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에서 목도리 쇼에 이어서, 이제는 전화통 붙잡고 또 다시 포토제닉 쇼를 하더군요. 한 소녀의 편지를 받고, 동사무소에 연락해 지원을 받을 길을 찾아주고, 어머니의 일자리도 알아봐주겠다는 것이 이번 신파극의 플롯으로 알고 잇습니다. 물론 그 소녀에게는 개인적으로 반가운 소식이겠지요. 하지만 그 소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도 129에 전화하면, 그 소녀가 받았던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문제가 그런 식으로 풀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식이라면 이 사회의 고질병이 된 청년실업 문제도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가령 일자리 찾는 청년 하나를 청와대에 데려다 밥 먹이며 격려해주고, 기업에 전화를 해 취직자리를 알아봐주는 겁니다. 국가가 나서서 한 사람 정도 취직시키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 청년이 졸지에 누리게 된 그 호사를, 같은 처지에 있는 수십 만의 청년들이 함께 누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위의 예에서 청년실업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효용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즉 그는 '대통령이 빈민과 청년실업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 위한 선전전의 재료로서 가치가 있는 거죠.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이 쇼는 아주 허망해집니다. 가령 전국의 청년 실업자들이 그 청년이 받은 것과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고 나선다고 가정해 봅시다. 어떻게 될까요? 정권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겠지요.
진정한 의미의 정치란, '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게 아니라, '많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데에 그 본질이 있지요. '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선행'이고,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은 '정책'에 속하겠지요. '한' 사람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선행'이고, '많은' 수의 빈민을 구제하는 것은 '정책'이지요. 지금 청와대에서 하는 것은 '정책'의 실행이 아니라, (별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신파의 연출입니다.
이 유치한 신파를 연출하면서 이명박 정권이 실제로 실행하고 있는 정책은 무엇일까요? 뉴스를 보니 이명박 정부가 최근 차상위 계층에 대한 의료급여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차상위 계층 21만명에 대한 지원이 끊어진 겁니다. 이들을 다 건강보험가입자로 전환시키겠다는 얘긴데, 문제는 이들 중 대다수는 보험료를 낼 형편이 못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1년 뒤부터 21만 명의 빈민이 그 동안 멀쩡히 받아오던 의료혜택에서 배제된다는 거죠.
뉴스에는 한 할머니가 나오더군요. 길바닥에서 박스를 주워다가 팔아서 먹고 사는 분입니다. 건강보험료를 내려면 이 80세의 할머니는 한달에 박스를 몇 개나 주워야 할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이명박 정권의 복지부에서 기초생활수급자의 수도 10,000명 가량 줄였다고 하더군요. 1명의 빈민 소녀를 돕는 그 유치한 가상의 무대 아래의 현실에서는 이렇게 210,000 명의 차상위계층, 10,000명의 기초생활수급자가 생존의 위협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강부자들에게는 세금 깎아 몇 조를 퍼다주고, 생존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주는 푼돈마저 깎아버리는 것이 이명박 정권의 본질입니다. 그 징그러운 모습을 남대문 목도리 쇼, 129 전화통 연극 따위로 감춰버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