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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6세기말 고대 三國과 당과의 對置 지역 比定

monocrop 2009. 1. 11. 01:30

 



신당서 열전 145-동이전에서 삼국의 위치

高丽,本扶馀别种也。地东跨海距新罗,南亦跨海距百济,西北度辽水与营州接,北靺鞨。
고려,본부여별종야.지동과해거신라,남역과해거백제,서북도요수여영주접,북말갈.

고려는 본시 부여의 또 다른 종이다. 그 땅 동으로 바다를 건너면 신라가 있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백제가 있다.

서북으로 요수를 건너면 영주와 접하고 북쪽은 말갈이 있다.  


其君居平壤城,亦谓长安城,汉乐浪郡也,去京师五千里而赢,随山屈缭为郛,南涯浿水,王筑宫其左。

기군거평양성,역위장안성,한낙랑군야,거경사오천리영,수굴료위부,남애패수,왕축관기좌.

군왕은 평양성 또는 장안성이라 일컽는 곳에 기거하며 한나라 낙랑군 땅 이었다. 경사로 부터 오천리를 가면

산을 따라 어지럽게 성의 외곽이 있는데 남쪽 절벽엔 패수가 있다.


又有国内城、汉城,号别都。

우유국내성,한성,호별도.

또한 국내성,한성이 있는데 또 다른 도읍이라고도 한다.


水有大辽、少辽:大辽出靺鞨西南山,南历安市城;少辽出辽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与之合。。
수유대요,소요:대요출말갈서남산,남역안시성;소요출요산서,역남류,유량수출색외,서행여지합.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는데 대요수는 말갈의 서쪽 남산에서 시작되고 남쪽에는 안시성이 있다;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시작되는데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량수는 성곽 밖에서 시작되어 서쪽으로 흐르다 합쳐진다.


有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鸭头,号鸭渌水,历国内城西,与盐难水合,又西南至安市,入于海。。

유마자수출말갈지백산,색약압두,호압록수.역국내성서,여염난수합,우서남지안시,입우해 .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고 색이 오리 머리 색깔과 흡사하여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은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而平壤在鸭渌东南,以巨舻济人,因恃以为堑。

이평양재압록동남,이거호제인,인시이위참.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백제인과 커다란 배 이물과 같이 믿을 만한 참호 역할을 하고 있다.

 

(심제역)


-----------------------------------------------산서성 解州考 -----------------------------------------


해진(解鎭)은 고대에 해량(解梁)이라고 불리웠었는데 해현지(解縣:解州誌)에는  
"原解梁亦稱탁鹿" 이라는 기록이 있고, 안읍현지(安邑縣誌)에는
"他是安邑"蚩尤村"(今改爲從善村)人" 이라는 기록이 있다.
안읍에 치우촌이 있었는데 개명된 이름은 종선촌이라 한다.

당나라  시인 왕한(王翰)이 지은 解州<鹽池曉望>의 시(詩) 중에는

"鹿城頭分曙色,素池如練?無塵"
이라는 귀절이 있어 탁록이 해주에 있고 탁록성도 있음을 말한다.

<河東鹽法備覽、鹽池門勝跡>이라는 소금과 염지 관련 고서에는
。"軒轅氏誅蚩尤于탁鹿之野,血入池化鹵,今池南有蚩尤城,相傳是其喪處"
라는 기록이 있어 해주,안읍 지역에 위치한 염지가 전투지이고

염지의 남쪽에 치우성(蚩尤城)이 있음도 기록하고 있다.

송나라 羅必이 지은 <路史>에는
"黃帝與蚩尤轉戰到中冀,才活捉了蚩尤,?立?就地處死,故殺蚩尤處稱做"解" 라 기술하고 있다.
산서성 남부는 고대의 기주(冀州)지역인데 기주의 중심인 "解" 즉, 해주(解州)에서 치우가 죽었음을 뜻한다.

로사에는 일설, 헌원의 성(姓)이 "公孫"이라는 기록도 있다.

송나라 문인 宋沈括의 <夢溪筆談>에는
"解州鹽池的?水呈紅色,俗話稱爲"蚩尤血"
라 하여  해주의 염지는 붉어서 간수가 들어간 듯 한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치우의 피"라 한다고 적고 있다.

<孔子三朝記>에는
"黃帝殺之(蚩尤)于中冀,蚩尤股體身首異處,而其血化爲鹵,則解之鹽池也"라 하여

절단되어 죽은 치우의 피가 간수처럼 변하여 해주의 염지가 되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雲?七簽、軒轅本紀>의
"黃帝殺蚩尤于"黎山之丘",其實"黎山"正是中條山的別名,距解鎭十五里,其是黃帝殺蚩尤于"解"的又一證據"
라는 기록은, 치우가 죽은 곳을  "여산언덕"이라 하는데  여산은 중조산(中條山)의 다른 이름으로
해진(解鎭)에서 십오리에 있어, 치우가 해주에서 죽은 하나의 증거가 된다. (향고도님 블로그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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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성 남단의 해주 근방에는 드러나지 않은 동이의 중요한 유적들이 많다고 본다.

백이숙제묘,그남의 하남성 몽성에는 기자묘가 있으며 앞으로 밝혀져야할 수많은 지명들이 실증을 받아야

하지만 위만의 망명지 제원근방.. 패수로 추정되는 맹진..부근의 롱수,추수

산서 서북 중간지점에는 마른하가 있다 이곳이 살수 아닌가 생각도 된다.


하북에서 고당전쟁이 일어났었다 가정할때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것이 군량미의 운반문제가 대두된적이

있었다. 즉 강소하남에서 일어난 전쟁의 군량미를 하북에서 끌고온다에서 지형적으로 걸럈던 것이다.

본인은 산서의 어느 지역이 평양성이라 비정은 못하고 있지만 아마도 성헌식 기자님의 말씀대로 평요고성이

중분한 입지 조건이라 한다면 평양도 그 한축에 끼일수 있다고 보는데 물길의 위치이다.

한서에 기록된 경사에서 5000리는 아마도 동북으로 500리로 가야 평양성이 나온다가 맞을것으로 기대한다.

동이 삼국의 위치는 결국 신라를 제외하고 백제 고구려가 당의 하남지역 침투를 막는 전략이었다고 판단이되고

이을 뚫기위해서 안휘성 비주로 비정되는 신라와 연합하여 지역적 탈출구를 마련하려는 전략이었을것으로 본다.

또한 신라로 보아서는 막강한 고구려,백제의  침입을 막고 남의 지긋지긋한 왜의 칩입을 제어하기 위한

양수겹장의 전략을 민족적 연게성을 가진 당과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신라의 경주는 합비로 비정하며 백제의 수도는 곡부근방 제왕성을 중심으로한 곳을 비정한다    

이런위치는 황하를 하남성을 사이에 두고  경게를 삼아 서로 치고 받는 공방전이 가능하였을것이라고 본다.

출병하면 적어도 2주이내에 목표 지점에 다다를수 있었다본다 조운선이나 병선을 출동시키면 수전이 가능하고

군수및 병참도 육상이 아닌 黃河 ,支流,淮河를 이용하였으리라 판단 되는것입니다.


본인의 비정에 대해서 회원분들의 의견 제시를 바랍니다.


심제 씀.




XXX (2009-01-05 11:51:59)  
군사적으로 보면 장안에서 하북성을 거쳐 요하를 건너 한반도 평양까지의 군사작전....
군사작전의 개념을 이해하면 역사해석도 달라질수 있는데...

이 박사님의 선제적인 분석은 가히...
산서성 남단은 엄청나게 연구중이오니 교육원에서 지도로 뵙지요.
인터넷상 공개는 조금더 연구가 된 연후에 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글쓴이 : 心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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