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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唐 진대덕의 고구려 정세보고서<高麗記>내용.

monocrop 2011. 9. 25. 21:10

<高麗記>는 중국학계에서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고문서중 하나다.

 

唐贞观年间,陈大德奉唐太宗之命,于贞观十四年十二月乙卯(公元640年1月23日)至贞观十五年八月丙辰(公元641年8月10日)出使高句丽。这次出使,名义是“持节答劳”,实际是奉旨“觇国虚实”,因此,陈大德归来后立即撰写了《高丽记》这份军事地理报告,并呈送给太宗,作为唐朝东征高句丽的参考。《高丽记》是我们研究高句丽后期高句丽史地的重要原始史料,弥足珍贵。可惜的是,《高丽记》早已佚失,现在我们能看到的只是残存于典籍中的佚文部分。从《高丽记》佚文本身看,尚存在一些不足,需要重新考订。本文拟就《高丽记》佚文的中央官位部分作一考订,不当之处,敬请学者批评指正。

 

고려기는 당태종이 640년12월~641년8월까지 당 사신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 고구려를 살피고 돌아온후 군사지리 정보보고를 기록한 첩보서이다.매우 귀중한 자료로 불행히도 문서는 일찌기 많이 훼손되었지만 남은부분을 정리하여 남긴것을 연구한것이다.

 

  前不久,吉林省委宣传部副部长张福有同志莅临我校调研时,曾高度赞扬了我校东北亚研究所高福顺、姜维公二位先生的《〈高丽记〉研究》,称赞其 “ 是一个很大的贡献,是不小的成绩。 ” 这一消息见诸报端后,引起了不小的反响,从而也引发了众多人士开始对《〈高丽记〉研究》的关注。为此,本报记者采访了东北亚研究所所长高福顺先生。


  交谈中了解到,《高丽记》又名《奉使高丽记》,是唐朝职方郎中陈大德奉旨出使高句丽归来后撰写的报告,内容是有关高句丽域内军事地理情况的。它具有亲见、亲闻、亲历之特点,可信度及史料价值颇高,值得深入研究。只可惜全书一卷,现已佚失。因而,选择 “ 《高丽记》研究 ” 为课题,从研究的角度入手,对已散佚的《高丽记》进行校补、考释,力争使其恢复全貌,就显得尤为必要。令人欣慰的是,高福顺、姜维公二先生经过苦心研究,潜心考证,在这一方面取得了突出成绩。

 

아래 논문은 고복순,강유공이란 장춘대학 중국학자가 고려기를 10여년동안 연구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한것이다.


  

 

평양성에 대한 삼국사기와 중국사서를 찾아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2년(198) 환도성을 쌓았다.

                  13년(209) 10월에 왕이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  

○ 동천왕     20년(246) 위나라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도륙하였다.

                  21년(247)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고국원왕 12년(342) - 봄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11월에 연왕(燕王) 모용황이 침략하여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무너뜨렸다.

                 13년(343) 7월에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 

 

通典 高句麗傳>  

「自東晉以後 其王所居平壤城 即漢樂浪郡王險城 自為慕容皝來伐 後徙國內城移都此城 亦曰長安城 隨山屈曲 南臨浿水 在遼東南千餘里 城內唯積倉儲器械 寇賊至 方入同守 王別為宅於其側 其外有國內城及漢城 亦別都也 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 皆置官司以相統攝焉 其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 東西六千里..中略..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為左碣石 又平壤城東北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有葦山 南臨浿水 其大遼水源出靺鞨國西南山 南流至安市 小遼水源出遼山 西南流與大梁水會 大梁水在國西 出塞外 西南流注小遼水 馬訾水則移反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入海 高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漢樂浪玄菟郡之地 自後漢及魏為公孫氏所據至淵滅 西晉永嘉以後 復陷入高麗 其不耐 屯有 帶方 安市 平郭 安平 居就 文城皆漢二郡諸縣 則朝鮮濊貊沃沮之地」

 

元史 > 

東寧路,

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壤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垣、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余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

 

鹹平府,

古朝鮮地,箕子所封,漢屬樂浪郡,後高麗侵有其地。唐滅高麗,置安東都護以統之,繼為渤海大氏所據。遼平渤海,以其地多險隘,建城以居流民,號鹹州安東軍,領縣曰鹹平。金升鹹平府,領平郭、安東、新興、慶雲、清安、歸仁 六縣,兵亂皆廢。元初因之,隸開元路,後復割出,隸遼東宣慰司。

 

遼史>

東京遼陽府,

本朝鮮之地。周武王釋箕子囚,去之朝鮮,因以封之。作八條之教,尚禮義,富農桑,外戶不閉,人不為盜。傳四十餘世。燕屬真番、朝鮮,始置吏、築障。秦屬遼東外徼。漢初,燕人滿王故空地。武帝元封三年,定朝鮮為真番、臨屯、樂浪、玄菟四郡。後漢出入青、幽二州,遼東、玄菟二郡,沿革不常。漢末為公孫度所據,傳子康;孫淵,自稱燕王,建元紹漢,魏滅之。晉陷高麗,後歸慕容垂;子寶,以勾麗王安為平州牧居之。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後為渤海大氏所有。大氏始保挹婁之東牟山。武後萬歲通天中,為契丹盡忠所逼,有乞乞仲象者,度遼水自固,武後封為震國公。傳子祚榮,建都邑,自稱震王,併吞海北,地方五千里,兵數十萬。中宗賜所都曰忽汗州,封渤海郡王。十有二世至彝震,僭號改元,擬建宮闕,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為遼東盛國。

 

忽汗州(濱海=천진남부)

即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太祖建國,攻渤海,拔忽汗城,俘其王大諲撰,以為東丹王國,立太子圖欲為人皇王以主之。神冊四年,葺遼陽故城,以渤海、漢戶建東平郡,為防禦州。天顯三年,遷東丹國民居之,升為南京。城名天福,高三丈,有樓櫓,幅員三十里。八門:東曰迎陽,東南曰韶陽,南曰龍原,西南曰顯德,西曰大順,西北曰大遼,北曰懷遠,東北曰安遠。宮城在東北隅,高三丈,具敵樓,南為三門,壯以樓觀,四隅有角樓,相去各二里。宮牆北有讓國皇帝御容殿。大內建二殿,不置宮嬪,唯以內省使副、判官守之。《大東丹國新建南京碑銘》,在宮門之南。外城謂之漢城,分南北市,中為看樓;晨集南市,夕集北市。街西有金德寺;大悲寺;附馬寺,鐵幡竿在焉;趙頭陀寺;留守衛;戶部司;軍巡院,歸化營軍千餘人,河、朔亡命,皆籍於此。東至北烏魯虎克四百里,南至海邊鐵山八百六十里,西至望平縣海口三百六十里,北至挹婁縣、范河二百七十里。東、西、南三面抱海。遼河出東北山口為范河(래원),西南流為大口,入於海;東梁河自東山西流,與渾河合為小口,會遼河入於海,又名太子河,亦曰大梁水;渾河在東梁、范河之間;沙河出東南山西北流,逕蓋州入於海。有蒲河;清河;浿水,亦曰泥河,又曰蓒芋濼,水多蓒芋之草;駐蹕山,唐太宗征高麗,駐蹕其顛數曰,勒石紀功焉,俗稱手山,山顛平石之上有掌指之狀,泉出其中,取之不竭。又有明王山、白石山——亦曰橫山。天顯十三年,改南京為東京,府曰遼陽。戶四萬六百因。轄州、府、軍、城八十七。統縣九:

 

魏書 > 

安等至高句麗,璉稱昔與餘慶有仇,不令東過,安等於是皆還。乃下詔切責之。五年,使安等從東萊浮海,賜餘慶璽書,褒其誠節。安等至海濱,遇風飄蕩。竟不達而還。 

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壤城,訪其方事,云: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余,民戶參倍於前魏時。其地東西二千里,南北一千餘里。

 

三國誌 > 

夫余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獄。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敝。土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粗大,性強勇謹厚,不寇鈔。國有君王.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水歲)貊,東與沃沮,北與夫余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祠靈星、社稷。其人性凶急,喜寇抄。其國有王,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皂衣先人,尊卑各有等級。

 

◆ <高麗記>에는 평양성이 4곳이 기록되어 있는데 ;

 

1> 압록수 평양성- 지금 생각하건데 그 물은 폭이 300보이고 평양성 서북으로 450리에 있다.

 → 압록수를 고구려 당시 하북성 백하(양하)로 비정한다면 평양성의 위치는 랑방시 인근이 될것이다. 

 

고구려 말기의 평양성에서 압록수(백하) 까지 의 거리 약 230km 거리(당시 5km=10리)

    

2> 노양산 평양성- 그성 동북에 魯陽山이 있는데 魯城이 그위에 있고 서남20리에 葦山(위산)이 있고  남으로 浿水에 접한다. 

 → 讀史方與紀要 및 後漢書

     魯陽關과 魯山은 하남성 汝州 南陽府에 위치한다.좀더 자세한 지명확인이 필요하다.

 

지도의 위치는 하남성 숭산남부 여주이다. 이근방???

 

3> 오골산 평양성- 烏骨山은 나라의 서북에 있고 夷人들이 말하길 屋山이 있는데 평양 서북 700리에 있다.  

 →

 

4> 개마대산 평양성 - 그 산은 평양성 서쪽에 있고 평양성은 왕검성이다.

 

 → 後 漢 書, 東 夷 傳, 東 沃 沮

 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注)蓋馬,縣名,屬玄菟郡,其山在今平壤城西,按.......蓋馬卽高驪二字之土音(中略),亦稱單單大領(中略)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 있으며, (주) 개마는 현의 이름이다. 현토군(玄菟郡)의 속현(屬縣)이다. 그 산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생각컨데....개마는 곧 고려(高驪)의 토속음이다. 또 부르기를 단단대령이다.(단단대령이 하북동부가 아닌 산서성 정형관 인근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왕검성은 위만조선의 왕검성으로 보기에 潞縣이나 石家庄으로 조심스레 비정한다 )

 

 沃沮國 ; 有南北二國,南沃沮又名東沃沮.[後漢書, 東夷傳........東沃沮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東濱大海,武帝滅朝鮮,以沃沮地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爲縣,屬樂浪東部都尉,至光武罷都尉官,後皆以封其渠帥,以沃沮侯,又有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里(中略)


    옥저국은 남북 두 나라가 있다. 남옥저는 또 동옥저라 한다. 東沃沮는 高句驪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며, 그 동쪽은 大海이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滅)하고 이곳은 현토군(玄菟郡)이 되었으나, 이곳에 夷貊이 쳐들어오자 현토군(玄菟郡)은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겨졌다. 고구려 서북으로 이동된 玄菟郡의 옥저는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낙랑군 동부도위관할에 속(屬)하게 되었다. 후한에 이르러 광무가 도위관을 파하였다. 후 이곳 모두에 거수에게 옥저후로 봉해졌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구루라 하였다. 남옥저와는 8백리가 떨어져 있다.

 

분명 새로운 지명은 연구대상이다. 

 

운영자 심제글.

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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