나', '와나', '하나'로 난다. '완하'는 한어로 부드럽게 읽어보면 음이 '와나'로 나고 화하는 '화하'로 발음되지만 '꽃 花'를 열도어로 '하나'라고 하므로 결국은 전부 다파나로부터 파생시켜 지어낸 분식명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결론적으로 사기나 유사에 나오는 석탈해설화는 진한인 중의 일파인 석씨집단이 비교적 늦게 진한고지인 연나라의 용성국에서 출발하여 발해만에서 황해를 거쳐 해로로 반도로 이주하고 그 과정에서 같은 진한출신으로 말이 잘 통하는 가락국에 들렀다가 김수로왕에게 배척된 후에 다시 말이 잘 통하고 계통상 가까운 초기신라로 가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후대에 힘을 축적하여 쿠데타로 박씨왕조를 뒤집고 한때 석씨왕조를 이룬 것을 설화형식으로 꾸민 이주집단의 성공스토리로서 석탈해설화는 일종의 건국(왕조성립)신화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